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을 든 꽃-207화 (207/211)

검을 든 꽃 외전 2-9화

현재 대륙에서 가장 결절에 대해 잘 아는 사람은 에키네시아일 것이다. 평생을 결절 연구에 바친 학자나 마법사보다도 말이다.

따라서 에키는 이변이 발생할 가능성을 계속 염두에 두고 있었다. 미로를 이루던 뱀을 모조리 죽였다 해도 끝나지 않을 수도 있다. 결절이란 그런 장소다. 그래서 그녀는 시작점을 찾아내자마자 테레사와 디트리히가 있는 곳으로 돌아갈 생각이었다.

[주인아, 저거 아냐? 저거 맞지? 근데 둥지가 엄청 커졌네. 밖에서 봤을 땐 이 정돈 아니지 않았어?]

자작나무로 만들어진 거대한 새 둥지 같은 구조물 안쪽에, 허공을 접은 자국 같은 것이 떠 있었다. 그녀는 둥지 끝에 올라서서 그것을 유심히 보았다. 결절의 시작점이었다.

“결절이니 뭐 그럴 수도 있지. 시작점 찾았으니까 일단 돌아가…….”

[……주인아.]

“알아.”

에키는 말을 멈추고 마검을 쥔 채 둥지로부터 천천히 물러났다. 둥지가 움직이고 있었다. 나무끼리 부딪히면서 따각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둥지가 아니라 따리 튼 마물이었네. 진짜 별걸 다 본다, 그치?]

똬리를 틀고 있던, 나무로 만들어진 뱀이 거대한 몸을 일으켰다. 미로를 이루던 바질리스크들보다 월등히 거대한 크기였다. 자작나무숲 자체가 몸을 일으키는 것처럼 보일 정도로.

나무로 만들어진 뱀이라니, 난생 처음 보는 괴물이었다. 그러나 에키는 그다지 긴장하지 않았다. 마검의 능력 덕분에 보자마자 어떻게 해야 저것이 죽는지 알아차렸고, 그렇게 하기에 충분한 능력도 있었다.

뱀이 커다랗게 입을 벌렸다. 용이 불을 뿜는 것과 비슷한 모습이라 그녀는 반사적으로 마나실드를 만들었다. 그녀의 예상대로 무언가가 쏟아져내려 마나 실드에 충돌했다.

[어? 야, 주인아, 이거…….]

그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 차가운 냉기였다. 뿜어진 궤적을 따라 얼어붙은 공기가 얼음조각이 되어 떨어졌다.

결절은 현실과 다른 법칙에 지배받는 기괴한 공간이지만 원칙은 있었다. 현실과 분리되며 삼켜진 것과 그곳에 있던 인간의 사념에 영향을 받는다.

그러니까 이 결절에서 바질리스크와 비슷한 괴생명체나 자작나무와 관련 있는 것들이 나타나는 건 기괴하긴 해도 납득이 안 갈 정도는 아니었다. 하지만 내쉬는 숨결이 얼어붙는 힘은 달랐다. 이런 건 저 북쪽, 그녀의 남편이 가 있는 곳에서 나타나야 할 현상이었다.

“……서리거인?”

물론 결절은 상식이 통하지 않는 공간인 만큼, 서리거인 같은 냉기를 뿜어대는 괴물이 생겨날 수도 있다. 랑테에 있던 기사들이 악튜크에 서리거인들을 섬멸하러 다른 토벌단이 가 있다는 걸 알고 있었으니 그 사념의 영향일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에키는 묘한 직감을 느끼고 눈썹을 치켜 올렸다.

* * *

테레사는 알로 만들어진 뱀을 막아낸 푸른빛이 사그라드는 것을 황망히 쳐다보았다.

[왜 멍하니 있어? 지키고 싶어서 나를 깨우기까지 했잖아?]

“디몽…… 디몽기오사?”

[디, 라고 부르면 돼. 인사는 나중에 하자, 주인님. 적이 다시 덤벼들 것 같아.]

