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을 든 꽃-187화 (187/211)

검을 든 꽃 187화

사용인들과 던컨, 이미 몇 번 방문했었던 니콜은 물러나고, 로아즈 일가만 벽난로가 있는 거실에 모여 앉았다. 가족들은 각자 감정을 추스르느라 한동안 조용했다.

백작부인이 진정하는 데에는 상당한 시간이 필요했다. 백작도 마찬가지였다. 란셀리드가 그나마 빠르게 낯빛을 가다듬었다. 소년이 눈이 빨개진 누나를 향해 부루퉁하게 말했다.

“누님, 전에 저한테 숨기는 비밀 같은 거 없다면서요.”

“…….”

“누님 완전 거짓말쟁이야. 너무하는 거 아니에요?”

할 말이 없어진 에키는 붉어진 코끝을 문지르며 훌쩍이는 소리만 냈다. 란셀리드는 입을 앙다물더니 볼멘소리를 냈다.

“그런 위험한 짓들을 가족들한텐 말도 없이 혼자 해요? 부모님 생각은 안 해요?”

“……너야말로 내가 얼마나 기겁한 줄 알아? 납치는 왜 당하는 건데! 이리 와봐, 눈은 괜찮아?”

에키가 손짓하자 란셀리드는 순순히 고개를 내밀었다. 그녀는 남동생의 보라색 눈동자가 양쪽 다 선명한 것을 확인하며 다시 새어 나오려는 울음을 간신히 삼켰다.

소년은 얌전히 얼굴을 내준 태도와 달리 화난 투로 대꾸했다.

“성녀님이 고쳐줬는데 멀쩡하죠. 저보다 누님이 심하거든요? 마검이라니, 어떻게 그런 큰일을 입도 벙긋 안 할 수가 있어요! 단장님께서 소식 전해주셨을 때 어머니 쓰러지셨다고요! 그런 걸 혼자 결정하고 혼자 떠나서 말도 없이 몇 달을……!”

“난 최소한 몸은 멀쩡했어! 죽을 뻔한 게 뭐라는 거야? 너야말로 부모님께…….”

“둘 다 똑같이 속을 태웠으니 조용히 하렴.”

백작부인이 야단조로 말했다. 코맹맹이 소리라 위엄은 없었으나 딸과 아들은 얌전히 입을 다물었다.

그들이 조용해지자 하인들이 잔뜩 장작을 넣고 간 난롯불만 타닥타닥 타올랐다. 백작이 나직이 한숨을 쉬었다.

“에키.”

“네, 아버지.”

“어떻게 된 연유인지는 창천기사단장님과 니콜에게 들었다. 음모로 인해 우리 집에 마검이 보내졌고, 네가 그걸…… 쥐게 되었고, 통제하는 데 성공해서…… 아젠카로 떠났던 거라고.”

“……네.”

“그리고, 악마가 된 단장님을 구하기 위해 마검을 가지고 있다는 걸 밝혔고, 그래서 수배되어 돌아오지 못했던 거라면서. 맞느냐?”

“네, 알고 계시는 게 맞아요.”

“하지만 이게 전부는 아니겠지, 안 그러냐?”

“…….”

“딸아.”

백작이 그녀에게 지긋이 시선을 주었다. 에키는 눈을 내리깔았다.

“나와 네 어머니는 너를 안다. 기사가 되겠다는 말은 변덕이라 쳐도, 하루아침에 제니스라니. 심지어 창천기사단장보다 더 뛰어난.”

“근데 누님, 누님이 진짜 혼자서 갈로서스를 무너뜨렸어요? 정말로? 어떻게요? 자세히 얘기 좀 해주…….”

“란셀.”

흥분한 어조로 끼어들었던 란셀리드가 백작부인의 부름에 경고를 알아듣고 급히 뒷말을 삼켰다. 백작이 헛기침을 하더니 말을 이었다.

“……다행히 창천에서는 이상하게 여기지 않는 것 같다만, 우리는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는구나. 너는 검술은커녕 검을 제대로 만져본 적도 없어. 아무리 네가 천재라 해도, 이건 시도해 본 적도 없는 분야의 재능 아니냐. 검에 관심조차 없었던 네가 어떻게…….”

