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을 든 꽃 186화
[……거기까지만 해라, 주인. 내 존재를 잊은 것은 아니겠지.]
성검이 음산하게 말했다. 급격하게 현실로 돌아온 유리엔의 손이 정지했다. 흐려진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던 에키 역시 아까부터 귓가에 흐르던 조그만 감탄 소리를 뒤늦게 알아차렸다.
[우와, 우와, 와아아…….]
그녀는 3초 정도 굳었다가, 후닥닥 그로부터 떨어지며 옷깃을 추슬렀다. 유리엔은 완전히 얼어 있었다. 어색한 시간이 짧게 흐르고, 에키는 작게 헛기침을 했다.
“느, 늦었으니 이만 자러 갈게요. 하녀들이, 전에 머물렀던 방을 치워 두었다고 하니까, 거기서……. 잘 자요, 율.”
그녀는 도망치듯 침실 밖으로 나가 버렸다. 유리엔은 제법 요란하게 닫힌 문소리에 채찍을 맞은 듯이 정신을 차렸다.
그는 황망히 제 손을 내려다보다가, 그 손으로 제 뺨을 때렸다.
[주, 주인? 뭐 하는 게냐?]
“……최대한 빨리.”
한쪽 뺨이 벌겋게 달아오른 채로 유리엔이 성검을 꺼내 창가에 내려 놓았다. 내팽개치는 것에 가까운 손놀림이었다.
“결혼할 생각이다.”
황태자를 제위에 올리겠다는 말보다 더 무겁고 깊고 절절한 어조였다. 그는 성검을 그대로 두고 침대로 돌아가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다.
* * *
아젠카에서 남동쪽으로 향하다 보면 작은 호수를 끼고 있는 마을 하나 나온다. 이름은 포와트.
앙투아르 왕국에 속해 있는데도 불구하고 아젠카와 몹시 긴밀한 사이인 곳이었다. 마을의 토지 대부분이 창천기사단 소유였기 때문이다. 창천기사단은 그 땅들에 기사들을 위한 별장을 여럿 지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크고 호화로운, 단장 전용의 별장에는 현재 로아즈 일가가 머물고 있었다.
12월 11일.
유리엔이 황태자의 즉위식에 참석하기 위해 제도로 떠난 날, 에키네시아도 마차를 타고 포와트로 향했다. 몇 달 만에 가족을 만나러 가는 길이었다.
던컨이 마차를 몰았다. 에키의 맞은편에는 니콜 시즈튼이 앉아 있었다.
하도 바빠서 요 며칠 제대로 자지 못한 니콜은 창가에 머리를 기댄 채 잠에 빠져들었다. 잘게 흔들리는 마차의 진동에 그녀의 머리가 창가에 부딪히려 했다. 에키는 재빨리 손을 뻗어 니콜의 머리를 받친 다음, 쿠션이 덧대진 마차의 내벽 쪽에 기대도록 고쳐주었다.
겨울의 여린 햇살이 마차의 유리창을 투과하여 비쳐들었다. 햇빛에 반짝이는 공기를 보며 그녀는 정신없이 흘러간 지난 며칠을 회상했다.
그러다 그날 밤의 기억이 떠올랐다. 문득 오른손의 문양에 마나를 퍼붓고 싶어졌다. 그녀는 뚫어져라 손바닥을 응시했다. 하얀 레이스 장갑이 마검의 문양을 덮고 있었다.
[주인아, 왜 그래?]
“……아무것도 아니야.”
“곧 도착합니다, 아가씨.”
던컨이 마부석 쪽의 작은 창문을 열고 말한 다음, 에키가 끄덕이자 창을 닫았다.
던컨은 유리엔에게 그녀가 갈로서스로 떠난다는 말을 전해준 후 줄곧 아젠카에 머무르고 있었다. 쐐기의 정보력으로 에키와 유리엔이 아젠카로 돌아오기도 전에 이미 갈로서스에서 있었던 일들에 대해 파악을 끝낸 상태였다.
아젠카로 돌아온 에키는 머물 곳이 없었다. 정황상 사관학교 기숙사로 돌아갈 수도 없고, 지금은 기사도 아니라서 창천기사단 숙소를 쓸 수도 없었다. 결국 그녀는 유리엔의 강력한 주장에 따라, 그리고 그녀 자신이 그러고 싶어서 당분간 그의 사택에서 머물게 되었다.
던컨은 그런 그녀를 알아서 찾아와서 자신이 그녀의 명을 어기고 창천기사단장에게 그녀의 행방을 고했다고 이실직고했다.
에키는 차마 화를 낼 수가 없었다. 던컨이 알린 탓에 유리엔이 그녀에게 죽을 뻔했지만, 유리엔이 아니었다면 그녀는 황태자군을 몰살시켰을지도 모른다. 그녀를 막아선 자가 유리엔이었기에 정신을 차리고 마검을 변화시킬 수 있었다. 던컨의 판단은 옳았다.
