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을 든 꽃 191화
“발. 사람들이 나를 누구로 기억할 것 같아?”
[…….]
“아메시스트의 주인이 아니라, 모두가 나를 바르데르기오사 오너로, 마검의 주인이라고 부를 거야. 내 검이라고 하면 모두 널 떠올릴 거라고.”
[……정말?]
“당연하잖아. 이건 내 검이라기보다, 뭐랄까……. 유리엔과의 증표 같은 거니까.”
얼굴이 뜨거워지는 기분이다. 에키는 주위에 아무도 없는 것을 재차 확인하며 슬쩍 손부채질을 했다.
[그럼 내가 예뻐, 쟤가 예뻐?]
“…….”
솔직히 에키의 취향은 아메시스트 쪽이었다. 희고 섬세한 검을 보면 유리엔이 연상된다.
그렇다고 솔직하게 말할 순 없고, 이런 걸로 거짓말을 하기에도 뭣하고. 에키는 잠시 고민하다가 대답했다.
“네가 더 멋있게 생겼어.”
[진짜? 진짜지?]
“응, 정말로.”
[쓸 때는? 쓰기에도 내가 더 좋아?]
“물론. 네가 훨씬 편하고 좋아.”
그 점은 확실하게 바르데르기오사를 편들 수 있었다. 마검은 신이 나서 히죽거렸다. 겨우 삐진 게 풀린 듯해서 에키는 작게 한숨을 쉬었다. 마검이 아메시스트를 허접하다고 놀리는 노래를 흥얼거리기 시작했지만 그 정도는 눈감아 주기로 했다.
‘아메시스트에 자아가 없어서 다행이야.’
“에키 언니!”
회랑 끝에 나타난 소녀가 그녀를 향해 외쳤다. 샤이였다.
소녀는 제례복 차림으로 에키에게 달려왔다. 펄럭이는 옷자락이 다리에 감겨드는 바람에 휘청이며 넘어지려는 것을, 급히 다가간 에키가 받쳐주었다.
“으…….”
“조심해야지, 샤이.”
에키는 소녀를 바로 세워주고 떨어질 뻔한 황금관을 잡아 잿빛 머리카락 위에 다시 씌워주었다. 흐트러진 머리를 다듬어 주는데 손에 감기는 머리카락이 어린 고양이의 털처럼 보드라웠다.
아젠카에서 성녀로서 몇 달을 보낸 샤이는 누가 봐도 고귀한 사람으로 보였다. 살도 오르고 키도 조금 자랐다. 처음 만났을 때의 모습은 이제 잘 생각도 나지 않는다. 발간 뺨과 윤이 나는 눈동자를 보고 있으면 천사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천사만큼 예쁜 마음을 가진 아이니 천사로 보이는 게 당연한 걸지도 모르겠다. 너무 귀엽고 반짝반짝해 보여서 에키는 저도 모르게 소녀를 꽉 안았다가 놓아주었다. 샤이가 활짝 웃었다.
“언니! 무슨 일로 오셨어요?”
“대신관님을 뵐 일이 있어서. 몸은 좀 괜찮니? 네게 계속 신세를 지게 되네.”
“네, 많이 늘어서 이제 그 정도쯤은 별거 아니에요. 그리고 신세라뇨, 언니와 단장님이라면 얼마든지, 아니, 아니, 이게 아니라.”
샤이가 합 입을 다물더니 양손을 허리에 얹었다. 소녀는 그녀를 가르치는 신관들을 흉내 내며 짐짓 엄한 표정으로 말했다.
“얼마든지 고쳐드릴 순 있지만, 이젠 그만 좀 다쳐오세요. 두 분 다 왜 이렇게 맨날 다치시는 거예요? 그러다 큰일 나요!”
“미안해, 샤이. 내가 실수해서 그 래.”
“사과하실 필요는 없고, 제발 몸을 소중히 여겨주세요, 네? 제가 치료할 수 없는 상황이면 어떻게 하시려고요. 물론 저는 언제나 최선을 다해 치료하겠지만, 그래도 혹시 모르잖아요. 그러니 아프지 마시고, 다치지도 마시고…….”
“정말 미안해. 앞으로는 조심할게.”
할 말이 없는 에키가 쩔쩔매며 사과만 반복하는 사이, 뒤늦게 나타난 신관 아론이 목소리를 높였다.
“성녀님, 제례복을 입고 달리시면 위험하다고 제가 몇 번이나……! 이런, 에키네시아 님.”
아론이 얼른 고개를 숙였다. 에키 역시 그에게 인사를 했다.
“안녕하세요, 아론 님.”
“에키네시아 님의 소식을 들었습니다. 기오사의 변화라니, 찬미받아 마땅한 이적이었습니다. 위대한 분, 신께서 당신의 거취마다 축복을 내리실 겁니다. 아르 세밧티엠.”
아론은 가만히 성호를 그었다. 에키가 민망해질 정도로 공경하는 태도였다.
“그렇게까지 위대한 일은…….”
