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을 든 꽃 193화
커다란 그림에는 넓은 바다와 붉은 황혼이 드리운 하늘을 배경으로 새카만 용과 싸우고 있는 여검사의 모습이 담겨 있었다. 얼굴은 보이지 않지만 물결치고 있는 머리카락은 연한 분홍색이었고, 손에 쥐고 있는 검은 투명한 칼날의 마검이었다.
[와, 와! 저거 주인이랑 나지? 우와아, 진짜 멋지다! 야, 이거 엄청 잘 그린 거 맞지?]
에키는 멍하니 고개를 끄덕였다. 섬세한 곳은 비늘이 만져지고 감촉이 느껴질 것처럼 섬세하고, 과감한 터치로 휘몰아친 곳들은 금방이라도 꿈틀거리거나 바람이 일 것 같은 생동감이 느껴졌다.
로잘린이 말했던 대로 션은 정말 뛰어난 화가였다.
“그때 결절에서 크게 영감을 받았던 모양이에요. 몇 달을 고심하고 붙잡고 있더니 완성하자마자 당신에게 드리라고 하더군요. 마음에 드시나요?”
“전 미술에 조예가 부족하지만, 이게 걸작이라는 건 확실히 알겠어요. 이런 그림에 제 모습이 남다니 정말 영광이에요.”
“이런 광경을 볼 수 있었던 남편이 더 영광인 걸요.”
로잘린이 웃으며 손을 내저었다. 가족의 안부와 날씨와 소소한 잡담이 오간 다음, 그녀는 눈매를 휘며 물었다.
“그러고 보니 저, 로아즈 양에게 도움이 되었나요? 로아즈 양이 제게 도움을 청한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저는 그리 대단한 위치에 있지도 않고, 지금은 무력하지만…… 그래도 제법 수완이 있답니다. 혹 제 도움이 필요하다면 뭐든, 언제든, 제게 말하세요.〉
션과 릴리를 구해낸 후, 부은 눈으로 찾아왔던 로잘린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그때에는 인질로 잡혔던 남편과 딸을 간신히 되찾은, 아버지로부터 이용당하던 공녀였던 그녀가 지금은 디아상트 공작이었다. 선황을 끌어 내린 시발점이 된 폭로도 그녀 작품이었다.
물론 로잘린 혼자서 이뤄낸 일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아무나 해낼 수 있는 일은 아니라는 것도 확실했다. 스스로 했던 말마따나 로잘린은 정말로 수완이 있었다.
에키는 솔직하게 감탄했다.
“상상 이상의 큰 도움이었죠. 로잘린, 아니, 디아상트 공. 감사했습니다.”
“로잘린이면 충분해요. 음, 막상 도움이 되었다는 말을 들으니 부끄럽네요. 저보단 유리엔 경이 고생이 많으셨죠.”
로잘린은 로아즈 참사 직후, 유리엔이 그녀를 찾아왔던 것을 떠올렸다.
〈디아상트 공녀. 공작이 될 생각이 있나?〉
황태자를 황제로 만들기 위해서는 디아상트 가문의 힘이 필요했다. 하지만 윈들턴 디아상트를 내버려둘 수는 없다. 그렇다면 답은 하나였다. 공작가의 주인을 바꾸면 된다.
로잘린 디아상트는 유리엔의 질문을 듣자마자 그게 무슨 의미인지를 알아차렸었다.
〈제가 공작이 되지 않으면, 디아상트는 멸문이겠군요.〉
〈강제하려는 것은 아니다. 공녀가 원하지 않는다면…….〉
〈아뇨. 실은 한 번쯤 해보고 싶었어요. 제가 어디까지 해낼 수 있는지 궁금했거든요. 아버지는 딸에게 가문을 물려줄 생각이 전혀 없으셨던 것 같지만, 전 욕심이 많아서.〉
아마 션을 사랑하게 되지 않았다면 로잘린은 좀 더 야망을 불태웠을 것이다. 기분 나쁘지만 그런 점은 아비를 닮았다. 그녀가 아비와 확연히 다른 삶을 살게 된 건, 사람을 사랑할 줄 알았기 때문이었다.
