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을 든 꽃 외전 2-2화
‘그때는 진짜 개새낀 줄 알았는데.’
디트리히는 나중에서야 유리엔이 했던 말이 조롱이 아니라 자조적인 진심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유리엔의 성장 과정을 알게 된 후에야 말이다.
물론 알게 되었다고 해서 그 시절의 유리엔이 빌어먹을 자식이 아니라는 뜻은 아니다. 사정이 어땠건 그때의 유리엔은 재수 없는 놈이었다.
사교성도 없고 예민한데다 원리원칙은 어찌나 따져대는지 규칙을 어기면 죽는 줄 아는 게 아닌가 싶었다. 사람에 대한 신뢰가 없어서 무슨 반응이든 부정적으로 받아들여서 피곤하기까지 했다.
예를 들어, 유리엔에게 왔던 편지를 그가 없는 사이 디트리히가 받아둔 적이 있었다. 물론 디트리히는 룸메이트의 편지에 관심이 없었다. 대충 놔뒀다가 그가 오자마자 편지 왔다고 줬을 뿐이다.
그러나 유리엔은 당연히 디트리히가 편지를 보았을 거라 가정했고, 편지의 내용으로 소문을 퍼뜨리거나 협박을 할 거라고 판단하고 각오를 했다. 디트리히가 유리엔이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는 걸 알게 된 건 무려 반년이나 지난 후였다.
〈미친놈, 그 정도면 피해망상이야. 날 그렇게 쓰레기 같은 놈이라고 여겼냐?〉
그 날도 디트리히는 유리엔과 한바탕 주먹질을 했었다. 더 황당한 것은, 당연히 그렇게 했을 거라 생각하면서도 유리엔이 디트리히를 싫어하거나 꺼려하지는 않았다는 점이었다. 피해망상 있냐고 욕을 하며 싸우긴 했지만 사실 피해망상이라기보다는 타인에게 아무런 기대를 하지 않는 거였다. 제대로 된 애정이나 신뢰를 느껴보지 못해서, 사람 사이의 관계라는 게 원래 그러려니 했단 소리다.
그러니 사관생도로서 함께 임무에 나갔을 때, 디트리히가 제가 다쳐가면서 자신을 도와준 것에 그렇게 충격을 받은 거다.
〈왜 날 도왔지?〉
〈그럼, 눈앞에서 죽게 내버려 두리? 얼굴 아는 놈이 그렇게 죽으면 꿈자리 사나워져.〉
디트리히 입장에서는 아무리 허구한날 싸우는 룸메이트라고 해도 죽게 내버려 둘 수 없었을 뿐이었다. 살리려 하면 자기가 죽을 상황이었다면 모를까, 그 정도로 위험한 건 또 아니었으니까.
그때부터 서서히, 그들은 친구가 되었다. 그 날 이후로도 꽤 많이 싸웠었지만.
‘뭐, 나라고 멀쩡했던 건 아니지. 하늘이 얼마나 높은지도 몰랐고…….’
높아지면 높아질수록 부는 바람도 거세진다는 것 역시 몰랐다. 신분이 높은 사람이면 다 편히 사는 생각 없는 놈들일 거라 여겼고, 자신이 가장 특별하다고 믿었으니까.
벌써 10년이 넘은 일이다. 지금의 디트리히는 검술재능 하나로 후원을 받아 창천에 들어온 자신 같은 사람이 의외로 많다는 것을 안다. 천재들이 모인 곳에서도 빛나는 천재가 따로 있다는 것도 알고, 그중에서도 가장 뛰어난 자인 유리엔이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도 알며, 높은 곳에 오를수록 짊어지는 무게가 늘어난다는 것도 안다.
‘아니까, 더 오르고 싶어.’
저절로 빛나는 천재가 아니더라도, 더 많은 것을 짊어지게 되더라도, 더 높은 곳으로 향하고 싶었다. 막연한 야망은 세월이 흐리고 그 높은 곳이 어떤 곳인지를 알게 되면서 보다 구체적인 열망이 되었다. 목 안쪽에서 넘실거리는 불길 같은 열망.
