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을 든 꽃 외전 2-7화
“……에키, 네시아 경?”
“일단 조금만 기다려.”
에키네시아는 쥐고 있던 마법가방을 그에게 던지다시피 밀어주고는 등을 돌렸다. 소름끼치는 울음소리와 함께 바질리스크라기엔 너무나 거대한 것들이 그녀를 내려다본다. 하늘에 닿을 듯한 수백 마리의 뱀들 앞에 서 있는 가는 몸집의 여자. 두려운 광경이었다.
하지만 디트리히는 탁 하고 긴장이 풀리는 것을 느꼈다. 그와 테레사의 앞을 막아선 여자는 에키네시아 스타티스, 마검의 주인이자 대륙 최강의 기사였으니까.
“눈 감고 있어도 됩니까?”
“그게 낫지. 저게 바질리스크는 아니겠지만 바질리스크같이 생긴 마물이니 시선을 마주치는 건 위험해.”
에키네시아가 고개만 돌려 그를 보더니 살짝 웃었다.
“거기서 눈 감고 잠깐 쉬고 있어. 오래 안 걸릴 거야.”
접근하게 하지 않을 테니 피할 필요도 없단 소리다. 디트리히는 황망히 중얼거렸다.
“정말 무지막지하시네요…….”
에키네시아는 이미 움직인 후였다. 그는 분홍색 머리카락이 보라색과 검은색 마나를 휘감고 허공을 가르는 뒷모습을 보며 눈을 감았다. 품 안에서 테레사의 온기가 느껴졌다.
* * *
디트리히 사루아가 열아홉 살, 2학년이 되었을 때, 스무 살의 테레사 폰 프랑 알마리가 사관학교에 입학했다.
유리엔 드 하르덴 키리에는 아무런 클럽에도 들지 않았다. 그러나 디트리히는 앙투아르 왕국 출신이 대다수인 뤼미에르 클럽에 소속되어 있었다. 그리고 클럽원들로부터 프랑 알마리 대공의 딸인 테레사에 대해 들었다.
‘원래대로라면 열여덟에 입학하고도 남을 실력인데, 2년이나 처박혀 있다가 이제야 왔단 말이지.’
사촌의 죽음에 충격을 받아서라고. 그 말에 디트리히는 기사가 되기엔 지나치게 심약한 여자 아닌가, 2년이나 아무것도 안 하고 슬픔에 잠겨 있을 여유가 있다니 역시 배부른 귀족의 딸이로군, 정도의 생각을 했다.
테레사가 입학하자마자 신입생 순위전에서 압도적인 1위를 했을 때는 조금 놀라긴 했지만, 그러려니 했다.
‘검술의 명가에서 재능을 물려받고 태어나 최고의 환경에서 훈련했으니 강한 게 당연하지.’
그가 테레사를 싫어하게 된 건, 테레사가 뤼미에르 클럽에 가입한 후부터였다.
대공의 딸인 테레사는 클럽에 들어오자마자 클럽의 중심에 위치하게 되었다. 그녀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말이다. 모두가 그녀와 검을 한 번이라도 맞대보려 애를 썼고 그녀에게 조금이라도 잘 보이려 노력했다.
테레사가 적당히 그것을 상대해 주었거나, 즐기고 다녔으면 디트리히는 그녀에게 아무 관심이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테레사는 제게 몰려드는 사람들을 전부 무시했다. 그녀는 어둡고 우울한 얼굴을 한 채 필요한 말 외에는 입도 제대로 열지 않았다. 디트리히는 그 모습이 거슬렸다. 거슬리다 못해 짜증이 났다.
‘차라리 유리엔이 낫다.’
주위와 어울리지 않는 건 그의 룸메이트인 유리엔도 마찬가지였지만, 그는 아예 클럽에 들질 않고 다른 생도에게 접근도 하지 않았다. 룸메이트라 마주칠 수밖에 없는 디트리히를 제외하면, 그냥 혼자 훈련하고 혼자 지냈다.
그에 비해 테레사는 클럽에 가입까지 하고, 클럽 모임에도 꼬박꼬박 참석했다. 그러면서도 저런 식으로 구니 꼴 보기가 싫었다.
