소설리스트

검을 든 꽃-208화 (208/211)

검을 든 꽃 외전 2-10화

“에키!”

환청인 줄 알았다. 설마 하며 돌아본 뒤에는 혹시 독에 중독되어 환상을 보나 싶어졌다. 악튜크에 있을 유리엔이 다급히 달려오는 게 보였으니까.

“에키네시아!”

그의 뒤로 서로를 부축한 채 서 있는 테레사와 디트리히를 보고 나서야, 에키는 그가 환상이 아닌 것을 깨달았다.

“율? 어떻게 여기에…….”

유리엔은 대답 대신 마나 실드를 발동한 채 쏟아지는 냉기 사이로 파고들었다. 그녀의 앞을 가로막은 그가 걱정으로 일그러진 얼굴로 그녀를 돌아보았다.

“그대는 진정 나를 미쳐버리게 할 작정인가.”

“네?”

“괜찮은가? 다친 곳은? 어지럽지는 않나?”

초조하게 묻는 그를 보며 그녀는 지지부진한 전투의 돌파구를 찾아냈다. 다른 사람이면 몰라도 그라면 의지할 수 있었다. 에키는 빠르게 말했다.

“유리엔. 당신을 믿어요. 잘 받아줘요.”

“무슨…….”

[야, 주인아, 잠깐만, 야!]

그녀가 그대로 그의 어깨를 딛고 뛰어 올랐다. 이어 뱀의 몸에서 살짝 튀어나와 있는 자작나무 밑동을 밟고 다시 도약했다. 그리고 한 번 더, 그녀를 피해 몸을 뒤트는 목덜미를 밟고 다시 한 번 더.

도약하는 와중에 마검에 이글거리는 마나가 거대하게 휘감겼다. 자작나무뱀의 머리보다 높은 위치로 떠오른 그녀가 그것을 그대로 내리그었다. 뱀의 머리가 세로로 부서졌다. 칼끝에 단단한 무언가가 걸렸다가 산산조각 나는 게 느껴졌다.

캬아아악!

뱀은 단말마를 남기고 자작나무 더미가 되어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그녀 역시 떨어져 내렸다. 에키는 아래를 보았다.

새파랗다 못해 새하얗게 질린 유리엔이 뭘 해야 할지 직감하고 성검을 내팽개쳤다. 랑기오사는 이번에는 자신을 내던진다고 항의할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마검의 주인이 너무 미친 짓을 하고 있어서.

조각난 백색 자작나무 가지들 사이로 분홍색 머리카락이 흩날렸다. 유리엔이 아래에서 팔을 벌렸다. 그녀는 그의 품으로 떨어졌다. 엄청난 높이에서 떨어졌지만 제니스인 그는 약간 몸을 낮추는 것만으로도 충격을 흘리며 그녀를 사뿐히 받아냈다. 부드러운 착륙이었다.

에키를 무사히 받아내자, 유리엔은 성에가 깔린 바닥에 비틀거리며 주저앉았다. 그리고 덜덜 떨리는 손으로 제 품의 그녀를 그러안았다. 힘주어 안을 엄두조차 나지 않는지 새털 같은 손길이었다. 에키는 그의 가슴팍에 기댔다.

“고마워요.”

“에키, 내, 내가, 실수하면, 어떻게 하려고 이런, 이런 말도 안 되는…….”

“실수하지 않을 거잖아요, 당신은.”

더듬거리던 그의 말을 끊으며 그녀가 속삭이더니 미소를 지었다. 신뢰가 깃든 눈빛에 유리엔의 말문이 막혔다. 멍하니 그녀를 내려다보던 푸른 눈동자에 불현듯 물기가 어리더니 부풀어 올랐다. 에키는 기겁했다.

“유, 율? 왜 울어요?”

“……그대 때문이다. 정말로, 나는…….”

“다, 다신 안 이럴게요! 다신 안 이럴 테니까, 울지 말아요! 걱정시켜서 미안해요!”

그가 눈물을 뚝뚝 흘리며 울기 시작하자 그녀는 어쩔 줄 모르며 그의 눈물을 닦아냈다. 그녀는 계속 사과하고, 그는 울면서 그녀를 끌어안고선 괜찮은지 자꾸만 확인하고, 그러다 둘 다 동시에 굳었다. 아래를 내려다보고 나서 서로 시선을 마주쳤다.