들리는 음성대로, 예상치 못한 사태에 놀랐던 뱀이 다시 움직이고 있었다. 테레사는 급하게 마나코어를 움직였다. 무리한 탓에 얼마 남지 않은 마나를 쥐어짜내 어지러움과 독기와 부상을 버티며 몸을 일으켰다. 자신을 ‘디’라고 부르라던 목소리가 응원하듯 속삭였다.

[잘했어. 몸 상태가 많이 나쁘네. 그래도 지킬 사람이 있으니까 힘내야지. 나도 같이 힘낼 테니까. 자, 얼른 날 쥐어.]

뱀이 머리를 드는 사이, 테레사는 바닥에 꽂혀 있는 디몽기오사를 움켜쥐었다. 입가와 코에서 피를 줄줄 흘리며 주저앉아 있는 디트리히가 얼빠진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정복검의……. 아, 아직 아니지. 저기, 주인님이 지키고 싶어 하는 사람이 조금 전에 마스터가 되었어. 봤어?]

“……제대로 보진 못했지만.”

테레사는 디몽기오사를 들어 올려 프랑 알마리의 기수식을 취하며 멍하니 대답했다. 어떻게 된 건지 아직 잘 모르겠다. 간혹 기오사가 각성하며 자아가 깨어나기도 한다는 건 오너가 된 직후 창천기사단에서 기오사 오너에게만 제공하는 정보를 통해 알고 있긴 했지만, 설마…….

[주인님이 시선을 끌어. 그리고 그 사이에 저 사람한테 적을 베라고 해. 나는 마검이 아니라서 저 적의 약점이 어디 인지는 모르겠지만, 눈 같은 부분이 수상해 보여. 거길 베어보라고 하는 게 어떨까?]

“디트리히, 검기를 쓸 수 있겠나?”

“어, 어?”

“방금 검기를 쓰지 않았나.”

“……내가 진짜 검기 썼어?”

더 대화할 틈이 없었다. 탐색하듯 그들을 살피던 뱀이 길게 울부짖으며 입을 들이댔다. 뒤에 디트리히가 있어서 피할 수는 없다. 사실 머리 부상으로 인한 현기증 때문에 빠르게 움직이는 게 불가능하기도 했다. 테레사는 엉겁결에 검을 들어 짓쳐드는 머리를 막았다.

조금 전과 비슷한 상황이었고, 따라서 원래대로라면 그녀는 충격을 견디지 못하고 튕겨나가거나, 적어도 밀려났어야 했다. 하지만 그녀는 밀려나지 않았다.

그녀가 습관적으로 디몽기오사에 덮어 씌운 검기가 일순 형태를 바꾸었다. 아까 디트리히를 막아섰던 것 같은 푸르스름한 빛의 막이 생겨나며 산사태 같은 뱀의 공격을 막아냈다. 마나실드? 그럴 리는 없었다. 테레사는 제니스가 아니었다. 그녀는 창천의 기록들 중에서 이런 현상에 대한 설명을 본 적이 있었다.

[급해서 내가 유도했어. 미안해, 주인님. 주인님이 직접 쓰는 건 나중에 연습하자.]

“이건…….”

[나는 기오사 중에서 가장 견고한 검이야. 깨어났으니 이쯤은 해야지. 온다!]

역대 디몽기오사 오너들 중 간혹 이런 능력을 발휘한 경우가 있다고 한다. 그들은 이 마법 같은 힘을 ‘수호’라고 불렀다. 디몽기오사의 별칭이 수호검이 된 유래다.

테레사는 거대한 공격을 연속적으로 막아냈다. 그녀가 막아설 때마다 방패가 펼쳐지듯 푸른 빛이 펼쳐졌다. 덕분에 최악인 몸 상태로도 튕겨나는 일 없이 쏟아지는 공격들을 막을 수 있었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막아낼 뿐이다. 랑기오사처럼 검기를 증폭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바르데르기오사처럼 무식한 마나를 쏟아낼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녀에게는 산을 베어낼 방법이 없었다. 막기에도 급급했다.

디트리히는 계속해서 넋을 놓고 있을 만큼 바보가 아니었다. 테레사가 뱀을 막아서는 사이 검을 고쳐 쥐고 집중했다.

