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을 든 꽃 외전 1-2화
유리엔은 이성을 유지하느라 바빠 그 서늘함을 알아채지 못했다.
“누구에게 들었다기보다는, 책에서 보았다.”
“책이요? 무슨 책인데요?”
“그냥, 별것 아니다.”
“무슨 책이기에 그런 얘기가 있어요? 제목이 뭐예요?”
“어쩌다 보게 된 거라 자, 잘 모른다.”
“어디서, 언제쯤 봤어요? 표지나 크기도 생각 안 나요?”
에키가 다그치자 유리엔의 낯이 점점 붉어졌다. 이리저리 대답을 피하던 그는 결국 귀끝까지 빨개진 채로 간신히 설명했다. 그가 털어놓은 이야기를 들은 에키는 어이가 없어 입을 벌렸다.
“……그, 그거랑 관련된 책에다 논문들까지 찾아보면서 공부했다고요? 서른 권 넘게?”
“그렇, 다.”
“책은 그렇다치고, 그, 그런 논문도 있어요? 대체 그런 건 어떻게 구한 거예요?”
“논문은 도서관에서, 그리고 책들은 뒷골목에서 구했다.”
저 고결한 사람이 뒷골목에서 그런 책들을 찾아다녔다고? 알아서 정체는 숨기고 다녔겠지만, 그래도 성검의 주인이……. 머리가 띵해지는 기분이었다. 그녀는 유리엔만큼이나 달아오른 얼굴이 되어 빽 소리쳤다.
“뭐, 뭘 그렇게 공부까지 하고 그래요! 이상한 편견까지 배웠잖아요!”
“……아플 수도 있다고 하니까.”
“네?”
“내 욕심으로 그대를 아프게 하고 싶지 않았다. 절대로. 그래서 배워야 했다.”
순간 말문이 막혔다. 에키는 고민도 하지 않고 있었던 지점이었다. 그러나 그녀를 보고 있는 그는 몹시 진지했다.
결혼식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초야에 여성은 통증만 느끼는 경우가 많다는 것을 처음 알았을 때, 유리엔은 굉장한 충격을 받았다. 밤일에 대해 그가 가진 지식이라곤 극히 기초적이고 생물학적인 수준에 불과했다. 그래서 전혀 몰랐다. 고통스럽다니. 생각해 보면 피가 나는 경우가 많다니까 당연한 일이긴 했다. 다만 유리엔에게 청천벽력이었다.
그 뒤 그는 미친 듯이 공부를 했다. 그러면서 자신이 몰랐던 것이 정말 많다는 현실을 깨달았다. 욕망에 비해 자신의 지식수준은 심각했다. 하마터면 배려 없이 제 욕심만 채울 뻔했다. 이쯤 되니 충동적으로 저지르려 했을 때 말려준 성검이 고마워지기까지 했다.
만일 아프지 않게 하는 것이 불가능했다면, 함께 밤을 보내는 것이 남성에게만 행복한 일이었다면, 유리엔은 욕망 따위는 아예 포기했을지도 모른다. 아이는 없어도 된다. 그녀가 웃는 얼굴로 그의 곁에 있기만 해도 충분했다.
천만다행으로 사랑하는 사람과 밤을 보낸다는 건 여성에게도 행복한 일이었다. 노력하기에 따라 초야에도 아프지지 않을 수 있다고 한다. 그래서 그는 더욱 최선을 다해 공부를 했다. 혼자서 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준비란 준비는 모조리 다 했다.
유리엔은 자신이 했던 고민들을 최대한 에둘러 말했다. 그럼에도 그 속에 자괴감에 죄책감에 심지어 자기혐오까지 곁들여져 있는 것이 느껴졌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 욕망만 느꼈던 스스로에 대한 혐오였다.
에키는 가만히 그의 고백을 들었다. 그런 고민을 했을 줄은 몰랐다. 그녀는 알고 있던 상식이었으나 신경도 쓰지 않고 있던 부분이기도 했다. 대부분 첫 밤은 그렇다지 않는가. 유리엔이 이렇게까지 고민하고 대비했을 줄은 짐작도 못했다. 어쩐지 유난히 긴장하더라니. 황당하기도 하고, 헛웃음이 나올 것 같기도 하고, 그러면서도 속이 묘하게 일렁였다.
“서툴어도 돼요.”
불쑥 나온 말에 그가 그녀를 본다. 그녀 자신보다도 그녀를 아끼고, 그녀 자신보다도 그녀를 소중하게 대하는 사람. 에키는 고개를 기울이며 덧붙였다.