주어진 기회를 잡지 않을 생각은 없었다. 갚아야 할 빚도 있었다. 로잘린은 기꺼이 유리엔의 계획에 협조했다.
그녀는 유리엔의 은밀한 지원하에 움직이기 시작했다. 창천기사단장의 지지와, 디아상트 공작이 마검으로 부린 수작에 대한 정보를 쥐고 디아상트의 사람들과 접촉했다.
가장 먼저 만난 건 어머니인 공작 부인이었다. 두 번째로 만난 건 언니인 황태자비였다. 그 뒤로 주요 친척들과, 핵심 가신들을 모조리 만났다. 마지막으로 만났으며 가장 힘들었던 상대는 공작의 친어머니이자 그녀의 할머니인 대부인이었다.
만나고, 협상하고, 설득하고, 거래했다. 가끔은 협박도 했다. 로아즈 참사로부터 마검 폭로까지의 한 달여, 그녀는 쉴 틈 없이 바쁘게 움직였다. 션과 살기로 결심하고 떠나기 전까지 습관적으로 하고 있던 인맥 관리가 큰 도움이 되었다.
그리고 창천기사단장이 마검의 음모를 알고 있는 판국에 현 공작을 따르다가는 가문 자체가 붕괴할 거라는 위기감과, 창천기사단장 자체가 협상에서 강력한 무기가 되어주었다.
이 정도의 무기를 가지고도 그녀의 터전인 가문 안에서 회유를 해내지 못한다면 수치스러운 일이었다. 결국 로잘린은 공작의 측근 외의 사람들을 전원 포섭하는 데 성공했다.
밑작업을 끝낸 뒤에는 유리엔의 계획대로 폭로를 준비하고, 황태자와 말을 맞춘 다음 제국의 수도로 향했다. 그 뒤로는 모두가 아는 대로였다.
“결국 제가 공작이 된 건, 유리엔 경의 힘이 컸죠.”
간략하게 과정을 풀어놓은 로잘린이 생긋 웃었다. 에키는 고개를 저였다.
“그의 조력이 있었다 해도, 그걸 해낸 건 결국 로잘린이잖아요. 로잘린은 대단해요.”
“정말 대단한 일을 해낸 분한테 이런 말을 듣자니 몸 둘 바를 모르겠네요. 최초의 바르데르기오사 오너님.”
“으, 놀리지 마세요, 로잘린.”
“놀리다뇨, 진심인데요. 그나저나 로아즈 양은 단장이 되지 않는 건가요?”
“적성에 안 맞아서요. 제가 했다간 아젠카가 엉망이 될지도 몰라요.”
“어머, 전 당신이 하게 되면 잘해 낼 것 같은데요.”
“잘하고 못하고 이전의 문제예요. 율이 일하는 걸 봤었는데, 도저히 그렇게는 못 하겠더라고요. 차라리 검을 휘두르는 게 낫지…….”
에키는 진저리를 쳤다. 유리엔이 미친 듯이 바쁜 것을 보고 사람을 혹사시키는 데에도 정도가 있다고 생각했던 기억이 뚜렷했다. 안 그래도 서류나 문서 작업에 능한 편이 아닌데, 잘하는 유리엔을 두고 그녀가 단장이 될 생각은 결단코 없었다.
로잘린이 눈썹을 슥 올리더니 입술을 휘었다.
“이젠 유리엔 경을 로드라고 부르지 않네요, 로아즈 양.”
“…….”
“진도는 많이 나가셨어요?”
숙제를 검사하는 가정교사 같은 투로, 로잘린이 은근히 물어 왔다. 에키는 무심코 오른손바닥을 노려보았다.
[주인아, 너 요즘 가끔 나 노려보는 거 같다……? 왜 그래?]
