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을 든 꽃 외전 2-5화
그는 절규하듯 그녀의 이름을 외쳤다. 마지막으로 남은 금발 끄트머리라도 움켜쥐려는 듯 손을 뻗었다. 머리카락은 그의 손끝을 스쳐 사라졌다. 허공을 움켜쥔 손. 커다랗게 떠진 붉은 눈이 빈손을 내려다본다. 디트리히는 그 상태로 움직이지 않았다. 결절에 그 손이 닿아 버릴 때까지.
디트리히가 삼켜지는 것과 동시에 쌓여 있는 허물 너머로 에키네시아가 고개를 내밀었다. 외침을 듣자마자 급하게 달려오는 바람에 그녀는 거칠게 숨을 내쉬고 있었다. 둥지의 중앙에서 거품처럼 부푸는 결절을 본 그녀는 욕설을 내 뱉으며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쓸어 올렸다.
“그래, 어쩐지 이럴 거 같더라. 차라리 내가 할 걸.”
“아가씨.”
“던컨, 그레고리 경한테 가서 지금부터 경이 토벌대장이라고 하고, 토벌대랑 같이 퇴각해.”
“아가씨는요? 설마 또…….”
“넌 들어오지 마. 짐만 돼. 가방 이리 주고.”
“잠깐만요, 아가씨……!”
에키네시아는 던컨의 손에 들려 있던 마법가방을 냅다 빼앗고는 그대로 둥지 아래로 뛰어내렸다. 길게 휘날린 분홍빛 머리카락이 결절 속으로 사라지는 걸 보며 던컨은 뒷목을 잡았다.
“……창천기사단장이 알면 기절하겠군.”
* * *
“으…….”
머리가 부서질 듯이 아팠다. 디트리히는 신음을 흘리며 눈을 떴다. 코끝에 매캐한 냄새가 맴돌았다. 호흡을 따라 들어오는 공기가 목구멍을 긁어내리는 듯했다. 그는 반사적으로 컥컥 기침을 했다.
“이걸로 입을 막고 숨을 쉬어라.”
무언가가 휙 날아와 얼굴에 덮였다. 디트리히는 눈물 맺힌 기침을 하며 그것을 집어 들었다. 끝부분에 동물 모양 수가 놓인 하얀 손수건이었다. 그것을 보자 이 와중에 웃음이 나오려 했다. 그는 입가를 얼른 손수건으로 가렸다.
‘테레사 취향은 여전하네.’
코와 입을 막고 숨을 쉬자 겨우 기침이 멈췄다. 하지만 머리는 여전히 어지러웠다. 공기가 끔찍하게 독했다.
“대체 네놈은 왜 들어왔지? 기껏 밀쳐 냈더니.”
“어……. 테레사가 삼켜져서?”
디트리히는 바보처럼 대답하며 고개를 들었다. 디몽기오사를 든 테레사가 미묘한 표정으로 그를 내려다보고 서 있었다.
“네가 들어온다고 해서 도움이 되진 않는다.”
“알아, 아는데, 그런 생각 할 틈이 없어서.”
“……어째서?”
디트리히는 그 물음에 대답하는 대신,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주무르며 되물었다.
“결절 안이지, 여기?”
“네 발로 들어와 놓고 왜 묻는 거냐.”
“살다 보니 결절에 다 들어와 보네.”
“태평하기 그지없군. 상황의 심각성이 짐작이 안 가나?”
테레사가 턱짓으로 옆을 가리켰다. 그녀를 따라 시선을 돌린 디트리히의 손에서 손수건이 툭 떨어졌다.
“이게 뭔……. 미친?”
바로 옆의 벽에 손바닥만 한 검붉은 비늘들이 빽빽하게 돋아 있었다. 그것은 심지어 꿈틀거리거나, 느리게 움직이기까지 했다. 자세히 보니 벽이 아니었다. 조금 전까지 질리게 싸웠던 바질리스크의 몸통과 비슷했다. 가장 큰 바질리스크보다도 압도적으로 커서 벽처럼 보일 뿐.
“테레사, 이거 설마 바질리스크야?”
“준기사 디트리히 사루아.”
“바질리스크입니까, 테레사 경?”
“모르겠다. 머리가 안 보이니.”
디트리히는 고개를 들고 주위를 살펴 보았다. 어딜 보아도 벽처럼 보일 정도로 높은 뱀 몸통들만 보였다. 꿈틀꿈틀 움직이고 있는 뱀 몸통들이 휘어지고 뒤섞인 공간은 마치 미로처럼 느껴졌다.
심지어 그것은 변화하는 미로였다. 그가 지켜보는 사이 스르륵 움직이는 소리와 함께 벽이 하나 사라졌다가, 다른 방향에 벽이 생겼다. 정확히는 뱀인지 바질리스크인지 모를 거대한 몸통이 움직인 것뿐이지만 겉으로 보기엔 그랬다. 디트리히는 입을 떡 벌렸다.
