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을 든 꽃-201화 (201/211)

검을 든 꽃 외전 2-3화

그녀의 말이 옳았다. 유리엔 역시 같은 판단을 내렸었다. 에키네시아가 임신 중만 아니었다면, 그는 랑테와 악튜크 중 한 곳을 그녀에게 맡겼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그럴 수 없었다. 그러고 싶지 않았다.

에키는 유리엔이 하얗게 질려서는 고집스레 입술을 다무는 것을 보고 옅은 한숨을 쉬었다.

“자꾸 그러면 악튜크에 제가 갈 거예요.”

“안 된다, 그것만은!”

유리엔은 사색이 되어 고개를 저었다. 눈동자가 젖어들며 떨렸다. 랑테보다는 몰살당했던 악튜크가 결절이 생길 확률이 높았다. 물론 어디까지나 확률일 뿐, 결절은 신검 라키아기오사의 마음대로 생겨나는 것이긴 하지만.

에키는 재차 한숨을 쉬고 발치에 앉아 있던 그를 일으켰다.

“이거 봐요, 당신 정말 울 것 같잖아. 그러니까 랑테로 가겠다는 거예요.”

“하지만…….”

“만약을 대비해서 가는 것뿐이에요. 랑테보다는 악튜크가 위험하니까, 율이야말로 조심해요.”

그녀가 딱 잘라 말하고는 유리엔을 잡아당겼다. 쉽사리 당겨진 그가 그녀의 곁에 누웠다. 나란히 누운 유리엔은 그녀에게로 팔을 뻗었다.

울 것 같은 표정을 지었는데도 넘어오지 않았으니, 무슨 말을 하든 에키네시아는 랑테로 갈 거다.

‘차라리 말하지 말 걸 그랬나.’

잠시 후회했다가, 다시는 숨기고 혼자 해결하려 하지 않기로 했던 것이 떠올랐다. 유리엔은 그 뒤로 그 결심을 어겨 본 적이 없었다. 어차피 그는 전부 설명했을 거고, 어떤 식으로 말하는 상황을 파악한 그녀는 나섰을 거다. 막을 방법이 없다는 판단이 서자 유리엔은 풀이 죽었다.

품에 파고드는 그녀를 감싸 안는 그의 팔이 떨고 있었다. 에키는 그의 가슴팍에 이마를 묻고 말했다.

“저도 조심할게요, 유리엔. 사고가 터지지 않는 한 절대 나서지 않고 쉬기만 할 테니까, 걱정하지 말아요.”

“……테레사 경도 함께 보내겠다.”

솔직한 심정으로는 유리엔 쪽으로 테레사 경이 갔으면 했지만, 그 편이 균형적으로도 나을 테지만, 그녀는 잠자코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자신을 믿지 못해서 이러는 게 아니라는 걸 잘 알고 있으므로.

유리엔은 그녀의 머리를 팔로 받치고 다른 팔로 허리를 안으며 속삭였다.

“집사도, 데려가고.”

“던컨을요?”

“없는 것보다는 낫겠지.”

“율은 던컨한테 평이 박해요. 집사로 삼겠다고 할 때도 별로 안 좋아하더니. 쐐기 출신이라 그런가?”

“아니…….”

그가 말끝을 흐리며 고개를 숙였다. 흘러내린 그녀의 머리카락을 걷어 정리해 주며 드러난 이마에 꾹 입술을 누른다. 긴 손가락들이 귓가를 어루만지고 뺨의 선을 따라 내려가는 동안, 이마를 눌렀던 입술은 눈가를 더듬고 코끝에 닿았다가 뺨을 스쳤다.

사랑스러워서 떨리고, 떨려서 가슴이 뛰고, 가슴이 뛰어서 견딜 수가 없어 튀어나오는 몸짓들. 그 속에서 걱정과 불안이 묻어나고 있었다. 안심하라는 뜻으로 그녀가 눈매를 접으며 웃자 그의 시선이 홀린 듯이 와 닿았다.

