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을 든 꽃 185화
“나는, 더는 견딜 수 없다. 정말 미쳐버릴지도 모른다. 그대는 내가 싫어진 건가?”
“그럴 리가요! 저기, 율,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모르겠…….”
“차라리 그대 손에 죽는 편이 낫다. 그러니 제발.”
“무슨 무서운 말을 하는 거예요!”
그녀는 기겁해서 유리엔을 밀어내고 얼굴을 보려 했다. 그러나 그는 더 힘주어 그녀를 품 안에 끌어안았다. 숨이 막힐 정도였다.
마나를 쓰면 벗어날 수 있겠지만, 그녀는 치료한 지도 얼마 되지 않은 그를 거칠게 밀어낼 엄두가 나지 않았다. 결국 포기하고 얌전히 그의 품에 기댔다.
그녀를 그러안은 손이 덜덜 떨렸다. 얇은 셔츠 한 장 사이로 그의 심장이 부서질 듯 뛰고 있는 것이 파묻힌 이마에 느껴졌다. 에키는 한참을 그대로 그에게 안겨 있었다. 그녀가 가만히 있자 그의 떨림이 천천히 잦아들었다.
“유리엔.”
그녀는 조심스럽게 그의 이름을 부르고, 그를 살짝 밀어냈다. 어느 정도까지는 밀려났지만 그녀를 놓아주지 않는다.
에키는 그의 품속에서 그를 올려다 보았다. 그는 몹시 불안해 보이는 표정이었다. 무엇이 이렇게까지 그를 불안하게 만든 걸까.
그녀는 그제야 자신의 모습이 막 잠에서 깬 그에게 어떻게 보였을지를 떠올렸다. 마검을 들고, 반쯤 열린 창가에 서 있다가 유리엔과 눈이 마주치자마자 뒷걸음질을 했다. 도망치려다 걸린 모양새가 아닌가.
“……제가 떠날까 봐 걱정했나요?”
“…….”
유리엔은 부정하지 않았다. 그는 툭 건드리면 눈물을 쏟아버릴 것처럼 여려진 낯으로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이 와중에 어스름한 달빛이 그에게 닿아 부서지는 게 한숨이 나올 정도로 아름다웠다. 뭘 하고 있든 예뻐 보이는 게 그녀가 문제인 건지 그가 문제인 건지 모르겠다.
그러면서도 그녀를 움켜쥐어 가둔 품은 단단하다 못해 약간 아플 지경이었다. 실제로 조금 아팠다.
“아파요, 율.”
그녀는 억지로 그의 팔을 떼어내는 대신 작게 속삭였다. 유리엔이 화들짝 놀라며 그녀에게서 손을 뗐다. 그는 주춤 물러나면서도 완전히 그녀를 놓아주진 못하고 손끝으로 그녀의 옷자락을 쥐었다. 그의 손이 떨려서 그녀의 옷깃도 같이 떨렸다.
에키는 가만히 그것을 보다가 그에게 다시 시선을 주었다. 물기 어린 푸른 눈동자를 응시하며 물었다.
“왜 제가 떠날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녀는 갈로서스 정복이 그녀 스스로 치른 시험이라는 이야기를 그에게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실패하면 돌아가지 않을 작정이었다는 말도 한 적 없다. 그에게 티를 낸 적이 없는 것 같은데, 그는 왜 그녀가 떠날 거라고 생각했던 걸까.
유리엔은 무언가 망설이듯 입술을 깨물더니, 그녀의 옷자락을 쥔 손만큼이나 떨리고 있는 음성으로 답했다.
“그대가, 답장을 하지 않아서.”
“네?”
“내게 실망했겠지. 그대는 더 이상 나를 믿을 수 없을 테니까. 그러니 돌아오지 않을 수도 있고, 돌아왔더라도, 언제든 떠나버릴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잠깐만요, 율, 지금 무슨 얘길 하고 있는 거예요?”
“기억이 없었다는 건 내 입장에서의 변명일 뿐이다. 내가 그대에게 상처를 입혔다는 건 명백한 사실이고, 그로 인해 그대가 더는 날 믿지 못하게 되는 것도 당연하다. 그대가 답장을 하지 않는 것도 당연한…….”
“유리엔.”
