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을 든 꽃-202화 (202/211)

검을 든 꽃 외전 2-4화

자잘한 위기가 있었으나, 전반적으로 토벌은 순조로웠다.

의외인 건 바질리스크의 수가 처음 정보원이 추정했던 30마리를 벌써 넘겼다는 것뿐이었다. 그마저도 토벌대를 구성할 때 창천기사단장이 바질리스크가 더 많을 수도 있다며 인원을 늘렸기에 큰 문제는 없었다.

둥지가 가까워질수록 튀어나오는 놈들의 수가 급증했다. 개체마다 크기는 달랐지만 제일 작은 놈이라 해도 사람 몸통만 한 굵기인 것들이 여럿 달려들자 정신이 없어졌다. 검이 휘둘러지고 독액이 사방으로 튀었다.

그렇게 전진한 토벌대는 드디어 둥지에 도착했다.

둥지는 부러뜨려진 자작나무들이 얼기설기 교차된 중앙에 있었다. 거대한 바질리스크의 허물들이 솜처럼 뭉쳐진 둥지에 나무술통보다 큰 알이 빽빽했다.

테레사는 둥지를 발견하자마자 디몽기오사를 뽑아든 채 혼자서 뛰어들었다. 둥지 근처에 도사리고 있던 바질리스크들은 그녀의 몸놀림을 따라잡지 못했다.

“다친 자는 뒤로! 기사들은 둥지 외곽에서 공격하라! 절대 둥지 안쪽으로 들어오지 마라!”

넓은 수호검의 칼날이 알을 으깨다시피 깨뜨리자 모든 바질리스크가 그녀만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테레사는 제게 집중된 공격을 막아내며 바질리스크들이 다른 쪽으로 시선을 돌리려 하면 바로 알을 깨뜨렸다.

가장 견고한 검인 디몽기오사의 오너이자, 방어에 특화된 검술인 철벽의 프랑 알마리를 계승한 그녀다운 방식이었다. 그녀 덕에 토벌대는 비교적 쉽게 등을 보이고 있는 바질리스크들을 처리할 수 있었다.

아름답기로 소문난 자작나무숲이 바질리스크의 독으로 새카맣게 죽어갔다. 숲이 망가지는 것까지 막는 건 불가능했다. 그래도 창천기사단 토벌대는 사망자 없이 모든 바질리스크를 처리해 냈다.

“테레사 경 덕분이군, 이건.”

“역시 수호검의 주인…….”

마지막 바질리스크가 쓰러지고 나자, 토벌대는 주위를 정리하고 귀환을 준비했다. 기사들이 휴식하는 동안 맡은 역할에 따라 준기사들이 신속하게 움직였다. 몇은 부상자를 치료했고, 몇은 바질리스크의 시체들 사이를 헤집으며 혹여 살아남은 놈이 있는지 확인하고 유용한 마법 재료인 송곳니와 눈알을 챙겼다. 디트리히는 후자였다.

에키네시아 스타티스는 던컨과 함께 약간 떨어진 곳에서 지켜보는 중이었다. 마지막 바질리스크가 죽을 때 긴장한 채 허리께의 아메시스트에 손을 올렸던 그녀는, 그것이 죽고 나서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자 안도하며 손을 뗐다. 던컨이 그녀에게 무어라 속삭였다.

디트리히는 둥지 외곽에서 바질리스크 시체들을 칼끝으로 헤집으며 흘깃 그녀를 확인했다.

‘역시 결절을 대비해서 왔던 건가? 뭔가 안심한 거 같은데, 이제 안 나올 거라는 확신이 들었나? 율도 그렇고 어떻게 예측하는 거지?’

“디트리히 사루아. 이리 와라.”

테레사가 갑자기 그를 불렀다. 디트리히는 뭉쳐진 허물들을 넘어 둥지 안쪽에 내려섰다. 바닥에 짚은 디몽기오사에 기대 선 테레사가 기운 빠진 음성으로 명령했다.

“마저 처리하도록.”