사실 창천은 매우 이상하게 여겼지지만, 대신전과 유리엔의 보증으로 에키네시아가 상상 초월의 천재라고 간신히 납득한 상태였다.

에키네시아에 대한 공표가 있은 뒤로 몇 달이 흐르면서 요즈음엔 수상하다는 말이 거의 나오지 않았다. 대신전에서 언급한 예언의 존재와, 사관생도들로부터 퍼져나간 그녀의 행적 덕이었다.

사관생도들의 이야기 속에서 그녀는 비상식적인 수준의 괴상한 천재일 뿐인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녀가 갈로서스에서 기적을 일으킨 뒤로는 완전히 여론이 안정되었다.

유리엔은 그러한 진통은 건너뛰고 결과만 백작 부부에게 전했다. 로아즈 일가는 쉽사리 믿지 못했다. 가족들이 알던 에키네시아와 유리엔의 이야기 속 에키네시아는 너무나 다른 사람이었다.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으나, 백작 부부는 사랑하는 딸이 다른 사람으로 바뀐 게 아닐까 의심하고 있었다. 말도 안 되는 소리지만 영혼이 바뀌었다거나, 은밀히 다른 사람으로 바꿔치기되었다거나 하는 식으로. 그 정도로 달랐다.

그러나 다시 만난 딸은 어딜 봐도 그들의 딸이었다. 보자마자 알았다. 부모로서는 알 수밖에 없었다.

눈앞에 있는, 창천기사단장을 제압하고 구해냈으며, 갈로서스를 홀로 정복했고, 최초의 바르데르기오사 오너가 될, 대륙에서 가장 강한 검사이자 전무후무한 천재라는 평을 듣고 있는 여자는, 그들의 하나뿐인 딸이었다.

조금 까탈스럽고 살짝 게으르지만 누구보다 사랑스럽고 예쁜 그들의 딸. 믿기지 않을 정도로 변했어도 그들의 딸이라는 것은 확실했다.

그것을 확신하고 나자 이제 딸이 왜 이렇게까지 변했는지에 대한 의문이 남았다.

백작부인은 양손으로 손수건을 움켜쥐었다. 백작이 깊은 눈으로 에키를 바라보았다.

“어떻게 된 일인지 우리에게 말해 줄 수 있느냐?”

[주인아, 어떻게 할 거야? 그때 그 덩치 큰 놈한테 한 것처럼 내가 널 제니스로 만들었다고 뻥칠 거야? 와, 나 이러다 진짜 신검으로 불리는 거 아니야?]

마검이 종알댔다. 에키는 아버지의 시선을 피한 채 심호흡을 했다. 그녀를 낳고 스무 해 동안 키우신 부모님이다. 스무 살까지의 그녀를 누구보다 잘 아는 분들이었다.

어설픈 변명은 소용이 없었다. 태양 축제 때 왔던 란셀이 그녀가 아젠카에 눌러앉으면서 한 변명을 부모님이 안 믿으셨다고 말하지 않았던가. 오는 길에 니콜이 했던 말도 떠올랐다.

〈이젠 숨기는 것으로 걱정을 덜 수 있는 상황도 아니잖니.〉

변명이 소용이 없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간신히 결심이 섰다.

전이었다면 절대 꺼내지 못했을 악몽이었다. 그러나 유리엔이 그녀를 지탱해 주는 지금은 안전한 거짓 대신 진실을 말할 수 있었다. 가장 큰 피해자에게 이해받아 보았고 받아들여져 보았기에 일부나마 그것을 꺼낼 용기가 생겼다.

그녀가 사랑하는 사람들이고, 그녀를 사랑해 주는 사람들이다. 자신이 기대면 받쳐줄 사람들이었다. 마음이 물러져서 기대는 것이 아니라, 조금쯤 아물었기에, 단단해졌기에 그들에게 기댈 수 있다.

마음을 먹었지만 긴장은 가시지 않았다. 입안이 바짝 말라왔다. 에키는 마른침을 삼키고, 잘 나오지 않는 목소리를 쥐어짜 말문을 열었다.

