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을 든 꽃 195화
서임식 저녁에는 창천기사단 본부의 홀에서 연회가 열렸다. 각국에서 찾아온 사신들을 대접하기 위한 기념 연회였다.
에키네시아가 아젠카로 온 이래 두 번째로 참석하는 연회이기도 했다.
첫 번째 연회에서 그녀는 바라하와 함께했고, 유리엔은 디아상트 공녀와 함께했었다. 그 연회에서는 공녀와 창천기사단장의 약혼이 발표되었다.
그때와는 정말 많은 것이 달라져 있었다.
로잘린 디아상트는 일찍 입장했다. 그녀는 남편인 션 디아상트와 같이 들어왔다.
평민과의 결혼이라는 스캔들은 제국의 내전과 그녀가 한 폭로 등과 맞물려 문제를 제기하기 어려운 여건이 되어버렸다. 디아상트 공작은 당당히 남편을 소개했고, 귀족들은 속으로야 어떻든 겉으로는 웃으며 인사를 나눴다.
딸의 서임식을 지켜보러 온 로아즈 일가는 화제의 중심에 있었다. 최고위 귀족들부터 각국 왕족들까지 차례로 그들에게 찾아와서 자신을 소개했다.
예상보다 거창한 서임식부터 놀랐던 백작부부와 란셀리드는 구름 위의 존재라 여겼던 자들이 몰려들어 에키네시아를 칭송하는 것을 듣고 혼이 나가는 중이었다. 로아즈의 장녀가 가지게 된 영향력은 가족들이 받아들이고 상상했던 것보다 더 컸다.
성녀는 부단장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들어왔다.
둘째를 임신한 바론의 아내는 만삭이라 거동이 힘들었기에, 그는 파트너가 없었다. 그래서 아직 어린 성녀의 파트너를 그가 맡게 되었다. 곰 같은 덩치의 바론은 제 반토막도 안 될 샤이를 딸처럼 살뜰하게 챙겼다.
준기사인 디트리히 사루아는 이번 연회에 참석할 자격이 없었다. 하지만 그도 연회장에 있었다. 테레사의 파트너가 된 덕이었다. 그는 싱글벙글 웃는 얼굴로 떨떠름해 보이는 테레사를 이끌었다.
사관생도가 아니라 프랑 알마리의 공자로서 연회에 온 미하일이 그 광경을 보고 들고 있던 잔을 놓쳐 깨 뜨렸다.
“테레사 누님……?”
“미, 미하일? 오해하지 마라.”
미하일을 발견한 테레사는 기겁하며 옆에 있던 디트리히를 확 밀쳐버렸다. 디트리히는 밀려난 것에 아랑곳하지 않고 다시 다가와 테레사의 손을 냉큼 잡았다. 그러고는 유들유 들하게 웃으며 미하일에게 인사를 했다.
“안녕, 도련님. 준기사 디트리히 사루아다. 테레사 경의 파트너지.”
“이, 이……!”
미하일이 감히 누님의 손을 잡은 시건방진 놈에게 무어라 고함을 지르려는 찰나, 마검의 주인과 성검의 주인이 연회장에 입장했다.
미하일은 저도 모르게 소란해진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디트리히는 그 틈에 잽싸게 테레사를 끌고 다른 곳으로 도망쳐 버렸다.
* * *
유리엔은 금실로 수를 놓은 검은 예복 차림이었다. 늘 하얀 제복을 입던 남자가 검은 예복을 걸치자 분위기가 달라 보였다. 조금 더 날카롭고, 조금 더 진중해 보인다.
에키는 새삼스럽게 그의 어깨와 등이 넓고 다리가 길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그의 예복이 그녀의 드레스에 맞춘 옷이라는 사실도 알아차렸다.
무표정하게 기다리던 그가 그녀의 기척을 느끼고 고개를 든다. 그녀를 본 순간 잠시 굳었다가, 곧 서늘하던 눈동자에 온기가 돌고 입꼬리가 풀어졌다.
“에키.”
그의 눈동자가 그녀에게 달라붙는다. 정신없이 얼굴을 바라보다가, 보석으로 장식되어 굽이치는 머리카락을 따라 시선을 옮겼다가, 잘록한 허리 뒤쪽으로 나비 꼬리처럼 늘어 뜨려진 리본의 끄트머리까지 훑고는, 다시 그녀의 눈을 마주했다. 눈매가 눈부신 것을 보듯 가늘어진다.
그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는데도,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자가 된 듯한 기분이 든다. 에키는 뺨을 약간 붉혔다. 그녀가 제 손을 유리엔의 손 위에 올렸다. 그 손에는 장갑이 없었다.
“가요, 율.”
유리엔은 손바닥 위에 얹어진 그녀의 손을 내려다보며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꿈을 꾸는 것 같다.”
“……저도 그래요.”
