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을 든 꽃-204화 (204/211)

검을 든 꽃 외전 2-6화

* * *

“저 무리가 마지막입니다, 단장님.”

준기사가 유리엔에게 보고했다. 랑기오사를 허공에 휘둘러 파란 피를 떨어낸 그가 무심히 명했다.

“전원 물러나서 정비해라. 지금부터는 나 혼자 처리하겠다.”

서리거인들과 마주하고 있던 기사들이 일사불란하게 물러났다.

서리거인들은 개성적인 생김새였다. 머리가 두 개, 혹은 그 이상인 놈들도 있고, 외눈박이거나 송곳니가 엄니처럼 삐져나온 놈도 있었다. 그것들의 공통점은 푸르스름한 피부와, 걸어 다니는 3층짜리 건물처럼 보일 정도로 큰 키와, 닿는 것을 모조리 얼어붙게 만드는 저주였다.

거인들이 내쉬는 숨마다 공기가 얼어붙으며 서리가 내려앉는다. 손이 닿는 곳과 발을 내디디는 곳에는 성에가 돋아난다. 때문에 놈들이 들고 있는 뼈나 나무몽둥이는 얼음기둥처럼 보였다.

서리거인들은 괴성을 지르며 물러나는 기사들을 쫓아왔다. 걸음마다 대지가 쿵쿵 울리며 빙판이 생겨났다. 기사들은 성검을 늘어뜨린 채 서 있는 유리엔의 곁을 지나쳤다. 누구도 수십의 서리거인을 혼자 처리하겠다는 단장을 의심하지 않았다.

마지막 기사가 지나쳐간 후, 유리엔은 성검을 들어 올렸다. 하얀 칼날을 백색 마나가 뒤덮더니 그 길이가 훅 길어졌다. 랑기오사의 증폭능력이었다. 거인의 키와 비슷해질 정도로 길어진 검이 가로로 길게 휘둘러졌다.

크르륵.

크웨엑!

비스듬히 쏘아진 검기가 얼어붙은 땅에 길게 흠집을 남겼다. 간신히 멈춰서며 발목이 토막 나는 것을 피한 서리거인들이 분노한 눈으로 자신들을 막아선 은발의 인간을 노려보았다.

[저게 마지막이면, 바로 결절이 생길 수도 있겠군. 그래서 네가 혼자 처리하려는 거냐?]

유리엔은 기사들이 충분히 거리를 벌린 것을 확인하며 작게 대답했다.

“그렇다. 그 편이 확실히 안전하겠지.”

[좋은 판단이다. 주인. 가지.]

성검이 기분 좋은 투로 대답하는 것과 동시에, 유리엔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하얀 마나가 번뜩일 때마다 거인의 푸른 피가 쏟아져내렸다. 서리거인의 저주로 인해 그 피들은 파르스름한 얼음조각이 되어 흩뿌려졌다.

“……우와.”

물러난 기사의 검을 받아 닦던, 임시 스콰이어로 따라온 사관생도가 감탄했다. 그는 학살에 가까운 광경이 펼쳐지는 것을 보며 중얼거렸다.

“인간이 아니네……. 야, 에키네시아 경보다 단장님이 더 강한 거 아니야?”

“그러게. 대련에서 에키네시아 경이 단장님한테 승리했다고는 하지만, 대련이랑 실전은 다르잖아. 진짜 단장님이 더 셀지도 몰라.”

다른 기사의 검을 닦던 사관생도가 대꾸했다. 그의 시선은 제가 닦고 있는 검이 아니라 먼 곳에서 번뜩이는 검기와 쓰러지는 서리거인들에게 향해 있었다.

“솔직히 저거보다 강하다는 게 말이 돼? 난 상상이 안 가.”

“단장님이 아무래도 아내를 위해 져주신 거 아닌, 아야!”

속닥거리던 사관생도가 뒤통수를 부여잡고 고개를 돌렸다. 지나가던 기사가 한심하단 표정으로 그들을 보고 있었다.

