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을 든 꽃-199화 (199/211)

검을 든 꽃 외전 2-1화

외전 2. 1631년 봄

신력 1631년, 봄, 아젠카.

“랑테와 악튜크? 여긴 왜 조사시킨 거냐? 하나는 앙투아르 왕국이고 하나는 북부잖아?”

디트리히 사루아가 단장실로 들어오며 말했다. 그의 손에서 서류 몇 장이 팔랑거렸다. 유리엔이 미간을 찌푸렸다.

“디트, 보고서를 가로채지 말라고 내가…….”

말을 이어가던 그가 돌연 입을 막으며 고개를 돌렸다. 솟구친 헛구역질을 참느라 그의 어깨가 들썩였다.

“사무관이 단장실 가는 길이면 전해달라기에 들고 온 거라고. 극비도 아닌데 뭘.”

디트리히는 책상 위에 서류를 내려놓으며 유리엔을 쳐다보았다. 창백해진 친구의 얼굴을 본 그는 어이없다는 어조로 물었다.

“너 아직도 입덧하냐?”

“…….”

유리엔은 말없이 준비되어 있던 생강차를 마셨다. 디트리히가 혀를 차고는 소파에 아무렇게나 걸터앉았다.

“내가 진짜, 아내가 임신했는데 남편이 입덧하기도 한다는 건 네 덕에 처음 알았다. 자식아.”

[그러게 말이다.]

디트리히의 중얼거림과 성검의 허탈한 음성이 연달아 들려왔다. 유리엔은 못 들은 척하며 생강차를 한 모금 더 들이키고는 서류를 잡아당겼다. 소파에 눕다시피 늘어진 디트리히가 고개를 들고 그를 보았다.

“야, 정작 에키네시아 경은 입덧 사라졌다며?”

“그래, 그러잖아도 힘들 텐데 입덧이라도 사라져서 다행이다.”

유리엔이 안도감으로 풀어진 낯으로 말했다. 표정과 달리 그의 안색은 여전히 파리했다.

“에키네시아 경이 힘들다고……?”

디트리히는 떨떠름하게 대꾸하며 어제 지나가다가 연무장에서 봤던 대련을 떠올렸다.

기사 세 명이 에키네시아 스타티스에게 작살이 나고 있었다. 슬슬 배가 커져서 제복이 불편하다며 하늘거리는 레이스를 몇 겹 드리운 엠파이어 드레스를 걸친 임산부에게, 창천의 정식기사들이 말이다.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거지?”

유리엔의 눈빛이 살을 저밀 듯이 서늘해졌다. 여기서 에키네시아 경은 건강하다 못해 체력이 넘쳐 보이던데, 라는 소리를 했다간 끝장이다. 디트리히는 얼른 고개를 저었다.

“아니, 에키네시아 경이 힘들겠다고.”

“당연한 소릴 하는군.”

유리엔은 그제야 침착해져서 서류로 눈을 돌렸다.

‘아무리 봐도 에키네시아 경보다 저놈의 안색이 더 나빠 보이는데. 저거 식사는 제대로 하고 있는 건지.’

디트리히는 한숨을 쉬고 턱을 괴었다. 친구의 등 뒤 책장 한 칸을 꽉 채우고 있는 임신육아 관련 서적들이 오늘따라 유난히 눈에 띄었다.

‘뭐, 초기에 비해선 낫나. 그땐 난리도 아니었지…….’

유리엔이 에키네시아의 임신을 알게 되었을 때 디트리히도 그 자리에 있었다.

그날은 휴일이었고, 디트리히는 유리엔과 대련을 하고 있었다. 에키네시아가 갑자기 연무장에 들어오더니 그들 사이에 끼어들었다. 그러고는 디트리히의 검을 맨손으로 가볍게 잡아 멈춰버렸다.

〈미안해, 디트리히 경. 잠시만 실례할게.〉

나름 회심의 공격이었는데 애들 장난처럼 맨손에 붙잡히다니. 소소하게 충격을 받은 그를 내버려 두고, 그녀는 들뜬 표정으로 유리엔을 향해 말했다.

〈유리엔, 우리 아기가 생겼대요.〉

유리엔은 눈이 커지고, 입이 벌어지고, 뻣뻣해진 채로 바보 같은 얼굴이 되었다. 디트리히는 맹세코 친구가 그런 낯을 하는 것을 본 적이 없었다. 객관적으로 보면 유리엔은 그런 표정으로도 잘생기다 못해 아름다운 수준이었지만, 디트리히가 보기에는 그저 못 볼 꼴에 불과했다.

유리엔이 한참을 그러고 있자 에키네시아가 그의 곁에 다가서며 속삭였다.

〈왜 그러고 있어요, 율. 기쁘지 않아요?〉

그녀의 물음에 유리엔이 정신을 차렸다. 그는 머리끝부터 목 아래까지 새빨갛게 붉어지며 더듬더듬 대답했다.