그녀는 깊은 한숨을 내쉬고 손바닥에서 시선을 뗐다. 그리고 묘하게 반짝이는 눈으로 자신을 보고 있는 로잘린에게 몇 가지 궁금한 것들을 물어보기 시작했다.
“저기, 로잘린…….”
* * *
12월 24일, 서임식 전날은 로아즈에서 2황자의 처형이 이루어지는 날이었다. 처벌은 로아즈 일가와, 로아즈 성에서 살아남은 시민들의 논의 끝에 정해졌다.
윈들턴 디아상트와 로라스 드 하르덴 키리에의 시신은 목을 잘라 성문에 내걸었다. 성을 오가는 사람들은 그 아래에 침을 뱉곤 했다. 제국 최고의 공작과 황제였다는 신분에 비하면 처참한 말로였다.
현자 헤레이스 리어폴드는 마나 코어가 파괴되어 반쯤 폐인이 되어 있었다. 그녀는 일치감치 재판을 받고 단두대에서 목이 잘렸다. 그 목은 선황과 전 공작의 아래에 내걸렸다.
로아즈 참사의 관계자 중에서 마지막까지 살아 있었던 건 2황자 카르엠 혼자였다.
날씨가 좋았다. 하늘이 청명하고 푸르렀고, 눈이 오지도 않았다.
“시작하라.”
로아즈 백작이 무표정하게 명했다. 병사가 카르엠을 얽어맨 밧줄을 잡아끌었다.
아젠카에 에키네시아의 서임식에 참석할 귀빈들이 속속들이 도착하고 있던 시각에, 카르엠은 마나 봉인구를 찬 맨발로 로아즈 성내를 걷기 시작했다.
길의 끝에는 단두대가 있었다. 앞서 걷는 병사가 큰 소리로 카르엠의 죄목을 읊는다.
로아즈 참사의 주모자, 죄인 카르엠.
지고한 황족이자 총애받던 황자였던 카르엠은 거친 옷가지도, 맨발도, 단두대형도 납득이 되지 않았다.
가장 거슬리는 것은 그를 노려보는 ‘미천한 것들’의 눈초리였다. 자신의 앞에 엎드려 고개도 못 들던 것들이 똑바로 서 있는 앞에서, 맨발로 끌려가고 있는 현실이 믿기지가 않았다.
병사의 목소리가 길게 이어진다.
죄인은 마검으로부터 추출한 살의를 이용하여 무고한 사람들을 살인자로 만들었으며…….
거리에 사람들이 빽빽했다. 슬픔이건 분노건 눈을 달구는 것은 똑같아서, 모두가 충혈된 눈으로 참사를 일으킨 ‘악마’를 노려보았다.
누군가는 가족을 잃었고, 누군가는 친구를 잃었고, 모두가 이웃을 잃었다.
분노를 참지 못한 자 하나가 돌을 움켜쥐었다. 작은 돌멩이가 날아가 카르엠의 종아리를 때렸다. 카르엠은 하나뿐인 눈을 희번뜩하게 뜨고 돌을 던진 쪽을 노려보았다.
감히, 라고 중얼거리는 순간 다른 방향에서도 돌이 날아왔다. 그것을 시작으로 여기저기서 돌이 날아왔다. 욕설이 쏟아졌다.
카르엠이 악을 쓰는 소리는 분노하는 사람들의 음성에 파묻혔다. 병사들은 그들을 굳이 제지하지 않았다. 카르엠은 결국 입을 다물었다.
중앙 광장의 단두대에 이를 때쯤, 카르엠은 상처투성이였다. 그는 형형한 눈으로 단두대 주위를 살폈다. 미친 듯이 누군가를 찾아 헤맸다. 그러나 그가 찾는 자들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유리엔은 2황자의 처형에 참석하지 않았다. 에키네시아 역시 불참했다. 이미 미래를 보고 있는 그들에게 2황자는 죽음을 보러 갈 가치도 없는 존재였다. 그들에게는 복수보다 행복을 가꾸는 것이 더 중요했다.