“바, 방금…….”

“움직였죠? 율, 방금 우리 아기 움직인 거 맞죠?”

에키가 눈을 반짝였다. 유리엔은 얼이 빠져서는 그녀와 그녀의 배를 번갈아 보더니 조심스럽게 손을 가져다 댔다. 한껏 집중된 부부의 기대에 화답하듯 아기가 움직였다. 첫 태동이었다.

“제가 놀라게 했나 봐요. 그래도 건강하네요, 우리 아이.”

그녀가 미안하면서도 대견한 얼굴로 배를 내려다보는 사이, 유리엔은 손을 떼지도 못한 채 혼이 나가버렸다. 눈물도 뚝 멈췄다. 그대로 입을 열었다 닫았다 하더니 새빨개졌다. 말이 나오지도 않는 모양이었다. 그의 표정을 본 에키는 웃음을 터뜨렸다.

다친 갈비뼈를 부여잡고 멀찍이서 그 광경을 지켜보던 디트리히는 오만상을 찌푸렸다.

“둘 다 아주 주위는 보이지도 않지.”

“보기 좋지 않나.”

테레사는 희미하게 미소를 띠고 있었다. 그녀를 돌아본 디트리히가 눈꼬리를 휘었다.

“테레사, 부러워? 그럼 나한테 대답해 주면 되는데.”

“대답이라니?”

“아까 고백했잖아.”

“무슨 고백을, 아.”

테레사는 정신없는 와중에 디트리히가 했던 고백을 뒤늦게 떠올렸다. 그가, 그녀에게 사랑한다고 했다. 테레사가 느꼈던 디트리히의 호감은 확실히 사실이었던 모양이다.

‘정말로 고백했으니 이제 거절을…… 하면.’

디트리히가 마스터가 된 순간이 떠올랐다. 그대로 돌아서서 에키네시아가 있는 곳으로 도망쳤으면 될 텐데, 끝끝내 그 자리에 남아서 발악하다 마나를 꽃 피웠다. 실패했다면 천하의 멍청이라 불릴 만한 짓이었으나 성공했으므로 최선의 선택이 되었다. 그녀의 위기가 그를 마스터로 만든 계기가 된 셈이다.

〈네가 들어온다고 해서 도움이 되진 않는다.〉

〈알아, 아는데, 그런 생각 할 틈이 없어서.〉

결절에 들어온 직후 나눴던 대화도 떠올랐다.

‘나를…… 그 정도로 좋아한다고? 언제부터? 내 무엇을 보고?’

설령 좋아한다고 해도, 가벼운 호감에 불과할 줄 알았다. 그런데 진심이라니. 무엇 때문에? 언제부터? 왜? 그런 의문이 뇌리를 점령했다. 때문에 거절의 말이 쉽사리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문득, 굳이 거절해야 하는가? 왜 나는 거절하려 하는 거지? 라는 자그만 의문이 속에서 돋아났다.

‘결혼할 생각이 있는 것도 아니니까 당연히…….’

테레사는 결혼에 관심이 없었다. 대공 부부는 기오사 오너인 그녀에게 결혼을 강요하지 않았고, 그녀는 기사로서 살아 가는 삶 외에는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무심코 꺼낸 답에 다시 의문이 솟는다.

‘결혼할 생각이 없다는 게 이유의 다라고? 그럼 디트리히에 대한 내 감정은…….’

머리가 아프다. 부상 때문일 것이다. 가슴 안쪽이 간질간질한 이상한 감각도 부상 때문이겠지. 역시 디트리히는 늘 그녀를 복잡하게 만든다. 테레사는 미간을 찌푸린 채 생각에 잠겼다. 가만 기다리고 있던 디트리히가 가벼운 어조로 재차 물었다.

“대답 안 해줄 거야, 테레사?”

“은근히 말 놓지 말라고 했다. 준기사 디트리히 사루아.”

“나 이제 기사 될 건데? 마스터잖아.”

복잡해서 습관적으로 한 말에 디트리히가 반박했다. 그의 말대로, 마스터가 되었으니 이제 아젠카에 돌아가면 디트리하는 기사로 서임될 것이다. 그는 슬쩍 웃으며 그녀에게 한 발자국 더 다가섰다.