‘넋을 놓는 일이 어째 줄어들지를 않네.’

유리엔은 여전히 예쁘다는 찬사보다도 적나라한 표정과 눈빛으로 그녀를 보곤 한다. 그게 싫지 않았다. 그녀는 웃는 얼굴로 그의 품에 기대어 눈을 감았다.

* * *

창천기사단에서 꾸려진 두 개의 토벌대는 동시에 출발했다.

창천기사단장 유리엔 스타티스가 이끄는 토벌대는 북부의 악튜크로, 기오사 오너 에키네시아 스타티스와 테레사 폰 프랑 알마리가 이끄는 토벌대는 남부의 랑테로 향했다. 아젠카에는 부단장 바론 틸리어스가 남았다.

출발하기 전 유리엔은 현자 칼리스토로부터 마도구를 받아갔다. 목적지가 랑테로 지정된 이동마법이 새겨진 물건으로, 여차하면 바로 그녀 곁에 가기 위해서였다. 에키는 과한 준비라고 생각했지만 말리지는 않았다.

열차에서 마차로 갈아탄 후 밤늦게 랑테에 도착한 토벌대는 별장 중에 한 곳을 빌려 캠프를 꾸렸다.

“단장님께서 여러모로 고생이 많으시군요.”

스콰이어로서 동행한 앨리스 윈터벨이 한숨 섞인 어조로 말했다. 마법가방을 들고 들어오던 던컨이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래도 그렇지요. 아가씨 때문에 신경줄이 남아나시질 않을 듯합니다.”

“지금 나 들으라고 하는 소리지, 둘 다?”

에키가 눈썹을 치켜 올리며 묻자 던컨이 딴청을 피웠다. 앨리스는 던컨이 내려놓은 가방을 열어 에키의 짐을 정리하면서 대꾸했다.

“아시면 좀 자제하시는 게 어떻습니까, 로드. 쉬기만 하시는 건 바라지도 않습니다만, 바질리스크 둥지가 있을 거라 추정되는 곳까지 오는 건 너무하지 않습니까?”

“애초에 난 지켜보기만 할 거라니까. 나한테는 그것들이 위험하지도 않은데. 다들 너무 걱정이 많아.”

“아무리 강하다고 해도 몸이 강철로 만들어진 것도 아니고, 심지어 임신 중이시잖습니까. 걱정하는 것도 당연하지요.”

“내 몸 상태는 내가 아는 걸. 괜찮아.”

“글쎄요, 로드께서 언제 아프면 아프다, 힘들면 힘들다 말을 하셨어야지요.”

그리 말하며 에키를 흘깃 보는 앨리스의 눈빛이 제법 날카로웠다. 아니라고 항변하려던 에키는 찔리는 게 있어 입을 다물고 말았다.

[주인아, 쟤 작년 일 때문에 저러는 거야? 여름 거? 아님 가을 거?]

작년 여름, 에키는 몸살 기운으로 열이 있는 것을 감추고 임무를 수행했다. 귀환할 때까지 아무도 몰랐으나 마중을 나왔던 유리엔이 알아채고 화를 냈다. 임무 내내 그녀를 시중들면서도 그녀의 열을 전혀 모르고 있었던 앨리스는 뒤늦게 충격을 받았었다. 그 뒤 가을 즈음에는 부러진 다리를 마나로 지탱하면서 숨기다가 앨리스에게 들키기도 했다.

여전히 에키는 아프거나 힘든 것을 티 내지 않고 홀로 해결하려는 습관이 남아 있었다. 그런 습관들이 쉽게 사라지기에는 혼자 떠돈 세월이 너무 길었던 탓이다. 룸메이트였던 시절에도 비슷한 전적이 있었으니, 결국 앨리스는 점점 깐깐해질 수밖에 없었다.

“……둘 다겠지…….”