땀에 젖은 금발이 그녀의 얼굴에 달라붙어 있었다. 아무리 수호검의 주인이라지만 수십 마리의 바질리스크가 쏟아내는 공격을 눈을 감고 받아내야 했으니 지칠 수밖에 없다. 디트리히는 얕게 들썩이는 그녀의 어깨에 시선을 주었다.

‘지금 괜찮냐고 물으면 안 되겠군.’

그랬다간 진심으로 화를 낼 테니까.

디트리히는 테레사에게 무례하게 굴면서도 한 번도 그녀의 선을 넘은 적이 없었다. 좋아하게 되었고, 그래서 늘 주의 깊게 그녀를 살폈고, 그로 인해 점점 더 그녀에 대해 잘 알게 되었고, 그러면서 더욱 사랑하게 되었으므로.

“예, 테레사 경.”

디트리히는 뭘 처리하라는 건지 묻지도 않고 검을 뽑아들었다. 그는 둥지에 남아 있는 알들을 하나하나 부수며 안에 있는 새끼 마물들의 숨통을 끊었다.

테레사는 숨을 고르며 그를 지켜보았다. 처리하란 말 한마디에 뭘 해야 할지 알고 행동한다. 일일이 말하지 않아도 알아서 하는 건 확실히 편했다.

‘너무 알아서 잘해서 짜증 나는 녀석이지.’

예를 들면, 파트너와 함께 연회에 간 적이 거의 없는 그녀가, 이번 연회에는 파트너와 같이 가서 춤을 추고 싶다고 생각하자마자 찾아와서는 파트너를 해 달라 보채는 식으로 말이다.

춤을 배운 뒤 참석한 성녀 데뷔 연회에서 테레사는 처음으로 연회가 즐거웠다. 에키네시아의 말마따나 잘 어울리는 드레스를 입고 마음껏 꾸민 뒤 경쾌한 음악에 맞춰 춤을 추는 건 제법 즐거운 일이었다.

물론 어디까지나 가끔 즐길 만한 일일 뿐, 그녀로서는 검을 들고 움직이는 게 더 즐거웠지만 말이다. 그래도 의무적으로 참여해야 할 때마다 제복 차림으로 대충 시간을 때우느니 드레스를 입고 춤을 추는 게 낫다는 생각이 들 정도는 되었다.

그래서 에키네시아의 서임식 무도회 날짜가 다가오자, 파트너를 구할까 하는 생각을 잠깐 했었다. 오늘 저녁에는 송어구이가 먹고 싶은데, 수준의 가벼운 생각이었다. 생각만 하고 귀찮아져서 결국 구하지는 않았다.

그러자 디트리히는 귀신같이 파트너 신청을 해 왔다.

〈저는 자격이 안 되어서요. 무도회에 참석하고 싶을 뿐, 다른 의도는 없습니다. 무도회도 못 가는 불쌍한 준기사를 구제해 주시면 안 될까요, 테레사 경?〉

다른 의도가 있다는 것이 빤히 보이는 얼굴로 하는 뻔뻔한 요청이었다. 그러나 그런 식으로 변명거리를 만들어주었기에, 테레사는 쉽사리 디트리히의 요청을 받아들일 수 있었다.

‘디트리히라면 그렇게 요청해야 내가 받아들이기 편하다는 걸 알고 한 거겠지.’

생각해 보면 처음 드레스를 입고 참석한 성녀 데뷔연회 때 즐거웠던 것도 디트리히 덕분이었다. 그녀의 신분이나 지금까지 이런 걸 내켜하지 않던 태도 탓에 아무도 춤을 신청하지 않고 눈치를 보는 와중에 디트리히만이 대뜸 춤 신청을 해 왔었으니까.

고마운데, 순수하게 고마워하기에는 제 사심을 채우려 하는 짓이라는 걸 고스란히 드러내서 고마워할 수가 없다. 테레사는 연애 감정에 무딘 편이었다. 그러나 그런 그녀로서도 눈치챌 수밖에 없을 정도로 디트리히는 대놓고 티를 냈다.

‘확실히 내게 호감이…… 있는 것 같 긴 한데.’