그녀가 답하자 유리엔이 웃는다. 그의 엄지가 가볍게 그녀의 손끝을 쓸었다. 스칠 듯 말 듯한 접촉이었는데도 불구하고 에키는 움찔 떨었다.
그녀의 반응을 본 유리엔의 눈에서 일순 초점이 나갔다가, 연회장 쪽에서 때마침 들려온 왁자한 소리에 겨우 되돌아왔다.
“유리엔?”
“……들어가지.”
조금 낮아진 음성으로 속삭인 그가 부드럽게 그녀를 이끌었다.
거대한 홀의 문이 열린다. 연회의 주인공인 마검의 주인이 성검의 주인과 함께 등장하자 연회장 전체가 잠깐 조용해졌다.
칙칙해 보여서 연회에서는 잘 입지 않는 검은 드레스가 에키네시아에게 놀랍도록 잘 어울렸다. 강렬하고 화려했다. 그녀의 곁에 있는 하얀 남자가 그녀의 색에 물들어버린 것처럼 보일 정도로.
함께 나타난 그들은 떠돌던 소문에 쐐기를 박는 모습이었다.
성검의 주인과 마검의 주인의 결합. 심지어 둘 다 제니스급 기사. 대륙에 파란을 일으키고도 남을 결합이었다.
몇몇은 정신없이 머리를 굴렸고, 대부분은 감탄했고, 창천 사람들과 로아즈 일가는 묘하게 뿌듯해졌다. 그 와중에 소수의 사람들은 조만간 검은색 드레스가 유행하겠다는 예측을 했다.
첫 춤곡이 시작되었다. 중부식 왈츠를 위한 곡. 파트너끼리 시작부터 끝까지 한 번도 손을 놓지 않는 춤이었다.
그의 어깨에 손을 올리고, 그와 손을 잡고, 음악에 맞추어 함께 원을 그린다. 드레스 자락과 붉은 리본이 꽃잎처럼 펼쳐지며 흔들렸다.
화려한 색이 가득한 연회장에서 그와 춤을 추는 것. 언젠가 꾸었던 꿈 속에서 보았던 소망이 현실이 되었다. 그와 손가락을 얽으며 그녀는 꿈결처럼 웃었다. 유리엔이 미소를 되돌려 주었다.
왈츠를 시작으로 곡이 이어졌다. 첫 춤을 끝낸 그와 그녀에게 사람들이 몰려왔다. 이제부터는 외교였다.
유리엔이 사신 대표들을 상대하는 사이 에키는 눈을 빛내는 아가씨들과, 그녀들보다 더 눈을 빛내는 각국 마스터급 기사들, 그리고 안달이 난 마법사들에게 둘러싸였다. 그나마 마법사들은 니콜이 나타나 스승인 칼리스토 쪽으로 수거해 갔다.
밤이 깊어지며 연회가 무르익을 때 쯤에야 겨우 사람들의 관심이 줄어들었다. 살짝 빠져나온 유리엔이 에키를 찾았다.
그녀는 제국 출신 귀족들 사이에 있었다. 작년까지만 해도 에키네시아를 머리카락이 특이한 촌구석 귀족 영애 정도로 기억하거나, 아니면 아예 몰랐던 자들이 그녀에게 눈도장이라도 찍으려 애쓰는 중이었다.
“실례지만, 에키네시아 경과 할 이야기가 있으니 비켜주겠나.”
유리엔이 끼어들자 그들이 분분히 물러났다. 그 와중에 한마디라도 더 말을 붙이려는 사람들로 인해 약간 시간이 걸렸다.
겨우 빠져나온 그들은 정원으로 연결된 계단 쪽으로 향했다.
“피곤하겠군.”
“그다지요. 흥미진진하던 걸요.”
에키가 고개를 저었다. 거짓말이 아니었다. 애초에 그녀는 사교 활동이나 연회를 즐기는 편이었고, 몰려든 자들이 어떻게든 그녀에게 잘 보이려 드는 통에 대화하기 쉬웠다. 적당히 웃으며 끄덕이고 흥미로운 화젯거리에만 귀를 기울여도 충분했다.
‘이 정도로 주목을 받는 건 처음이었지만, 그만큼 대강 상대해도 되니까.’
에키는 자신이 어느 정도의 위치에 올라섰는지 잘 알았다. 살아 있는 전설들인 기오사 오너 중에서도 정점. 대부분의 경우 그녀는 강자의 위치에 서게 된다. 게다가 로아즈는 신년부터 공작가가 될 예정이었다. 누구에게도 굽실거릴 필요가 없다.
“당신이야말로 피곤하겠어요.”
“나야말로, 늘 하던 일이라 괜찮다.”
유리엔이 웃으며 답했다. 그들은 연회장에서 만난 사람들에 대해 이야기하며 고요한 정원을 걸었다.
에키는 그가 말을 꺼낼 타이밍을 재고 있다는 인상을 받았다. 무슨 말인지 알 것 같아서 조금씩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정원의 끝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창천기사단 본부와 외곽을 분리한 높은 담장이 보였다. 그 담장 너머로는 더 높이 솟은 내성의 성벽이 있다. 그 방향을 응시하던 유리엔이 말을 꺼냈다.