“헛소리할 시간이 있으면 단장님이 보여주는 경지나 열심히 봐둬라, 꼬맹이들아. 지금 너희 수준에서는 너무 높아서 가늠도 안 되겠지만, 그래도 단장님 검을 보다 보면 나아지겠지.”

“네? 무슨 뜻이십니까?”

“너희 눈이 옹이구멍이라 단장님이랑 에키네시아 경 사이의 격차도 구별 못 한단 소리다.”

“그, 그럼 진짜 에키네시아 경은 지금 단장님보다 더 대단하다는 겁니까? 단장님이 져주시는 게 아니라?”

“헛소릴. 져주신 거냐니, 에키네시아 경이야 웃고 넘길지 몰라도 단장님이 들으셨다간 너네 큰일 난다.”

기사는 헛웃음을 흘리고는 목소리를 낮추었다.

“너희, 단장님과 에키네시아 경 대련 본 적 있지?”

“네.”

“사실 그것도 에키네시아 경이 단장님을 봐주면서 대련하는 거야.”

“……진짭니까?”

“내가 이런 걸로 거짓말을 하겠냐. 단장님이 너희가 상상할 수 있는 범위 안에서 최강이라면, 에키네시아 경은 너희가 상상하지도 못할 수준이거든.”

사관생도 둘이 멍청한 얼굴로 서로를 바라보았다. 하나가 용기를 내어 되물었다.

“저, 정말입니까? 솔직히 단장님도 대련하실 때보다 엄청나신데……. 그럼 대체 에키네시아 경은 어느 정도라는 겁니까?”

“몰라.”

“네?”

“모른다고. 비교할 전례가 있어야 알지. 갈수록 더 강해지시는 거 같긴 한데.”

“…….”

“단장님이야 에키네시아 경하고 진심으로 대련하는 거 보면 어느 정도까지인지 보이니까 알지만, 에키네시아 경은 한계가 온 걸 본 적이 없는데 내가 어떻게 아냐.”

사관생도들의 입이 벌어졌다. 기사가 어깨를 으쓱이며 그들에게 말했다.

“알아들었으면 짐이나 챙겨라. 이제 귀환할 테니까.”

“네? 벌써요? 아직 단장님께서 싸우고 계신데…….”

“끝났잖아. 봐.”

기사의 말대로였다. 유리엔은 마지막 서리거인을 베고 성검에 묻은 피를 털고 있었다. 하늘은 맑았고, 별다른 이변은 일어나지 않았다.

[의외로군. 시간을 돌리기 전엔 몰살당했던 마을이 통째로 살아남게 되는 거니, 여태까지의 경험상 결절이 생길 줄 알았는데. 흠, 혹시 숨어 있는 서리거인이 남아 있나?]

“그럴지도 모른다. 수색을 더 진행해 봐야겠군.”

성검을 거둔 유리엔이 기사들 쪽으로 돌아오자, 그의 임시 스콰이어인 사관생도가 빠르게 다가왔다.

“단장님, 마나전보가 왔습니다.”

[전보? 설마.]

유리엔은 불안한 기분으로 사관생도가 내미는 종이를 받아 펼쳤다. 내용을 읽은 그의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바르데르 쪽에 생겼군.]

-랑테, 결절 발생. 실종자: 디트리히 사루아, 테레사 폰 프랑 알마리, 에키네시아 스타티스.

그의 손 안에서 전보가 와작 구겨졌다. 유리엔은 낮게 신음을 흘리고는 품에서 편지봉투를 하나 꺼내 근처에 있던 기사에게 건넸다.

“지금부터 경이 토벌대를 이끈다.”

“예?”

“수색을 추가로 진행하고, 정비 후에 귀환하도록. 주의할 점은 거기에 미리 써두었으니 참고해라.”

“다, 단장님?”