“란셀. 니콜 언니를 불러와 줄래?”

“응?”

“언니에게도 알려야 할 것 같아서.”

멍하니 그녀를 보던 란셀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에키는 란셀이 하인을 시켜 니콜을 부르는 동안 무릎 위에 올려놓은 두 손을 뚫어져라 노려보고 있었다. 움켜쥔 드레스 자락이 엉망으로 구겨졌다.

[어, 너 시간 돌린 거 말하려고? 안 숨겨? 그래도 돼?]

마검이 의외라는 듯 물었다. 에키는 대답하지 않았다.

하얗게 변한 손마디 위에 문득 따스한 체온이 얹어졌다. 백작부인이 잔뜩 힘이 들어가 떨리고 있는 그녀의 손을 가만가만 토닥였다.

고개를 들자 백작부인은 말없이 그녀의 머리카락을 쓸어 넘겨주었다. 에키는 손등 위에 겹쳐진 어머니의 손을 잡았다. 식은 손에 온기가 퍼져나간다. 백작부인이 부드럽게 웃었다.

니콜은 금세 도착했다. 에키는 몇 번이나 말을 삼킨 다음 조심스럽게 이야기를 시작했다.

“지금부터…… 말씀드릴 이야기는,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아 주셨으면 해요. 이건, 모두, 이제 존재하지 않게 된 일들이니까요.”

그녀는 최대한 간결하게 말했다. 자신이 마검에 물들었고, 그것을 극복해 냈고, 기오사 전설에 따라 열 개의 기오사를 모아 시간의 신검을 사용했다는 사실을. 그래서 지금의 자신이 있다는 것을.

구체적인 과정이나 자세한 사정은 언급하지 않았다. 누구를 죽였는지, 무슨 끔찍한 경험을 했는지, 몇 년이나 걸렸는지, 어떤 고통을 겪었는지, 얼마나 절박했는지 말하지 않았다. 아주 짧고 축약된 악몽이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이야기는 얼마 되지 않아 끝났다. 침묵은 훨씬 오래 갔다. 에키는 갈라지려는 목소리를 몇 번이나 가다듬은 다음 마지막 말을 덧붙였다.

“전부 끝난 일이에요. 이젠 다 없던 것이 된 일이고요. 걱정 끼쳐드려서 죄송해요.”

란셀리드는 넋이 나간 채 누나의 얼굴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니콜은 안경을 벗어 닦더니 먼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녀의 손을 움켜쥔 백작부인의 손이 떨렸고, 백작은 자꾸만 얼굴을 문질렀다.

이제야 그녀가 보였던 이상한 행동들이 모두 이해가 된다.

란셀리드는 자신을 보며 살아 있다고 말했던 그녀를, 니콜은 급격히 철이 들었던 그녀를 떠올렸다. 그녀가 어떻게 갑자기 저토록 강해졌는지도 납득이 갔다.

“많이…… 힘들었겠구나.”

백작이 꺼끌꺼끌한 목소리로 말했다. 에키는 태연히 웃었다.

“다 지난 일이잖아요. 이젠 괜찮아요.”

많은 말이 각자의 속에서 맴돌았지만 아무도 그것을 꺼내지 못했다. 예상한 것보다 길고 무거운 침묵에 에키가 약간 민망해질 때쯤, 백작부인이 불현듯 물었다.

“에키, 그분도 이걸 알고 계시니?”

“네? 누구 말씀이세요?”

“유리엔 단장님 말이다.”

에키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겨우 대답했다.

“네. 그는 전부 알고 있어요.”

“네게 그는 어떤 사람이니?”

답하기 쉬우면서도 어려운 물음이었다. 그녀는 더듬더듬 대답했다.

“저를, 언제나 믿어주는…… 그런 사람이에요.”

그렇게 말하는 그녀의 볼이 옅게 붉어졌다. 백작부인은 여자의 얼굴을 한 딸을 보고는, 아무렇지도 않게 물음을 던졌다.

“그를 사랑하니?”

“네.”

얼결에 즉답해 버린 에키의 얼굴이 곧 완전히 새빨개졌다. 그녀가 고개를 푹 숙였다. 백작부인은 더는 손을 떨지 않았다.