“그대에게 보여주고 싶은 것이 있다. 보러 가지 않겠나?”
옆얼굴만 보이는데도 그의 표정이 짐작이 간다. 그녀는 자꾸만 올라가는 입꼬리를 자제하며 말했다.
“연회에서 빠져나가도 되나요?”
“할 일은 다했으니 상관없다. 물론 그대가 연회를 즐기고 싶다면 더 있어도…….”
“아뇨, 충분해요. 어디로 갈 건가요?”
유리엔이 훌쩍 뛰어올라 담장 위에 올라섰다. 그는 소년처럼 웃는 얼굴로 아래의 그녀에게 손을 내밀었다.
“내성 밖으로. 말을 준비해 두었다.”
그의 뒤로 펼쳐진 밤하늘이 맑다. 그의 도움이 없어도 뛰어오를 수 있지만, 그러고 싶었기에 그녀는 그의 손을 잡았다.
담장을 넘자 유리엔의 말인 실피드가 길가에 얌전히 서 있는 게 보였다.
[진짜 준비해 놨네. 성검의 주인이 땡땡이 쳐도 되는 거야? 엥근데 주인아, 네 말이 없다?]
“아리엘은요?”
그녀의 말은 보이지 않고 실피드만 있었다. 유리엔은 실례하지, 라고 속삭이며 그녀를 안아 실피드 위에 올려놓았다. 그러곤 그녀의 뒤쪽에 올라타며 대답했다.
“……그대와 함께 타고 싶어서.”
에키는 웃음을 터뜨리며 그의 품에 기댔다. 그에게서 그녀처럼 두근거리는 박동이 느껴졌다. 유리엔은 약간 붉어져서는 재빨리 고삐를 잡아 당겼다. 성검이 헛웃음을 흘리는 게 들렸다.
귀빈들이 연회를 즐기는 동안 중앙 광장에선 아젠카 시민들을 위한 서임식 기념 축제가 열리고 있었다. 사람들이 죄다 그 쪽에 몰려 있어서 거리는 한산했다.
금빛이 도는 하얀 말이 가로등 불빛만 있는 시내를 가로질렀다. 하늘하늘한 붉은 리본이 불티처럼 말의 뒤로 흩날렸다.
유리엔은 중앙 광장 바깥쪽의 길로 말을 몰았다. 광장이 가까워지자 그가 말의 속도를 약간 늦췄다. 사람이 많았다. 웃고 떠드는 소리와 음악 소리가 들려왔다.
에키는 그의 팔 너머로 광장을 보았다. 빽빽한 사람들의 머리 위로 커다란 분수대가 보였다. 분수대에 있는 카이로스기오사를 든 천사상이 꽃과 리본과 깃발로 장식되어 있었다. 축제를 위한 장식인 모양이었다.
시체가 걸려 있고 피가 흐르던 분수대의 풍경 위로, 경쾌하고 왁자지껄한 소리와 색색으로 장식된 분수대의 풍경이 덮인다. 그녀는 멀거니 그 풍경을 바라보았다.
그녀가 무엇을 보는지 알아챈 유리엔이 나직이 물었다.
“그때, 그대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지?”
“그때라니요?”
“사관학교 입학 첫날 저녁에, 그대가 저 분수대 앞에 서 있었을 때.”
그와 그녀가 처음으로 대화를 나눴던 날. 에키는 광장에서 시선을 떼고 그를 올려다보았다.
“분수대를 보면서…… 모든 것이 망가지기 전으로 되돌아왔다는 걸, 확인하고 있었어요.”
유리엔이 조금 서글픈 눈으로 그녀를 본다. 뭐든 감싸 안아줄 듯한 다정한 시선. 그녀는 웃으며 살짝 눈을 흘겼다.
“율은 그날 왜 거기까지 왔어요?”
“…….”
“산책 나온 거 아니었죠?”
“……그대가 내성을 빠져나가는 것을 우연히 보고 따라갔었다.”
[무례한 미행이었지. 악행이 아니라고 해서 다 해도 되는 건 아닌데 말이다. 바르데르기오사처럼 날 변화시킬 수 있다면 악행의 기준을 좀 더 철저히 하고 싶군.]
성검이 툴툴거렸다. 유리엔은 못 들은 척하며 실피드의 속도를 올렸다. 에키는 킥킥거리며 그에게 기댔다.
[우연은 무슨. 야, 저거 역시 너 감시한 거 아니야? 나쁜 놈이네! 랑기오사는 왜 저런 걸 봐주는 거야?]
그녀 역시 마검이 떠드는 소리를 못 들은 척했다. 그리고 내심 결심했다. 아무래도 유리엔과 함께 있을 때 바르데르기오사를 떼어놓을 상자 같은 걸 마련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