“좀 아파도 되고요.”
그녀의 눈매가 부드럽게 휘어졌다. 귓가에 걸려 있던 머리카락이 기울어진 고개를 따라 흘러내려 목덜미로 떨어졌다. 그녀가 좀 더 깊어진 음성으로 속삭였다.
“당신이니까, 괜찮아요.”
어쩔 줄 모르고 있던 유리엔의 얼굴에서 천천히 표정이 사라졌다. 푸른 눈이 세상에 그녀 외에는 아무것도 없는 것처럼 그녀에게 고정되었다.
“저도 당신을 원하거든요. 저 역시, 당신을 가지고 싶어요. 당신만 욕망을 느끼는 게 아니라고요.”
에키가 웃으며 그에게 안겨 왔다. 부드러운 머리카락이 피부를 간질이고, 달콤한 향이 그를 뒤덮었다. 콧속으로 파고들어 뇌를 녹여버릴 듯한 향이다. 유리엔은 호흡을 멈췄다.
“그러니…….”
그녀는 더 말을 이을 수가 없었다.
갈급하게 입술이 닿아 왔다. 자제하지 못한 열기가 맞닿은 곳을 통해 넘어왔다. 그저 입맞춤인데 물거품 같은 것들이 속에서 마구잡이로 부풀어 오르는 듯했다. 어지러웠다.
간신히 받아넘기다 보니 몸이 들리고 곧 등이 푹신한 것에 닿았다. 겨우 입술이 떨어졌다. 에키는 혼곤해진 채 위를 올려다보았다. 그에게서 긴 은발이 흘러 떨어져 그녀의 위를 뒤덮었다.
“에키.”
그녀의 이름을 부르고, 그가 호흡을 골랐다. 어쩐지 그르렁거리는 것처럼 느껴지는 숨이었다.
“내가 혹여 실수를 하면, 망설이지 말고 밀어내라.”
“실수라뇨?”
그녀가 의아하게 되묻자 유리엔은 지그시 눈을 감았다. 느릿하게 떠지는 푸른 눈동자가 몹시 짙었다.
“지금 내가…….”
그는 설명하려 입을 떼었다가, 제 아래에서 숨을 쉬며 조금씩 들썩이는 그녀의 가슴께를 보고 그대로 멈췄다. 얇은 슬립 위에 가운만 걸치고 있었던 탓에 흐트러진 옷자락 사이로 뽀얀 살이 보였다. 동공이 풀렸다.
“유리엔?”
“……내가, 약간, 조금 많이, 아니, 몹시 제정신이 아닌 것 같으니, 혹시 이상하게 굴거나 아프면, 절대 참아주지 마라. 부탁이다.”
눈꺼풀은 떨리고, 와 닿는 숨은 뜨겁고 거칠다. 그녀를 뒤덮은 몸은 단단하고 컸으며, 벌어진 셔츠의 옷깃 사이로 목덜미와 가슴팍의 근육이 날뛰기 직전처럼 꿈틀거렸다. 고결해 보이는 외양과는 영 다른 몸이었다. 그러면서도 그는 그녀가 대답할 때까지 얌전하게 기다리고 있었다.
에키는 사랑하는 남자를 양팔로 감싸며 끌어안았다.
“안 참아요, 그러니 걱정하지 말아요.”
* * *
에키네시아는 유리엔이 왜 비인간적이라는 소리를 들을 정도의 천재였는지를 새삼 실감했다. 검술에 유난히 특출할 뿐이지 대부분의 분야에서 재능을 보였다더니, 정말로 뭐든, 생전 처음 해보는 일이라도 심하게 잘했다.
너무 심하게.
예상했던 것보다 커서 긴장했는데도 솔직히 통증을 느낄 틈조차 없었다. 지나치게 좋았다. 정신이 어지러이 휩쓸리며 생각마저 날아갈 정도로 좋았다. 게다가 제니스의 경지에 이른 사람은 확실히 초인이었다. 괴물이 따로 없었다. 그녀 역시 제니스라서 괜찮았지, 아니었다면 감당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덧붙여, 에키는 자기 자신에 대해 잘 몰랐던 점 하나를 고된 대가를 치르며 깨달았다.
“아, 유, 아, 율, 잠깐, 조, 조금만, 잠시만…….”
