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을 든 꽃 194화
창천기사단 정식 기사의 서임 과정은 본래 길고 복잡했다. 마스터가 기본 조건이고 얻게 되는 권한이 상당하므로 당연한 일이었다. 그 긴 과정 중에서 대중에게 공개되는, ‘서임식’이라 불리는 과정은 일부였다.
그러나 오늘, 바르데르기오사 오너의 서임식에는 원래 공개되지 않던 과정 중에도 공개되는 것이 있었다.
‘시험’이었다.
기오사 오너, 또는 경력 5년 이상의 기존 기사가 ‘시험관’이 되어 기사로 서임될 후보자와 대련을 한다. 마나 사용은 금지된다. 검기를 쓸 수 있는 마스터라는 이유만으로 검술이 부족한 자가 기사가 되는 일을 방지하기 위해서였다.
대련을 할 때 시험관과 같은 조건인 증인 두 명이 참석해서 후보자가 기사가 될 자격이 있는지를 심사하게 되어 있었다.
대련의 승패와 관계없이, 증인들과 시험관까지 세 명 전원이 동의하면 후보자는 기사가 될 자격을 얻는다.
만약 후보자가 스콰이어 출신이라면, 시험관은 후보자의 로드가 맡는 것이 관례였다. 그러므로 에키네시아 로아즈의 시험관은 유리엔 드 하르덴 키리에였다.
중앙 제단에 올라선 부단장 바론이 간단한 인삿말을 하면서 서임식이 시작되었다.
제단 옆에 설치되어 있는 대련장에 시험관 유리엔이 올라섰다. 푸른 망토를 두른 백색 제복 차림, 손에 든 것은 대련용으로 준비된 평범한 롱소드였다.
이어 에키네시아 로아즈가 대련장에 올라왔다. 그녀 역시 제복 차림이었으나, 창천의 문장이나 푸른 망토는 없었다.
대련장의 옆에 증인이 될 자들이 착석했다. 바론 틸리어스, 테레사 폰 프랑 알마리.
나머지 창천기사단원들은 반대편에 앉아 있었다. 고작 서임식에 수십의 정식 기사들이 망토까지 착용한 정복으로 모이는 건 드문 일이었다. 신입 기사가 기오사 오너이기에 볼 수 있는 광경이다.
“증인에 시험관에 후보자까지 모조리 기오사 오너라니, 전대미문이겠군. 볼만하겠어. 경도 그렇게 생각하지?”
크루엔이 뒤에 있는 호위기사에게 넌지시 물었다. 호위기사는 대련장에 시선을 고정한 채 대꾸했다.
“폐하께선 봐도 잘 모르시지 않습니까.”
“경내가 아무리 검에 서툴어도 잘하는지 못하는지 정도는 보이거든?”
“시작합니다. 폐하. 집중하시죠.”
유리엔이 먼저 예를 취했다. 망토를 풀어 대련장 밖으로 떨구고, 손잡이에 손을 올린 채 묵례를 하고, 한 걸음 물러서며 검을 뽑아 늘어뜨린다. 이어 에키네시아가 맞은편에서 예를 취하고 검을 뽑아 들었다.
시험관이 늘어뜨렸던 검을 들어 자세를 잡는 것이 신호였다. 후보자의 선공으로 대련이 시작되었다. 칼날이 빛을 받아 은색으로 반짝이며 날끼리 맞부딪히고 미끄러지는 소리가 허공을 채우기 시작했다.
마나 사용이 금지되어 있었기에 에키네시아는 육체적인 면에서 압도적으로 열세였다. 힘도 속도도 확연히 밀렸다.
그 때문인지 그녀는 시종일관 방어적이었다. 똑바로 막았다간 버틸 수 없기에 한끝 차이로 피하거나 검으로 방향을 틀어 흘렸다.
“진짜 괴물이군요.”
“누가? 에키네시아 로아즈?”
“네, 소름이 돋습니다.”
“밀리고 있잖아?”
“마나 사용이 금지되어 있으니 맨몸인데, 저 체격으로 창천기사단장의 검을 막아내고 있잖습니까. 심지어 속도도 부족한데도. 힘을 배분하고 흘리는 거나, 공격의 방향을 파악하는 게 귀신같네요.”
“뭔지 모르겠지만 잘하고 있단 소리군. 보기엔 불리해 보이는데.”
“실제로 그녀가 불리합니다. 아마 이기기는 힘들 겁니다.”
“괴물 같다면서? 그럼 이길 수도 있는 거 아닌가? 유리엔이 자신보다 그녀가 강하다고 했었는데.”
크루엔이 갸우뚱하자 호위기사가 침착하게 대답했다.