마스터. 그리고 기오사 오너. 친구가 자신에게 의지할 수 있을 만한 높이. ‘그녀’에게 닿을 수 있는 높이.
손가락 사이로 보이는 붉은 눈동자가 깊게 이글거렸다. 무슨 수를 써서는 그 자리에 도달하고 싶었다. 강해지고 싶었다.
좀 더 저열한 성품이었다면, 그는 더러운 짓도 서슴지 않는 인간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이안 펠레트로나 전 디아상트 공작처럼 말이다. 혹은 그가 탐하는 것이 순수한 실력으로 오를 수 있는 높이가 아니라 권력이었다면 완전히 다른 길을 걸었을 수도 있다.
그렇지 않기에 그는 그저 검을 쥔다. 아무것도 탐나는 것이 없어서 검을 쥐었던 친구와 달리, 불길 같은 탐욕으로 쥐는 검이었다. 근원은 달라도 삶에서 검을 빼면 별로 남는 게 없다는 점은 비슷했다. 그래서 친해질 수 있었다.
유리엔에게는 이제 검보다 소중한 것이 생겼으나, 디트리히는 여전히 검이 삶의 중심이었다. 만일 검을 다시는 잡지 못하게 된다 하더라도 유리엔은 에키네시아를 택하겠지만, 디트리히는 테레사를 사랑하면서도 그럴 수는 없었다.
그는 쓴웃음을 지었다.
“어차피 검이 아니었다면 그녀를 쳐다볼 수도 없는 신분인데 뭘.”
깊게 숨을 토해 내고 몇 차례 얼굴을 문지르자 평소처럼 가벼운 낯이 되었다. 디트리히는 느긋한 걸음으로 대신전으로 향했다.
* * *
“랑테와 악튜크요?”
에키네시아는 젖은 머리카락을 닦으며 되물었다. 유리엔이 그녀에게로 다가와 자연스럽게 수건을 빼앗아 들었다. 에키는 그의 손길에 머리카락을 맡긴 채 눈을 감았다.
“그래, 같은 날, 거의 비슷한 시간에 일어났던 일이었다. 1631년 봄, 북부 악튜크의 서리거인 출현, 그리고 휴양지 랑테의 바질리스크 둥지 발생.”
“아, 서리거인 이야기는 저도 들어봤어요. 북부에 있는 얼어붙은 마을 말이죠? 그게 생겨난 게 이 시기였어요?”
“얼어붙은 마을? 후일에는 그렇게 불리게 되었나.”
“갑자기 서리거인 무리가 나타나는 바람에 마을 하나가 통째로 얼어붙은 사건 아니에요?”
“맞다.”
“어쩌다 그렇게 된 거예요?”
“악튜크 근처에 마물 소굴이 하나 있었다. 처음에는 나타나는 마물 수준이 높지 않았지. 마을의 자경대로도 막을 수 있을 정도로 말이다. 때문에 왕국의 토벌 우선순위에서 밀린 상태였는데, 실종자가 자꾸 생겨서 영주가 자체적으로 토벌대를 보냈다.”
“그 토벌대가 돌아오지 않았겠군요.”
“그래. 뒤이어 왕국에서 보낸 기사들마저 실종되었다.”
“그래서 창천기사단에 의뢰가 들어온 건가요?”
“그렇다.”
유리엔이 무겁게 답했다. 그녀의 머리카락을 닦아내던 그의 손이 이어지는 말을 따라 점점 느려졌다.
“보고서는 그리 심각해 보이지 않았다. 트롤 정도의 마물로 짐작된다는 내용이었다. 그래서 기사 한 명만 보냈다. 그리고 나는 바질리스크의 둥지가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는 랑테로 향했다.”
유리엔의 손이 결국 멈췄다. 에키는 일이 어떻게 된 것인지 짐작했다.