갓 마스터가 된 그의 몸은 마나코어를 생성하는 중이었다. 그러나 그것이 완성될 때까지 기다릴 시간이 없었다. 검을 들자 다친 갈비뼈 쪽의 통증이 심해졌지만 이를 악물고 참았다. 간신히 칼날에 희미한 붉은빛이 어렸다. 힐끗 그것을 확인한 테레사가 위태롭게 소리쳤다.

“눈을 베어라, 디트리히!”

[급소라면 틈이 생길 거야, 그럼 바로 달아나야 해. 지금 상태의 주인님이랑 저 사람 둘이서 적을 쓰러뜨리긴 어려워.]

“달아날 준비도 하고!”

디트리히는 대답 대신 검을 들었다. 약이 바짝 오른 뱀이 테레사를 물어뜯으려 다시 덤벼들고, 막히면서 멈칫한 순간에, 그가 알이 깨져서 피 같은 액체가 줄줄 흐르는 부위를 찔렀다. 알로 만들어진 뱀이라 그곳이 눈인지 확신할 순 없었지만 위치상 눈이고 이상한 부분이었으니까.

붉은 마나가 감긴 검이 깨진 알 안쪽을 깊숙이 찔렀다. 검은 손잡이까지 푹 박혀들었다. 뱀이 눈 깜박할 사이에 움츠러들며 고통스러운 비명을 내질렀다.

디트리히는 검을 놓치며 주저앉았다. 갈비뼈가 아파서 달릴 수가 없었다. 갓 마스터가 된 그는 아직 마나로 통증을 억누르고 버티며 움직일 수준이 되지 못했다. 그런 사정을 짐작한 테레사는 뱀이 머리를 움츠리자마자 수호검을 거두고 디트리히를 붙잡았다. 한 팔로 그를 들어 올리고 달리려던 그녀가 휘청거렸다. 그가 무거워서는 아니었다.

[주인님 머리 부상이 생각보다 심하네. 어쩌지, 어쩌지.]

디몽기오사가 애타게 중얼거렸다. 쓰러질 뻔했던 테레사가 겨우 자세를 바로잡는 사이 뱀의 비명이 멈췄다. 모골이 송연해지는 감각이 등 뒤에서 느껴졌다. 테레사는 본능적으로 돌아서며 검을 들었다. 좀 전보다 훨씬 약해진 푸른 빛이 펼쳐지며 아슬아슬하게 뱀의 송곳니를 막았다. 마나가 고갈되기 직전이었다.

“나를 버려, 테레사.”

“헛소릴.”

“진심인데.”

“닥쳐, 디트리히.”

디트리히의 말을 일축한 그녀가 고개를 들었다.

자꾸만 공격이 막히는 게 성가셨던 뱀은 공격방법을 바꿨다. 사방이 허연 뱀의 몸뚱이로 둘러싸였다. 그리고 서서히 조여들기 시작했다.

놈에게는 느린 속도였으나 덩치 차이 탓에 테레사와 디트리히에게는 빠르게 느껴졌다. 멀리서는 비늘처럼 보였던 것들이 삽시간에 가까워지며 알이라는 게 확연히 구별되는 거리가 되었다. 그들의 얼굴에 핏기가 가셨다.

[안 돼, 이제 막 만났는데 잃기는 싫어, 주인님……!]

디몽기오사가 울먹이는 듯한 음성으로 말했다. 뒤이어 디트리히가 혼잣말처럼 말했다.

“테레사, 사랑해.”

“……뭐?”

“너 좋아한다고. 농담 아니야.”

“이, 이, 이, 와중에 무슨……. 미쳤나?”

“지금 아니면 말 못 할 것 같아서. 아까도 후회했거든.”

테레사가 황당하단 표정으로 디트리히를 돌아보는 순간, 그의 뒤쪽에서 하얀 빛이 번개처럼 내리쳤다. 그리고 조금 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고통스러운 뱀의 비명이 허공을 찢었다.