〈당연히, 기뻐서…… 믿기지가 않을 정도로……. 맙소사.〉

유리엔은 말을 하면서 비로소 지금 무슨 소식을 들었는지 자각하는 듯했다. 입을 틀어막으며 눈시울까지 붉어진다.

그 꼴을 보며 디트리히는 슬금슬금 뒤로 물러났다. 그의 친구는 입을 가린 채 맙소사, 세상에, 신이시여, 등등의 헛소릴 늘어놓더니 곧 멍청해 보일 정도로 풀어진 웃음을 지으며 에키네시아를 끌어안았다. 그녀는 활짝 웃으며 그에게 안겨들었다.

디트리히는 순식간에 둘만의 세계를 만드는 남녀를 피해 도망쳤었다. 이제 제법 익숙해졌다고 생각할 때쯤 더한 모습을 보여주는 부부였다.

그 뒤는 물론 예상한 것보다 더한 나날들의 연속이었다. 디트리히는 유리엔이 백여 권에 달하는 임신 육아 서적을 읽어치우는 걸 봐야 했다. 대륙에서 가장 강한 검사인 에키네시아 스타티스를 실바람에도 흔들리는 꽃송이인 양 싸고 도는 꼴도 봐야 했다. 전에도 지극정성이다 싶었는데 그게 유리엔의 한계치가 아니었다는 사실도 강제로 깨달아야 했다.

그러다 결국 에키네시아는 별로 심하지도 않은 입덧을 유리엔이 세 배는 호되게 겪는 꼴마저 봤다. 심지어 그녀에게 사라진 입덧이 그에게는 더 길게 지속되고 있었다. 제 친구지만 아주 징글징글했다.

[저 녀석은 아직도 너한테 적응을 못 하는군. 이쯤이면 뭘 보든 그러려니 할 때가 되지 않았나?]

디트리히가 할 말이 가득한 표정으로 유리엔을 보고 있자, 성검이 모든 것을 내려놓은 어조로 중얼댔다. 유리엔은 대꾸 없이 서류를 넘기다가 한 차례 더 헛구역질을 했다. 디트리히가 이마를 감싸 쥐는 것과 동시에 성검의 한숨이 들려왔다. 유리엔이 화제를 돌리듯 말을 꺼냈다.

“디트, 혹시 랑테나 악튜크에 대해 아는 것이 있나?”

“글쎄, 내가 아는 거라 해봐야 별거 없는데.”

디트리히는 어깨를 으쓱이고는 말을 이었다.

“랑테는 앙투아르 왕국 휴양지잖아. 멋진 자작나무숲으로 유명하다는 거? 그 정도만 알지.”

“악튜크는?”

“악튜크는 처음 들어. 아까 보고서 보니까 북부 구석에 있는 콩알만 한 마을이던데. 근처에 마물 소굴이 생겼지만 그리 심각한 것 같진 않고.”

“그렇군. 모르는 곳들이면 되었다.”

“요새 네가 이런 식으로 굴면 꼭 그 동네에서 뭔가 일이 터지더라. 이번엔 뭔데?”

날카로운 질문이었다. 지워진 과거에 큰 사고가 터졌던 곳들이라고는 차마 말할 수가 없어서, 유리엔은 잠자코 서류만 팔락거렸다.

[주인, 정복검의 주인, 아니, 정복검의 주인이 될 자가 널 수상하게 쳐다보고 있다. 벌써 두 번이나 막았으니 의심스 럽겠지. 엘기오사 오너 건까지 치면 세 번 아니냐?]

“……디트, 슬슬 대신전 경비 교대 시간 아닌가?”

“어, 그래, 경비 서러 가야지.”

디트리히는 부스스 몸을 일으키고 문으로 다가갔다. 문고리를 잡은 채 그가 문득 입을 열었다.

“야, 율”

“……?”

“역시 나는 미덥지 않냐? 약해서?”

“뭐라고?”

“……아냐, 실언이다. 잊어.”

디트리히는 거칠게 제 머리를 헝클어뜨리고는 문을 쾅 닫았다. 그는 빠르게 걷다가 인적 없는 복도에 멈춰 섰다. 그러곤 손에 얼굴을 파묻었다.

“에이, 씨발, 쪽팔리게 뭔 소릴 지껄인 거야. 못미더운 게 당연하지.”

얼굴을 덮은 손가락 사이로 깊은 한숨이 새어 나왔다.

“나도 한때는 내가 세기의 천재인 줄 알았는데.”

디트리히 사루아.

빨간 머리라서 ‘진저’라고 불렸던, 앙투아르 뒷골목의 고아 소년은 오로지 검술에 대한 재능 하나로 귀족의 양자가 되어 새로운 이름까지 얻었다.

고작 나무작대기를 가지고 놀다가 사루아 남작가의 기사 눈에 띄고, 마침내 남작의 후원까지 받게 되었을 때, 진저는 자신이 다시없을 천재라고 생각했다. 남작이 연결해 준 또래들과 검을 맞대면서도 그 생각은 변하지 않았다. 전승이었으니까. 소년은 또래에게 패해 본 적이 없었다.

