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을 든 꽃-188화 (188/211)

검을 든 꽃 188화

1629년 12월 15일, 제국의 새로운 황제가 즉위했다.

유리엔은 즉위식이 끝나자마자 아젠카로 돌아왔다. 마나 열차에서 잠을 자는 것을 감수한 일정이었다. 도착하자마자 사택으로 간 그는 에키네시아가 외출했다는 것을 알았다.

유리엔이 제도에 가 있는 동안 가족이 있는 포와트에서 며칠 머물렀던 에키네시아는 유리엔보다 하루 먼저 사택으로 돌아왔다. 하녀는 그녀가 사관학교 클럽 모임에 참석하러 갔다고 전했다.

유리엔은 바로 사택을 나섰다. 그가 자리를 비운 사이 사택에와 있었던 편지와 소포를 챙겨 든 채였다.

[클럽 모임이면 금방 돌아올 텐데, 굳이 지금 거기까지 가야겠느냐?]

성검이 혀를 차며 말했다. 유리엔은 사택에 와 있던 편지를 들어 보이며 변명했다. 대신전에서 온 편지였다.

“대신관이 순례자의 방문을 청하고 있으니 전해주어야 한다.”

[지금 당장 가야 하는 건 아닐 텐데.]

“되도록 빠른 시간 내에 방문해 주었으면 한다고 쓰여 있잖나.”

[핑계 대지 말고 그냥 솔직히 말해 봐라.]

“……그녀가 보고 싶어서 도저히 기다릴 수가 없다. 게다가 사관학교 클럽 모임이면 바라하가 있을…….”

[아니, 내가 미안하다, 주인. 앞으로는 따지지 않으마.]

성검이 질린 투로 유리엔의 말을 끊었다. 솔직히 말하랬다고 이렇게 까지 솔직하게 말하다니.

‘물은 내가 잘못이지. 그래, 좋아 보이니 됐다.’

성검은 깊은 한숨을 쉬고는 입을 다물었다.

유리엔은 에키가 바라하를 깔끔하게 거절했고 자신을 진심으로 사랑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래도 신경이 쓰였다.

바라하가 그녀의 근처에 있는 게 싫다. 요즘은 던컨도 거슬렸다. 그녀가 찬양받는 건 괜찮지만, 그녀와 친밀한 사람은 자신뿐이었으면 좋겠다. 특히 남자는 죄다 치워버리고 싶다.

디트리히에게 제정신이 아닌 소리로 들린다고 했던 생각을 자신이 계속 되새기게 될 줄은 몰랐다. 전에도 했던 생각이지만, 역시 디트리히가 옳았다. 유치하고 바보 같은 질투라는 걸 머리로는 아는데 마음이 말을 듣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그녀에게는 이런 속 좁음을 드러낼 생각이 없었다. 그녀가 원하는 일을 그가 어떻게 싫다고 할 수 있겠는가. 대신 그녀의 관심 대부분이 자신에게 기울도록 계속 노력할 작정이었다.

유리엔은 사관학교로 향하면서 소포를 풀어 내용물을 확인했다. 그녀에게 줄 물건이었다. 주문대로 잘 완성되었는지 살펴보다 보니 어느새 사관학교의 입구가 보였다.

* * *

위즈덤 클럽 모임은 상록수 울타리로 둘러싸인 제6연무장에서 일주일에 한 번씩 열렸다.

제6연무장은 첫 모임 때도 사용했던 곳이었다. 사관학교 클럽이 주로 사용하는 연무장치곤 작은 편이었지만, 위즈덤은 클럽원의 수가 많지 않아서 그 정도로도 충분했다.

에키는 간만에 꼼꼼히 치장을 했다. 정말 오랜만에 클럽원들을 만나러 가는 길이었다. 계절이 바뀌었으니.

