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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을 든 꽃-206화 (206/211)

검을 든 꽃 외전 2-8화

“제게요? 어떻게 아십니까?”

그녀는 더는 답하지 않고 입을 다물었다. 그러고는 가뿐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슬슬 시작점을 찾아봐야지. 금방 다녀올 테니 테레사 경 지키고 있어. 머리를 다친 사람을 함부로 움직일 순 없으니까.”

“……예.”

산책이라도 나가는 것마냥 가벼운 발걸음으로 그녀가 떠나갔다.

디트리히는 제 손을 내려다보다가, 위를 올려다보았다. 새카맣게 먹구름이 끼어 있는 하늘은 아득하게 멀었다.

‘스스로에 대한 구체적인 확신이라…….’

머리가 복잡해졌다. 그는 검을 쥐고 뚫어져라 내려다보았다. 마나가 일어나 검기가 칼날을 뒤덮는 상상을 해보았다. 디트리히가 머릿속으로 막연히 떠올린 자신의 검기에는 색이 없었다.

마나의 색은 개인에 따라 천차만별이었다. 무슨 관계인지는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았다. 그 사람의 성격이나 분위기와 유사한 이미지의 색이라는 경향성만 알려져 있었다.

그는 제가 아는 사람들의 마나를 떠올려 보았다. 유리엔은 깨끗한 순백색, 에키네시아는 엷은 보라색, 바론은 묵직한 회색이었다. 그리고 테레사는 바다처럼 일렁이는 푸른빛이다.

디트리히는 테레사가 마스터가 되던 순간을 기억한다. 준기사들이 쓰는 연무장에서 그녀는 가상의 적을 향해 검을 휘두르는 중이었다.

일상적인 광경이었으나 평소와 다른 점이 있었다. 그녀는 울고 있었다. 이를 악물고 눈물을 쏟으며 검을 휘둘렀다. 땀과 눈물이 뒤섞여 흰 목덜미를 타고 내려가던 모습이 아직도 선명하다. 그러다 어느 순간 그녀의 칼끝에 눈물처럼 빛이 고였다. 황홀할 정도로 깊고 아름다운 푸른빛이었다.

그때 왜 울면서 검을 휘둘렀는지 테레사는 말하지 않았지만, 디트리히는 짐작했다. 테레사가 참가한 임무에서 사망자가 나왔다고 들었으니까. 아마 제 탓이라 생각하며 자책했겠지. 오만할 정도로 강한 그녀의 책임감은 여전했다. 예전에는 싫어했던 점인데, 지금은 그런 점도 좋았다.

그녀의 마나는 그런 그녀를 그대로 담고 있는 색이었다.

‘내 마나는 무슨 색을 띨까.’

기묘한 소리가 들려온 건 바로 그 때였다.

처음에는 잘못 들었나 싶을 정도로 아주 작았다. 방울이 굴러가는 듯한 소리. 방울 하나의 소리 같던 것이 어느 순간 두 개, 세 개, 그리고 삽시간에 수십 수백 개의 방울이 나뒹구는 굉음이 되었다.

“뭐, 뭐야!”

생각에 잠겨 있던 디트리히는 귀청을 찢어놓을 듯 요란한 소음에 놀라 소리가 난 방향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대로 얼어붙었다.

에키네시아가 죽여 쌓아놓은 마물 더미가 꿈틀거리고 있었다. 그것들의 배가 저절로 갈라지며 어린아이 머리통만 한 알이 굴러 떨어졌다. 하나, 둘, 떨어지던 알들은 금세 파도처럼 쏟아져 내렸다.

쏟아지는 알 하나하나가 비늘처럼 자리 잡으며 지금까지 본 것들보다 훨씬 더 큰 바질리스크의 형상을 이룬다. 알로 만들어진 뱀이 덜그럭거리며 서서히 몸을 일으켰다. 이전의 바질리스크들이 성벽 내지는 탑처럼 보였다면 저것은 문자 그대로 산이었다.

눈 부위의 알이 깨어지며 속에 있던 새빨간 액체가 흘러내렸다. 그 모습은 피눈물을 흘리는 것처럼 보였다. 그것이 입을 벌렸다. 입안에 깨진 알껍질들이 이빨처럼 날카롭게 솟아 있었다. 동굴처럼 새카만 목구멍 안쪽에서 목이 졸린 짐승이 비통하게 우는 듯한 괴성이 흘러나왔다.

그……어……어어…….

난생 처음 보는 괴물이었다. 마물이라기보다는 괴현상에 가까웠다.

‘결절이라서 생기는 현상인가?’

저게 뭔지 따지고 있을 겨를은 없었다. 디트리히는 급하게 테레사를 안아 올렸다. 늘어진 뱀의 시체들을 피해 에키네시아가 향한 방향으로 달렸다.

그어어억!