“랑테에 결절이 발생했다. 나는 그리로 가보겠다.”

당황하던 기사는 그 말에 입을 다물었다. 유리엔은 경례를 받으며 기사들 사이를 빠져나와 현자로부터 받아온 이동 마도구를 끄집어냈다.

[걱정할 필요가 없다고 해봤자 안 듣겠지. 네가 도착할 때쯤엔 결절이 사라진 후일 확률이 높으니 기다리는 것 말고는 할 일이 없다고 해도 안 들을 거고.]

“그녀와 테레사 경이 동시에 사라졌다는 건 랑테 토벌대의 수뇌에 공백이 생겼다는 뜻이다. 무슨 일이 벌어졌을지 모르니 가봐야 한다.”

[네가 떠나면서 여기에 생기는 공백은?]

“예상하고 대비해 두었으니 괜찮다.”

[그래, 알아서 다 챙겨놨겠지, 네놈이라면. 그래도 마검의 주인이 결절에 들어갔단 소리를 듣고 정신이 나가지 않는 것만 해도 장족의 발전인가. 뭐, 아이도 있으니, 걱정하는 것도 이해는 한다만…….]

“다, 다, 단장님!”

잔소리처럼 이어지던 성검의 푸념이 경악한 누군가의 외침에 뚝 잘렸다. 외침이 들려온 쪽을 돌아본 유리엔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왜 그를 부르는 건지 보기만 해도 알 수 있는 광경이 펼쳐져 있었다.

악튜크에도 결절이 발생했다.

* * *

이변을 먼저 알아챈 것은 테레사였다.

“조심해라!”

그녀의 외침과 동시에 지진 같은 파동이 전해졌다. 뱀들이 발광하듯 움직이며 머리를 들었다. 그것들은 한 방향으로 몰려가기 시작했다.

바질리스크들의 목표는 테레사나 디트리히가 아니었지만, 그저 이동하는 것만으로도 덩치 탓에 재난이 따로 없었다. 사방에서 성벽이 움직이는 꼴이다. 그들은 몰려가는 군중 틈바귀의 병아리와 비슷한 신세였다. 아차하면 짓눌려 죽어 버릴지도 몰랐다.

하지만 테레사는 무력한 병아리가 아니라 기오사 오너였다.

“위는 보지 말고 아래만 보면서 날 따라와라, 디트리히!”

그녀는 명령조로 말한 후 곧바로 움직였다. 파도치는 비늘들 사이를 그녀가 날렵하게 빠져나갔다. 디트리히는 그녀의 다리쯤에만 시선을 둔 채 황급히 뒤따랐다.

테레사는 놀랍게도 마스터가 아닌 디트리히가 따라올 수 있을 정도로만 움직이면서도 안전하게 피하고 있었다. 디트리히는 그저 따라가기만 하면 되었다. 그녀의 배려는 충분했다. 문제는 그에게 있었다.

‘젠장, 이거…….’

눈앞이 뿌옇게 흐려지며 머리가 부서질 듯 아팠다. 코 안쪽이 화끈해지더니 무언가가 주륵 흐르는 게 느껴졌다. 피였다. 계속 들이마신 독기가 위험수위에 이른 모양이었다.

‘해독마도구를 더 아끼다간 죽겠군.’

뱀들이 날뛰고 있는 이 판국에 독에 휘청거릴 순 없었다. 디트리히는 품 속을 더듬어 초록색 마법진이 새겨진 얇은 유리판을 끄집어냈다. 손이 떨리는데 다 지진이 난 것처럼 땅까지 떨려서 마도구가 자꾸만 미끄러졌다. 간신히 그것을 움켜쥔 그가 마법을 발동하려 했다.

“해…….”

“디트리히!”

테레사가 비명처럼 그를 불렀다. 마도구를 꺼내 쥐느라 걸음이 느려진 그에게 탑처럼 굵은 바질리스크의 꼬리가 휘둘러지고 있었다. 디트리히는 그것을 알아채지 못하고 멍하니 고개를 들었다.

