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을 든 꽃 190화
에키에게 이끌려 걷던 유리엔은 그녀가 향하는 방향을 보고 퍼뜩 정신을 차렸다. 그녀는 창천기사단 본부 바깥, 사택으로 향하고 있었다.
“그쪽이 아니다, 에키.”
“네?”
“대신전이 방문을 청했다. 함께 가지.”
그가 품에서 편지를 꺼내 그녀에게 건넸다. 에키가 멈춰 서서 편지를 읽는 동안 유리엔은 뒤따르던 던컨 쪽을 흘깃 보았다. 눈빛이 서늘했다. 오싹해진 던컨이 급하게 말했다.
“저는 먼저 돌아가 있겠습니다, 아가씨.”
“그래.”
에키는 대신관의 편지에 신경이 쏠려 건성으로 대꾸했다. 던컨은 재빨리 사라졌다. 비로소 그녀와 그만이 남았다.
유리엔은 편지와 함께 챙겼었던, 하얀 가죽에 말려 있는 길쭉한 물건을 한 손에 들고 있었다. 그는 그것을 내려다보다가 편지를 읽고 있는 에키네시아를 가만히 살폈다.
[그냥 바로 주면 되지, 뭘 또 눈치를 보고 그러느냐.]
성검이 한심하다는 듯 중얼거렸다. 유리엔은 긴장한 손으로 물건을 고쳐 쥐었다. 그제야 편지를 다 본 에키가 고개를 들었다.
“순례자라는 거……. 율도 잘 모른 다고 했었죠?”
“그대에게 알려주었던 내용이 내가 아는 전부다.”
“대신관이 카이로스기오사에게 들었다는 예언은 뭘까요.”
“순례자 본인에게는 밝히겠다고 했었으니, 지금 가면 들을 수 있지 않겠나.”
에키는 미간을 찌푸렸다. 그녀가 시간을 돌린 사실을 대신전이 알고 있었다는 이야기에는 무척 놀랐었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니 모르는 게 더 이상하겠다 싶어져서 금방 납득했었다.
다만 카이로스기오사가 했다는 예언인지 신어인지는 무슨 내용일지 짐작도 가지 않았다.
[다 알면서 모르는 척하고 있었다는 거 기분 나빠. 수상하니까 죽이면 안 돼?]
“발, 안 되는 거 알면서 헛소리하지 마.”
[왜애! 말 정도는 할 수도 있지! 야, 솔직히 너도 내가 안 조르면 허전하지 않아?]
“안 허전하니까 입 다물어.”
[쳇.]
마검에게 작게 쏘아붙인 그녀가 유리엔에게 편지를 돌려주었다.
“가서 들어봐야겠어요. 율도 함께 갈 건가요? 막 도착했다면서, 바쁘지 않아요?”
“예정보다 하루 일찍 도착했으니 상관없다.”
“왜 이렇게 일찍 왔, 아.”
그녀는 말을 멈추고 그를 빤히 올려다보았다.
“보고 싶어서요?”
유리엔은 입술을 달싹이다가, 상기된 채로 조그맣게 대답했다.
“……그래.”
[나한테는 그렇게 뻔뻔하게 대답하더니, 마검의 주인한테는 수줍어하는 거냐? 나 원 참.]
성검이 푸념해 댔다. 에키가 그를 향해 웃는 바람에 유리엔은 그 푸념을 듣지도 못했다. 그녀는 활짝 웃으며 말했다.
“저도 보고 싶었어요, 율.”
[야, 너네 일주일도 안 떨어져 있었잖아?]
이놈의 마검을 어디다 처박아 놓든지 해야지. 그녀는 일그러지려는 표정을 간신히 자제했다. 심상찮은 분위기를 느낀 마검이 얼른 입을 다물었다.
에키는 옅게 한숨을 쉬고 멍하니 자신을 보고 있는 유리엔을 향해 물었다.
“황태자, 아니, 이제 황제 폐하죠. 폐하와 의논은 어떻게 되었어요?”
“아. ……걸으면서 이야기하지.”
겨우 넋이 돌아온 유리엔이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크루엔과 의논했던 것을 전부 들었을 때쯤 그들은 기사단과 대신전 사이를 잇는 길에 접어들었다. 딱히 급하지 않았기에 가장 긴 길이었고, 그랬기에 예전에 걸었던 길이었다.
겨울의 이팝나무는 흰 꽃무더기 대신 눈송이들을 하얗게 이고 있었다.
“폐하께서 신경을 많이 써주시네요.”
“그대와 로아즈가 당연히 받아야 할 것들이다.”
“그래도요.”
그녀가 생각했던 것보다 크루엔은 더 적극적으로 배려해 주고 있었다. 처벌도 철저했고 일을 허술하게 넘길 것 같지도 않았다. 유리엔의 말대로 믿어도 될 만한 합리적인 사람이었다.
‘하긴, 시간을 되돌리기 전에도 디아상트 공작을 알아서 쳐냈던 사람이니.’