“검술에서 마나의 비중은 굉장히 큽니다. 꼭 화려하게 검기를 뽑아내지 않아도, 근육을 보조하거나 강화하는 것만으로도 차원이 달라지지요. 마검의 주인처럼 가느다란 몸으로 탁월한 강함을 보인다는 건 그녀가 마나 사용에 통달했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마나 없이 순수한 육체로만 대련하는 지금은 그렇게까지 강하지 않다?”
“예, 폐하. 특기를 봉인하고 싸우는 거나 마찬가집니다. 물론 마스터가 아닌 보통 기사들에 비하면 훨씬 강하겠지만…… 상대인 창천기사단장이 마나에만 의지하는 어설픈 기사도 아니고 그도 검의 정점에 이른 사람인데, 경험의 차이에 체격의 차이까지 있잖습니까. 저렇게 버티는 것만 해도 대단, 흐억?”
대련장을 응시하며 설명하던 호위기사가 혀를 씹으며 이상한 소리를 냈다.
에키네시아가 일부러 드러낸 허점에 유리엔이 걸려들었다. 공격이 허공을 가르며 그는 일순 균형을 잃었다. 상체가 비었다. 그녀의 검이 예리하게 파고든다. 아슬아슬하게 그의 검이 막는다.
만약 에키네시아의 속도가 조금만 더 빨랐다면 방금 그 공격으로 승리했을 수도 있었다.
크루엔이 픽 웃으며 말했다.
“경, 나하고 내기할까? 난 마검의 주인한테 걸지. 경은 유리엔에게 걸어.”
호위기사는 대답할 정신이 없었다. 턱이 빠져라 입을 벌리고 대련장만 쳐다보았다.
에키네시아는 다시 수세로 바뀌었다. 그러다 어느 순간 그녀의 검이 기묘하게 비틀렸다.
칼날이 교묘하게 회전하며 유리엔의 검에 달라붙었다. 뱀처럼 날을 타고 반 바퀴 돈 그녀의 검이 유리엔의 검 바깥쪽으로 넘어갔다. 칼날이 서로 긁히며 기기긱 소리를 냈다. 그사이 유리엔의 칼끝이 그녀의 머리카락을 스쳤다.
공격을 위한 동작이 완전히 끝나며 검을 거두기 위해 힘의 방향이 전환되는 극히 짧은 찰나, 그녀는 그 찰나를 노려 제 검에 유리엔의 검을 걸어 잡아당겼다. 당기면서 그 반동을 이용해 그녀의 몸이 그의 안쪽으로 훅 파고들었다.
검을 빼앗기기 충분한 상황이었지만, 유리엔은 예상하고 힘을 주어 버텼다. 그녀의 공격이 이어지리라 예상하고 곧바로 대비도 했다. 하지만 그는 바짝 다가온 그녀가 무릎으로 제 팔꿈치를 쳐올리는 것까지는 예상하지 못했다.
그의 손아귀에 일순 힘이 빠졌다. 그 순간 에키네시아가 유리엔의 검을 완전히 당겨 내던졌다. 빈손이 된 유리엔의 가슴팍에 새파란 칼끝이 겨누어졌다.
광장이 정적에 잠겼다. 그리고 곧 귀가 멍멍해질 정도의 환호가 터져 나왔다.
* * *
부단장이 제단 위에서 시험의 결과를 선포하고 선언문을 낭독하기 시작했다. 선언문은 기사가 될 후보자가 어떤 사람이며 어떤 업적을 쌓았는지, 기사에 걸맞은 무용이 있는지를 설명하고 그 사람에게 기사가 될 자격이 있음을 선언하는 내용이었다. 에키네시아에 대한 선언문은 여러 가지 의미에서 화려했다.
선언문이 이어지는 동안 에키와 유리엔은 나란히 서서 숨을 골랐다.
“그대는 정말 뛰어나다.”
유리엔이 감탄하는 어조로 속삭였다. 에키네시아는 사관생도가 가져온 수건으로 땀을 닦으며 황당하게 그를 응시했다. 그는 누가 보면 승리한 사람인 줄 알 정도로 웃고 있었다.
겨울인데도 워낙 격하게 움직인 터라 그녀는 땀투성이였다. 3월, 갓 돌아왔을 때에 비하면 월등하게 단련된 몸이었지만 기사의 평균치에는 아직 모자랐다.
그녀에 비해 여유가 있었던 유리엔은 땀조차 흘리지 않았다. 그럼에도 패배한 것은 그였다.
그녀와 유리엔의 경험은 몇 배나 차이가 난다. 속도도 힘도 밀리는 상황에서 에키네시아가 이길 수 있었던 건 그녀의 경험과 기술이 그보다 뛰어나고 이 대련이 정직한 ‘시험’이었기 때문이다.
둘 중 누구도 치명적인 공격을 하거나 급소를 노리지 않았다. 그렇다고 져줄 생각으로 대련을 한 건 아니었다. 유리엔은 규칙하에서 최선을 다하고 패배했다.