포와트에서 며칠 머물 때 어머니와 함께 재단사를 불러 맞췄던 겨울용 드레스를 꺼내 입었다. 회분홍색의 도톰한 원단에 최신 유행대로 풍성한 러플을 몇 겹이나 덧대고, 검은 레이스로 포인트를 준 드레스였다.

머리카락은 곱게 빗어 짙은 회분홍색 코사지와 검은 리본으로 장식했다. 장신구는 은과 흑진주를 엮어 만든 것을 선택했다.

날이 추우니 연회색 숄도 살짝 걸쳤다. 실상 그녀 정도의 수준이면 추위에 별로 영향받지 않지만, 기분상의 문제였다. 오랜만의 외출이라 기분을 내어 실컷 치장한 것과 같은 맥락이다.

몇 달간은 수배 생활을 했고, 갈로서스에서 돌아온 직후의 며칠은 무리한 몸을 쉬어주느라 사택에만 있었고, 그 뒤엔 가족과 함께 포와트에 머물렀으니 제대로 된 외출은 확실히 오랜만이었다.

사관학교로 향하는 구두를 신은 발걸음이 경쾌했다. 그녀를 뒤따르던 던컨이 말을 걸었다.

“기분이 좋아 보이십니다, 아가씨.”

“오랜만에 놀러가는 기분이라서.”

“오늘 정식으로 클럽을 탈퇴하러 가시는 것 아니었습니까?”

“탈퇴한다고 해서 못 보게 되는 건 아니잖아. 같은 창천에 계속 있을 건데 뭘.”

곧 기사가 될 예정인 그녀는 위즈덤 클럽을 탈퇴해야만 했다. 더 이상 사관생도가 아니기 때문이다. 스콰이어까지는 사관학교에 계속 있을 수 있어도, 기사가 된 사람이 그럴 수는 없는 법이다.

지난번에 유리엔을 구하러 가기 위해 기사 서임을 요청할 때는 너무 급했던지라 대부분의 절차를 생략했었다. 사관학교 조기졸업 절차를 밟지 못해서 클럽 탈퇴를 하지도 못했다.

이번에 유리엔이 그녀의 서임식을 준비하면서 조기졸업 문제는 처리해 두었지만, 클럽 탈퇴 문제는 아무래도 클럽원들을 직접 만나서 이야기하고 싶었다.

‘그러고 보니 서임식날이 유리엔과의 스콰이어 관계가 해지되는 날이기도 하구나.’

묘한 느낌이었다. 그와 그녀 사이에 있던 공식적인 끈이 사라지는 느낌이라 약간 허전한 기분까지 들었다.

‘공식적인 끈이라…….’

포와트에서 나이에 맞지 않게 어리광을 부리며 어머니와 같은 침대에서 잠든 날, 베개를 맞댄 어머니가 그녀에게 속삭이듯 물었다.

〈그 사람과 결혼하고 싶니?〉

에키는 제대로 대답하지 못했지만, 어머니는 그녀의 얼굴만 보고도 대답을 알아차리고는 후후 웃었었다.

란셀리드는 한동안 넋이 나가 있었지만 제법 빠르게 창천기사단장과 누나의 사이를 납득했다. 아젠카에 방문했을 때 수상한 낌새를 느꼈던 덕이었다.

납득한 후의 란셀리드는 귀찮을 정도로 그녀에게 달라붙어 창천기사단장이 어떤 사람인지, 정말 누님이 그 사람보다 강한지를 확인하려 들었다.

에키는 성가심을 견디지 못하고 마검을 뽑아 호수에 대고 검기를 날리는 것을 보여주었다. 아무리 작은 호수라지만 순간적으로 바닥이 드러나며 밀려난 물이 해일처럼 치솟는 것을 본 소년은 얼이 빠졌다.

그 뒤로 란셀리드는 다른 방향으로 귀찮아졌다. 초롱초롱한 눈으로 졸졸 쫓아다니다 못해 검을 가르쳐달라 조르기까지 하는 바람에 그녀는 남은 날 동안 동생을 은근슬쩍 피해 다녔다. 소년은 부루퉁해져서 투덜거렸다.