사루아 남작이 후원하는 소년은 진저 말고도 몇 더 있었다. 그러나 그중 진저가 가장 특별했다. 남작은 소년을 특별 취급하며 넌 창천의 기사가 될 인재라고 말하곤 했다. 진저를 가르치던 검술 사범도 그의 재능에 늘 혀를 내두르곤 했다.

〈너는 정말로 창천의 매가 될 아이다. 어쩌면 기오사 오너가 될지도 몰라. 그리되면 네 인생은 완전히 달라지겠지.〉

벌레 먹은 빵 한 조각 때문에 피가 터지게 싸우던 고아 시절과 귀족의 후원을 받으며 검을 익히는 지금만 해도 완전히 달라진 인생이었다. 진저는 이보다 더 높은 곳이 있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검술사범은 소년을 비웃으며 구름 위의 세계를 설명해 주었다.

진저는 자신에게는 까마득하게 높아 보이는 사루아 남작도 귀족들의 세계에서는 말단에 지나지 않고, 그 위로 왕족들이, 더 위에는 제국의 황족들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창천의 기사가 되면, 그들에게도 굽실거릴 필요가 없어. 거기에 기오사 오너라도 되는 날에는 누구도 너를 함부로 대할 수 없게 된다.〉

〈제, 제국의 황제라도요?〉

〈물론. 너 같은 고아 꼬맹이도, 이 검 한 자루면 그 높이로 기어올라 갈 수 있지. 가장 밑바닥에서 아득히 높은 곳까지 말이다. 말 그대로 하늘을 나는 매처럼.〉

〈아득히 높은 곳…….〉

악취가 풍기는 길바닥에 누워 올려다보던, 검고 어두운 건물의 뒷벽들 사이로 보이던 새파란 하늘. 그 하늘을 날던 매.

밑바닥에서 태어나 자랐어도 매와 같은 높이에 이르고 싶었다. 그것이 진저의 목표가 되었다. 자신은 그 높이에 오를 재능이 있었고, 재능을 꽃피울 환경을 얻는 운도 있었다. 남은 것은 노력뿐이다. 소년은 야망을 품었다.

진저는 18세가 되자마자 사관생도 선발시험에 응시하러 떠났다. 출발할 때 사루아 남작은 소년에게 새로운 이름을 주었다.

〈진저라니, 그런 이름을 기사의 이름으로 삼긴 그렇지. 이중에서 골라봐라.〉

하나같이 귀족적인 이름들이었다. 진저는 그중에서 디트리히라는 이름을 골랐다. 고대어로 높은 곳이라는 뜻의 이름. 그 이름이 가장 마음에 들었다. 그 날부터 소년은 디트리히 사루아가 되었다.

선발시험을 준비하는 내내 디트리히는 자신감에 차 있었다. 자신은 지금까지 사범 외에는 패배해 본 적이 없고, 보잘것없는 고아 출신인데도 재능 덕분에 귀족이 될 정도로 뛰어난 인재였다. 그리고 나름 최선을 다해 노력해 왔다.

‘곱게 자라면서 설렁설렁 검을 익힌 놈들이 내 상대가 될 리가 없어.’

그 오만은 응시생끼리 대련하는 1차 시험에서 박살이 났다.

상대는 눈부신 은발을 늘어뜨린 곱상한 소년이었다. 누가 봐도 귀한 신분이라는 티가 나는 도련님에게 디트리히는 압도적으로 깨졌다. 검을 맞대는 순간부터 격차가 느껴질 정도로 일방적인 대련이었다.

저게 진짜 천재구나.

깨달으면서도, 믿기지가 않았다. 그리고 억울했다.

〈억울하다는 눈빛이군. 뭐가 억울하지? 대련은 공정했다.〉

검을 거두며 은발의 소년이 물었다. 디트리히는 이를 갈며 내뱉었다.

〈공정한 대련? 그래, 대련은 공정했지. 그런데 뭐가 억울하냐고? 너처럼 고생 한 번 안 한 새끼는 영원히 모를 걸. 재능에, 신분에, 외모도 잘났으니 인생이 얼마나 쉽겠어, 씨발! 그 정도로 다 가졌으면 검술까지 잘할 필요는 없잖아!〉

소년은 알 수 없는 눈으로 디트리히를 내려다보다가 조용히 말했다.

〈그래, 검에 대한 재능은 없는 편이 나았겠지. 이런 건 필요 없었다.〉

〈뭐? 이 새끼가……!〉

하얗고 우아한 낯으로 지껄이는 소리가 재수 없다 못해 죽여버리고 싶을 정도였다. 그보다 뛰어난 실력을 가지고 있으면서, 이깟 것쯤은 필요 없다며 비웃는 것처럼 느껴졌다. 디트리히는 시험장이라는 것도 잊고 그 소년에게 주먹을 날렸다.

그게 유리엔 드 하르덴 키리에와 디트리히의 첫만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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