‘어울릴 생각이 없으면 그 자식처럼 처음부터 혼자 놀든가. 클럽에 와놓고 저 따위로 구는 건 무슨 속셈이야? 관심 가지고 위로해 달라고 시위라도 하는 거야?’
뤼미에르 클럽에는 고학년들에게 전담하여 이끌 신입생들을 배정해 주는 전통이 있었다. 보통 순위가 높은 고학년에게 신입생 순위전에서 높은 순위를 기록한 신입생을 배정해 준다.
당시 뤼미에르 2학년생 중에 가장 높은 순위였던 디트리히에게 신입생 1위인 테레사가 배정된 건 필연적인 일이었다. 거슬린다 해도 담당 신입생이 아니었으면 무시했을 텐데, 그럴 수도 없었다. 그래서 시비를 걸었다.
〈위로해 주길 바라고 그렇게 구십니까, 공주님?〉
〈……공주님?〉
〈뤼미에르의 공주님이잖습니까. 프랑 알마리의 테레사 공녀.〉
〈나는, 사관학교 내에서 가문을 내세울 정도로 한심한 자가 아니다. 나를 모욕하지 마라.〉
〈아이고, 그러세요? 가문을 내세울 생각이 없으세요? 그럼 직속 선배한테 보이는 지금 태도는 뭡니까? 모욕하지 말라고요? 완전히 받들어 모셔야 할 공주님처럼 구시는데요. 다들 공주님 눈치를 보느라 힘든 게 고귀하신 눈에는 보이지도 않겠죠, 네.〉
테레사가 화를 내거나 울거나 무시할 줄 알고 꺼낸 말이었다. 이왕이면 못 참겠으니 직속 선배를 바꿔달라고 요청하면 더 좋고. 그러기만 하면 클럽 내에서 좀 불이익을 받아도 상관없었다.
그러나 그녀는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알 수 없는 초록색 눈동자로 그를 빤히 올려다볼 뿐이었다. 그러곤 곧 일어서서 허리를 숙였다.
〈제 행동이 그렇게 느껴질 줄은 몰랐습니다. 제가 어리석었군요. 무례를 사죄드립니다, 선배님.〉
비꼬는 게 아니라 진심어린 사과였다. 디트리히는 놀라고 말았다. 귀족이, 대공의 따님이 이렇게 바로 인정하고 사과까지 할 줄은 몰랐는데. 당황한 그가 어물거리는 사이 그녀는 반듯한 어투로 말을 이었다.
〈제가 후배이니, 앞으로는 하대해 주십시오. 잘 부탁드립니다, 선배님.〉
그렇게 시작된 인연이, 10년.
〈목표를 높게 가지는 것이 왜 우스운 일입니까?〉
평민 출신, 사관생도 순위는 20위 근처에서 오락가락하는, 낮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높다고도 할 수 없는 순위의 2학년이 기오사 오너가 되겠다는 소리를 했을 때, 비웃거나 농담으로 듣지 않은 두 명의 사람.
한 명은 평생의 친구가 되었고, 한 명은 그가 사랑하는 여자가 되었다.
디트리히는 관자놀이를 주무르며 천천히 눈을 떴다. 흐릿한 시야에 분홍색이 어른거렸다.
“디트리히 경, 좀 괜찮아?”
“……전 괜찮습니다. 테레사 경은 어떤가요?”
“머리를 부딪친 것 같……. 경, 안 괜찮아 보이는데. 코피 나잖아.”
에키네시아가 혀를 차며 말했다. 디트리히는 코로 주륵 흐르는 것을 손등으로 문질러 닦았다.
“견딜 만합니다.”
“해독마도구 있지? 해독부터 해.”
“다 썼습니다.”
“이런, 나도 없는데.”
애초에 해독마도구는 기사가 아니라 준기사들에게 지급되었다. 마스터들은 독에 내성이 있으니 크게 필요하지 않고, 혹시나 위험할 경우 부대의 준기사가 대신 사용하기로 되어 있었으니까.
“경은 괜찮으신 겁니까?”
“내가 누구라고 생각해?”
“제니스이자 마검의 주인이시죠.”