지워진 과거, 창천기사단에 두 개의 의뢰가 들어왔다. 유리엔은 더 위험해 보이는 랑테에 출정하면서 악튜크에는 기사 하나만 보냈다. 그 결과 악튜크는 얼어붙은 마을이 되어버렸다. 마스터급 기사 한 명이 서리거인 무리와 마주쳤다면 살아남을 수는 있어도 막는 것은 불가능했을 터다.
바질리스크나 서리거인은 전혀 다른 종류의 마물이지만, 혼자서도 강한 것들이 몰려다니기까지 한다는 공통점이 있었다. 그래서 극도로 위험한 마물로 분류되었다.
에키는 뒤를 흘깃 돌아보았다. 유리엔은 무표정한 얼굴이었지만 그녀는 그의 심경을 알아차렸다. 그의 선택에 의해 갈린, 구해내지 못한 곳과 구해낸 곳.
“……거라도 그랬을 거예요. 바질리스크는 정말 위험하잖아요. 랑테는 숲속에 외딴 별장들이 많은 휴양지라 방어에도 취약하고. 악튜크에 서리거인의 흔적이 있었던 것도 아닌데 그걸 어떻게 미리 예상해요.”
“그래도, 좀 더 신중했어야 했다. 토벌대의 시체조차 발견되지 않았다는 보고를 들었을 때…….”
“유리엔.”
에키가 돌아앉았다. 그녀는 유리엔의 뺨을 양손으로 붙잡고 아래로 당겼다. 눈을 내리깔고 있던 그가 그녀와 눈을 마주했다. 그녀가 웃었다.
“이번엔 양쪽 다 구할 수 있잖아요. 그렇죠?”
눈부신 미소였다. 가슴팍이 삐걱거릴 정도로. 유리엔은 그녀의 턱을 감싸 들었다.
“……그래, 그대 덕분에.”
부드럽게 입술이 맞물리고 온화한 숨이 오갔다. 그는 접촉이 자연히 욕망 어린 열기로 넘어가려는 것을 참으며 입 술을 떼었다.
1년쯤 지나면 좀 익숙해지지 않을까 싶었는데 닿으면 닿을수록 더 어지럽기만 했다. 늘어난 것은 자제심뿐이었다. 그는 능숙하게 욕망을 누르고 그녀의 뺨에 다정한 입맞춤을 남기며 물러났다.
에키는 수건을 든 그의 손에 가만히 머리를 기댔다.
“마저 말려줘요. 그리고 랑테랑 악튜크에서 있었던 일, 좀 더 자세히 듣고 싶어요.”
그녀의 머리를 마저 말리면서, 유리엔은 두 장소에서 동시에 일어났던 사건에 대해 조곤조곤 설명했다. 그리고 에키는 폐허가 된 얼어붙은 마을에 대해 아는 대로 알려주었다.
유리엔의 기억은 1632년까지, 창천기사단장인 만큼 상세하고 핵심적이었다. 에키네시아의 기억은 1644년까지, 떠돌며 주워들은 것들이라 흐릿하고 중구난방이었지만 더 먼 미래였고 범위가 넓었다.
많은 것이 바뀐 터라 지워진 과거와 비슷하게 흘러가리란 보장이 없지만, 어쨌든 그들은 아는 사건 중에 막을 수 있는 것들은 막기로 결정했었다. 설령 그로 인해 결절이 발생할지라도 상관없었다. 그들에게는 충분한 힘이 있으므로. 그러니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머리가 다 마르자 유리엔은 가볍게 그녀를 안아 올렸다. 침대에 편히 기대도록 베개를 받쳐주고는 향유를 가져왔다. 그가 그것으로 그녀의 발을 마사지하기 시작했다. 에키는 자연스럽게 그에게 발을 맡겼다. 처음에는 기겁했는데 유리엔이 또 뭘 보고 배워 왔는지 임산부에게 좋다며 강경하게 해야 한다고 주장해서 어쩔 수 없었다.
