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을 든 꽃 192화
노인은 그녀를 응시하며 신어를 읊었다.
“‘자격 있는 인간아, 너는 최선을 다했고, 원하던 것을 얻었구나. 축하한다.’”
에키의 눈이 커졌다. 그녀는 직감적으로 깨달았다. 저 신어가 무슨 뜻인지를.
“저희는 이것이 일어난 기적에 대한 설명이라고, 그러니까 순례자인 당신께서 걸어온 과거에 대한 신어라고 판단했습니다. 당신이 시간을 되돌린 걸 축하한다는 뜻으로 말입니다. 그러므로…….”
“아뇨, 그 신어는 과거에 대한 설명이 아니에요.”
그녀는 차근히 이어지던 대신관의 설명을 끊었다. 대신관이 살짝 눈썹을 치켜 올리고는 되물었다.
“과거에 대한 신어가 아니라면, 순례자께서는 그 신어를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그건…….”
〈자격 있는 인간아, 무엇을 원하는 가?〉
〈네가 다시 얻은 시간을 무엇을 위해 쓰겠느냐?〉
카이로스기오사가 그녀에게 물었을 때, 그녀는 무어라고 대답했던가.
그냥, 살아갈 거야. 지금은 죽어 있는 거나 다름없어. 지금의 나는…… 도저히, 행복해질 수가 없으니까.
〈두 번의 기적은 없을 것이다. 그러니 최선을 다해 행복해져 보거라.〉
시간을 되돌리기 직전, 신검은 그녀에게 그렇게 속삭였다. 그러므로 ‘최선을 다했고’, ‘원하던 것을 얻었’다는 말은 결국.
“……예언이에요.”
에키는 홀린 듯이 답했다. 보라색 눈동자가 제단 중앙의 카이로스기오사를 향했다. 천천히, 그리고 뚜렷하게, 신어가 와 닿는다.
시간을 관조하는 검은 시간을 되돌리는 것과 동시에 그녀의 먼 미래, 그녀의 시간이 모조리 끝나는 지점까지 지켜보고 말했다.
너는 행복을 얻었다고. 얻을 것이라는 축복이 아니라, 이미 얻었다는 결과를.
그러므로 그것은 예언이자 결론이었다.
앞으로 무슨 일이 있든, 어떤 어려움이 있더라도, 그녀는 늘 최선을 다할 것이며, 결국 항상, 반드시, 행복해지리라는 것을. 그녀가 살아갈 날들이 그녀가 원했던 바로 그 행복한 시간들임을.
문득 그녀가 시간을 되돌린 후 깨어난 시점이 마검을 발견하기 전의 새벽이 아니라, 이미 빈 꾸러미가 발견된 아침이었던 일을 떠올렸다.
새벽부터 아침까지의 공백. 그녀가 잠들어 있던 시간. 그녀가 사용한 신검이 잠들어 있었던 시간과 일치하는 공백이었다.
그 시간 동안 신검이 새롭게 편성된 그녀의 시간을 들여다보며 자신이 일으킨 기적의 결과를 확인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신검도 그녀도 잠들어 있었던 걸지도 모른다.
추측에 불과한데도 어쩐지 확신이 들었다. 그녀는 황망히 중얼거렸다.
“신검이…… 제 미래를 봤군요.”
[네가 옳다. 나는 보았다. 옛 시간이 사라지고 새 시간이 오기 전, 시간의 틈에서.]
바람 소리처럼 가볍게 귓가에 속삭임이 머물렀다 떠났다. 그리고 다시 한 번 더.
[네가 새로 만들어낸 시간들은 옛 시간들보다 흡족했다. 너는 원하던 것을 누릴 자격이 있다. 살아가거라.]
그것으로 끝이었다. 신검은 더는 말하지 않았다.
에키는 모르는 새 멈춰 있던 호흡을 가늘고 길게 내쉬었다.
유리엔이 굳어버린 그녀를 걱정스럽게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는 불현듯 치밀어 오르는 떨림을 자제할 수가 없어서 그의 품에 기댔다. 그가 반사적으로 그녀를 받쳐 안아주었다.
“에키?”
손끝 발끝까지 벅차 오른 무언가가 그녀의 내부를 가득 채웠다. 벅차 오른 감정을 설명하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그녀는 그저 그것을 드러냈다.
유리엔은 그녀가 물기 어린 눈을 하고선 옅게 미소 짓는 것을 보았다. 긴 터널의 끝에 보이는 엷은 빛처럼, 흐리고 작음에도 불구하고 눈부시게 강렬한 미소였다. 그녀가 속삭였다.
“저는 행복해질 거예요, 율.”
* * *
에키네시아 로아즈의 서임식은 12월 25일로 예정되어 있었다.