“그렇지? 그러니 네 몸부터 걱정해.”
“그래도 아기가 있……. 흐억!”
그녀 쪽을 돌아본 디트리히는 저도 모르게 괴상한 소리를 내며 검을 찾아 쥐었다. 에키네시아의 뒤로 거대한 바질리스크 머리통이 널브러져 있었다. 그 너머로는 새카만 것들이 구불구불 쌓여 산을 이루고 있다.
그녀가 의아한 얼굴이 되어 제 뒤를 돌아보더니 피식 웃었다.
“다 죽은 거야. 신경 쓰지 마.”
그러면서 에키네시아는 바로 뒤에 있는 바길리스크 머리에 아무렇게나 등을 기댔다. 혀를 길게 빼물고 있는 성문만 한 뱀 머리통에 기대앉은 채로 마법가방을 뒤적거리는 모습은 평화로워 보일 지경이었다.
“다행이다. 있네.”
가방에서 붕대와 지혈제 등을 꺼내놓던 에키네시아가 반색하며 작은 유리병 하나를 꺼냈다. 연둣빛 액체가 딱 한 모금 정도 들어 있었다.
“해독마법약이야. 마셔.”
“마셔봤자 또 누적될 텐데요. 숨을 안 쉴 수도 없고요.”
“지금까지 누적된 건 사라질 테니 어느 정도는 버티겠지. 그 안에 나가면 돼.”
“한 병뿐인데, 뒀다가 위급한 사람이 마시는 게 낫지 않습니까?”
“나나 테레사 경은 마나로 버틸 수 있잖아. 그러니 경이 마셔야 해. 그리고 경, 지금 코피 계속 나.”
“……알겠습니다.”
디트리히가 약을 받아 들자 에키네시아는 옆에 눕혀둔 테레사에게 다가갔다. 치료하려는 그녀를 본 디트리히가 얼른 다가가 손을 내밀었다.
“제가 하겠습니다.”
에키네시아가 묘한 눈으로 그를 보더니 지혈제와 붕대를 넘겨주었다. 디트리히는 해독마법약을 마시고 나서 테레사 곁에 꿇어앉아 그녀의 머리카락을 살짝 걷어냈다.
옆머리에 피딱지가 엉겨 붙어 있었다. 상처 자체는 그렇게 크지 않은데 위치가 머리인지라 불안했다. 그의 눈매가 절로 찡그려졌다. 그는 몹시 조심스러운 손길로 피를 닦아내고, 붕대를 둘렀다. 그것을 가만 지켜보고 있던 에키네시아가 불쑥 물었다.
“디트리히는 언제부터 테레사 경을 좋아했어?”
“글쎄요, 어쩌다 보니 이미 그렇게 되어버려서 말입니다.”
“좋아하게 된 건 어떻게 알았어?”
“자연스럽게 알았습니다. 어느 날부턴가 테레사 경이 귀여워 보여서 미치겠더라고요.”
“멋진 게 아니라?”
“책임감이 강하고 충실한 기사다운 사람이, 요령이 없어서 무뚝뚝하게 굴면서 이런 동물무늬 손수건 들고 다니는 거 귀엽지 않습니까?”
에키네시아가 웃음을 터뜨렸다. 디트리하는 붕대를 마무리하며 아무렇지도 않은 어조로 말했다.
“에키네시아 경.”
“응?”
“어떻게 하면 당신처럼 강해질 수 있습니까?”
“으음…….”
“……아닙니다. 이상한 질문을 했군요. 죄송합니다.”
한심하고 의미 없는 질문이었다. 디트리히는 쓴웃음을 지으며 치료도구들을 정리했다. 가라앉은 그의 옆얼굴을 본 에키네시아가 말했다.
“나만큼은 무리야.”
“예, 예, 그러시겠죠. 전 유리엔보다 더 천재가 있을 줄은 짐작도 못 했습니다. 그놈도 괴물인데 정말이지…….”
“하지만 경은 강해질 거야. 기오사 오너가 될 테니까.”
〈허황된 소리가 아니다. 넌 기오사 오너가 될 테니까.〉
흰 까마귀 협곡에서 유리엔이 그에게 했던 말과 비슷하게 들렸다. 응원이나 빈말이 아니라 확신을 담은 예언 같은 어조 속에서 무언가 울컥 치받았다. 디트리하는 이를 악물었다.
