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을 든 꽃 196화
광장 근처를 빠져나온 말은 아젠카 외곽으로 향했다.
유리엔의 사택을 지나, 고급 저택들이 모여 있는 거리를 통과하자 메타세쿼이아 가로수길이 나타났다. 까마득한 높이로 뻗어 있는 나무 사이로 이어진 길 끝에 하얀 것이 어른어른 보였다.
그것은 성이라고 불러도 될 법한 웅장한 저택이었다.
저택의 입구에 있는 철창문 앞에서 유리엔이 실피드를 멈춰 세웠다. 황동인지 금박을 입힌 건지 모를 금빛 철창문에는 복잡한 장식이 덧대어져 조형물처럼 보였다.
그는 문에 걸려 있는 자물쇠를 직접 풀고 당겨 열었다. 보통 사람이라면 한참을 낑낑거려야 열 무게였으나 그에게는 간단했다.
유리엔이 문을 연 다음 멍한 얼굴로 저택을 보고 있는 에키에게로 다가왔다.
“율, 여긴……?”
“보여주고 싶었던 것이다.”
“네? 이 저택이요?”
그가 다시 실피드에 올라타 천천히 말을 몰았다. 다각다각 하는 말발굽 소리가 조용한 정원에 울려 퍼졌다.
눈이 얇게 덮인 정원은 봄이 되면 수를 놓은 연둣빛 융단처럼 펼쳐질 듯했다. 색색의 자갈이 그 사이로 모자이크처럼 펼쳐져 길을 이루었다.
“내부 인테리어나 세부 공사는 남겨두었다. 그대가 원하는 대로 꾸밀 수 있도록. 그대는 고르기만 하면 된다. 혹 마음에 들지 않으면 얼마든지 말해 다오. 후보로 골라둔 곳들이 더 있으니…….”
조곤조곤 귓가로 들려오는 설명들이 언뜻 이해가 가지 않았다. 에키는 얼이 빠져서 점점 가까워지는 저택을 올려다보았다.
널찍한 유리창이 많았다. 낮이면 저택 전체에 햇빛이 화사하게 비쳐들 것이다. 밤인 지금은 외벽에 달린 등불들이 은은하게 빛나고 있었다.
섬세하게 조각된 난간이 딸린 테라스들이 곳곳에 보였다. 뾰족한 지붕과 팔각지붕들은 회갈색이었다. 가장 높은 지붕 아래에는 조각된 난간으로 둘러싸인 전망대 같은 것이 있었다.
저택의 2층에서부터 지상으로 이어지며 우아한 곡선을 그리는 계단과, 1층에서 후원으로 연결되는 회랑이 눈에 띄었다. 회랑의 끝에는 자그만 호수가 얼핏 보였다. 가장자리에 살얼음이 낀 호수 위에 새하얀 백조 몇 마리가 깃을 골랐다.
후원의 호수에서 정원의 가든 하우스로는 목재 회랑이 연결되어 있었다. 격자로 이루어진 그 회랑의 지붕에는 덩쿨이 자랐다. 여름이면 초록빛 잎사귀가 싱그럽게 드리워질 듯했다.
동화처럼 아름다운 저택이었다.
어느새 입구에 도착했다. 실피드가 푸르륵거리며 멈췄다.
등 뒤에서 뻗어 온 그의 손이 그녀의 손을 감싸 쥐었다. 손 안에 금속의 감촉이 느껴졌다. 그의 체온으로 데워진 금속은 따스했다.
에키가 그것을 얼결에 받아 쥐자 유리엔이 뒤에서 그녀를 당겨 끌어 안았다. 그가 귓가에 속삭였다.
“그대의 청혼에 대한 내 대답이다.”
살짝 떨리고 있는 나지막한 음성. 그는 그대로 그녀를 안아 올려 말에서 내린 다음, 저택의 현관 앞에 내려주었다. 에키는 그제야 손 안에 있는 것을 확인했다.
금빛 열쇠.
유리엔이 그녀를 부드럽게 이끌었다. 금속 장식이 덧대어진 적갈색 나무문 앞으로.
열쇠의 윗부분은 가느다란 금이 얽혀 만들어진 꽃 모양이었다. 얇은 금판으로 만든 꽃이 문에도 달려 있었다. 중앙에 열쇠구멍이 있다.