그런데 그 호감이 어느 정도인지를 모르겠다. 어쩌면 저놈은 원래 그런 놈이고, 다 그녀의 착각일 수도 있었다. 워낙 가볍게 구는 터라 감이 오질 않았다.

“그런데 테레사 경, 본인이 할 수 있는 일을 굳이 절 불러서 시키는 건, 제가 가장 믿음직하고 친해서겠지요? 아니면 저랑 함께 있고 싶어서?”

바로 저렇게 말이다. 테레사는 반사적으로 인상을 썼다.

“네놈이 제일 가까이에 있었잖나.”

“그래, 그래, 그렇다고 치지 뭐.”

“은근슬쩍 말 놓지 마라, 디트리히 사루아.”

“지금은 주위에 아무도 없잖아. 사관학교 시절엔 부담스러우니 말 놓으라고 하고선.”

“그때는 네가 선배였지만, 지금 나는 기사고, 너는 기사가 아닌 준기사에 불과하다.”

테레사는 툭 내뱉은 후에 아차 싶었다. 사실이라 해도 무례한 말이었다. 기사가 되지 못하고 준기사에 머물러 있는 자들은 그 사실에 스트레스를 받는다. 준기사에 만족하는 자들도 있지만, 대부분은 기사가 되기 위해 창천에 입단했으니까.

상처를 주었을지도 모른다. 그녀가 당황하며 사과하려는 찰나 디트리히가 과장되게 한숨을 쉬었다.

“네, 네, 알겠습니다. 기사님. 제가 기사가 되면 두고 봅시다. 다 갚아줄 거니까요.”

정말 아무렇지도 않은 걸까, 그녀가 당황하니 장난으로 받아넘겨 준 걸까. 테레사는 복잡한 심경으로 붉은 머리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테레사 폰 프랑 알마리는 스무 살에 사관학교에 입학했다. 25세까지 입학이 가능하므로 그렇게 늦은 나이는 아니었으나, 그녀의 실력을 감안하면 많이 늦은 편이었다. 원래라면 18세에 입학했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했다.

그녀의 열여덟 살은 슬픔이 찾아온 나이였고, 열아홉 살은 그 슬픔을 받아들이고 극복하기 위해 흘러가 버렸다.

자매처럼 자란 친구가 있었다. 그녀와 많이 닮은 금발의 동갑내기 사촌여동생. 프랑 알마리 대공의 여동생 부부의 딸, 엘리제.

대공의 여동생과 그 남편은 어린 엘리제를 두고 배 사고로 죽었다. 혼자 남은 조카를 가엾게 여긴 대공은 엘리제를 거둬 딸과 함께 키웠다. 그래서 테레사와 엘리제는 어릴 때부터 늘 함께였다. 마치 쌍둥이처럼.

테레사가 검을 익히기 시작하자 엘리제도 검을 따라 쥐었다. 월등한 천재성을 보이는 테레사에 비해 그녀는 그렇게 뛰어나지 않았지만, 네가 좋아하는 것을 배운다는 것 자체가 즐겁다며 웃곤 했다. 누구보다 소중한 친구이자 자매였다.

열여덟, 테레사는 검술 수행을 위한 여행을 떠났다. 따라가고 싶다고 엘리제가 우겼다. 그 요청을 차마 거절하지 못한 건 테레사가 평생 가장 후회하는 일이 되었다.

나름 자신이 있었다. 테레사는 천재였고, 강했으며, 어지간한 기사들조차 그녀의 상대가 되지 않았다. 위험할 일은 없으리라 믿었다. 설령 위기가 오더라도 자신의 실력이면 엘리제를 지킬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오산이었다. 대공의 딸인 그녀를 노린 자들이 있었다. 그들은 똑같은 금발인 엘리제를 테레사로 착각하여 납치했다. 그리고 자신들이 납치한 사람이 대공의 딸이 아님을 깨닫자, 증거 인멸을 위해 엘리제를 죽이고 달아났다.