“아뇨, 그렇게까지 위대한 일이셨습니다. 조금 더 친교를 나누고 싶습니다만 성녀님의 일정이 밀려 있어서……. 성녀님, 가셔야지요. 루이스 신관님께서 기다리고 계실 겁니다.”
“잠시만요, 아론.”
샤이가 풍성한 옷자락을 야무지게 움켜쥐고 에키에게로 바짝 다가왔다. 에키는 자연스럽게 무릎을 굽히고 소녀와 눈높이를 맞췄다. 샤이가 그녀의 귓가에 소근거렸다.
“언니, 아직 비밀이지만, 대신관님이 제가 언니의 서임식을 맡아도 된다고 하셨어요. 그래서 지금도 그거 연습하러 가는 중이에요.”
“네가? 내 서임식을?”
“네. 저, 열심히 할 거예요!”
샤이는 수줍게 웃고는 아론에게로 달려갔다. 옷자락에 걸려 또 비틀거리는 소녀를 아론이 얼른 부축하고는 에키에게 꾸벅 고개를 숙여 보였다. 그들은 회랑을 돌아 사라졌다.
창천의 매들은 보통 수석 신관이 주관하는 서임식을 통해 기사가 된다. 서임식 과정 중에 있는 기오사 홀 입장 이후, 기오사 오너가 되었을 경우에만 대신관이 직접 축복을 내린다.
예법상 대신관보다 높은 위치에 있는 성녀가 직접 서임식을 주관하는 건 여러모로 이례적인 일이었다. 그 사실만으로도 그녀의 서임식이 평범한 서임식과는 궤를 달리한다는 증거가 될 정도로 말이다.
에키는 얼떨떨하게 샤이가 사라진 쪽을 바라보다가, 익숙한 기척에 고개를 돌렸다. 유리엔이 그녀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에키, 대신관이 그대를 기다리고 있다.”
“저 혼자요? 당신은요?”
“그대가 원한다면 함께 들어도 된다고는 하지만, 원칙적으로는…….”
“함께 들어요, 율. 어차피 당신에게도 말할 내용인 걸요.”
그녀는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앞으로는 당신에게 숨기지 않을 거예요. 기대기로 했으니까. 그러니 당신도 앞으로는 제게 힘든 일을 숨기지 마시고, 제게 기대주세요.”
유리엔은 그녀에게 숨기고 처리하려다 도리어 그녀를 더 힘들게 만들었었던 가짜 마검 사건을 떠올렸다. 그녀가 모든 것을 혼자 짊어지고 떠났을 때 그가 느꼈던 심정도 떠올려 본다.
이해와 신뢰가 있는 관계에서는 감추는 것보다 진실이 언제나 낫다. 처음부터 반박할 생각 따윈 없었지만, 그녀의 말에 따를 수밖에 없었다. 그를 비추고 이끄는 태양 같은 혼.
“그래, 앞으로는 무엇이든 함께 하겠다. 그대와 같이 변해가기로 했으니.”
그는 미소 지으며 그녀의 손을 맞잡았다.
* * *
대신관은 카이로스기오사가 있는 신검의 홀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신검은 누구도 만질 수 없기에 특별히 지킬 필요도 없었다. 따라서 신검의 홀은 경비를 위한 건물이 아니라 신성하고 상징적인 장소였다.
원형 공간을 덮은 거대한 돔 지붕 중앙에는 둥글게 뚫린 부분이 있었다. 카이로스기오사가 박혀 있는 대지 바로 위에 뚫린 천장 창이었다.
그곳을 통해 햇빛과 비와 눈과 바람이 모두 자유롭게 드나들었다. 어떤 비바람에도 손상되지 않는 신검은 모든 자연을 제 본체로 받아들이며 시간의 흐름을 보여주곤 했다.
신검의 주위를 빙 둘러 감싼 원형의 제단 옆면에는 기오사 전설 속의 장면들이 연속적으로 조각되어 있었다.
신검의 양옆에는 날개를 활짝 펴고 검을 들고 있는 천사들이, 신검의 뒤편에는 시계와 톱니바퀴가 어지러이 얽혀 있는 조각상이 보였다.
제단의 윗면에는 보석으로 새겨 넣은 열 자루의 기오사 이름이, 신검의 바로 앞에는 순금으로 만든 명패가 있었다. 명패에는 유려한 고대어로 딱 두 줄이 쓰여 있다. ‘카이로스기오사’, ‘신께서 시간을 빚어 만드신 검’.
신검의 주위에는 방문객들이나 신관들이 기도를 할 수 있도록 만들어 둔 대리석 단들이 있었다. 돔의 가장자리를 따라서는 허리쯤 오는 높이의 화단이 있는데, 1월부터 12월에 피는 꽃들을 시계 순대로 심어두었다. 화단의 외곽을 따라 파여 있는 수로에서 맑은 물이 졸졸 흘렀다.
엊그제 눈이 온 탓에 신검은 하얀 눈을 덮어쓰고 있었다. 얇은 겨울 햇살이 천장창을 통해 후광처럼 드리웠다. 칼날을 타고 흐르는 빛은 쉼 없이 색을 바꾸며 은은하게 빛났다.