등 뒤에서 소름끼치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쿵, 하고 대지가 흔들렸다. 디트리히는 본능적으로 테레사를 감쌌다. 곧 세상이 빙글빙글 돌더니 온 몸 곳곳이 쑤셔왔다. 무언가 거대한 충격에 날아가 한참을 나뒹굴었다는 건 뒤늦게 깨달았다.

“윽…….”

갈비뼈를 잘못 부딪친 모양이었다. 몸을 일으키려던 그는 제자리에 주저앉았다. 그 충격에 그의 품에서 떨어진 테레사가 낮게 신음을 흘리더니 눈을 떴다. 초록색 눈동자가 초점을 잡지 못하고 허공을 헤매다가 디트리히에게 고정되었다.

“디트리…….”

그녀는 디트리히의 이름을 부르다 말고 앉아 있는 그의 멱살을 잡고 제 쪽으로 확 끌어내렸다. 숙여진 그의 머리 위로 후웅, 하며 무언가가 스쳐 지나갔다. 솜털이 쭈뼛 서는 감각이었다. 디트리히는 파랗게 질려 뒤를 돌아보았다. 하얀 알들이 비늘처럼 빽빽한 것만 보였다. 그것이 조금 멀어진 후에야 그는 그게 끔찍할 정도로 커다란 뱀의 머리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뱀의 입이 다시 벌어졌다. 그것은 벌어지는 것과 동시에 산사태처럼 그들을 향해 쏟아졌다. 그 순간 디트리히의 멱살을 쥐고 있던 테레사가 온 힘을 다해 그를 밀치며 집어 던졌다. 마나를 실어 집어 던졌기에 디트리히는 거의 날아가다시피 했다.

“으, 크윽, 흐으…….”

떨어지며 부딪힌 가슴팍에 끔찍할 정도의 통증이 일었다. 부러진 갈비뼈가 어딘가를 찌른 듯했다. 디트리히는 몸을 웅크리고 신음을 흘리다가 고개를 들었다.

“테레사!”

테레사는 대답할 여유가 없었다. 디트리히를 집어 던지면서 뽑아 든 디몽기오사를 받쳐 든 양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디몽기오사는 알껍질로 이루어진 거대한 송곳니를 막고 있었다.

그녀는 사금파리 언덕 아래의 무저갱처럼 보이는 뱀의 목구멍을 들여다보며 눈을 계속해서 깜박였다. 사물이 몇 겹이나 겹쳐져 보이며 토할 것처럼 어지러웠다. 두통도 극심하여 눈물이 절로 고였다.

‘머리를 부딪쳤나……?’

생각이 잘 이어지지 않는다. 이런 상태로 마나를 쓰는 건 미친 짓이었다. 오랜 훈련과, 가장 효율적으로 방어하는 방법을 주인이 본능적으로 알아채도록 하는 수호검의 능력이 아니었다면 막기는커녕 그대로 삼켜졌을지도 모른다.

마나란 마나는 죄다 산에 짓눌리는 듯한 뱀의 힘을 버티기 위해 팔로 몰렸다. 그 상태로 잠시 버티자 다른 문제가 발생했다. 독이나 다름없는 공기가 전신에 침투하며 내부를 할퀴기 시작했다. 독으로부터 몸을 보호할 여유가 없었다. 기침과 동시에 덜컥 팔이 흔들렸고, 송곳니가 좀 더 아래로 내려왔고, 그녀는 땅에 처박혔다.

디트리히는 고통을 참으며 일어나 검을 들었다. 뱀의 주의라도 끌어볼 목적으로 검을 휘둘렀으나, 쉽사리 깨질 것처럼 보이는 알껍질들은 금조차 가지 않았다. 흙 사이로 짓눌려 파묻힌 테레사를 돌아본 그는 악을 쓰며 몇 차례 더 검을 내리쳤다.

“빌어먹을, 여길 봐! 여길 보라고, 괴물 새끼야!”

그 소리에 테레사가 흘깃 눈을 돌렸다. 그녀는 온 힘을 다해 겨우 한마디를 외쳤다.

“가!”

짧은 말. 그 안에 내포된 뜻.

이 자리에 있어봤자 너는 도움이 되지 않고, 오히려 위험하기만 할 뿐이니, 빨리 여기서 벗어나라. 너는 약하니까. 의지하거나 도움을 받을 만한 존재가 아니니까. 너는 내가 지켜야 할 대상이니까.

디트리히는 터질 정도로 거세게 입술을 깨물었다. 테레사가 지켜야 할 존재는 많았다. 디트리히는 그 많은 존재 중 하나가 되고 싶지 않았다. 그녀가 굽어 보며 지켜야 할 대상이 아니라, 그녀와 비슷한 높이에서 등을 맞대고 검을 드는 존재가 되고 싶었다.

서로를 지킬 수 있는 존재가 되고 싶었다.