엘리제의 시신을 찾아냈을 때, 테레사는 난생 처음으로 아득한 절망과 끝이 없는 슬픔을 느꼈다. 평소에 잘 의지하지 않던 대공가의 힘까지 총동원하여 복수는 했다. 그럼에도 지키지 못했다는 사실은 그대로 남았다.

누구도 테레사를 책망하지 않았으나 테레사는 자기 자신을 지독하게 책망했다. 자신감도 잃었다. 검의 천재라는 게 무슨 의미가 있나, 제 곁에 있던 사람조차 지키지 못했는데.

슬픔에 잠겨 보낸 기간이 2년이었다. 2년간 그녀는 하루도 검을 손에서 놓지 않았다. 차마 검을 놓을 수가 없었다. 미친 듯이 검을 휘둘렀다.

그녀는 어느 정도 슬픔을 극복한 스무 살에 겨우 아젠카로 향할 수 있었다. 반쯤은 도피였다. 대공저에 있으면 어디에서건 엘리제와 보낸 시간들이 떠올랐으므로.

그리고 디트리히 사루아를 만났다.

〈너 때문에 친구가 죽었다고? 너, 진짜 건방지다.〉

한 살 어린 선배는 짜증 나는 인간이었다.

〈네가 죽인 것도 아니고, 네가 실수한 것도 아니라며. 그런데도 네 탓이야? 같이 다닌 게 잘못이라고? 왜, 아주 그 날 폭풍우가 몰아친 것도 네 탓이라고 하지 그래. 나 참.〉

〈죄지은 새끼들이 죄책감을 느껴야지 당한 사람이 왜 자책을 해? 막을 수 있었을 거라고? 네가 무슨 신이야? 뭐든 자기 때문이라는 것도 오만한 생각이야, 테레사.〉

〈반대로 생각해 봐. 네가 죽고 걔가 살았는데, 너라면 걔 꿈에 나타나서 너 때문에 내가 죽었어, 하고 원망하고 싶냐? 만약 그러고 싶으면 너네 사이는 그 정도였단 소리니까 울 필요도 없고.〉

〈그럴 리 없다고? 절대 원망하고 싶지 않아? 그럼 그거 개꿈이야. 걔가 원망하는 게 아니라 네가 세상 모든 게 자기 탓이라고 삽질하고 있으니까 그딴 꿈을 꾸는 거라고.〉

〈네 자책감을 불쌍한 친구한테 덮어씌우지 좀 마라. 세상에서 제일 불행한 사람처럼 다니지도 말고. 꼴 보기 싫으니까.〉

디트리히는 프랑 알마리 대공의 딸이자 철벽의 계승자인 그녀를 상대로 거침없이 말을 내뱉었다. 무례하고, 뭐라도 아는 것처럼 떠드는 게 짜증 나고, 화가 나고, 그럼에도 그가 쏟아내는 말들을 듣다보면 마음이 편해지곤 했다.

그녀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조심스럽게 위로하는 것이나, 그녀의 신분을 어려워하는 그 외의 사람들이 격식을 차리며 배려하는 것보다, 그 막말들이 묘하게 더 위로가 되었다.

‘그래서 그를 좋아하냐고 한다면, 그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싫어하냐면, 그것도 아니었다.

복잡했다. 한 살 어리지만 선배이고, 사관학교 선배지만 기사와 준기사라는 격차가 있는 관계처럼, 그를 볼 때마다 복잡한 심경이 든다. 그래서 인상이 찡그려진다.

테레사는 눈살을 찌푸렸다. 그러면서도 그에게서 시선을 떼지는 않았다. 그 덕분에 이변을 빨리 알아차렸다.

“……!”

디트리히가 마지막 알을 부수는 순간, 그의 머리 위 허공이 일그러졌다.

앞뒤 생각할 틈이 없었다. 판단보다 먼저 몸이 움직였다. 테레사는 디트리히를 잡아채 뒤로 당겼다. 그 반동으로 그녀의 몸이 돌아 일그러진 공간에 닿았다.

“테…….”

밀쳐내져 주저앉은 디트리히는 그녀의 모습이 굴절된 허공에 삼켜지는 것을 보았다.

“테레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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