머리가 잘 돌아가지 않았다. 마법에 걸린 것처럼. 에키는 홀린 듯이 열쇠를 꽂아 넣고 돌렸다. 문은 소리 없이 열렸다.
계단이 있는 로비가 펼쳐졌다. 커다란 샹들리에에는 아직 초나 마법등이 달려 있지 않았다. 높은 벽도 휑했다. 취향대로 채워 넣을 수 있는 백지였다. 주인이 완성시켜주길 기다리는 공간에는 아직 아무것도 없었다.
아니, 하나가 있었다.
현관의 정면에 길쭉한 테이블이 보였다. 벨벳이 깔린 테이블 위에 레이스로 포장된 풍성한 꽃다발이 있었다.
중심이 되는 건 연한 분홍색의 에키네시아 꽃들. 그 주위로 하얀 백합과, 보랏빛 스타티스, 그리고 히아신스, 메이릴리, 리시안서스 등 겨울에 구하기 힘든 꽃들이 생생하게 피어 있었다.
유리엔이 그녀를 지나쳐 테이블로 다가갔다. 꽃다발을 들고, 오른손에서 성검을 뽑아내더니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그가 그녀에게 돌아와 꽃다발을 내밀었다.
에키는 멍하니 그것을 받아 들었다. 꽃향기가 전신을 휘감았다. 달콤하고 은은하고 어지러운.
유리엔이 조용히 말했다.
“여기서부터는, 그대와 나만이 갔으면 한다.”
에키는 그의 말이 무슨 뜻인지를 한 번에 알아들었다.
[뭔데, 뭔데? 나 빼놓고 뭐 하려고? 왜?]
“……잠깐만 기다려.”
테이블로 다가가 종알거리는 마검을 성검 옆에 내려놓았다.
유리엔이 그녀의 손을 받쳐 들었다. 그녀는 한 팔에 꽃다발을 안고, 그의 손을 잡고 계단을 올라갔다. 나선을 그리는 계단의 끝에는 조금 전 밖에서 보았던 전망대가 있었다.
저택에서 가장 높은 곳이었다. 팔각형 공간 전체가 유리문으로 구분된 테라스로 둘러싸여 있었다. 테라스로 나가자 서늘하고 맑은 겨울바람이 머리카락을 헤집으며 지나갔다.
에키는 테라스에 기대 섰다.
메타세쿼이아 가로수들 너머 멀리 아젠카 내성의 성벽이 보인다. 그 너머로는 창천기사단 본부가 솟아 있었다.
머리 위의 밤하늘은 쏟아질 것처럼 별이 가득하다. 아래로는 눈으로 덮인 저택과 정원 전체가 내려다보였다. 후원의 호수에 있던 백조들이 날갯짓을 했다.
“마음에 드는가?”
그녀의 곁으로 다가온 그가 물었다. 고개를 들자 유리엔이 긴장한 얼굴로 그녀를 보고 있었다. 그녀는 미소 지었다.
“네, 무척이나.”
그의 낯이 밝아졌다. 들떠서 어쩔 줄 모르는 기색이 되어 입가를 가린다. 그녀 역시 붕 떠 있는 듯한 감각이 사라지질 않았다. 에키는 꽃다발을 만지작거리며 입을 열었다.
“율이 준비하고 있었다는 게, 여기였어요?”
유리엔의 눈매가 곱게 휘었다. 아래의 저택을 내려다보는 푸른 눈이 꿈꾸듯 반짝인다.
“지급되는 사택이 아니라 그대와 함께할 우리만의 장소를 마련하고 싶었다. 여럿을 눈여겨보다 결국 이곳으로 정한 지는 좀 되었는데, 단장하고 다듬느라 시간이 꽤 걸렸다.”
“그래서 제게 선수를 빼앗겼군요.”
에키가 장난스럽게 웃었다. 그가 뺨을 붉히더니 그녀를 똑바로 응시했다.
“에키.”
짧은 머뭇거림. 유리엔이 그녀에게로 한 걸음 더 다가왔다.
“나는 여기에서…… 그대와 함께 살아가고 싶다.”
바로 곁에 서서 그가 그녀를 향해 고개를 기울였다. 바람결에 흩날리고 있는 그녀의 머리카락을 쓸어 넘긴다.
“그대가 말했던 행복을 같이 가꿔 나가고 싶다. 이곳에서.”