크루엔이 좋은 황제가 될 듯한 예감이 들자 마음이 편안해졌다. 그가 보낼 죄인과 죄인의 시신에 대한 처벌은 로아즈에서 이루어질 것이다.
“에키.”
나란히 걷던 유리엔이 나직이 그녀를 불렀다. 그의 걸음이 느려지더니 천천히 멈췄다. 그가 머뭇거리면서 그녀 쪽으로 들고 있던 물건을 내밀었다.
“싫지 않다면, 이것을 다시…… 그대에게 돌려주고 싶다.”
에키는 눈을 내리깔고 있는 그의 얼굴과, 그가 내민 하얀 가죽 꾸러미를 번갈아 보았다. 그것의 길이와 감싸고 있는 흰 가죽을 보자마자 무엇인지 알아차렸다.
〈그 검은 안 돌려주셔도 돼요.〉
성검을 잃은 그에게 대신할 검으로 건네주었다가, 마검을 들고 있는 그녀를 경계하며 뽑아 드는 모습을 보고 돌려받지 않았던 것.
아메시스트.
에키는 그에게서 꾸러미를 받아들어 풀었다. 자수정이 박혀 있는 하얀 칼이 모습을 드러냈다.
전에도 날렵하고 아름다운 검이었으나 좀 더 정돈된 느낌으로 변해 있었다. 세공이 추가되었고 날이 더 예리해졌다. 게다가 아무 무늬가 없던 흰 칼집에까지 마법진이 무늬처럼 섬세하게 새겨져 있었다.
“외관 말고도 기능에 약간 손을 보았다. 쥐고 있는 사람을 설정된 장소로 이동하게 해주는 마법이 걸려 있다. 한 번 사용하고 나면 마나가 전부 소모되어 대량으로 충전이 필요하지만, 그대라면 별문제가 없을 거다.”
열심히 설명하면서 눈치를 보는 유리엔의 모양새가 처음 아메시스트를 줄 때를 떠올리게 했다. 마음에 들어할까, 제발 마음에 들었으면 좋겠는데, 하는 심정이 고스란히 티가 났다.
그때의 그녀는 저 모습을 보면서도 그가 스콰이어에게 로드로서 평범한 선물을 주는 거라고 판단했었다. 이제는 그가 무슨 감정을 담아 이것을 주는지 알 수 있었다.
예전에는 이렇게 빤히 보이는 감정을 왜 몰랐을까. 입꼬리가 간질간질했다.
“이동 마법의 도착지는 아젠, 카로 해두었다. 그 외에도 사소하지만 편리할 마법이 두어 가지 더 있다. 조명용 빛을 만들어내는 마법과…….”
“이동마법이라니, 그건 혹시 어디를 가든 당신의 곁으로 돌아오라는 뜻인가요?”
그녀가 놀리듯 묻자 유리엔의 귀가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정답인 모양이었다. 그는 약간 망설이다가, 입술을 살짝 깨물더니 강하게 말했다.
“그래, 그대가 어디로 가든, 무엇을 하든, 아젠카로, 내 곁으로 돌아왔으면 좋겠다. 그대를 붙잡거나 얽어맬 생각은 없으나, 내가 항상 기다리고 있으리라는 것은 잊지 말아 주었으면 한다.”
전보다 약간 확고해진 것은, 그녀가 그를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확신하게 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럼에도 그녀를 우선하며 한 발 물러서는 태도는 여전하다. 황태자와 논의하고 거래한 결과를 들어보면 결코 무른 사람이 아닌데 말이다.
그가 기억을 잃었을 때 한 번도 웃지 않는 것을 보고 깨달았던 사실이 떠올랐다. 원래 그는 잘 웃는 사람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녀 앞에서는 녹을 듯이 웃는다.
‘혹시 내 앞에서만 물러지는 걸까. 내게 맞추고, 나를 우선하면서…….’
그러니까 얽어맨 생각이 없다는 건, 실은 그녀를 얽어매고 싶다는 뜻 아닐까.
에키는 그런 의심을 해보았다. 그의 진심은 더 욕심이 많을지도 모른다. 잘 참고 티를 안 낼 뿐 그럴지도 모르겠다.
당신이라면 내게 더 강력하게 요구해도 괜찮은데. 나도 당신을 놓아주고 싶지 않으니.
그녀는 떠오른 것을 그대로 입 밖에 내었다.
“저는 당신에게 좀 얽매여도 되는데.”
그녀가 아메시스트를 들어 올렸다. 검집에 달려 있는 허리끈을 그를 향해 내밀었다.
“매어 주실래요?”
처음 이것을 주었던 때처럼. 그 요청은 중의적으로 들렸다.
유리엔이 움찔하더니 말없이 그녀가 내민 끈을 받아 쥐었다.
그가 다가와 그녀의 허리에 끈을 돌려 감고 옆구리 근처에서 구슬들을 얽는다. 눈에 띄게 손이 떨리고 있었다.
에키는 바로 앞에 있는 그의 어깨에 툭 이마를 기댔다. 그의 심장이 어찌나 강렬하게 요동치는지, 그 고동이 그녀에게까지 전해질 정도였다.