그리고 그가 마사지마저 잘하는 바람에 몇 달 만에 완전히 익숙해져 버렸다. 낮고 부드럽게 이어지는 유리엔의 음성과 크고 단단한 손이 발을 어루만지는 감각에 전신이 노곤해졌다.
‘잠들 것 같아…….’
아기가 생긴 후 확실히 잠이 늘었다. 에키는 반쯤 눈을 감은 채 바질리스크 둥지 토벌 과정을 듣다가 툭 물었다.
“율은 이번에 둘 중 어느 쪽으로 갈 거예요?”
“아무래도 바질리스크는 처리하며 얻었던 정보가 있으니 다른 이들에게 맡기고, 나는 서리거인이 나온 쪽으로 갈 생각이다. 이번엔 반드시 막아야겠지.”
“그럼 제가 랑테로 갈게요.”
“……!”
유리엔이 삽시간에 창백해져서는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그 표정을 보니 잠이 확 깼다. 에키는 그의 손 안에서 발을 빼내고 상체를 일으켰다. 그녀의 입가에 짓궂은 미소가 떠올랐다.
“설마 절 빼놓을 생각이었어요? 이런 중요한 임무에 저처럼 유능하고 강한 기사를 놀게 두려고요, 단장님?”
“하, 하지만, 그대는, 홑몸도 아니고…….”
“초기는 지났잖아요. 그렇다고 움직이기 힘들 정도도 아니고. 율, 저 못 믿어요?”
“믿지 못한다는 뜻이 아니라는 것을 그대도 알고 있지 않나. 나는 그저, 적어도 임신기간 중에는 그대가 편히 쉬기만 했으면 좋겠어서……. 갈 만한 기사가 없는 것도 아니고. 랑테에는 테레사 경을 보낼 생각이니, 그대는 제발 아젠카에서 쉬어다오.”
유리엔이 애원하다시피 말을 쏟아냈다. 에키는 거의 울상이 되어버린 그를 빤히 응시하다가 말했다.
“공간검 라키아기오사는 시간검 카이로스기오사로 인한 변화를 따라다니는 경향이 있죠. 당신과 저는 그것을 이미 몇 번 겪었고, 결론을 내렸어요.”
“…….”
“살았을 사람이 죽게 되는 것보다, 죽었어야 할 사람을 살리는 것이 더 큰 변화이며, 결절이 발생할 확률이 더 높다.”
“…….”
“물론 카이로스기오사에게 기적을 약속받은 당사자, 그러니까 제 손에 죽었던 사람이 살아남는 건 예외 같지만요. 하지만 악튜크나 랑테의 사람들은 제게 죽었던 자들이 아니고, 마을 단위로 살아남게 되니까…….”
“……아마도 확실히, 결절이 생기겠지.”
침묵하던 유리엔이 내키지 않는 어조로 그녀의 말을 받았다. 에키가 끄덕였다.
“네, 그래서 율이 직접 가려는 거잖아요. 결절이 생기면 아무리 마스터라 해도 생사를 장담할 수 없지만, 당신과 저는 결절에 익숙한 제니스니까. 그러니 우리가 두 곳을 나눠 가야죠.”
“랑테는 과거에도 별로 피해가 나오지 않았던 곳이다. 그러니 결절이 생길 확률이 낮아. 테레사 경이라면 충분할 거다.”
“사망자가 없었던 건 아니라면서요. 하지만 이번엔 둥지 위치도 알고, 마물이 어느 정도일지도 알고, 어떻게 토벌해야 될지도 알아요. 당신이 전부 알려줄 테니까. 그럼 아무도 안 죽을 걸요. 죽었어야 할 사람이 살게 된다고요.”
“그때와는 양상이 달라질지도 모른다. 많은 것이 바뀌었으니까.”
“그래도 확실한 건, 과거만큼 많은 희생자가 나오진 않는다는 거잖아요. 결절이 생길 수도 있어요. 그러니까 제가 가야 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