“그도 너를 사랑하는구나, 그렇지?”

“……네, 아주 많이요.”

조그맣게 나온 대답이었으나 숨길 수 없는 신뢰가 있었다. 깊은 애정을 받고 있다는 티가 뚝뚝 묻어났다. 에키의 고개가 더 깊이 파묻혔다. 백작부인은 조용히 미소 지었다.

“그래, 잘 되었구나.”

그 대화에 에키가 밝힌 진실의 충격이 비로소 흐려졌다.

니콜은 예상한 듯 흐뭇한 얼굴로 에키를 바라보았다. 란셀리드는 켁, 하고 사례 들린 소리를 냈다. 백작은 바보 같은 얼굴이 되어 백작부인을 보았다.

“누가 누구를 어쩐다고……?”

“당신 딸이랑 창천기사단장님이 서로 사랑한다고요.”

“언제부터? 어떻게?”

백작부인은 해쓱해진 백작을 보며 혀를 찼다.

“당신, 설마 눈치도 못 채고 있었어요? 그렇게 티가 나는데.”

“부인은 대체 뭘 보고 눈치챈 거요?”

“그 바쁜 분이 왜 여기까지 직접 찾아와서 우리의 편의를 봐주고 갔겠어요? 그렇게나 극진한 자세로. 당신은 그걸 보면서 이상하다고도 못 느꼈어요?”

“그건, 그러니까, 난…….”

백작이 버벅거렸다. 란셀리드는 턱이 빠져라 입을 벌리고는 얼굴이 발간 누나를 쳐다보았다.

에키는 당황해서 백작부인에게 물었다.

“그가 여기에 직접 왔었나요?”

“한 번 온 것도 아니고 몇 번을 왔지. 참, 나는 그 사람이라면 찬성이란다.”

“찬성이고 자시고 믿기지 않을 정도로 과분하죠! 서, 서, 성검의 주인이, 기오사 오너가, 창천기사단장님이, 매, 매, 매형이라니, 맙소사, 말도 안 돼, 너무 대단하잖아요…….”

란셀리드가 목소리를 높이며 끼어 들었다. 눈살을 찌푸린 백작부인이 무어라 하기 전에 니콜이 툭 말했다.

“란셀, 네 누님이 그분보다 더 대단한 사람이야.”

“어?”

“그렇잖아? 마검의 주인이고, 신검을 사용해 본 사람이며, 가장 뛰어난 기사지. 네 누님이 창천기사단장님보다도 강하다고. 역사에 전설로 남을걸.”

소년이 머리를 부여잡았다. 전부 사실인데 적응이 안 된다. 우리 누나가 전설적인 존재라니. 이게 무슨 환상소설도 아니고.

혼란에 빠진 란셀리드를 보고 픽 웃은 니콜이 에키를 돌아보았다.

“그러고 보니 에키, 창천기사단은 실력제 아니었니? 이제 네가 단장이 되는 거야?”

“아, 그건 단장이 되겠다고 정식으로 결투를 청해서 승리하면 되는 거야. 난 절대 할 생각 없어. 율이 잘하고 있는걸.”

“……율?”

“율이 누구……. 아.”

“어머나.”

백작이 삐걱거리며 되물었고, 니콜이 알아듣고 끄덕였고, 백작부인은 손으로 입가를 가리더니 웃음소리를 흘렸다.

“그 사람이랑 사이가 무척 좋은 것 같구나. 애칭을 부를 정도라니…….”

에키는 양손에 얼굴을 파묻었다. 부끄러워 죽을 것 같다. 얼굴을 덮은 손바닥이 화끈거렸다.

“근데 대체 어떻게 사귀게 된 거예요?”

란셀리드가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모두의 관심이 그녀에게 쏠렸다.

에키는 더듬거리며 진실의 일부만을 풀어놓았다. 이미 지나가버린 슬픔을 덮기에 충분한, 설레고 좋은 이야기를.

가족들은 과거의 상처를 파헤치는 대신 앞으로 펼쳐질 미래에 관심을 기울였다. 외면이 아니라 배려였다.

에키네시아는 그렇게 집으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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