지는 것을 좋아할 사람은 없다. 하지만 지금 그는 무척 기분이 좋았다.
난생 처음 만난 ‘벽’이 모든 것을 바쳐 사랑하는 사람이다. 검사로서 존경하고 더 높은 경지로 향하기 위해 함께 검을 나누고 싶은 사람이 평생을 함께할 여자였다. 바로 그 점이 너무나 기뻤다. 그는 들뜬 투로 말을 이었다.
“칼날을 그런 식으로 날에 걸고 잡아당기는 건 처음 보는 기술이다. 절묘했다. 그대는 어디서 누구에게 이걸 배웠지? 아니면 혹 그대가 직접 만든 기술인가?”
“어느 용병이 쓰는 걸 보고 익힌 기술이에요. 마나 없이 자신보다 강한 자를 상대할 때 유용하기에 기억해 두고 있었어요.”
“한 번 더 보여줄 수 있나? 내가 보기에는 날이 맞물렸던 방식이 이렇게…….”
“율, 지금 서임식 중이에요.”
“아.”
유리엔은 검을 꺼내들려다 겨우 진정했다. 에키는 설핏 웃고는 땀을 닦은 수건을 치웠다.
그녀는 그가 대련을 청하는 것만으로도 굳었었다. 그에게 검을 겨누는 것만으로도 악몽이 되살아나고 숨이 가빠졌었다. 그것들을 참으며 그를 구하기 위해 검을 들었었다. 넘쳐흐른 살의로 이성을 잃고 그를 향해 또 검을 휘두르기도 했다.
그리고 이제 그녀는 그에게 기대기로 했다. 자신과 그를 믿기로 했다. 검을 쥘 때 악몽이 아닌 다른 것들이 먼저 떠오르게 되었다.
그 모든 과정을 지나온 지금, 그녀는 그와 검을 나눌 수 있다. 검을 나눈 후에 웃으며 대화할 수 있다.
‘다음에는 같은 기술이 안 먹히겠네.’
그녀의 몸이 단련되듯 유리엔의 실력도 점점 늘어날 것이다. 앞으로 이어질 그와의 대련이 그녀 역시 기대되었다.
‘대련이 기대된다니…….’
이제 검이 싫지 않다. 오히려 좋다. 그녀는 검을 잡는 것이 즐거워졌다.
에키는 들고 있던 시험용 검을 희미하게 웃는 얼굴로 들여다보다가, 다가온 사관생도에게 넘겨주었다.
그사이 선언문 낭독이 끝났다. 팔뚝만 한 길이의 화려한 깃펜을 쥐고 바론이 선언문에 서명을 했다. 이어 테레사가 서명을 남겼다. 마지막은 시험관인 유리엔이었다.
기오사 오너 세 명의 서명이 새겨지 창천의 선언문이 게시되었다. 이로서, 창천이 그녀에게 기사가 될 자격이 있음을 인정했다.
기다리고 있던 샤이가 제단 위로 올라왔다. 두루마리와 잔 등의 물건이 얹힌 쿠션을 든 신관들이 성녀의 뒤에 도열했다.
소매가 긴 제례복에 황금관을 쓴 샤이는 제 상체만 한 두루마리를 신관으로부터 받아서 펼쳐 들었다. 에키는 성녀의 앞에서 무릎을 꿇었다.
창천의 맹세를 읊을 차례다.
성녀는 조그만 입을 열어 또랑또랑하게 물었다.
“에키네시아 로아즈, 그대는 어떤 다짐으로 검을 다루겠는가?”
“명예를 알고 성실을 담아 검을 다루겠습니다.”
“그대는 무엇을 위해 검을 쥐는가?”
“신에 대한 공경과, 이 땅의 평화와, 저 자신의 수양을 위해 검을 쥐겠습니다.”
“그대는 어떤 기사가 되겠는가?”
“약자를 위해 피를 흘리고 불의 앞에서 굽히지 않으며, 죽음이 다가올 지라도 신념을 따르는 기사가 되겠습니다.”
“신께 맹세하는가?”
“맹세합니다.”
긴 세월 동안 이어져온 창천 기사의 맹세가 오갔다.
성녀는 두루마리를 내려놓고 커다란 금잔을 들어올렸다. 잔 속에서 찰랑이는 성수 속에 에키가 제 피를 내어 몇 방울 떨어뜨렸다. 샤이는 그 물을 찍어 그녀의 이마와 양손등에 적셔주며 축복을 내렸다.
“축하해요, 언니.”
외워서 읊은 긴 축도의 끝에, 에키에게만 들리도록 조그맣게 속삭이며 샤이가 웃었다. 남은 성수를 가지고 성녀와 신관들이 물러났다. 서임식이 끝나면 관람객들은 저 성수로 축복을 받게 된다.
