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을 든 꽃 189화
아직 대련이 남아 있었지만 클럽원들은 모두 검을 거두었다. 서로 할 이야기가 많았다.
그들이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상록수 울타리 아래에는 생도가 점점 늘어나고 있었다. 사관학교에 있는 생도란 생도는 죄다 몰려나오는 듯했다.
“무사해서 다행이다, 에키. 걱정 많이 했다.”
바라하가 웃는 얼굴로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 가벼운 목소리와 달리 눈동자가 떨리고 있었다. 아직 마무리되지 않은 감정의 편린이 그 눈동자에 묻어 있었다. 에키는 그것을 모른 척했다. 그게 나을 테니까.
“그렇게까지 고생하진 않았어요. 그나저나 선배님, 존대에 익숙해지라고 하시더니…….”
“서임식 전까지는 귀여운 후배님일 뿐이지. 존대하길 원하십니까, 혼자서 말도 없이 전부 짊어지고 기사까지 그만둔 에키네시아 경?”
“아, 아뇨, 그러지 마세요. 미안해요.”
에키는 급히 고개를 저었다. 바라하가 픽 웃는 사이 파티마가 냉큼 끼어들었다.
“에키, 탈퇴했어도 클럽에 가끔 놀러 와라! 그럴 거지?”
“네, 파티마 선배님. 꼭 그럴게요.”
“그, 그럼! 지도 대련도 계속 해줄 거야? 맨날 해달라고는 안 할게. 가끔이라도!”
“물론이……. 알고 계셨어요?”
반사적으로 답하려던 에키가 화들짝 놀랐다. 모임 때마다 클럽원 전원에게 지도 대련을 하긴 했지만, 앨리스 외에는 최대한 티가 나지 않게 나름 애를 썼었다. 대놓고 지도 대련을 하면 자존심이 상할 테니 평범하게 압도하는 척하면서 교묘하게 유도하는 식으로 말이다.
파티마의 눈매가 반달처럼 휘어졌다.
“물론 알고 있었지. 이젠 대놓고 해줘도 돼. 정말 고마워, 에키.”
“……뭘요, 제가 좋아서 한 일인 걸요.”
클럽원들에게 지도 대련을 해주는 건 꽤 뿌듯하고 흥미로웠었다. 검에 대한 거부감이 옅어져서 가능했던 일이었고, 그 지도 대련들 덕에 조금씩 더 검이 좋아졌었다. 이제는 검을 쥘 때 악몽 같은 기억들보다 다른 기억들이 먼저 떠오른다.
에키는 클럽원들을 돌아보았다. 그녀가 마검의 악마라고 불릴 때도 아니라고 항변했던 사람들이었다. 창천의 기사가 되는 모습이 보고 싶은 사람들이다.
약간씩 차이는 있어도 그들 모두 마스터가 될 만한 자질이 있었다. 그 개화를 앞당기고 유도해 주고 싶어졌다.
“좀 자주 올지도 모르겠는데, 괜찮나요, 선배님?”
“괜찮다 못해 영광이지! 최초의 바르데르기오사 오너가 해주는 지도 대련인데! 쟤들은 지금 부러워서 미칠걸.”
파티마가 클럽 모임을 지켜보고 있던 생도들 쪽을 슬쩍 턱짓했다. 그녀의 말대로, 그들은 이미 반쯤 광란상태였다. 탄식과 감탄을 포함한 괴상한 소리들이 터져 나왔다. 간절하게 파티마 쪽을 바라보는 생도들도 있었다.
클럽원이 사관학교를 졸업하고 기사가 되면 간혹 후배들을 위해 클럽에 와서 검을 봐주곤 했다. 이런 전통과 선후배 관계는 오래된 클럽의 장점 중 하나였다.
그러나 기오사 오너, 심지어 제니스의 경지에 이른 기사가 지도 대련을 해주는 경우는 지금껏 없었다. 아예 새로운 전설을 쓰고 있는 존재인데 그녀 같은 사람을 스승으로 섭외하는 게 가능할 리가 없다.