한 가닥으로 묶여 있던 금발이 펼쳐지며 하늘하늘 휘날렸다. 금발에 휘감긴 그녀의 몸이 던져진 돌멩이처럼 날아가다가, 다른 뱀에게 부딪혀 땅에 처박혔다. 머리가 부딪히는 듯한 무서운 소리가 났다.

모든 일은 일순간에 일어났으나, 그에게는 모든 것이 느리게 느껴졌다.

디트리히를 향해 날아오는 꼬리를 테레사가 검면을 들어 막았다. 달려드는 열차를 칼 한 자루로 막아선 것이나 다름없는 짓이었다. 아무리 마스터라 해도 육중하다 못해 웅장한 크기의 꼬리가 내리치는 것을 정면에서 힘으로 막아낼 순 없었다. 그럼에도 수호검의 주인이기에 용케 막아내긴 했으나, 그 충격까지는 버티지 못하고 튕겨나간 것이다.

흩날린 머리카락이 내려앉는 것과 동시에 느리게 보이던 것들이 확 되돌아왔다. 튕겨나가 쓰러진 테레사는 움직이지 않았고 그녀의 옆에서 꿈틀거리는 뱀의 몸체가 다가오고 있었다. 디트리히는 괴성인지 신음인지 모를 소리를 내지르며 달려가 그녀를 잡아당겼다. 코피가 줄줄 흘렀지만 이 순간만큼은 독으로 인한 어지러움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해독!”

그는 한 팔로 테레사를 끌어안고 마도구를 발동했다. 마도구에서 솟은 연둣빛 광채가 그의 몸을 훑고 사라졌다. 정신이 약간 맑아졌다. 디트리히는 횟수를 다 쓰면서 부서져버린 마도구를 내던지고 테레사를 안아 올리려 했다.

갑자기 사위가 밤처럼 어두워졌다. 밤이 아니었다. 마물의 몸체가 드리운 그림자였다. 그는 커다랗게 떠진 붉은 눈으로 위에서 떨어져 내리는, 비늘로 뒤덮인 벽을 보았다. 먹구름이 가득하던 하늘이 무너지는 것과 다를 바 없이 느껴지는 광경이었다. 죽음이 쏟아지고 있었다.

‘나는, 이렇게 죽기 위해 태어났나? 고작 이런 죽음을 맞이하기 위해?’

디트리히는 무의미한 짓임을 알면서도 반사적으로 테레사의 위를 덮었다. 그러자 바닥에 흐르고 있는 그녀의 피가 보였다. 그 짧은 찰나에 그는, 조금 전까지 느끼던 심정과 완전히 다른 심정을 느꼈다.

‘그녀만이라도…….’

이 순간 제 품에 있는 여자를 살릴 수 있다면. 그럴 수만 있다면 아무것도 이루지 못하고 죽어도 허무한 삶이 아닐 텐데.

‘……내가 생각보다 더 테레사를 좋아하고 있었구나.’

경지에 오르지 못하고 죽게 되는 것보다 그녀가 죽는 것이 더 끔찍하게 느껴졌다. 지킬 것이 없었던, 위만 바라보고 있던 그로서는 처음으로 느껴보는 지키고 싶다는 열망이었다.

디트리히는 눈을 감았다. 쿠웅, 하고 묵직한 것이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그러나 고통은 느껴지지 않았다. 그리고, 귓가에 익숙한 음성이 들려왔다.

“큰일 날 뻔했네. 괜찮아?”

그는 눈을 떴다. 보석으로 장식된 샌들이 먼저 보였다. 그것을 따라 시선을 올리자 살랑거리는 드레스 자락과, 검게 타오르는 마검을 쥔 손이 보였다. 연한 분홍색 머리카락 사이로 보이는 조그만 얼굴이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

“별로 안 괜찮아 보이네. 늦어서 미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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