맹세가 끝나자 유리엔이 움직였다. 이번에는 시험관이 아니라 창천기사단장이자 성검의 주인으로서였다.
그는 예식용 은검을 한 자루 들고 있었다. 대기하고 있던 테레사와 바론이 각자의 기오사를 꺼내 들었다.
“살리기오사와 디몽기오사다!”
“기오사의 세례로군. 기오사가 두 개나…….”
“랑기오사까지 셋이지. 난 이걸 보고 싶어서 왔다고.”
“하긴 기오사의 세례는 거의 공개되지 않는 과정이니까.”
웅성임이 일었다. 기오사의 세례는 창천 특유의 서임식 전통이었다. 원래 하나의 기오사에게만 받거나, 오너가 부족하면 미뤄뒀다가 한 명의 기오사 오너가 다수의 신입 기사에게 한 번에 내리기도 하는 세례다.
유리엔이 들고 있는 은검에 바론이 살릭기오사를 가져다대었다. 그의 마나가 살릭기오사를 통해 흘러나와 은검을 한 차례 훑었다. 잿빛 마나가 광검을 휘감아 흘러내리며 은검으로 전해져 칼날을 물들인다. 바론이 광검의 주인으로서 축복했다.
“새로운 기사에게 분노를 통제하는 검의 축복을, 아르 세밧티엠.”
다음은 테레사였다. 디몽기오사로 은검에 세례를 내리며 그녀 역시 오랜 과거부터 전해진 기오사 오너의 축복을 읊었다. 바다 빛깔의 마나가 흐른다.
“새로운 기사에게 슬픔으로부터 지켜내는 검의 축복을, 아르 세밧티엠.”
제단 바로 앞에서 유리엔은 사관생도가 양손으로 받쳐 올린 쟁반 위에 은검을 올렸다. 그가 랑기오사를 꺼내 기오사의 세례를 내렸다. 눈부신 황금빛이 칼날을 물들였다.
“새로운 기사에게 정의를 추종하는 검의 축복을. 아르 세밧티엠.”
세례를 받은 은검을 들고 유리엔이 제단에 올라섰다. 무릎을 꿇고 있는 에키의 양어깨를 그 은검으로 가볍게 두드린다.
“아젠카의 깃발과, 신께 올린 맹세와, 기오사의 축복 아래에서, 그대를 창천의 기사로 임명한다.”
그가 은검을 눕혀 그녀에게 내밀었다. 그녀는 양손으로 그것을 받아 들었다.
“기사 에키네시아 로아즈, 맹세에 따라 검을 쥐겠습니다.”
“일어나라.”
유리엔은 일어선 그녀에게 푸른 망토를 둘러주었다. 그리고 그녀의 가슴팍에 금빛 매 문장을 달아주었다.
이 순간부터 그녀는 기사가 되었다.
원칙대로라면 이제 기오사 홀에 입장해야 했다. 창천의 서임식은 기오사 홀에 입장했던 기사가 나온 후에야 종료된다.
그러나 에키는 기오사 홀에 들어가는 과정을 건너뛰고 마지막 식순을 행했다. 기오사 오너가 된 기사가 기오사를 시연하는 것.
검은 문양에서 바르데르기오사를 뽑아낸다. 투명한 칼날이 서서히 드러나자 사위가 쥐 죽은 듯이 조용해졌다.
[주인아, 나 시선 때문에 간질거린다는 말이 무슨 느낌인지 알겠어. 쟤들 무지 부담스러워!]
그녀의 손에서 완전히 모습을 드러낸 마검은 역사에 기록된 마검과 다른 형태를 하고 있었다. 멀리서도 확연히 눈에 띄는, 검은 손잡이 주위에 떠도는 붉은 문양들.
바르데르기오사가 변화했다는 뚜렷한 증거였다.
[근데 인간들이 잔뜩 있는데 아무도 벌벌 떨지 않으니까 좀 신선하네. 쟤네 지금 나랑 주인이랑 대단하다고 쳐다보는 거지? 어, 음, 이거도 제법 기분 좋은 일인 거 같아! 신난다!]
마검이 떠들어대는 소리에 에키는 저도 모르게 웃었다. 그녀는 입가에 미소를 매단 채 마검을 들어 올렸다. 칼날을 휘감은 검은 마나가 검기가 되어 하늘로 치솟았다.
그녀를 시작으로 기오사 오너들이 차례로 검기를 쏘아 올린다. 뒤이어 제단 외곽에 도열해 있던 기사들까지 검기를 날렸다. 색색의 마나가 폭죽처럼 하늘을 가로질렀다. 함성이 터져 나왔다.
대신전에서 종을 울렸다. 깊고 맑은 소리가 사람들의 환성 사이로 흘러갔다. 새로운 기사의 탄생을 알리는 소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