아젠카의 사관생도는 검에 평생을 바치다시피 한 사람들이니, 부러워서 미치는 정도면 양호한 반응이었다. 내일부터 위즈덤 클럽 가입 신청서가 장작을 떼도 될 만큼 쌓일 게 뻔했다.
“쟤가 지도 대련을 했었……. 아니, 그녀가 지도 대련을 했었습니까?”
미하일이 얼결에 튀어나간 반말을 급히 수정하며 물었다. 파티마는 갸웃거리며 소년을 돌아보았다.
“미하일 생도는 몰랐어? 당연하잖아, 차원이 다른 실력인데 평범한 대련이 되겠어?”
“그…… 그렇군요.”
[쟤 좀 덜 건방져진 거 같아. 근데 그래도 아직 건방져. 그러니까 죽이……자고는 안 할게. 안 했으니까 나 착하지? 칭찬해 줘, 주인아!]
에키는 마검이 시끄럽게 떠들어대는 것을 한 귀로 흘리며 미하일을 바라보았다. 란셀리드도 키가 쑥 컸는데 미하일도 키가 꽤 커졌다. 저 나이대의 소년들은 확실히 금방금방 자라는 느낌이었다.
에키의 시선을 느낀 미하일이 머쓱하게 제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렸다. 그녀와는 눈도 마주치질 못하고 있었다. 테오가 그의 옆구리를 꾹 찔렀다. 질겁한 미하일이 룸메이트를 노려보았다. 두 소년이 무어라 낮게 속닥였다.
“에키.”
에키가 다른 클럽원들과 대화를 나누는 사이 줄곧 입을 다물고 있던 앨리스가 나직이 에키를 불렀다.
“앨리스! 잘 지냈어요?”
“……에키, 제가 에키와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았다는 것을 압니다. 우리가 서로를 알게 된 시간도, 함께 지낸 시간도 길지 않았지요.”
그녀는 눈을 내리깔고 양손으로 검집을 꾹 움켜쥐었다.
“그러니 그렇게 떠나면서 왜 제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는지, 저를 믿지 못했는지 따질 수 없다는 것도 압니다. 그럼에도 저는, 당신과 친구라고 생각했기에.”
앨리스가 숨을 들이키고는 고개를 들었다. 회색 눈동자가 잔뜩 흐려져 있었다.
“……서운했습니다, 에키. 정말 많이…… 걱정했고요.”
“……앨리스.”
에키는 그녀에게 다가가 검집을 쥐고 있는 손 위에 제 손을 겹쳤다.
“제가 대련을 하면서 즐겁다는 생각을 한 건, 앨리스와 했을 때가 처음이었어요.”
“…….”
“당신을 친구라고 여기지 않아서 말하지 않은 게 아니에요. 그저…… 누구에게도 말하기 버거운 일이었을 뿐이에요.”
“아닙니다, 에키. 말하지 않은 건 이해합니다. 제가 서운하다고 한 건, 그러니까…….”
망설이며 몇 차례 달싹인 입술이 천천히 열렸다.
“에키가 그렇게 떠나면서, 혹시 저도 당신을 악마라고 여길 거라 생각한 건 아닌가 싶었습니다. 마검을 가지고 있든 말든 에키는 에키라고, 그렇게 전할 기회조차 없는 걸까 싶어서……. 그게 서운해서.”
급하게 말을 늘어놓던 앨리스가 소매 끝으로 눈가를 문질렀다.
“미안합니다, 이건 정말 어린애 같은 투정이군요.”
에키는 낯을 붉히는 앨리스를 멍하니 응시했다. 그녀가 진실을 숨겼다는 것보다, 자신이 그녀를 믿는다는 사실을 전할 수 없었던 것이 서운했다고 하는 친구를.
시간과 마음은 비례하지 않는다. 어울려본 또래 중에서 가장 짧은 시간을 함께했음에도 불구하고 앨리스가 누구보다 진심으로 그녀와 가까워진 것처럼.
몽글몽글한 것이 목 안쪽에서 돌아다녔다. 그녀는 마음이 이끄는 대로 올곧은 친구를 와락 끌어안았다.
“에키?”
“앨리스, 저도 투정을 부려도 돼요?”