뱀의 한쪽이 완전히 잘렸다. 토막 난 부위에서 부서진 알껍질들이 우박처럼 떨어졌다. 그 사이로 몹시도 반가운, 그러나 이 자리에 나타나리라곤 짐작도 하지 못한 사람이 모습을 드러냈다.

유리엔 스타티스였다.

“단장님?”

“……테레사 경? 디트리히?”

그 역시, 여기에 그들이 있을 줄은 몰랐던 듯 푸른 눈이 커졌다.

[다행이다! 다행이야, 주인님!]

디몽기오사만이 한시름 놓은 목소리로 순수하게 안도했다. 당황한 얼굴로 그들을 보고 있던 유리엔은 성검을 고쳐 쥐었다.

“우선, 저것부터 치우고 나서 어떻게 된 건지 이야기하지.”

반토막이 난 채로도 살아 발광하고 있던 뱀은 제니스인 성검의 주인에게 곧 산산조각이 났다.

* * *

에키네시아는 의외로 고전하는 중이었다.

자작나무뱀이 얼음을 내뿜는 몸집이 끔찍하게 크든 사실 그녀에겐 별 문제가 아니었다. 문제가 되는 건 그녀 뱃속의 아기였다.

아무리 마나로 보호해도 급격한 움직임은 태아에게 좋지 않다. 그녀는 어느 정도까지 괜찮은지 비교적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었다. 그래서 되도록 움직임을 줄이는 방법으로 싸우고 있었다. 그게 문제였다.

[저거 머리를 부숴야 죽을 텐데, 내려올 생각을 안 하네. 피하기는 또 되게 잘 피하고. 더럽게 얄미워!]

“……이거 어쩐지 겪어본 상황인데.”

[가짜 용이 이랬잖아. 치사하게 하늘에서 불만 뿜으면서 안 내려오고. 덩치도 큰 것들이 겁쟁이야! 겁쟁이! 에베베! 쳇, 저거한테도 내 목소리가 들리면 좋겠는데.]

예전에 결절에서 마주쳤던 용이 하늘에서 내려오지 않았던 것처럼, 자작나무 뱀은 결코 머리를 숙이지 않았다. 구름에 닿을 듯이 꼿꼿하게 머리를 세우고는 얼어붙는 숨결을 뿜거나 꼬리만 휘둘러댔다.

움직임을 최소화하기 위해 에키는 그것들을 대부분 마나실드로 버티며 뱀의 몸통을 베었다. 하지만 머리 외의 부위는 아무리 부숴봤자 바로 복구되었다. 머리를 향해 검기를 날리면 재빨리 피해버린다. 그로인해 전투는 지지부진했다.

저 뱀은 에키가 마나를 다 소모하고 지쳐버리길 노리는 모양이지만, 마검의 마나가 있는 그녀는 거의 무한하게 버틸 수 있었다. 애꿎은 주변만 빙판이 되어갔다.

사실 용처럼 날아다녀서 닿을 방법이 없는 게 아니니 이렇게 고전할 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뱀의 몸통을 밟고 뛰어 올라가면 그만이었다. 그러니까 문제는, 결국 아기였다.

‘뛰어올라 가는 건 그렇다 쳐도, 저 높이에서 착지할 때의 충격은 절대 못 버텨.’

그녀 말고 아기가 못 버틴다. 에키는 초조해져서 입술을 깨물었다.

‘속도를 내기 어려우니 이걸 무시하고 빠져나갈 수도 없고. 디트리히랑 테레사 경 쪽은 괜찮을까.’

걱정이 되었다. 독기가 가득한 공기 속에 오래 있는 것도 신경이 쓰인다. 마스터가 아니라서 못 버틸 디트리히도 그렇고, 그녀와 유리엔의 아기도, 아무리 마나로 보호하고 있다지만 안 좋을지도 모른다.

‘……너무 얕봤어. 어떡하지?’

또다시 쏟아지는 냉기를 마나실드로 막으며, 그녀는 가만히 아랫배를 감싸 안았다. 막막한 기분이 드는 지금, 그가 너무나 보고 싶었다.

‘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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