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을 든 꽃-197화 (외전) (197/211)

검을 든 꽃 외전 1-1화

외전 1. 함께 있는 밤

에키네시아 로아즈와 유리엔의 결혼식은 1630년 초봄에 치러졌다. 결혼식의 규모 자체는 역대 창천기사단장의 결혼식들과 큰 차이가 나지 않았으나, 몰려든 인파와 방문한 귀빈들의 면면이 기록적이었던 탓에 자연히 성대하게 느껴졌다.

두 명의 제니스는 혼인서약서에 서명을 하며 자신의 이름 뒤에 새로운 성을 붙였다.

그들의 결혼과 동시에 스타티스라는 가문이 새로이 탄생했다. 영지도 작위도 없으며 있는 것은 아젠카의 저택과 가문의 문장뿐이었다. 그럼에도 스타티스는 탄생과 동시에 누구도 무시할 수 없는 가문이 되었다. 귀빈들은 축하하는 한편으로 제니스 부부의 가문이 미칠 영향력을 계산하느라 바빴다.

피로연은 스타티스 저택의 정원에서 해가 질 때까지 이어졌다.

그리고 밤이 찾아왔다.

에키는 생경한 기분으로 침실을 둘러보았다. 유리엔이 고른 저택 내부는 그녀가 선택한 것들로 채워졌다. 그동안 내내 들락거리며 하나하나 직접 골랐지만, 이제부터 이 저택이 그녀의 집이 된다고 생각하니 묘하게 낯설어 보였다.

‘정말로 살게 되는 거구나, 여기에서. 그와 함께…… 새 이름으로.’

함께 걷는 날들이 시작된다. 같은 이름을 쓰고, 같은 집에 살고, 같이 잠들고 일어나는 삶이. 그녀는 넓은 침대에 걸터앉아 무릎을 끌어안고 앞뒤로 몸을 흔들다가 뒤로 드러누웠다.

지금까지와는 많은 것이 달라질 것이다. 되새길수록 기분이 이상해졌다. 간질간질 설레기도 하고, 여러모로 긴장되기도 하고.

씻은 지 얼마 되지 않아 물기가 남아 있는 분홍색 머리카락이 하얀 시트 위에 구불구불 흐트러졌다. 에키는 그것을 손가락으로 감으며 섬세한 무늬가 있는 천장을 멍하니 올려다보았다.

유리엔은 황제를 배웅하고 나서 이 방으로 돌아올 터였다. 그가 돌아오면, 이제 남은 일은……. 얼굴이 빨개진 에키는 갑작스레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 주인아, 어디 가?]

“잊은 게 있어서.”

침실은 이중문이었다. 두꺼운 커튼을 걷고 첫 번째 문을 열고 나가면 간단한 식사나 차를 즐길 수 있는 2인용 테이블이 있는 내실이 나온다. 내실에는 욕실로 연결된 문이 있었고 구석은 자그마한 서재처럼 꾸며져 있었다. 책장들 사이로 뚫린 천장까지 닿는 커다란 유리창 너머로는 후원의 호수가 내려다보였다.

에키는 내실을 가로질러 두 번째 문을 열었다. 부드러운 융단이 깔린 복도가 이어지고, 침실 입구의 바로 옆에 작은 문이 보였다.

원래 지근거리에서 시중을 드는 사용인을 위한 방이었는데, 에키와 유리엔은 그 방을 다른 용도로 쓰기로 결정한 상태였다. 일종의 보관실로 말이다. 그녀는 곧바로 그 방 안으로 들어갔다.

작은 방의 중앙에는 벨벳이 깔린 테이블이 있었다. 창천 정식 제복과 기사들에게 지급되는 갑옷이 두 벌씩 나란히 걸려 있고, 한쪽의 유리보관함 안에는 아메시스트가 놓여 있었다. 랑기오사를 얻기 전에 유리엔이 주로 썼던 검도 장식장 안에 있었다. 그 외에도 자잘한 전투 관련 물품들이 정갈하게 보관되어 있었다.

에키는 중앙의 테이블 위에 바르데르기오사를 내려놓았다.

[어? 잊었다는 게 나 떼놓는 거였어? 와, 와, 애기 만들려고?]

“시, 시끄러워, 발.”

[아니야? 맞잖아! 결혼도 했으니까 이번엔 진짜로 걔랑 애기 만드는 거지?]

그녀가 칼날을 향해 눈을 흘겼다.

“제발, 그런 건 눈치껏 모른 척 좀 해.”

[왜? 왜 모른 척해야 되는데?]

“…….”

에키는 말문이 막혔다. 대답할 말이 궁했다. 그냥 마나로 한 번 훑어주면 조용해지지 않을까? 그녀의 눈매가 가느스름해졌다.

[……주인아, 너 지금 때릴까 말까 고민하는 거 같은데……. 안 때린다며! 이제 말로 할 거라며! 죽이자는 소리도 안 했잖아!]