“네, 뭐든.”
“제 스콰이어가 되어주세요.”
“네?!”
되묻는 앨리스의 목소리가 깜짝 놀라 갈라졌다. 흐뭇한 미소를 물고 지켜보던 파티마가 우와, 하고 감탄했다. 바라하가 눈썹을 치켜 올리더니 빙글거리며 팔짱을 꼈다. 자기들끼리 속닥이던 미하일과 테오가 휘둥그레져서는 그녀들을 쳐다보았다.
에키는 꽉 안았던 팔을 풀면서 앨리스를 빤히 올려다보았다. 충동적으로 꺼낸 제안이었지만 꺼내고 나니 절대 물리고 싶지 않았다.
기사로서 임무를 떠날 때 그녀의 뒤에 설 스콰이어가, 그녀의 경험과 검술을 전해 받을 사람이 앨리스였으면 좋겠다.
앨리스는 자신을 올려다보는 커다란 보라색 눈망울이 느릿하게 깜박이는 것을 보았다.
“싫어요? 저는 앨리스를 지명하고 싶지만, 앨리스가 싫다면…….”
“아뇨, 싫지 않습니다! 그럴 리가 없지 않습니까.”
뻣뻣해져 있던 앨리스가 황급히 대꾸했다. 그러더니 허둥지둥 에키를 향해 경례했다. 정신없는 와중에도 우아하게 각 잡힌 경례였다.
“자, 잘 부탁드립니다.”
“저야말로요, 앨리스. 서임식을 하고 나면 정식으로 지명할 테니까, 잘 부탁해요.”
엄밀히 따지면 아직 스콰이어 상태인 사람이 스콰이어를 지명하는 기상천외한 광경이었다. 그럼에도 누구도 그것을 따지지 않았다. 부러움의 신음만이 간간히 흘렀다.
그러다 돌연 생도들 쪽에서 술렁임이 일었다. 술렁임의 원인은 금세 알 수 있었다.
“다, 다, 단장님!”
“아르 세밧티엠.”
생도들이 우르르 물러나며 경례를 했다. 유리엔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그들의 인사를 받았다. 그러면서도 그의 눈은 에키네시아에게 쏠려 있었다. 그는 곧장 그녀에게로 다가왔다.
“에키.”
그녀를 부르는 그의 눈매가 곱게 접히며 화사한 미소가 떠올랐다. 눈동자가 가을 하늘마냥 맑게 반짝인다. 살짝 흘러내린 에키의 귀밑머리를 그가 손끝으로 쓸어 넘겼다.
“그대를 찾고 있었다. 포와트에는 잘 다녀왔나?”
몇 마디 되지 않는 단순한 말에서도 마디마다 꿀이 뚝뚝 떨어졌다. 서늘하거나 담담하던 창천기사단장이 무르다 못해 녹아드는 낯을 하고 웃고 있다.
주위에 있는 사람들은 전혀 의식하지 않는 태도였다. 연무장 가득 정적이 흘렀다. 에키는 당황해서 그가 쓸어 넘긴 머리칼을 만지작거렸다.
“유, 유리엔……. 언제 도착한 거예요?”
그녀는 나름 사람들이 보고 있다는 것을 생각해서 애칭 대신 이름을 불렀다. 로드라고 부르면 된다는 건 미처 떠오르지 않았다. 따라서 별로 소용이 없는 짓이었다.
유리엔이래. 유리엔. 맙소사. 단장님 표정 좀 봐. 저게 뭐야. 지금 뭘 보고 있는 거지, 우리가? 저 두 사람 설마 그 소문대로…….
숨 죽인 속삭임이 오갔다. 초인적인 청력 덕에 그것을 고스란히 들은 에키의 얼굴이 붉어졌다.
유리엔은 다 들으면서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이제 숨길 필요가 없는 관계 아닌가. 오히려 좀 더 확실하게 소문이 났으면 좋겠다.
그는 자제하지 않고 표정을 흩뜨린 채 에키를 향해 웃었다. 여기저기서 헛바람을 들이키는 소리가 났다.
“나는 조금 전에 도착했다.”