‘눈치도 빠르고, 일도 잘하고, 확실히 편해. 이대로 어정쩡하게 부려먹느니 차라리 월급을 주고 정식으로 부려먹을까. 기사는 적성에 안 맞는댔으니 집사 정도로.’
익숙하게 에키의 수발을 드는 던컨을 보는 유리엔의 눈초리가 점점 서늘해지고 있었지만, 그가 여리고 고결하게만 보이는 그녀는 눈치채지 못했다. 그래서 그녀는 진지하게 던컨을 제대로 고용하는 문제를 고민했다.
던컨은 제 앞날에 드리운 암운을 모른 채 열심히 마차를 몰았다. 마차의 속도가 천천히 느려지더니 완전히 정지했다. 그제야 고개를 든 에키는 졸고 있는 니콜을 흔들어 깨웠다.
“니콜 언니, 도착했어.”
“으응……. 5분만…….”
“언니.”
“꺅! 깜짝이야!”
귓가에 대고 훅 바람을 불자 니콜이 기겁하며 일어났다. 에키가 킥킥 웃었다. 니콜은 턱까지 내려올 듯한 기미를 달고 관자놀이를 주물렀다.
“피곤해 죽겠네…….”
“어제도 밤 샜어?”
“그래. 시간이 너무 촉박해서 안 되겠더라. 돌아가면 또 밤샘이야.”
니콜이 한숨을 쉬었다. 그녀는 스승인 칼리스토 팽과 함께 완전히 아젠카에 정착하기로 결정을 내렸다. 이번 사건으로 현자가 제국에 진절머리가 난 탓이었다. 제국은 창천기사단장의 눈치를 보느라 현자를 순순히 보내주었다.
아젠카는 이민을 반기는 편이었고, 현자 정도의 재원이라면 반기다 못해 모셔와야 할 급이었다. 창천은 현자에게 아예 마법관을 하나 신설해 주기로 했다.
현자는 니콜에게 제국의 마탑에 남아도 상관없다고 했지만, 니콜은 망설임 없이 스승을 따라 옮겨 왔다. 얼마 전에야 이사를 마친 스승과 제자는 곧바로 창천의 의뢰를 받았다.
조만간 있을 에키네시아의 서임식 전까지 바르데르기오사의 변화에 대한 연구논문을 작성해 달라는 요청이었다. 서임식에 참석할 각국의 마법사들에게 발표할 논문이었다. 호기심으로 이루어진 생물인 마법사들로부터 마검에 대한 의심을 불식시키려면 반드시 필요한 일이었다.
시간이 촉박했기 때문에 니콜은 현자와 함께 자주 밤을 새곤 했다. 마검 조사를 위해 에키도 매일 마법관에 들렀지만 그녀가 하는 일이라 해 봤자 두어 시간 동안 마검을 시연하거나 질문에 대답하는 수준이었다. 나머지는 니콜과 현자의 몫이었다.
“미안해, 언니. 나 때문에.”
“아니, 네가 사과할 이유는 없지. 너 때문도 아니고. 너 정말 왜 이렇게 애가 순해졌니, 철이 들어도 너무 들었잖아. 아무래도 내가 들키는 바람에 네가 너무 고생을 해서…….”
“언니가 아니었더라도 그것들은 비슷한 짓을 저질렀을 거야.”
니콜이 에키가 맡겼던 마석 목걸이를 들키는 바람에 가짜 마검과 창천이 엮여 유리엔이 함정에 빠졌었다. 그것을 시작으로 에키는 마검을 드러내고 긴 수배 생활을 해야 했다.
니콜은 돌아온 에키를 만나자마자 몇 번이나 사과를 해놓고서도 그 점이 계속해서 신경 쓰이는 모양이었다.
“언니야말로 내가 맡긴 조사 때문에 독방에 감금까지 됐잖아.”
“얘는, 식사도 꼬박꼬박 나오는 방에 있는 거랑 수배령이 나붙어서 쫓기는 거랑 같니.”
“난 던컨 덕분에 편하게 지냈다니까?”
“나도 편했어. 하여간 너는…….”
“도착했습니다.”
던컨이 마차의 문을 열며 고했다. 차가운 바람이 훅 밀려드는 것과 함께 그녀들의 무의미한 말싸움도 중단되었다.
에키는 드레스 위에 하얗고 도톰한 로브를 걸치고 마차에서 내렸다. 니콜이 춥다고 투덜거리며 로브의 후드를 눌러쓰고 뒤따랐다.
마차가 멈춘 곳은 오솔길 입구였다. 눈이 쌓여 있는 전나무 숲 사이로 난 좁은 오솔길의 끝에 호수를 끼고 선 우아한 저택이 있었다. 내 전이 마무리될 때까지 로아즈 일가가 임시로 머물고 있는 창천기사단 소유의 별장이었다.
던컨이 앞장서서 걸었다. 그를 따라 걷던 니콜은 등을 톡톡 건드리는 손짓에 뒤를 돌아보았다. 에키가 입술을 우물거리더니 작게 물었다.
“언니, 저기, 부모님은…….”