최악의 상황에서 한마디를 외친 대가로 테레사는 울컥 피를 토해 냈다. 팔이 좀 더 아래로 접혔다. 디트리히는 돌아서지 않았다. 이 자리에서 뒤돌아 도망치고 싶지 않았다. 테레사가 버티는 사이 에키네시아를 불러오는 게 낫다고 판단하면서도, 그녀를 여기에 두고 돌아설 수가 없었다.

그는 이글거리는 눈으로 칼날을 바라보았다.

〈계기를 맞이했을 때, 그 순간에 무너지는 대신 마스터가 될 수 있게 만들어 주는 결정적인 것. 무르익었을 때 알을 깨고 나올 수 있게 만들어주는 힘.〉

넘실거리는 마나. 무슨 색일까. 목 안 쪽에서 타오르는 불처럼 너울거리는 것. 언제나 위를 향하는 불꽃의 색. 그래, 붉은색이 좋겠다.

새빨간 불길이 검을 타고 흐르는 듯한 환상이 보였다. 열기가 손등을 핥는 감각이 느껴질 정도로 뚜렷한 이미지였다. 마치 이미 검기를 사용하고 있는 듯한 착각.

〈당신에게는 그 요소가 이미 있어.〉

그 에키네시아 스타티스가 한 말이다. 그러므로, 자신은 도달할 수 있을 것이다. 해낼 수 있다. 해내야만 했다.

명치 안쪽이 델 것처럼 뜨겁게 타올랐다. 그것이 전신으로 질주했다. 그리고 환상은 현실이 되었다.

“으아아아!”

붉은 마나를 휘감은 검이 내리쳐졌다. 그것이 여태껏 버티던 알껍질들을 으스러뜨리며 파고들었다. 벌건 액체가 팍 튀어올랐다.

뱀의 몸집에 비하면 생채기에도 못 미치는 상처였으나, 분명히 상흔이 났다. 테레사에게 쏟아지던 태산 같던 압박감이 일시에 사라졌다. 알로 만들어진 뱀이 디트리히 쪽으로 머리를 돌렸다.

그것에게는 바질리스크와 같은 저주받은 눈이 없었지만, 디트리히는 돌이 된 것처럼 굳어버렸다. 순간적으로 한계를 넘어선 몸은 손가락 하나 움직일 힘이 없었다. 벽은 넘었지만, 마나코어는 만들어지지도 않은 상태다. 그는 자신을 향해 짓쳐드는 뱀의 머리를 멍하니 쳐다보았다.

테레사는 자신을 짓누르던 힘이 훅 사라지는 것을 느꼈다. 그것이 방향을 틀어 덤벼드는 방향에 있는 붉은 머리가 보였다.

‘왜 도망가지 않은 거야, 망할 자식!’

결절에 따라 들어온 것으로도 모자라, 그녀 대신 죽고 싶은 모양이었다. 내게 가진 호감이 진심이었나? 언뜻 든 생각과 별개로, 그 꼴은 볼 수 없었다. 그녀 자신이 죽는 한이 있더라도, 그녀는 또다시 지키지 못하고 잃을 순 없었다.

멀었다. 머리의 부상과 독기의 침투, 과도한 힘 사용으로 몸이 말을 잘 듣지 않았다.

그래서 테레사는 쥐고 있던 디몽기오사를 던졌다. 푸른 검이 달려드는 뱀의 머리와 디트리히 사이로 날아가는 것을 보며 그녀는 온 마음을 다해 빌었다.

너는 수호검이잖아. 대장장이가 인간들이 무언가를 잃고 흘린 눈물들과, 무언가를 지키고 싶어 하는 마음을 모아 만든 기오사잖아.

‘그러니까 내가 지키고 싶어 하는 사람을, 그를, 지켜줘, 제발!’

잃을 바에는 죽겠다. 다시는 울고 싶지 않아.

[응, 들려. 내게 닿았어.]

갑자기, 성별도 나이도 짐작되지 않는 묘한 목소리가 그녀의 안에서 들려왔다. 손바닥의 문양이 뜨거워졌다.

[지켜줄게.]

디트리히와 뱀의 머리 사이의 땅에 꽂힌 디몽기오사에서 푸른 빛이 터져 나왔다. 그 빛은 방패처럼 견고해지며 뱀의 머리를 막아냈다.

그어억!

알 수 없는 것에 가로막힌 거대한 뱀도, 힘이 빠져 주저앉은 디트리히도, 검을 던져버린 테레사도 놀란 눈으로 수호검을 바라보았다. 푸른 막이 사라지며 작은 음성이 속삭였다.

[막았어. 근데 나 혼자서 또 막기는 힘들어. 소중한 사람이잖아? 함께 지켜야지. 얼른 일어나.]

부드럽고 상냥하지만 단호한 어투였다.

[일어나서 나를 쥐어, 주인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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