“축하 안 해줘?”

“추, 축하한다.”

“좋아. 그럼 대답은?”

“당연히 거…….”

[거절해? 정말? 왜? 주인님, 저 사람 꽤 좋아하잖아. 저 사람을 지키고 싶어서 나를 깨울 만큼.]

빙글빙글 웃는 반반한 얼굴이 짜증나서 울컥 답하려던 테레사에게 디몽기오사가 이상하다는 듯 물어왔다. 테레사의 입이 딱 다물렸다. 수호검이 소근거렸다.

[난 저 사람이랑 주인님이 잘됐으면 좋겠어. 저 사람은 주인님의 반쪽이 될 사람이거든. 운명적이지 않아? 반쪽이 될 사람을 좋아하게 되었다는 게. 게다가 오래오래 천천히 쌓인 감정이지? 나 이런 거 정말 좋아해.]

수호검의 말이 이어질수록 테레사의 뺨이 서서히 붉어졌다. 나긋나긋한 어투인데 듣는 테레사에게는 한마디 한마디가 망치질 수준이었다. 기오사가 주인의 감정도 느낄 수 있던가? 저게 내 감정이라고? 그럴 리가 없다. 그녀는 저도 모르게 버럭 소리치고 말았다.

“누, 누가 누굴 좋아한다는 거냐!”

[주인님은 주인님의 반쪽을 좋아하잖아. 저기, 주인님, 부끄러운 건 이해하지만, 나는 늘 주인님 편이니까 진심을 숨기지 않아도 괜찮아.]

“저놈이 내 반쪽이라니 대체 무슨 소린가?”

[비밀이야. 하지만 금방 알게 될 거야. 주인님도 인정할 수밖에 없을걸.]

‘저 빨간머리의 남자는, 곧 나와 공명하는 쌍검인 레밍기오사의 주인이 된단 말이야.’

수호검은 지워진 시간을 떠올리며 속으로만 중얼거렸다.

기오사들은 본래 잠들어 있는 동안 있었던 일은 알지 못한다. 바르데르기오사가 제 껍데기가 주인을 조종하던 시절을 잘 모르듯이. 랑기오사는 모든 것을 기억하지만, 잠들지 않는 검이라 예외적인 경우였다.

디몽기오사도 그런 예외적인 경우에 일부 포함되었다. 정확히는 쌍검인 레밍기오사와 관련된 것들만을 알 수 있었다. 먼 옛날 대장장이가 인간의 기쁨과 슬픔을 재료로 검을 만들면서부터, 정복검과 수호검은 동전의 양면 같은 한 쌍으로 결정되었으니까.

따라서 시간검이 움직이는 바람에 바뀌었다 해도 분명히 정복검의 주인이었던 사람을 못 알아볼 리가 없는 것이다.

‘카이로스기오사를 움직인 건 정황상 마검의 주인이겠지? 틈을 봐서 랑기오사에게 물어봐야지. 늘 깨어 있는 성검은 잘 알고 있을 테니까.’

디몽기오사가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 디트리히는 묘한 눈으로 테레사를 바라보고 있었다.

“테레사, 날 좋아한다고? 게다가 내가 네 반쪽이야?”

그가 되묻는 말에 테레사는 기겁해서 고개를 저어댔다.

“누, 누가 그런 망언을!”

“방금 테레사가 한 말인데.”

“……그, 그건, 그 뜻이 아니라…….”

“아냐, 충분히 알았으니까 설명하지 마. 자세한 대답은 천천히 해줘도 돼. 부끄러운 거잖아, 지금.”

“나는 언제나 떳떳하다, 디트리히!”

“내가 네 반쪽이라며. 난 얼마든지 기다릴 수 있어.”

“아니, 그건 내가 한 말이 아닌…….”

“고마워, 테레사.”

[잘됐다. 정말 정말 잘됐어. 서로 좋아하는 사람끼리 반쪽이라니, 나 앞으로가 조금 기대돼. 깨워줘서 고마워, 주인님.]

테레사는 난생 처음으로 검을 내팽개치고 싶어졌다.

* * *

랑테의 결절에 유리엔이 나타났던 건 학계를 뒤집어놓을 사건이었다.