카르엠은 그것을 납득하지 못했다. 그는 끝까지 저주받을 동생이나 빌어먹을 분홍머리 계집을 찾아 눈을 굴렸다.
‘계속 바라왔을 복수잖아, 보러 오지 않을 리가 없…….’
……이상과 같은 죄목으로,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바…….
단두대 곁에 있던 병사가 마지막 문구를 소리 높여 읽고 있었다. 카르엠은 그것을 들으며 비로소 깨달았다.
‘없잖아.’
그들은 어디에도 없었다.
누군가를 증오하는 자에게 가장 큰 절망은 무관심이다. 자신은 그자를 증오하여 견딜 수가 없는데, 정작 그자에게는 자신이 분노조차 일으키지 않는 하잘것없고 무의미한 존재임을 깨닫는 것. 적조차도 되지 못했다는 현실. 파멸하는 것을 지켜볼 만큼의 관심도 없다는 의미.
알고 싶지 않은 진실이었다. 카르엠은 비명을 지르려 했으나, 꽉 막힌 목에서는 꺽꺽거리는 신음이 새어 나올 뿐이었다.
……따라서 죄인 카르엠을 사형에 처한다.
마지막 문구가 끝났다. 그 구절 속에서 카르엠에게 남은 것은 황족의 성이 아니라 죄인이라는 명칭과 이름뿐이었다.
마지막 귀빈인 크루엔 황제가 아젠카에 도착했다. 비슷한 시각에, 로아즈의 단두대에서 칼날이 떨어졌다.
* * *
12월 25일, 에키네시아 로아즈의 서임식이 시작되었다. 어제보다 더 좋은 날씨였다. 겨울치고는 따스하기까지 했다.
해가 뜨는 것과 동시에 창천기사단 본부 곳곳에 깃발이 올라갔다. 네 장의 날개를 편 황금빛 매 문양 아래에 바르데르기오사의 검은 문양이 수놓인 깃발이었다.
일찍이 일어난 사람들은 창천기사단 본부로 향했다. 오늘 특별히 개방된 본부는 몰려든 사람들로 인산인해였다.
창천의 서임식은 보통 세밧툼이라 불리는 행사용 건물에서 진행되지만, 이번에는 대신전의 성소에서 이루어진다. 참석하는 손님들의 수가 많아 세밧툼에서 수용하기 어려우리라 예상된 탓이다.
성소는 카이로스기오사가 보관된 신검의 홀 근처의 땅을 일컬었다. 태양 축제 등 일반에 공개하는 제례들이 그곳에서 이루어졌다.
기둥과 조각상으로 둘러싸인 직사각형 광장의 끝에 신검의 홀이 있고, 중앙에 제단이 있으며, 그 주위로 계단처럼 위로 뻗은 관람석이 있었다.
관람석은 해가 막 뜬 시간부터 사람이 차기 시작했다. 아침이 밝아왔을 무렵에는 빽빽하여 빈자리가 거의 보이지 않았다. 귀빈들도 금세 도착해 그들을 위해 배정된 자리에 앉았다.
크루엔은 귀빈석에 있는 자들의 면면을 보며 혀를 내둘렀다. 오늘의 귀빈석에서 가장 신분이 낮은 자가 공작이었다. 대부분이 후계자급 왕족을 보냈다. 마탑주나 현자급의 마법사들과, 각국에 몇 있지도 않은 마스터급 기사까지 동행한 상태로. 성녀가 등장했을 때보다 더 거창한 사신들이었다.
‘뭐, 제일 거창한 건 나지만.’
황제가 몸소 왔으니 제국만큼 거창한 사신을 보낸 나라는 없다고 봐야 했다. 크루엔은 쓴웃음인지 헛웃음인지 모를 것을 흘리고는 성소를 내려다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