귀신같은 녀석. 그녀는 한숨을 쉬고는 뜨끈뜨끈해진 뺨을 만지작거렸다.

“안 때려. 그냥…… 부끄러워서 그런 거니까 앞으로도 계속 모른 척해.”

[뭐가 부끄러운데? 나쁜 짓도 아니고 이상한 일도 아닌데?]

“음, 이건 아주 사적인 일이니까. 너한테도 비밀로 하고 싶은 일. 너도 나한테 뭐든 말하는 건 아니잖아?”

[난 뭐든 다 말하는데?]

“전에 랑기오사랑 의논하던 내용은 말 안 했었잖아. 비밀이라면서. 그것도 나쁜 짓도 아니고 이상한 일도 아니었는데 그랬었지?”

[어어, 으, 으응, 그랬긴 한데……. 그런가?]

“그렇지? 그러니까 조용히 기다려. 좀 기다리면 랑기오사도 올 거니까 둘이 같이 놀아.”

[치이……. 알았어.]

마검이 겨우 잠잠해졌다. 어떻게든 납득시킨 듯해서 에키는 겨우 안심했다. 그래도 이제 말을 하면 어느 정도 통하긴 해서 다행이었다.

‘아니지, 어쩌면 마검은 그대로인데 내가 발을 대하는 태도가 달라져서 그렇게 느껴지는 걸지도 몰라.’

처음엔 분명 증오하다 못해 혐오스럽기까지 했는데, 오랜 기간 함께 지내며 미운정이 들더니 변한 이후로는 꽤 귀엽게 느껴지기까지 했다. 에키는 피식 웃으며 방을 나왔다.

마검을 떼어놓고 나니 조금 더 실감이 든다. 침실로 향하는 걸음마다 심장이 데굴데굴 굴러다녔다. 마음의 준비는 진작 했고, 직전까지 간 적도 있고, 백작부인과 로잘린에게 조언도 들었는데, 잘 진정이 되지 않는다. 달아오른 뺨도 영 가라앉질 않았다.

‘이제 정말로 부부가 되는 거구나.’

침대에 앉아 있으니 기분이 점점 이상해졌다. 얼굴도 계속 화끈거렸다. 결국 가만 앉아 있을 수가 없어져서 침실 안을 방글빙글 돌기 시작했다. 온갖 생각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달칵.

“꺅!”

에키는 문이 열리는 소리에 펄쩍 뛰다시피 놀랐다. 정신이 없어서 다가오는 기척조차 못 느낀 모양이었다.

반사적으로 내뻗은 손끝에 마나가 돋아나며 칼날을 이루었다. 잔뜩 날이 선 몸이 저절로 반응하며 그것을 들어온 자에게 겨누었다. 보랏빛 마나의 칼끝에 위치한 건 쟁반을 든 유리엔이었다.

“……!”

갑작스레 닥쳐오는 살기와 겨눠진 칼날에 문을 열었던 유리엔도 화들짝 놀라버렸다. 그것은 곧 요란한 사고로 이어졌다. 와장창, 유리가 박살 나는 소리가 귀를 찔렀다. 유리엔의 손에 들려 있던 쟁반이 미끄러지며 유리잔과 병까지 모조리 떨어져 깨졌다. 유리들이 박살 나며 담겨 있던 와인이 사방으로 튀었다.

몇 초간, 에키와 유리엔은 멍하니 그것을 보고만 있었다. 그녀의 손에서 마나가 서서히 흩어져 사라졌다. 쏟아진 와인이 흘러 그의 슬리퍼에 스며들었다. 유리엔은 그제야 기울어진 쟁반을 내려놓고 허리를 숙였다. 깨진 조각들을 급히 주워 담았다.

“율…….”

“오, 지 마라. 날카로우니.”

정신을 차리고 다가오려는 에키를 그가 급히 제지했다.

“제가 그런 것에 상처 입을 리가 없잖아요.”

“그래도, 내가 치울 테니…….”

“같이 치워야죠. 저 때문인데.”

에키는 그에게로 다가가 쪼그려 앉아 유리조각을 주웠다. 산산조각이 나서 전부 치우는 건 무리였다. 큰 것들만 대강 치우며 하인을 불러야 하나 고민하던 그녀는 조각을 줍는 유리엔의 손이 떨리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것을 보자마자 말이 튀어나갔다.

“미안해요.”

유리엔이 고개를 들었다. 에키는 바닥에 만들어진 자줏빛 웅덩이에 시선을 둔 채 말을 이었다.

“갑자기 마나소드까지 만들어버려서……. 많이 놀랐어요?”

“그렇게까지 놀라진 않았다. 다만, 기, 긴장이 되어서, 그러니까, 긴장한 상태라서, 실수를 했을 뿐이다. 평소라면 이런 실수는 하지 않는다.”

그가 급하게 변명했다. 실상 변명이라기보다는 진실이었다. 제니스의 경지에 이른 기사가 아무리 놀랐다지만 이 지경으로 몽땅 떨어뜨리는 건 이상한 일이었다. 설령 떨어뜨렸다 해도 그의 반사신경이면 바닥에 닿기 전에 잡아채고도 남았다.