그녀는 마검에게 조그맣게 대답하고는 아직 정리되지 않은 상자에 손을 뻗었다. 닿기 직전에 상자가 쑥 당겨졌다. 상자를 든 앨리스가 딱 잘라 말했다.

“열차에 마차까지 타셨으니, 좀 쉬십시오.”

“별로 안 피곤…….”

“로드 말은 안 믿습니다. 그리고 설사 로드께서 괜찮다고 해도, 아기는 피곤할 겁니다.”

할 말이 없어진 에키가 입을 다물었다. 얌전히 침대에 들어가는 수밖에 없었다. 던컨은 속이 후련하다는 표정으로 저녁 식사를 가져다주었다.

* * *

랑테 토벌대의 실질적인 지휘는 테레사 폰 프랑 알마리가 맡았다. 실력상 우위에 있는 에키네시아가 맡는 것이 원칙이었으나, 임산부인 그녀는 위급 시에만 나서기로 결정된 탓이었다. 이번 토벌 계획은 에키네시아의 전력을 배제한 상태로 짜여졌다.

바질리스크는 거대한 뱀의 형상을 한 마물이었다. 피와 체액, 내뱉는 숨결마저 지독한 독이며, 눈에는 저주가 깃들어 시선이 마주친 생물을 돌로 만들어 버린다.

매우 위험한 마물로 분류되지만 상대하기 불가능한 수준은 아니었다. 비늘이 단단하긴 해도 기술만 있다면 보통 검으로도 벨 수 있어서 마스터급 기사가 아니라도 처리 가능했다. 해독주문과 거울, 그리고 정면으로 보지 않고도 싸울 수 있는 실력이 필요했지만 말이다.

물론 눈을 감고도 마나로 움직임을 감지할 수 있는 마스터는 훨씬 쉽게 바질리스크를 상대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랑테가 위험한 이유는 장소가 방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은 데다 숨을 곳이 많은 휴양지의 숲이라는 점, 그리고 바질리스크가 한 마리가 아니라 군락을 이루고 둥지에 알을 낳아둔 상태라는 점 때문이었다.

의뢰를 받고 선행 조사를 나갔던 창천의 정보원은 둥지에 30마리 이상의 바실리스크가 있다고 추정했다.

‘그래봤자 마스터가 열 명에 기오사 오너까지 온 마당이다. 변수가 생길 확률은 낮아.’

디트리히 사루아는 검을 고쳐 쥐며 생각했다.

위험한 임무에는 동행시키지 않는 사관생도들까지 임시 스콰이어로 따라왔다. 독과 석화저주라는 위험 때문에 전투까지 따라오지는 않았지만, 그들이 보조로 동행했다는 것 자체가 이번 임무가 그리 어렵지 않다는 증거였다.

‘그럼 왜 굳이 에키네시아 경이 온 걸까.’

어렵지 않은 임무인데, 비상시에만 나서기로 하면서까지 임신 중인 에키네시아 스타티스가 토벌대에 합류했다.

‘대체 왜? 설마, 여기에 결절이 발생할 수도 있다고 예측한 건가? 진짜로? 무슨 결절 예보기도 아니고…….’

“디트리히 사루아!”

생각에 잠긴 채 고개를 돌리는 순간에 날카로운 외침이 들려왔다. 동시에 누군가가 그의 눈가를 손으로 덮으며 뒤쪽으로 확 잡아당겼다.

“죽고 싶나? 어딜 함부로 보는 거냐, 멍청한 놈”

귓가에 이를 가는 음성이 들려왔다. 곧이어 그는 거칠게 밀쳐졌다. 쉼 없는 훈련 덕분에 용케 나동그라지지는 않았다. 디트리히는 겨우 자세를 바로잡고 제 앞을 가로막은 등을 바라보았다. 보통 여자에 비하면 탄탄하지만, 그래도 그보다 좁은 어깨에 키도 작은 여자의 등. 올려 묶은 금발이 나부끼며 푸른 검이 허공을 갈랐다.