“계속 주위가 변하고 있다. 일어나.”
그가 일어나다가 비틀거리며 또 기침을 했다. 테레사는 손수건을 주워 다시 건넸다.
“공기가 독이니 조심해라. 그리 강한 독은 아닌 것 같지만 계속 마시다 보면…….”
“경은 괜찮습니까?”
“마나를 순환시키는 중이라 버틸 만해.”
디트리히는 손수건으로 입을 막은 채 호흡을 골랐다. 아무래도 어지러움이 가시지 않는다. 오히려 조금씩 더 두통이 심해지는 느낌이었다. 죽지 않은 것을 보면 테레사의 말대로 그렇게 강한 독은 아닐 것 같지만, 숨을 쉬면 쉴수록 독이 누적되는 모양이다.
‘이거 좀 위험한 것 같은데.’
“해독마도구는 가지고 있겠지?”
테레사가 무뚝뚝하게 물었다. 디트리히는 품 안에 있던 마도구를 꺼내보았다. 이번 임무를 위해 보급받은, 해독마법이 새겨진 마도구에는 횟수 제한이 있었다. 남은 횟수를 가늠해 본다. 전투 중에 많이 쓴 탓에 거의 남지 않았다.
‘……한 번.’
고개를 든 그는 테레사의 눈가에 있는 얇은 피부가 파르르 떨리는 것을 보았다. 그녀는 초조해하고 있었다. 기오사 오너인 그녀는 해독마도구를 가지고 있지 않다. 그다지 필요하지도 않았다. 반면 디트리히는 해독마법이 없으면 오래 버티지 못할지도 모른다. 그는 그녀의 짐이 되고 싶지 않았다. 저절로 거짓말이 튀어나갔다.
“넉넉해. 10회 넘게 남았어.”
그녀의 얼굴에 확연한 안도감이 감돌았다. 길게 숨을 토해낸 테레사가 돌아서며 흐트러진 머리칼을 다시 묶었다.
“다행이군. 위험하다 싶으면 바로 사용해라.”
“알겠습니다.”
“결절 파훼법은 알고 있으니, 그대로 하면 되겠지. 우선 시작점부터 찾아내자.”
결절에서 벗어나는 실전적인 방법은 유리엔과 에키네시아에 의해 창천기사단 내부에 알려진 상태였다.
바르데르기오사에 관한 논문을 발표한 뒤부터 현자 칼리스토 팽과 그의 제자 니콜 시즈튼이 결절에 관한 연구를 하고 있었다. 1년이 넘었지만 파훼되는 정확한 원리 자체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그래도 괴물 같은 제니스 부부가 몸으로 밝혀낸 덕에 방법 자체는 확실했다.
테레사는 손이 미끌거려 검을 고쳐 쥐었다.
그녀는 늘 누군가를 지키는 입장에서 검을 휘둘러왔다. 지켜야 할 사람이 뒤에 있다고 해서 이렇게까지 불안해질 이유는 없었다. 지키지 못한 엘리제가 갑자기 떠오를 이유도 없었다. 아무리 결절이라는 미지의 공간이라 해도, 파훼법도 알고 있지 않은가.
그럼에도 테레사는 긴장하고 있었다. 자각하진 못했으나, 잃고 싶지 않은 만큼 커진 불안이었다.
디트리히는 테레사의 불안을 눈치챘다. 그래서 그는 그녀가 잊고 있는 점을 지적하는 대신 입을 다물었다.
‘시작점을 건드리기 전에 결절 내의 마물을 모두 없애야 하잖아. 이 결절 내의 마물이면, 미로를 만들고 있는 이 무식한 크기의 뱀들을…….’
아찔해졌다. 그래도 어쨌든 시작점을 찾는 게 우선이었다. 그는 미로 속을 걷는 테레사의 뒤를 조용히 뒤따랐다.
* * *
[야, 이거 독 아니야?]
“독 맞아. 성가신 결절이네.”
에키는 결절에 들어서자마자 입을 막았다가, 곧 손을 떼었다. 마나코어가 활발하게 움직이며 신체를 강화해 독을 버텨냈다. 극독이 아닌데다 한 번에 삼키게 되는 양이 적어서 별것 아니었다. 어디까지나 그녀 자신에게는 말이다.
하지만 그녀에게는 너무나 소중하면서도 한없이 무력한 존재가 함께하고 있었다. 에키는 몸 안에서 휘도는 마나의 흐름을 배 쪽에 최대한 집중했다. 그녀의 몸뚱이는 조금쯤 중독되어도 되지만, 아기에게는 독기가 한 톨도 미치지 않아야 한다.
[주인아, 괜찮아?]
“그럭저럭. 이거, 오래 있으면 마스터라도 힘들겠는데. 마스터가 아니면 당연히 더 힘들고.”
[마나 떨어지면 바로 꽥이야?]
“바로는 아니고, 서서히겠지.”