그럼에도 유리엔이 그러지 못한 것은, 에키가 그러지 못한 것과 같은 이유였다. 그녀는 유리조각을 줍던 손을 멈추고 물었다.

“그렇게 긴장돼요?”

그녀의 물음에 유리엔이 흠칫했다. 에키는 그의 얼굴에 순간적으로 낭패라는 듯한 표정이 지나가는 것을 보았다. 그가 애써 담담한 낯을 만들더니 고개를 저었다.

“아니, 괜찮다. 나는 아무렇지도 않다.”

“방금은 긴장해서 그런 거라면서요. 역시 떨리는 거죠?”

“…….”

그는 두 번 부정하지는 못했다. 애초에 유리엔이 그녀 앞에서 거짓말을 한다는 건 어려운 일이었다. 제정신을 차리고 있기도 힘든데 거짓말이 쉬울 리가 없다.

그의 반응을 보자 쿵쿵 뛰어대던 그녀의 심장이 느려지며 침착해졌다. 유리엔이 긴장하고 있다는 사실에 묘하게 안심이 되었다. 그녀만 긴장하고 있는 게 아니라서 다행이었다. 안심하는 그녀와 달리 유리엔은 눈을 내리깔며 시선을 피했다. 그가 기어들어 가는 음성으로 조그맣게 되물었다.

“실망스러운가?”

“네? 왜요?”

“한심한 꼴이니까.”

“뭐가 한심해요? 저도 엄청 긴장했는 걸요. 방금도 봤잖아요. 마나소드까지 만드는 거.”

에키는 유리조각을 마저 치우고 손을 털며 가볍게 물었다.

“왜 제가 실망할 거라고 생각한 거예요?”

유리엔이 일어서더니 유리조각이 담긴 쟁반을 근처의 협탁 위에 내려놓았다. 그는 그대로 잠시 서 있다가 천천히 대답했다.

“능숙하지 않아도 능숙한 척을 하고, 처음이라는 티는 절대 내지 말라고 들었다. 경험 없는 남자는 매력이 없으니까, 여유 있는 모습을 보여야 실망하지 않는다고…….”

에키의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저건 무슨 편견이야. 경험 없는 남자가 뭐가 어째? 누가 저딴 걸 가르쳤어?

“누구한테서 들었어요. 그거?”

“…….”

그는 그녀를 돌아보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유리엔에게 저런 이야기를 할 수 있을 만한 사람이라 해봤자 뻔했다. 디트리히나 바론뿐이다.

‘하지만 둘 다 그럴 사람으로 보이진 않았는데. 혹시 다른 기사들이나 사무관들이 떠드는 걸 지나가다 들었나? 대체 어떤 놈이야?’

그녀는 기가 차서 한숨을 쉬었다.

“이미 알고 있었던 거잖아요. 그리고 설령 몰랐다 해도, 제가 그런 걸로 실망할 리가 없잖아요. 오히려 기쁜 걸요.”

비로소 그가 그녀를 돌아보았다. 물기가 약간 남은 은발 아래에서 그녀를 향하는 하늘빛 눈동자. 조각한 것처럼 완벽한 얼굴, 깨끗하고 하얀 피부, 훌쩍 큰 키인데도 날렵하고 우아한 몸. 새삼스레 정말 아름다운 남자라는 생각이 들었다. 가슴께가 두근거렸다. 그녀는 호흡을 고르고 그를 올려다보며 말을 이었다.

“제게 당신뿐이듯, 당신에게도 저뿐이라는 거잖아요. 물론 굳이 처음이 아니었더라도 상관없지만, 어쨌든 둘이서 뭐든 처음부터 함께한다는 건 기, 기쁜 일이니까, 그, 그러니까 입맞춤처럼, 함께 이…….”

뒤로 갈수록 더듬거렸다. 기세 좋게 말을 꺼낸 건 좋았는데 역시 아직은 부끄럽다. 에키는 새빨개진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조그맣게 줄어든 목소리로 간신히 말을 마무리했다.

“하, 함께, 익숙해지면 돼요.”

고개를 숙인 그녀는 자신을 보는 그의 눈동자에서 순간적으로 초점이 확 나가버리는 것을 보지 못했다.

유리엔은 저절로 올라간 손을 그녀를 향해 뻗는 대신 그것으로 얼굴을 문지르며 심호흡을 했다. 속에서 짐승 같은 것이 요동치고 있긴 했지만, 짐승처럼 굴고 싶진 않았다. 숨결이 평소보다 뜨거웠다.

그사이 에키는 우물거리며 망설이다가 결국 다시 물었다.

“근데 율, 그건 대체 누가 알려줬어요? 그냥 궁금해서 그래요.”

구슬리듯 꺼낸 물음 속에 은근한 서늘함이 스며 있었다. 누군지 걸리면 가만 두지 않겠다는 속내가 새어 나온 탓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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