가만히 서서 신검을 바라보고 있던 대신관이 입구에서 들리는 발소리에 몸을 돌렸다.
“처음 뵙겠습니다, 에키네시아 로아즈 님. 성검의 주인께서도 함께 오셨군요.”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대신관님.”
“편히 말씀하시지요. 당신께 공대를 듣기에 과분합니다.”
에키의 인사에 대신관이 손사레를 쳤다.
“아니에요, 공대하는 쪽이 편한 걸요.”
“순례자께서 그러하시다면. 이리로 오시지요.”
대신관은 그녀를 돔 외곽의 화단을 따라 놓여 있는 벤치로 안내했다. 유리엔은 창천기사단장으로서 대신관을 만나러 온 것이 아니었으므로 한 발 물러서서 조용히 뒤따랐다. 대신관 역시 유리엔에게는 가볍게 묵례만 했다.
에키는 그를 따라 걸음을 옮기며 말했다.
“순례자라 불리니 낯서네요.”
“그 호칭은 대신전에서 멋대로 정한 것일 뿐, 신검은 당신 같은 분들을 따로 지칭한 적이 없습니다. 에키네시아 님이라 부르는 쪽이 편하십니까?”
“아뇨, 상관없어요. 대신관님께서 편한 쪽으로 불러주세요.”
“알겠습니다. 그럼 순례자님이라고 부르겠습니다. 외부에서는 그리 부를 수 없겠으나, 신전 내에서만이라도.”
“네, 대신관님.”
“실은 지금 몹시 두근거리고 있습니다. 신의 종으로 살면서 신의 기적을 허락받은 순례자를 만나 뵐 날이 올 줄은 몰랐습니다. 역대 대신관 중에서 이런 영광을 누린 사람은 제가 처음입니다. 앞으로도 거의 없겠지요.”
아론도 저러더니, 대신관도 에키가 느끼기에는 찬사가 과했다. 적응이 안 된다. 그녀는 민망해져서 화단 쪽으로 슬쩍 시선을 돌렸다. 노인이 빙그레 웃고는 화제를 돌려주었다.
“참, 잘 알려져 있지 않은 사실이지만, 의외로 신관들은 신어를 자주 듣는답니다. 그런 신어들은 아주 사소한 내용들이지만 말입니다.”
“신검이 무슨 말을 하나요?”
“제단을 청소하던 수석 신관과 신입 신관들이 다 같이 듣고 기록으로 남긴 것이 가장 최근의 신어입니다. ‘올해는 겨울 꽃이 예쁘게 피겠구나’라고 하셨지요. 보십시오, 예쁘지요?”
대신관이 12시 방향에 있는 화단을 가리켰다. 노란 수선화와 발긋한 동백, 빨간 포인세티아 같은 겨울 꽃이 가득 피어 있었다. 그 풍경은 겨울이라는 계절과 어울리지 않게 화사했다.
“……그러네요, 정말.”
[카이로스기오사가 수다쟁이였어? 근데 자격 안 되면 자기 건드리지도 못하게 하는 놈이 아무한테나 그렇게 떠들어대도 돼? 심심해서 그런가?]
마검이 황당하다는 듯 중얼거렸다. 에키 역시 비슷한 의문을 품었다. 그녀의 얼굴에 그런 의문이 드러났는지, 대신관이 웃으며 덧붙였다.
“신검은 자격 없는 자와 대화하지 않지만, 일방적으로 말을 전하는 건 상관없는 모양입니다. 그러니 간혹 저희에게 말을 흘리는 것 아니겠습니까.”
겨울 꽃 화단의 가장자리에 김이 나는 티포트와 찻잔이 차려진 은쟁반이 준비되어 있었다. 그들이 벤치에 앉자 대신관은 손수 차를 따라 건네주었다. 에키나 유리엔이나 딱히 추위를 타진 않지만 서늘한 손을 데우는 따끈한 온기는 반가웠다.
“카이로스기오사는 까마득한 과거부터 더 까마득한 미래까지, 이 자리에서 홀로 모든 시간을 지켜보겠지요. 신검에게는 과거나 미래나 별반 차이가 없을지도 모릅니다.”
대신관은 자신의 잔에도 차를 따르며 계속해서 말했다.
“그래서인지 신어가 과거의 일에 대한 것인지, 미래의 일에 대한 것인지 애매할 때가 많습니다.”
“저와 관련해서 나온 신어도 그런가요?”
“예. 우선은 저희 나름대로 분석한 끝에 결론을 내리긴 했습니다. 하지만 순례자께서는 다르게 판단하실지도 모르겠습니다.”
“어떤 내용이었는지 알려주실 수 있나요?”
“물론 알려 드려야지요.”
대신관이 찻잔을 들어 목을 축였다. 그리고 차분히 입을 열었다.
“올해 3월 17일 새벽부터 아침까지, 카이로스기오사는 잠들어 있었습니다. 먼 옛날 ‘순례자’가 처음 등장했을 때와 똑같이. 그리고 이른 아침에 깨어난 신검이 흘린 말이 기도를 올리던 저희에게 들려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