느리게 눈을 깜박인 그가 나지막이 묻는다.
“내 대답을 받아주겠나?”
품속에서 맴도는 꽃내음이 너무 달았다. 그녀와 그가 내쉬는 숨에도 꽃향기가 뒤섞이는 것 같다. 에키는 그 향을 한껏 들이마셨다. 향기가 몸을 채운다.
“네.”
그에게 발돋움했다. 맞닿기 직전에 소근거렸다.
“기꺼이.”
입술이 맞물렸다. 그의 손이 그녀의 뒷머리를 움켜쥐며 제 쪽으로 당겼다. 일순 집어삼켜지는 듯했다. 사이에 끼인 꽃다발이 바스락댔다. 떨어진 꽃잎이 그와 그녀의 옷자락에 달라붙었다.
입술을 뗀 그가 길게 숨을 내쉬었다. 그 호흡에서 짙은 열기가 느껴졌다. 흐릿해진 푸른 눈이 그녀를 탐나는 듯이 보다가, 그들 사이에 짓눌린 꽃다발을 보고 불현듯 정신을 차렸다.
“이런.”
유리엔은 자책하며 그녀가 들고 있는 커다란 꽃다발 속으로 손을 뻗었다. 꽃들 사이를 헤집은 그가 조그만 상자를 끄집어냈다.
“그건…….”
“……잊을 뻔했다.”
보라색 스타티스 꽃이 벨벳 상자에 눌려 붙어 있었다. 유리엔은 눌린 꽃송이를 털어내고 상자를 열었다. 투명한 보석이 달린 우아한 반지가 그 안에 있었다.
마석을 보석처럼 가공해서 만든 반지였다. 마석은 마나를 불어넣으면 보관된 마나의 색을 띄게 되어서, 기사들이나 마법사들이 반려에게 증표로 줄 때 자주 쓰였다.
‘당신의 색으로 물들고 싶다’ 또는 ‘당신을 내색으로 물들이고 싶다’라는 뜻으로.
유리엔이 달아오른 얼굴로 그것을 그녀에게 내밀었다. 그러면서 결심했던 것을 입밖에 내었다.
“에키네시아, 내게 그대의 성을 주었으면 한다.”
“제, 성이요? 로아즈?”
“황실의 성을 완전히 지웠으니, 나는 이제 성이 없다. 결혼하면…… 그대와 같은 성을 쓰고 싶다.”
예상하지 못했던 요청이었다. 그녀의 성을 따르게 해달라니.
에키는 반지와, 붉어진 그를 번갈아 보았다. 반지 상자에 미처 떨어내지 못한 꽃송이가 아직 붙어 있었다. 어떤 충동이 솟았다.
그녀는 그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끼워 주실래요?”
유리엔이 천천히 반지를 꺼냈다. 한 손으로 그녀의 손을 조심스럽게 받쳐 들고, 가느다란 손가락에 반지를 끼운다. 왼손 약지. 결혼반지를 끼는 곳에.
그가 반지를 낀 그녀의 손을 한참 내려다보았다. 벅차 오른 것이 넘실거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그래서 그는 말없이 몸을 굽혀 그녀의 손등에 입술을 꾹 눌렀다. 그의 긴 은발이 사르르 흘러내렸다.
손등이 뜨겁다. 그 열기와, 손가락에 닿은 반지의 감촉과, 맴도는 향기 속에서 에키네시아의 안에 솟았던 충동이 확고하게 형태를 이루었다.
그녀는 유리엔이 테라스의 난간에 내려놓은 반지 상자 쪽을 다시 보았다. 벨벳에 엉겨 붙어 있는 보라색의 자잘한 꽃송이.
“스타티스.”
“……?”
“스타티스로 해요.”
유리엔이 의아하게 고개를 들었다. 에키는 웃으며 덧붙였다.
“우리가 함께 쓸, 우리만의 이름이요.”
“……로아즈가 아니라?”
“네. 그건 란셀리드가 이어받게 될 이름이니까.”
그의 눈이 커졌다. 그녀는 형태를 이룬 꿈을 풀어놓았다.
“당신과, 제가, 새로운 가문을 만드는 거예요. 우리로부터 시작되어 우리 아이들에게로 이어질 이름을.”
“새로운 가문이라고. 우리, 아, 이들에게 이어질…… 스타티스…….”