규모가 컸기에 날짜가 다가오자 모두가 점점 바빠졌다. 최초의 바르데르기오사 오너를 보기 위해 관광객들과 각국의 사신들도 몰려오기 시작했다. 아젠카 전체에 축제를 앞둔 것마냥 들뜬 분위기가 감돌았다.
정작 서임식 당사자인 에키네시아는 한가한 편이었다. 그녀는 느긋하게 정식 기사용 제복을 맞추고, 현자와 니콜의 논문 작성을 돕고, 서임식 이후에 열릴 연회와 신년 연회를 대비한 드레스를 맞췄다.
신년 연회용은 파티마, 앨리스와 함께 시내로 나가 그녀가 직접 맞췄지만, 서임식 연회용은 그럴 수가 없었다.
“굉장한 드레스군요.”
“조금 과하지 않나요?”
가봉한 드레스를 걸친 에키가 어색하게 웃었다. 어지간하면 즐길 그녀로서도 이건 좀 과했다. 디자인이 과한 게 아니라 들어간 원단과 보석과 자수와 레이스의 수준이 과했다.
검은 비단에 길게 트인 슬릿 사이로 하얀 러플이 허벅지에서부터 발 끝까지 겹겹이 늘어져 있었다. 러플의 끝단마다 섬세한 레이스와 작은 보석이 달려 움직일 때마다 별무리처럼 반짝였다.
디자인이 깔끔한 편인 데다 검은색과 하얀색 위주라 단조로워 보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곳곳에 포인트로 자리한 붉은 리본과 자수 덕에 그 드레스는 무척 화려했다.
특히 허리 뒤쪽으로 꼬리처럼 길고 풍성하게 늘어뜨린 붉은 리본이 핵심이었다. 그것은 재질과 형태 때문에 접혀 있는 나비 날개같이 보이기도 했고, 움직일 때 흔들리면서 너울거리는 불꽃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 드레스는 마검과도, 그녀 자신과도 아주 잘 어울렸다. 그야말로 바르데르기오사 오너인 에키네시아 로아즈만을 위한 드레스였다. 재봉사는 보람 찬 얼굴로 핀을 들고 움직였다.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던 수아드 술라이만 총행정관이 고개를 저었다.
“과하다는 뜻이 아닙니다, 에키네시아 님. 굉장할수록 좋거든요. 설명해 드렸던대로, 이번 서임식의 모토는 ‘모두에게 각인될 만큼 화려하고 거창하게’니까요.”
수아드가 안경을 치켜 올리며 생긋 웃더니 덧붙였다.
“그리고 어차피 이거 다 군주님 사비잖아요. 예산 걱정도 없는데 더 팍팍 써야죠.”
“아무리 그래도 이렇게까지 호화로운 건…….”
에키가 신년 연회용 드레스를 혼자 맞춰버리자 유리엔은 서임식 연회용 드레스만이라도 자신이 맞춰주고 싶다고 애걸했다.
그간의 경험상 그가 원하는 대로 선물하게 두면 끝도 없이 스케일이 커지리라는 걸 짐작한 에키는 사양하려 했었다. 예전보다 기능이 추가된 아메시스트만 해도 사실 허리에 성 한 채를 매달고 다니는 격이었다.
게다가 최근 그의 사택에 머물고 있는 며칠 사이에 그녀가 받은 것들도 하나같이 귀족인 그녀로서도 기함할 것들이었다. 예전에 마구잡이로 선물을 사오는 것을 보고 너무 많다고 했더니 가짓수를 줄이는 대신 질이 천정부지로 올라갔다.
그중에는 유리엔의 애마인 실피드와 동종인, 황금빛 도는 하얀 털의 말도 있었다.
정식 기사가 되려면 말을 마련하는 게 필수이긴 했지만 그 말은 그냥 명마 수준이 아니었다. 먼 조상 중에 유니콘이 있다고 전해지는, 대륙에 몇 마리 있지도 않은 혈통의 말이었다.
이건 좀 과하다는 말에 유리엔은 한결같이 그대에게 과한 것 따위는 없다는 대답으로 일관했다.
에키는 포기하고 그 말을 받아서 이름도 지어주었다. 유리엔의 말이 바람의 정령을 뜻하는 고대어에서 따온 이름이라는 것에 착안하여 공기의 요정으로부터 이름을 가져와 ‘아리엘’이라 붙였다.
이번 서임식 연회용 드레스 때도, 그가 눈썹을 늘어뜨리며 글썽이기까지 해서 에키는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그 결과가 지금이었다.
이쯤 되니 그녀는 진심으로 걱정이 되었다.
“단장님 좀 무리하고 계신 거 아니에요?”