“피곤할 텐데 쉬지 않고요.”
“괜찮다. 클럽 모임이 끝나려면 얼마나 걸리지?”
그리 말하며 그의 시선이 클럽장인 파티마에게 향했다. 파티마는 동그랗게 뜬 눈으로 그들을 보고 있다가, 급하게 손을 입가로 가리고 헛기침을 몇 번 했다.
“크흠, 크흠! 오늘 클럽 모임은 여기까지. 다들 다음 주에 보자! 참, 에키, 나중에 연락할 테니 드레스 사러 또 같이 가줄래? 신년 연회용 드레스가 아직 없어서.”
에키로서는 거절할 이유가 없는 제안이었다. 파티마가 드레스를 고르게 내버려두고 싶지도 않았고, 전에도 무척 즐거웠었으니.
“좋아요, 선배님. 앨리스, 앨리스도 함께 가요!”
“네, 에키.”
앨리스는 이번에는 순순히 받아들였다. 파티마가 잠깐 고민하더니 그녀를 향해 말했다.
“에키, 그럼 어디로 연락을 전하면 돼? 기사단 숙소?”
“아뇨, 유리엔의 사택……으……로…….”
아무 생각 없이 답하던 에키의 말끝이 흐려졌다.
예전에 독을 마시는 바람에 ‘로드’의 사택에 머물 때와는 상황이 달랐다. 지금, 유리엔이 저런 얼굴로 나타나서 그녀를 찾은 이런 순간에, 유리엔의 사택에 머물고 있다고 말 한다는 건 결국…….
안 그래도 몰려 있던 시선이 더 강렬하게 느껴졌다. 파티마가 멍하니 입을 벌렸다가 눈을 데구르르 굴리더니 샐쭉 웃었다.
“응, 알았어. 나중에 봐!”
“나, 나, 나중에 뵈어요, 선배님!”
에키는 새빨개지다 못해 거의 불타는 얼굴이 되어 유리엔을 잡아끌었다. 유리엔은 ‘같이 살고 있다’고 선언한 거나 다름없는 그녀의 발언에 반쯤 혼이 나가서는 그녀가 이끄는 대로 연무장을 벗어났다.
상록수 울타리 근처에서 대기하고 있던 던컨이 고개를 절레절레 내젓고는 그들의 뒤를 따랐다.
생도들이 하나 둘 자리를 떠났다. 지금까지 에키네시아 로아즈에 관해 돌던 소문과는 다른 의미로 충격적인 소문이 일파만파 퍼져나가리란 것이 분명해 보였다.
앨리스와 파티마가 서로 대화하며 먼저 떠나갔다. 연무장에 남아 검을 닦던 바라하는 미하일이 하얗게 질린 채 굳어 있는 것을 보았다. 테오가 그의 옆에서 난감한 얼굴로 머리를 긁적이고 있었다.
“미하일 생도, 고백할 생각이었나?”
바라하가 툭 던지듯 물었다. 미하일이 소스라치게 놀라 펄쩍 뛰더니 바라하를 돌아보았다.
“무슨 소립니까, 선배님? 고, 고, 고백이라뇨?”
“안됐지만 늦어도 한참 늦었어. 나도, 빠른 줄 알았는데 이미 늦었었지.”
“저는 선배님이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전혀 모르겠습니다.”
미하일이 창백한 얼굴로 꿋꿋하게 대답했다. 바라하는 어깨를 으쓱이고는 검을 챙겨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보아하니 깨달은 것도 최근인 모양인데, 힘들겠지만 그래도 잊어버려. 가망이 없으니까.”
바라하는 설렁설렁 손을 휘젓고는 연무장 밖으로 향했다. 바라하마저 떠나고 나자 테오가 한숨을 쉬며 미하일의 어깨를 툭 쳤다.
“야, 틀렸다. 바라하 선배님 말 아니더라도, 아까 두 사람 봤지? 그냥 잊어.”
“…….”
에키네시아가 아젠카에서 사라진 뒤에야 겨우 첫사랑을 자각했던 소년은 울적한 얼굴이 되어 고개를 떨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