캬아아악!

튀어나왔던 바질리스크의 머리가 잘려 풀숲 사이로 데굴데굴 굴러갔다. 쏟아진 피를 맞은 자작나무가 급속도로 시들었다. 그녀나 그녀의 뒤에 있는 디트리히 쪽으로는 피가 한 방울도 튀지 않았다. 독이나 다름없는 피들이 튀는 방향까지 고려한 깔끔한 일격이었다.

“……테레사 경.”

“자살하고 싶으면 임무가 끝나고 나서 내가 안 보는 곳에서 시도해라. 자살하려는 게 아니면 전장에서, 그것도 바질리스크를 상대로 한눈파는 짓은 하지 말도록.”

싸늘하게 쏘아붙인 테레사가 디몽기오사를 쥔 채 다른 부대로 이동했다. 멀거니 그 뒷모습을 보는 디트리히의 어깨를 누군가가 두들겼다. 그가 소속된 부대의 기사 그레고리였다.

“미안하군, 디트리히 경. 옆에서 바질리스크가 튀어나올 줄이야.”

시선을 마주했다간 돌이 되어버리므로 준기사들은 거울을 든 채 아래만 보며 걷고, 앞장 선 마스터들이 접근하는 바질리스크의 방향을 알려주고 있었다. 그러다 바질리스크와 마주치면, 기사가 눈을 감고 마나로 기척을 감지하며 싸우는 사이, 준기사들은 거울로 보면서 해독주문이 새겨진 마도구를 사용하여 기사를 보조하는 식으로 전투를 진행하는 중이었다.

따라서 그레고리가 바질리스크의 접근을 알려주지 못한 것은 확실히 실수였다. 하지만 생각에 빠져서 무심코 에키네시아가 있을 방향을 돌아본 디트리히도 큰 실수를 저질렀다. 정신을 차린 디트리하는 급히 경례를 했다.

“아닙니다, 제가 방심했습니다.”

“아니, 내가 먼저 감지했어야 했다. 그 거리에 있던 테레사 경보다 늦다니.”

그레고리는 나이가 많았지만 마스터였기에 고작 서른 초반으로 보였다. 고개를 저은 그가 멀어지는 테레사의 뒷모습을 흘깃 보더니 중얼거렸다.

“꽤 멀었는데, 어떻게 알아채고 여기까지 오셨지?”

“줄곧 절 보고 계셔서 그레고리 경보다도 빨리 알아채셨나 봅니다.”

“경을 왜?”

“그러게요, 왜일까요? 역시 저한테 관심이 있으신 게 아닐까요?”

놀람이 가신 디트리히가 유들유들 대꾸하는 말에, 그레고리가 인상을 썼다.

“테레사 경이 왜 자네만 보면 눈살을 찌푸리는지 알겠군. 그렇게 미움받아도 괜찮은가?”

“테레사 경은 저를 싫어하지 않으십니다.”

“그걸 자네가 어떻게 아나?”

“물어봤습니다.”

“……고백했단 소린가?”

디트리히가 테레사를 마음에 두고 있다는 건 알 사람은 다 알았다. 워낙 티를 내고 다니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아뇨, 고백은 아직 안 했습니다. 마스터가 되면 할 예정입니다.”

“언제 마스터가 될 줄 알고?”

“그레고리 경께서도 저번에 대련하실 때 제게 곧 마스터가 될 것 같다고 하셨잖습니까? 그러니 얼마 남지 않았겠지요.”

그레고리는 기가 차다는 듯 디트리히를 바라보았다. 빙글빙글 웃는 반반한 얼굴을 뚫어져라 보던 기사가 픽 웃으며 돌아섰다.

“뭐, 젊은이는 그런 패기가 있어야지. 힘내게.”

“감사합니다.”

잠시 정지했던 그레고리의 부대가 다시 이동하기 시작했다. 디트리히는 잡생각을 묻어두고 우선 전투에 집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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