유리엔이 급하게 불타오를 듯이 빨개진 낯을 가렸다. 그녀가 갸웃거렸다.
“너무 즉흥적으로 정했나요? 음……. 유리엔 스타티스, 그리고 에키네시아 스타티스. 괜찮은 것 같은데. 별로예요?”
함께할 미래. 그들만이, 그리고 그들의 아이들만이 공유할 이름. 그 미래를 그려내는 연인.
유리엔은 갸웃거리는 그녀의 얼굴을 감싸 쥐었다. 사랑스러워서 참을 수가 없다. 향기 나는 이름을 읊조리는 입술을 그대로 삼켰다. 에키네시아의 손에서 꽃다발이 떨어졌다. 그녀가 그를 마주 끌어안았다.
등에 닿는 그녀의 손이, 제 손에 닿는 그녀의 허리와 스치는 머리카락이, 입술에 닿아 뒤섞이는 열망이 아주 미칠 것 같았다. 이쯤이면 카랑카랑하게 잔소리를 해댈 성검도 치워놓고 온 참이다.
유리엔은 이 저택에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을 백 번쯤 되뇌며 간신히 인내했다. 첫날밤을 맨바닥에서 치를 순 없었다. 침대는 사다놓을 걸, 까지 생각하다가 그는 자괴감을 느꼈다. 짐승도 아니고.
입술을 뗀 채 호흡을 고른다. 에키가 발긋해진 얼굴로 물었다.
“이건, 음, 새로운 가문을 만드는 거, 당신도 찬성한다는 뜻이죠?”
“언제나 그대는 내 예상을 넘어서는군. 놀라울 정도로 매력적인 방식으로 말이다.”
유리엔은 잠긴 음성으로 말하고는 그녀의 이마에 입 맞췄다.
“그대의 뜻대로.”
에키네시아는 환하게 웃었다.
* * *
[랑아, 랑아.]
[왜 자꾸 부르느냐?]
[주인들 뭐 하러 간 거야?]
[몰라도 된다.]
[애기 만들러 갔어?]
[음? 너 의외로 알고 있…… 아니, 됐다. 어쨌든 이번은 아닐 거다. 뭘 준비했는지 내가 지켜봤었으니 확실하다.]
[이번은 아냐? 그럼 앞으로는?]
[……바르데르. 너 지금 알면서 묻는 거 아니냐?]
[뭘? 내가 뭘 아는데? 인간들이 애기 만드는 법? 나 알아! 뽀뽀하고 끌어안고 같이 눕는 거!]
[…….]
[주인 애기면 나중에 커서 나 쥘 수 있을까? 궁금해! 빨리 만들었으면 좋겠다!]
* * *
……기오사와 창천기사단, 기사의 성지 아젠카에 대해 언급할 때면 항상 함께 언급되는 가문이 있다. ‘스타티스’다.
스타티스는 ‘아젠카의 군주는 스타티스가 계승하는 세습직이다’라는 농담이 나돌 정도로 자주 창천기사단장을 배출하고, 다수의 기오사 오너를 배출한 가문이다.
마스터를 대대로 배출하는 가문은 제법 있어도, 기오사 오너가 이토록 자주 탄생하는 가문은 오직 스타티스뿐이다.
스타티스의 핏줄들은 대부분 천부적인 검술 재능을 타고나고, 아름다우며, 남녀 가릴 것 없이 꽃의 명칭을 이름으로 쓴다. 가문의 문양 또한 꽃을 배경으로 교차하는 두 자루의 검이다.
이러한 특징을 담아, 아젠카의 시민들은 스타티스를 ‘검을 든 꽃’이라는 애칭으로 부르곤 한다.
스타티스는 최연소 제니스이자 최초로 기오사를 변화시킨 기오사 오너이며, 처음으로 ‘마검의 주인’이라 인정받은 에키네시아 스타티스와, 그녀의 반려이며 마찬가지로 제니스였던 성검의 주인 유리엔 스타티스로부터 시작되었다.
스타티스의 가보이자 가주의 상징으로 유명한 ‘아메시스트’ 또한 유리엔 스타티스가 에키네시아 스타티스를 위해 만들어 선물한 검이다. 아메시스트에 관해서는 많은 일화가 있는데, 대표적인 것은…….
-〈검을 든 꽃 : 스타티스의 기사 들〉 중 발췌.
검을 든 꽃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