에키는 주위를 한 바퀴 둘러본 다음, 아메시스트를 검집에 집어넣고 벽으로 다가갔다. 느릿하게 꿈틀거리고 있는 비늘들 위에 그녀가 손을 올렸다. 살아 있는 생물의 감촉이었다. 그녀는 벽을 짚으며 걸었다.
“이거 머리가 어디에 있는 거야? 마물이면 시작점 건드리기 전에 죽여야 하는데.”
[얘넨 머리가 없을지도 몰라, 결절이니깐!]
바르데르기오사가 뭐가 그리 재밌는지 깔깔거렸다. 주인의 힘을 잘 아는 마검은 전혀 긴장하지 않고 있었다.
에키는 고개를 들었다. 까마득한 높이로 치솟은 뱀의 벽 위로 먹구름이 가득한 하늘이 펼쳐져 있다. 금방이라도 비가 쏟아질 듯이 흐린 오후 같은 하늘이었다. 아래는 삭아버린 나뭇가지와 낙엽이 뒤섞인 숲의 흙이 깔려 있었다.
“흐음.”
뱀이 움직이며 미로의 길이 바뀌는 것까지 확인한 그녀가 고개를 기울이더니 발로 땅을 툭툭 쳤다.
에키가 신고 있는 샌들은 하늘거리는 드레스에 맞추어 보석으로 장식한 것이었으나, 굽이 낮고 편한 형태였다. 이왕이면 예쁜 게 좋아서 예쁜 것들을 차려 입긴 했어도, 임신 중이라 몸에 편한 것들을 골랐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그녀는 가방을 옆에 내려놓고 가볍게 땅을 박찼다. 중간에서 몸을 틀며 벽을 걷어차 다시 반동을 얻으며 뛰어오른다. 어지간한 벽은 가뿐히 넘을 높이로 뛰어올랐음에도 모자랐다. 아기를 고려하지 않으면 더 높이 뛸 수 있지만, 그럴 순 없었다.
[어떻게 할 거야? 미로 찾기 해? 전에 엘기오사 오너 구할 때 그 결절에서처럼? 근데 여긴 자꾸 바뀌어서 갈림길 표시해도 없어질 거 같은데.]
“그때야 힘을 최대한 감춰야 했으니 발로 뛰었지만…….”
도로 바닥에 착지한 에키는 한 손으로 가방을 쥐고, 다른 손으로 바르데르기오사를 뽑아내 움켜쥐었다. 칼날을 타고 검은 마나가 넘실거리며 솟구쳤다.
“……지금은 뭐, 쉬운 길 두고 굳이 빙빙 돌 필요는 없으니까.”
[엉?]
“이러면 되잖아.”
그녀가 마검을 휘둘렀다. 거대하게 내쏘아진 검기가 뱀의 벽에 도달하며 폭음이 일었다. 기괴하게도 피가 나진 않았다. 하지만 캬아악, 하고 고통스러운 비명은 울려퍼졌다. 뱀의 몸통이 꿈틀거리며 사방이 지진이 난 것처럼 요동쳤다.
캬아아악!
캬아아!
첫 울음에 뒤이어 화답하듯 연속적으로 뱀들이 울었다. 에키는 뒤틀리며 움직이는 벽들을 슬쩍 슬쩍 피했다. 바질리스크와 똑같이 생긴 뒤통수가 일어서는 게 보였다. 어마어마한 덩치 탓에 머리를 드는 게 탑이 돋아나는 것처럼 보였다. 에키는 그것이 그녀를 향해 시선을 돌리는 순간 눈을 감았다.
“머리 찾았네, 발.”
[쳇, 결절인데 머리가 왜 있어? 개성 없어!]
“이 정도면 덩치가 개성이잖아.”
한가롭게 대꾸하는 그녀를 향해 바질리스크의 머리가 입을 벌린 채 덤벼들었다. 웅장한 크기에 비해 속도는 벼락이 내리치는 듯 빨랐다. 그 서슬에 밀려 난 공기가 눈을 감은 그녀의 머리카락과 옷자락을 마구잡이로 휘날렸다.
“느긋하게 길을 찾고 다니기엔 여기 공기가 우리 아기한테 안 좋을 테니까.”
송곳니가 말뚝처럼 땅에 틀어박혔다. 그녀는 이미 그곳에 없었다. 보드라운 인간의 몸 대신 흙만 삼킨 바질리스크가 그르륵 소리를 내며 머리를 들어 올렸다.
한 뼘 정도 들어 올려진 머리는 툭 잘리더니 땅에 처박혔다. 잘린 단면은 몹시 깔끔했다. 남은 목 아래가 허공으로 솟구쳤다가, 아래로 떨어지며 나뒹굴었다. 머리를 잃고 몸부림치는 뱀의 몸뚱이가 주위의 뱀들을 후려쳤다. 곧 연달아 벽이 일어서기 시작했다.
에키는 죽은 바질리스크의 머리를 밟고 선 채 빙긋 웃었다.
“다 잡아 죽이는 게 훨씬 빠르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