〈너무하시네요, 누님. 나중에 매형한테 가르쳐 달래야지.〉

〈매형? 너한테 매형이 어딨어?〉

〈에이, 누님도 내숭은. 알았어요, 예비 매형이라고 하면 되죠? 근데 언제 결혼해요?〉

〈…….〉

란셀리드는 그렇게 받아들였고, 백작부인도 기정사실로 받아들이면서 나름의 준비까지 시작했다. 유일하게 백작만이 그녀가 결혼하리라는 사실을 아직 받아들이지 못했다.

백작은 예전에 딸의 혼처를 찾고 이 영식이 어떠냐고 초상화까지 보냈으면서도 계속 혼란에 빠져 있었다. 창천기사단장이 상대이리라고는 상상조차 못 한 탓인 듯했다. 백작이 받아들이기엔 너무 거물인 사위였다.

〈저…… 정식으로 청혼이 오면, 그 때 생각하마. 그전에, 모르겠다…….〉

포와트에 머무는 내내 에키는 가족들의 그런 분위기를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 그냥 모른 척했다.

그녀로서도 실감이 안 나기도 했다. 그와 서로 함께하겠다는 마음을 확인한 지는 꽤 되었으나, 백작의 말마따나 정식으로 결혼 얘기가 오간 적은 없었다. 위장 약혼 때문에 그와의 관계를 드러내지도 못했다.

하지만 그 위장 약혼은 내전의 시발점이 된 로잘린의 폭로 때 이미 깔끔하게 끝났다. 워낙 거대한 스캔들이었고, 처음부터 창천기사단장이 그녀의 사정을 알고 있었다는 게 다 알려진 데다, 실제로 약혼식을 하지도 않았기에 아주 자연스럽게 잊혀졌다.

‘정말 하게 되는 걸까? 언제?’

에키의 뺨이 발긋해졌다. 던컨이 의아한 듯 물었다.

“추우십니까?”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너 왜 자꾸 멍해지고 빨개지고 그래? 무슨 생각해? 걔랑 요상한 분위기 내는 생각?]

마검의 말에 에키는 지그시 오른손을 움켜쥐었다.

[야! 그렇다고 때릴 것까진, 엥, 안 아프네? 주인아, 왜 요즘 안 때려? 불안하게.]

“이제 의젓해졌으니까 말로 해도 될 줄 알았는데, 아니야? 때려줬음 좋겠어?”

[죄송합니다, 주인님.]

“……존대하지 말랬지, 발.”

에키는 닭살이 돋은 팔뚝을 문지르며 진저리를 쳤다. 바르데르기오사가 개구지게 웃어댔다.

마검이 변화하면서 철이 들었다는 이야기를 들은 던컨이 말투도 공손해졌냐고 물은 후로 발은 가끔 이런 장난을 쳤다. 공손하게 굴 때 에키의 반응이 재미있는 모양이었다.

상록수 울타리 근처에는 위즈덤의 첫 모임만큼은 아니어도 제법 생도들이 몰려 있었다. 공개적으로 이루어지는 클럽 모임의 경우 생도들이 구경하러 오는 게 흔한 일이긴 했지만, 소수에 생긴지 얼마 되지도 않은 클럽 모임인 것 치곤 구경꾼의 수가 많았다.

외곽에 있던 생도 중 몇이 다가오는 에키네시아를 발견했다.

“헉, 야! 야! 저거 봐!”

“미친, 에키네시아 로아즈다.”

“진짜? 진짜 에키네시아 로아즈야?”

“우와, 여기엔 무슨 일이지?”

“위즈덤 모임에…….”

에키가 마스터임을 드러내고, 마검의 소유자임이 밝혀지고, 수배당하고, 제니스라는 것이 알려지고, 갈로서스에서 기적을 일으키고 마검의 주인임을 증명하는 동안 아젠카 내에서 그녀의 평판은 미친 듯이 요동을 쳤다.