그의 품에서는 청량한 향이 났다. 안개처럼 흘러나온 입김이 서로에게 닿아 스며든다. 그녀의 심장도 떨리기 시작했다.
서로를 얽어매고 싶다면, 얽어매면 되는 것 아닌가.
“율.”
“…….”
“우리 결혼할까요?”
구슬과 가죽끈이 유리엔의 손에서 주르륵 미끄러져 떨어졌다. 에키는 슬쩍 이마를 떼고 그를 올려다보았다.
“율?”
유리엔이 삐걱거리는 움직임으로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혼이 나가버린 낯이었다. 에키가 고개를 기울였다.
“싫어요?”
“아니! 절대로 아니다!”
그가 정신없이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다시 고장 난 목각인형처럼 뻣뻣해졌다. 에키는 그의 옷깃을 살며시 잡아당겼다.
“그럼, 대답은요?”
“자, 잠, 잠시만…… 잠시만.”
유리엔이 입가를 가린 채 심호흡을 했다. 귀와 목 아래에서부터 붉은 기가 퍼져나가 이마 끝까지 차오른다.
그는 얼굴을 몇 차례나 문지르고, 휘청이려는 몸을 세우고, 꿈인지 현실인지 확인하려는 것처럼 눈을 깜박이고, 한 번 더 심호흡을 하고는, 겨우 에키를 마주보았다.
“그대는…… 너무하다.”
바들바들 떨리는 음성으로 한 첫마디가 저것이었다. 에키가 눈썹을 모았다. 유리엔은 새빨간 얼굴로 그녀의 시선을 피하며 말을 이었다.
“내가 그대에게 청혼하고 싶었다. 제대로 하려고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눈매가 처지면서 그가 시무룩해졌다. 커다랗고 우아한 생김새의 남자가 왜 이리 마냥 귀여워 보이는지. 가슴 안쪽이 살랑살랑 나풀거렸다. 에키는 웃음을 참으며 말했다.
“무슨 준비를 했어요?”
“그건, 비밀이다.”
“언제 하실 예정이었는데요?”
“……그대의 서임식 이후에.”
“좋아요, 그럼 그때 대답을 주세요.”
“대답이라니, 내 대답은 당연…….”
에키가 유리엔의 입을 손으로 가볍게 막았다. 그녀는 미소 지으며 말했다.
“그때까지 기다릴게요. 기대하면서.”
그리 말하며 웃는 그녀의 얼굴이 그에게는 홀릴 정도로 달콤해 보였다. 유리엔은 황홀해진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파란 눈이 당장이라도 찬사 내지는 고백을 쏟아낼 것처럼 출렁거린다. 에키는 슬쩍 그 시선을 피했다.
“너무 그렇게 보지 마세요.”
“그렇게라니?”
“제가 굉장한 사람이라도 된 것 같아서, 긴장된단 말이에요.”
유리엔이 조금 웃었다. 그에게 겨우 여유가 돌아왔다.
“그대는 굉장한 사람이 맞으니, 긴장할 이유도 없지 않나. 그대가 이룬 것들을 떠올려봐라.”
“그런 굉장함 말고요.”
“그럼?”
에키는 달아오른 뺨으로 우물거리고는 그의 팔짱을 꼈다. 유리엔이 순간적으로 숨을 멈춘다. 그의 온 신경이 그녀에게 닿은 곳으로 기우는 게 느껴졌다. 그녀는 걸음을 옮기며 속삭였다.
“이거 봐요, 팔짱만으로도 당신을 정신 못 차리게 만드는 굉장한 사람이 된 것 같잖아요.”
“그건…… 된 것 같다가 아니라, 이미 되었다.”
“익숙해질 때도 되지 않았어요?”
“그대 잘못이니, 책임져다오.”
“어떻게…….”
유리엔이 그녀를 가로수 아래로 이끌었다. 주위에 보는 이라곤 하나도 없는데 하늘로부터 가리고 싶은 것처럼. 그녀의 귓가로 고개를 숙이고, 평소보다 낮아진 그의 목소리가 귓가에 파고든다.
“입 맞춰도 되겠나?”
귓바퀴가 저릿해졌다. 입을 열었다간 헛소리가 나올 것 같아 에키는 그냥 팔을 뻗었다.
눈이 솜사탕처럼 쌓여 있는 나뭇가지가 드리운 아래에서 호흡이 맞물렸다.
* * *
대신전에 도착해 유리엔이 방문을 알리러 간 사이, 에키는 안뜰이 보이는 회랑에서 잠시 기다렸다. 근처에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한 그녀는 마검을 불러보았다.
“발.”
[왜.]
사람이었다면 볼이 퉁퉁 부어 있을 법한 대꾸였다. 마검은 확실하게 삐져 있었다. 아메시스트를 돌려받을 때부터 짐작한 일이라 에키는 피식 웃었다.
“아메시스트는 보조용으로 쓸 거야.”
[왜. 네가 좋아하는 놈이 준 거고, 유용한 마법도 걸려 있다며! 그거나 써. 흥! 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