유리엔 스타티스는 악튜크에 생겨난 결절에 휘말린 기사를 구하기 위해 뛰어들었다. 안전한 장소에서 부상을 입은 기사들을 쉬게 두고, 시작점을 찾아 헤매던 그는 이상한 점을 알아차렸다. 어느 지점을 기점으로 조금씩 환경이 바뀌더니, 결국 주위 분위기가 다른 결절로 들어온 것처럼 완전히 달라졌다.

그리고 결국 남쪽에 있던 랑테의 결절에서 삼켜졌던 에키네시아 스타티스를 비롯한 사람들과 만났다. 그로 인해 결절, 즉 공간검 라키아기오사가 세계로부터 도려낸 공간이, 연달아 발생했을 경우 서로 이어져있을 수도 있다는 가설이 제시되었다.

비슷한 시간에 여러 곳에서 결절이 생기는 일도 드물고, 결절에서 살아 돌아온 사람은 더 드물고, 살아 돌아왔다 해도 결절 내부를 헤집고 다니진 못했던 터라 처음 알려진 사실이었다. 창천기사단의 의뢰로 스승과 함께 결절 연구를 진행 중이던 니콜은 비명을 질렀다. 그녀는 지금까지의 논문을 전부 파기하고 새로 써야 하는 신세가 되었다.

물론 학계의 파란과 별개로, 보통 사람들에게는 창천기사단과 스타티스 부부에게 새로운 업적이 추가된 사건에 불과했다. 끔찍한 사고가 될 뻔했던 랑테와 악튜크 모두를 한 명의 사망자도 없이 막아냈으므로.

* * *

아젠카로 귀환한 디트리히는 곧 비밀을 알게 되었다.

결절을 어떻게 예측한 거냐고 친구를 추궁한 끝에, 에키네시아와 상담한 유리엔이 결국 입을 열었다.

“……시간을 되돌렸다고? 에키네시아 경이?”

“그래, 그녀가 기적을 만들었다.”

유리엔은 극히 간략한 사정만을 말했지만, 그것만으로도 디트리히가 예상한 것보다 깊고 무거웠다. 유리엔은 그 설명 끝에 망설이다가 한마디를 덧붙였다.

“네가 못미더워서 이것을 말하지 않았던 것이 아니다, 디트리히. 그저 나는…….”

“됐어. 더 들으면 내 꼴이 쪽팔려질 것 같으니까 그만 말해라, 자식아. ……고생했다, 율.”

디트리히는 쓰게 웃고는 더 캐묻지 않았다. 그리고 들은 것조차 잊어버린 것처럼 행동했다. 다만, 딱 한 번, 어느 날 문득 에키네시아에게 입을 열었다.

“절 볼 때 가끔 굉장히 미안한 표정을 하는데, 그러지 않아도 됩니다. 에키네시아 경.”

“……내가 그랬어?”

“당신이 무슨 짓을 했었든 그건 이미 존재하지 않게 된 일이잖습니까. 심지어 당신이 원해서 한 일도 아니었을 테고.”

“…….”

“제가 아는 경은 위대한 기사이며, 저와 테레사를 포함해 많은 사람의 목숨을 구한 사람이고, 평생의 친구가 멍청이처럼 굴 정도로 사랑하는 사람일 뿐입니다. 그러니까 아무짝에도 쓸데없는 그 죄책감은 갖다 버리세요.”

디트리히는 한없이 가벼운 투로 그렇게 말하고는, 그 뒤로 다시는 지워진 시간과 관련된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 * *

1631년 봄, 창천기사단에 새로운 기오사 오너가 탄생했다.

디트리히 사루아.

그는 정복검 레밍기오사의 주인으로 선택되었다. 테레사는 비로소 디몽기오사가 왜 그를 보고 그녀의 반쪽이라 칭했는지 깨달았다.

디트리히는 기오사 홀에서 나오자마자 테레사 폰 프랑 알마리에게 청혼을 했다. 테레사가 무어라 반응하기도 전에 곁에 있던 그녀의 동생 미하일 폰 프랑 알마리가 디트리히를 향해 장갑을 집어 던졌다고 한다.

수호검의 주인이 정복검의 주인과 결혼하게 되는 건 그로부터 몇 년 후의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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