“이미 소문 다 났으니까 ‘단장님’ 말고 편히 부르셔도 됩니다, 에키네시아 님.”
“…….”
“그리고 군주님 돈 많으시니까 괜찮습니다. 아젠카 예산에서 군주를 위해 매년 배정되는 개인 자산이 있는데, 군주님이 그거 지금까지 한 푼도 안 쓰셨거든요. 4년치가 고스란히 쌓여 있습니다. 있는 줄도 모르셨던 게 아닌가 의심스러울 정도 로요.”
“……고스란히요?”
“네. 아, 가끔 구휼 예산 부족하면 보태라고 내주시긴 했죠. 참, 군주님 말인 실피드도 사신 게 아니라 임무 가셨다가 모 왕실에서 받으신 거랍니다. 그 외에도 직접 나가신 임무에서 개인적으로 받은 대가들도 상당하신데 그거도 죄다 그냥 처박아 두셨더라고요. 검소한 것도 정도가 있지, 창고 목록 보니까 아주 자리가 없을 지경이라. 최근 에키네시아 님 덕분에 자리가 생겨서 다행입니다.”
수아드가 보란 듯이 한숨을 내쉬었다.
“창천기사단장 월급도 무지막지한데 그것들도 거의 손 안 대고 내버려 두셨을걸요. 군주님 같은 분은 여러모로 돈을 좀 써주시는 게 대륙의 경제를 위해서도 낫습니다. 그러니까 이정도로 과하다고 여기지 마세요. 마음껏 지르세요.”
에키는 할 말을 잃고 멍하니 입을 벌렸다. 그가 퍼붓는 선물의 스케일을 보고 짐작하긴 했지만, 이건…….
“거기, 루비 말고 레드 다이아몬드로 가져와요. 그리고 은제는 다 치우고 백금만 꺼내세요.”
수아드가 에키에게 말하다 말고 보석상에게 지시했다. 보석상이 황급히 물건을 다시 꺼내는 찰나, 방으로 유리엔이 들어왔다.
“수아드 총행정관, 휴일에 여기까지 무슨…… 일로…….”
미간을 찌푸린 채 들어왔던 유리엔은 가봉 중이라 훤히 드러난 에키네시아의 등을 목격하고 말끝이 무너졌다. 붉은 리본과 검은 비단 사이로 보이는 하얗고 매끄러운 등. 등에서부터 허리로 이어지는 부드러운 곡선.
“급히 논의드릴 게 있어서 왔다가, 군주님께서 디트리히 경과 함께 연무장에 있으시다기에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율, 너 왜 입구를 막고 서 있, 으악!”
유리엔은 뒤따라 들어오려던 디트리히의 얼굴을 손으로 덮어 밀쳐냈다. 밀려난 디트리히가 기가 막혀 물었다.
“너 이 자식, 뭐 하는 짓이야?”
“눈 돌리고 가라.”
“……뭐? 야!”
유리엔은 아예 문을 닫아버렸다. 디트리히가 밖에서 무어라 화를 내며 투덜거리는 게 들렸으나 그는 문에 등을 기대 설 뿐이었다. 그러곤 얼이 빠져 있는 에키 쪽을 흘깃 본 다음 곧바로 고개를 푹 숙이며 입가를 가렸다.
“율, 왜 그래요?”
“……그 드레스, 설마 완성된 건가?”
“아뇨, 가봉 중이라서……. 아.”
갸웃거리던 에키는 드러난 등을 알아차렸다. 그녀는 황급히 몸을 돌려 등을 숨겼다.
부상 치료를 위해 등을 드러낸 적도 있었고, 선을 넘을 뻔하기도 했지만, 그것과 이런 건 별개였다. 그녀의 낯도 불그스름해졌다.
수아드 총행정관은 새빨개져서는 십대 소년처럼 수줍어하는 아젠카의 군주를 보고 얼어붙었다가, 에키네시아 쪽을 한 번 봤다가, 천장을 봤다가, 다시 군주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사무적으로 물었다.
“결혼식 날짜는 언제쯤으로 잡아두면 될까요? 준비할 게 많으니 되도록 미리 알려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
* * *
로잘린 디아상트, 새로운 디아상트 공작이 된 그녀가 아젠카에 도착한 건 서임식 이틀 전이었다. 그녀 역시 서임식 참석 목록에 있었다. 에키네시아와 그녀는 유리엔의 사택 응접실에서 만났다.
“이거, 선물이에요.”
로잘린은 하인이 두고 간 큼직한 액자를 가리켰다. 그녀가 직접 액자에 덮여 있는 포장지를 벗겨냈다.
“이건……. 세상에, 션 공이 그리신 건가요?”
“네, 남편 작품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