처음에는 창천을 속이고 잠입한 악마로 불렸다. 창천의 공표가 있은 후로는 진짜 바르데르기오사 오너냐 아니냐는 갑론을박이 벌어졌다. 창천기사단장을 제압하고 저주를 풀어 낸 제니스라는 게 알려진 뒤로는 아무리 천재라지만 저게 사람이냐는 의심이 튀어나왔다.

갈로서스의 일 이후로 안정되었지만, 당시에는 험악하기 그지없었다. 그 속에서 그녀에 대한 관심은 그녀가 속한 클럽인 위즈덤으로 향했다. 온갖 헛소문이 떠돌았다.

그러나 위즈덤 클럽원은 한 명도 탈퇴하지 않았다.

그녀가 악마나 마물일 리가 없다는 항변의 대부분은 위즈덤으로부터 나왔다. 룸메이트였던 앨리스나, 클럽장 파티마, 그녀와 함께 결절에 갇혔었던 바라하, 그리고 그녀와 대련 몇 번 해본 게 전부인 미하일과 테오까지도.

〈오히려 그 시기를 거치면서 결속이 강해진 것 같더군요. 요즘이야 아가씨가 바르데르기오사 오너임이 확실해졌으니 위즈덤도 선망의 대상이 되었지만, 초기엔 꽤 힘들었을 겁니다.〉

위즈덤의 소식을 전해주었던 던컨이 했던 첨언을 떠올리며, 에키는 몰려 있는 사관생도들 사이로 걸음을 옮겼다. 그녀가 다가오자 사관생도들이 분분히 물러나며 길을 터주었다.

“저 사람이 바르데르기오사의…….”

“갈로서스에서…….”

“세상에, 내 눈으로 보게 될 줄은…….”

“난 순위전에서 검도 맞대봤어!”

“너 그건 들었어? 곧 서임식이…….”

등 뒤로 따라붙는 시선과 속닥거림이 뜨겁다 못해 열광적이었다. 어느 정도는 예상했지만 예상한 것보다 좀 더 격렬하면서도 조심스러웠다.

눈을 빛내면서도 다가오기는커녕 말을 걸지도 못하고 자기들끼리만 마구 떠들고 있었다. 몇몇은 이 기회를 놓칠 수 없다며 친구를 불러와야겠다고 달려가기도 했다.

에키는 뒤따르는 던컨에게 슬쩍 물었다.

“던컨, 쟤네 반응이 왜 저래? 요즘엔 사관학교에서 내 취급이 어떻기에?”

“여신님이죠.”

던컨이 덤덤하게 대꾸했다. 에키는 걸음이 흐트러져 발목을 삘 뻔했다.

“뭐?”

[우와, 그럼 난 신검이야?]

“에키?”

기가 차서 던컨을 돌아보던 그녀를 누군가가 멍하니 불렀다. 에키는 다시 앞을 보았다.

앨리스 윈터벨이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들고 있던 검을 늘어뜨리며 그녀의 회색 눈동자가 점점 커졌다. 그런 그녀의 곁을 누군가가 휙 지나쳐 에키에게로 달려왔다.

“에키! 오랜만이야!”

파티마가 땋아 내린 검은 머리카락을 팔랑거리며 에키를 끌어안았다. 에키보다 키도 몸집도 작은 탓에 사실 끌어안았다기보다는 안긴 것에 가까웠다.

앨리스의 뒤에서 고개를 내민 미하일이 얼어붙었다. 멀찍이서 테오와 검을 나눈 뒤 땀을 닦고 있던 바라하는 그녀 쪽을 보고 굳었다가, 만면 가득 미소를 띠었다.

“에키!”

에키는 파티마를 마주 안아주며 웃었다.

“오랜만이에요, 다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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