“어떻게 그렇게 확신하십니까?”
에키네시아가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입을 열었다.
“디트리히. 마스터와 마스터가 아닌 기사의 차이가 뭐라고 생각해?”
“많죠. 마나코어를 만들었는지, 검기를 쓸 수 있는지, 마나로 신체를 강화할 수 있는지…….”
“그런 거 말고 말이야. 음, 질문을 바꿔볼게. 마스터가 ‘될 수 있는’ 기사와 그렇지 못한 기사의 차이가 뭘 것 같아?”
“…….”
디트리히는 입을 다물고 생각에 잠겼다.
준기사 중에는 기사보다 검술이 뛰어났던 사람들이 있다. 사관학교를 1위로 졸업할 정도로 압도적이었던 사람도 있었다. 그들이 모두 마스터가 되진 못한다. 반면 순위는 높지 않았는데도 젊은 나이에 쉽사리 마스터가 되는 사람도 있다.
단순하고 상식적으로는, 마나친화력의 차이였다. 마나친화력이 높은 사람은 마나를 비교적 잘 받아들이고 다른 이들보다 쉽게 마나에 익숙해진다. 검에 재능이 있는 자들이 빠르게 검을 익히듯이 말이다.
하지만 지금 그녀는 그런 당연한 사실을 묻는 것 같지가 않았다. 마스터가 된 준기사와 영원히 준기사에 머물러 있는 준기사들. 뭐가 달랐던가? 디트리히는 고심 끝에 답했다.
“절박함의 차이입니까?”
“반은 맞았어. 그래, 마스터가 된 기사들은 대체로 계기가 있었지. 한계를 넘어야만 벗어날 수 있는 절박한 상황을 맞이했었어. 아니면 마스터가 되어야만 하는 절박한 이유가 있었거나. 하지만 절박하다는 이유만으로 마스터가 될 수 있을 리가 없잖아.”
위기에 처했다고, 절박하게 바란다고 마스터가 될 수 있다면 누구나 마스터가 되었을 거다. 디트리히는 미간을 좁혔다.
“마나친화력이나 노력은 기본이겠죠.”
“그건 당연한 거지. 나는 그 외의 요소를 말하는 거야. 마스터로 넘어가는 그 순간에 필요한 것. 계기를 맞이했을 때, 그 순간에 무너지는 대신 마스터가 될 수 있게 만들어주는 결정적인 것. 무르익었을 때 알을 깨고 나올 수 있게 만들어주는 힘.”
“잘 모르겠습니다. 뭘 말씀하시는 겁니까?”
에키네시아는 어딘가 먼 곳을 보는 시선을 허공에 잠시 두었다가, 디트리히와 다시 눈을 마주쳤다. 오싹할 정도로 선명한 눈동자였다.
“확신이야.”
“……확신이라니요?”
“자신이 이 순간을 넘어설 수 있으리란 믿음. 나를 가로막은 벽을 부술 수 있다는 믿음. 막연한 믿음이 아니라, 눈을 감고도 그릴 수 있을 정도로 뚜렷한 이미지. 마치 이미 마스터가 된 듯이, 검기가 이미 내 검에 타오르고 있는 환상이 보일 정도로, 강렬하게 믿는 것.”
“…….”
“마나를 움직이는 건 근육이 아니야. 보이지도 않는 힘을 마스터는 어떻게 손발처럼 다룰 수 있을까? 그것이 내 뜻대로 움직일 거라는 확신이 없으면 불가능해. 내가 믿고 있다는 사실조차 잊을 정도의 확신. 그게 마스터가 되기 위해 필수적인, 그러나 눈에는 잘 드러나지 않는 요소야. 마스터의 벽은 자기 검을 의심하는 자는 넘어설 수 없는 벽이거든.”
디트리히는 멍해진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에키네시아는 눈을 휘며 웃었다.
“확신이 필요하다는 걸 안다고 해서 저절로 의심이 확신으로 바뀌진 않아. 하지만 당신에게는 그 요소가 이미 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