그녀가 저도 모르게 그의 어깨를 밀어 내는 순간 유리엔이 재깍 멈추었다. 그러고는 그 긴 속눈썹을 늘어뜨리며 젖고 흐려진 눈으로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눈물 대신 땀이 뚝, 떨어진다.
“아픈가?”
달뜬 눈매와 처연한 표정을 마주하니 도저히 그만하자고 할 수가 없었다. 말이 절로 나왔다.
“……아뇨, 안 아파요.”
“그럼 어째서…….”
그가 걱정스럽게 그녀를 살폈다. 시선을 타고 미련과 욕망이 애정과 염려에 뒤섞여 흘러내린다.
에키네시아는 유리엔의 얼굴에 약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가 짓는 여린 표정들에 특히 약했다. 그것에 홀려 제 손에 쥐어진 고삐를 스스로 내려놓아 버릴 정도로. 그녀는 이제야 그것을 깨달았다.
죽는 모습을 본 과거 때문인지, 그냥 그가 예뻐서인지, 너무 사랑해서인지 잘 구별이 안 간다. 어쨌든 울먹이기라도 할라치면 뭐든 내주고 싶어졌다. 에키는 그의 등을 안으며 제게로 당겼다.
“정말 아파서 그런 게 아니니까…….”
아파서 멈추려 한 게 아닌 건 사실이었다. 낯선 감각들에 정신을 못 차릴 것 같아서 그렇지. 열기에 절여진 것처럼 어지럽고 저릿했다. 녹아서 사라져버릴 것 같은 느낌이었다. 몸이 말을 듣질 않았다. 그래서 약간 무서워졌을 뿐이다.
그런 심정을 솔직하게 말할 엄두는 나지 않아서, 그녀는 아무 말이나 꺼냈다.
“사랑해요, 유리엔.”
얼버무리기 위해 튀어나간 말치고는 진솔하고 강렬했다. 이 순간 가장 하고 싶은 말이기도 했다.
코앞에 있는 유리엔의 동공이 확장되는 것이 섬세하게 보였다. 바짝 붙어 있는 탓에 미세한 움직임까지도 전부 느껴졌다. 그가 그녀의 목덜미에 고개를 묻으며 신음 섞인 말을 무어라 중얼거렸다. 이대로 죽어도 괜찮을 것 같다, 내지는 이대로 미쳐버릴 것 같다, 로 들렸는데 발음이 엉망으로 흐트러져서 정확히 무슨 말인지를 모르겠다.
에키가 뭐라고 한 거냐고 되물으려는 찰나, 그가 으스러질 듯이 그녀를 끌어안으며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동시에 떨리는 음성이 그녀의 귀에 꽂혔다.
“나 역시, 그대를 사모한다. ……너무나도.”
달콤하고 긴 밤이었다.
* * *
[랑아, 주인들 언제 와? 왜 이렇게 안 와?]
[많이 참았지.]
[응?]
[좋을 때고.]
[뭔 소리야?]
[오래 걸릴 테니 잊고 있으란 뜻이다.]
[뭐가 그렇게 오래 걸려? 에이, 지루해!]
[심심한가, 바르데르? 내가 옛날에 전 주인과 함께 용을 잡은 적이 있는데, 들어볼 테냐?]
[용? 우와, 우와, 진짜 용? 난 저번에 결절에서 가짜만 잡아봤는데! 해줘! 얼른! 진짜 용은 말도 할 줄 안다며, 정말이야? 말 잘 통해?]
[말을 하긴 하지. 그다지 인간과 대화할 의사가 없을 뿐.]
[그래? 우리는? 우린 인간 아니잖아! 랑은 용이랑 이야기해 봤어?]
[주인이나 같은 기오사 외에는 대화 못 하는 걸 너도 잘 알지 않나. 어쨌든, 그 시절 내 주인은…….]
부부 침실 곁에 있는 보관실을 청소하러 들어온 하녀는 테이블 위에 맞닿아 있는 기오사들이 희미하게 빛나는 것을 감탄하며 구경했다. 그녀는 성검과 마검이 서로 이야기를 하고 있을 줄은 짐작도 하지 못했다. 그저 바르데르기오사와 랑기오사가 공명하듯 함께 빛나는 모습이 각자의 주인들처럼 잘 어울린다는 생각을 했을 뿐이다.
하녀의 생각은 수다 속에서 금세 소문이 되어 퍼져나갔다. 주인 부부가 사흘 밤낮을 침실에서 안 나왔다는 소문과 함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