“엄청 화나셨지. 엄청 우셨고, 엄청 걱정하셨고. 부인께서는 한동안 앓아눕기까지 하셨어.”
“…….”
“좀 큰일이었니. 로아즈 성에는 그런 일이 벌어졌지, 아들은 사라졌다가 눈을 다치고 배도 찔린 채 되돌아와서는 무슨 일이 있었는지 반쯤 까먹었다지, 딸은 대뜸 기사가 되겠다고 했던 것도 아직 납득이 안 되는데 난데없이 황족을 베고 사라진 마검의 주인이 되었지. 온 제국에 수배령까지 나붙고…….”
니콜이 말을 할수록 에키의 목이 움츠러들었다. 걸음을 옮기던 니콜은 그런 그녀를 돌아보더니 작게 한숨을 쉬었다.
“너, 아직도 숨기는 거 있지? 갑자기 제니스라니, 심지어 창천기사단장을 제압할 수준의. 처음 들었을 때 난 농담인 줄 알았어.”
“…….”
“나야 네가 말하기 힘들다면 더 추궁할 생각은 없는데, 백작님과 백작부인께도 그러지는 마. 이젠 숨기는 것으로 걱정을 덜 수 있는 상황도 아니잖니.”
오솔길은 길지 않았다. 천천히 걸었는데도 벌써 저택에 도착했다. 저택 입구에서 털이 달린 후드를 눌러 쓴 채 종종거리던 여자가 그들을 보고 반색했다. 그녀는 안을 향해 무어라 소리를 지르고는 그들 쪽으로 달려왔다. 던컨과 니콜이 슬쩍 비켜섰다.
“아, 아, 아가씨이!”
달려온 여자는 에키를 막무가내로 끌어안았다. 주근깨투성이 얼굴 가득 울음이 터졌다.
전속하녀 노라였다. 에키는 던컨을 통해 소식을 알아볼 때 그녀가 살아 남았다는 것을 확인하고 몹시 안심했었다. 그녀는 팔을 들어 노라를 토닥였다.
“노라, 오랜만이야.”
“그렇게 덤덤하게 말씀하실 일이 아니었잖아요! 제가 정말 얼마나 걱정했는 줄 아세요? 기사가 되겠다는 것만으로도 기절할 뻔했는데 어떻게 그러실 수가 있어요! 그나저나, 세상에, 왜 이렇게 마르셨어요? 제가 아가씨 곁에 계속 있었어야 했는데, 얼마나 힘드셨길래 이렇게, 어허엉…….”
“진정해, 노라. 별로 고생 안 했어.”
“안 하기는 뭘 안 해요! 수, 수배라니, 아가씨가 그런 험한 생활을 하다니!”
“이젠 다 끝났으니까 괜찮아.”
“정말이지 저는, 마검이니 제, 제 뭐더라, 하여간 그런 건 하나도 모르겠다고요! 그냥, 우리 고운 아가씨가, 어헝, 어허엉…….”
훌쩍거리는 노라의 코가 새빨겠다. 에키는 그녀를 달래며 이끌었다.
“춥잖아, 일단 들어가자, 응?”
던컨이 먼저 가서 저택의 문을 열었다. 니콜이 들어가고, 에키는 노라와 함께 마지막으로 들어갔다.
안쪽의 공기는 따뜻했다. 로비에 사람들이 몰려 있었다. 저택 안의 사람들이 전부 나온 듯했다. 줄지어 선 사용인들 사이로 백작 부부와 란셀리드가 보였다.
던컨이 문을 닫았다. 에키는 제자리에 우뚝 섰다.
백작 부인은 그녀를 본 순간 울음을 터뜨리며 손으로 입가를 가렸다. 몇 달 사이에 키가 꽤 자란 란셀리드가 어머니에게 손수건을 건넸다. 소년은 표정을 숨기고 싶은 것처럼 에키로부터 고개를 돌렸다.
백작이 충혈된 눈동자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는 입을 열었다가, 다물었다가, 손으로 입가를 만지작거리고, 눈가를 문지르고, 꽉 막힌 목에서 쥐어짜내듯, 힘들여 말했다.
“어서 와라, 에키. 무사히…… 돌아왔구나.”
에키는 양손으로 드레스 자락을 잡았다. 어릴 적 어머니가 몇 번이나 손을 겹쳐 쥐고 고쳐주었던 대로, 치맛자락은 우아한 주름을 그리며 살짝 들어 올려졌다. 오른발을 뒤로 빼며 몸을 낮추고, 무릎을 굽혔다.
“다녀왔습니다.”
가늘게 떨리는 인사말에 물기가 묻어났다. 백작 부인이 예법에 엄격하던 평소의 태도도 잊고 휘청거리며 달려와 그녀를 끌어안았다.
“에키. 에키…….”
그녀는 무어라 말을 하지도 못하고 이름만 부르며 딸을 쓰다듬었다. 에키는 울지 않으려 애썼다. 견딜 수가 없었다. 그녀는 결국 어머니의 옷깃을 적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