겨우 그가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를 깨달은 그녀가 그의 말을 잘랐다. 그녀는 또박또박 말했다.
“기억을 잃은 건 당신의 잘못이 아니었고, 저는 당신에게 실망한 적이 없어요. 제가…… 답장을 쓰지 않았던 건, 제 자신을 믿지 못했기 때문이에요.”
“그대 자신을 믿지 못했다고? 어째서?”
“당신이 만들고 있는 자리에 돌아가서, 바르데르기오사 오너로 살면서…… ‘악마’가 되지 않고 이성을 유지할 자신이 없었어요. 한 번이라도 실수하면 끝이니까. 이번만 해도, 당신은 정말 죽을 뻔했다고요. 제 손으로, 또다시 당신을…….”
“에키네시아.”
그녀의 옷깃을 잡은 그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정신이 없어서 하녀가 가져다준 대로 갈아입었던 실내용 드레스에 주름이 졌다. 유리엔이 나직이 말했다.
“왜 그대는 돌아오면 실수할 거라고 판단했지? 지금까지 아젠카에 머물면서는 그런 것을 걱정하지 않았잖나.”
날카로운 질문이었다. 에키는 일순 말문이 막혔다.
“그건, 그러니까…….”
“그대는 훌륭히 마검을 통제하고 있었다. 갈로서스의 일은, 솔직히, 그대가 일부러 자기 자신을 통제하지 못할 곳으로 몰아넣은 느낌이다. 왜 그랬지?”
“그야, 그런 상황에서도 완벽히 통제할 수 있는지 시험해야 했으니까요.”
“그 정도까지 스스로를 몰아붙여서 확인해야 할 이유가 있었다는 뜻 아닌가. 그대가 아젠카로 돌아오는 데에는 그 정도의 각오가 필요했다는 뜻이고. 이전에는 분명히 그럴 필요가 없었다. 왜 갑자기 그대는 그렇게까지 각오해야 했나?”
“……바, 바르데르기오사 오너로서 나서는 거잖아요. 전과는 각오가 다를 수밖에 없죠.”
“외부적으로야 그렇겠지만, 실질적으로 다른 점이 있나? 그대는 이미 마검을 지닌 채 아젠카에서 기사까지 될 생각이었다. 인내하고 통제할 자신이 있었으니 그렇게 결정한 것 아닌가. 그러니 그 이유만으로 그대가 스스로를 몰아붙일 리가 없다.”
에키는 입을 다물었다. 그녀를 바라보는 그의 눈동자는 영혼까지 꿰뚫어보는 것처럼 짙다. 늘 그러했듯이. 그녀는 그의 시선을 피했다. 유리엔이 조용히 묻는다.
“정말로 그 이유뿐이었다면, 그대는 왜 내내 답장조차 하지 않고 나를 피했지?”
“…….”
에키가 답하지 못하자 유리엔의 눈매가 쳐졌다. 그는 이를 악물더니, 자신이 던진 질문에 대한 답을 스스로 내놓았다.
“그대는 나를 믿을 수 없었다. 내가, 그대에게 신뢰를 주지 못해서. 내가 그때처럼 또 그대에게 상처를 입힐 것 같아서. 그렇게 되면 그 충격으로 자신을 자제하지 못하게 될까 봐. 만일 그렇게 되면 내가 그대를 절대 막을 수 없다고 판단했으므로. 한 번 악마가 되어버린 적이 있는 내게 그대의 살의를 감당하게 할 수는 없어서.”
“유리엔.”
“그래서 그대는 나를 피했고, 그렇게까지 자신을 시험해야 했다. 그렇지 않나?”
“아…….”
아니에요, 라고 답하려던 에키는 그 대답을 마무리하지 못했다. 그의 말이 진실이었기 때문에. 그녀는 고개를 숙여 그의 시선을 피했다.
유리엔이 그녀의 옷깃을 쥔 손을 놓았다. 그의 손이 다가와 숙인 그녀의 얼굴을 감싸 쥔다. 결코 거칠지 않은 손길로 그녀의 얼굴을 들어 올렸다. 눈이 마주쳤다.
“에키.”
그녀는 눈을 내리깔았다. 유리엔이 다시 물었다.
“방금, 정말로 떠나려던 것이 아니었나? 그런 생각을 전혀 하지 않았나?”
마검이 자신이 어떻게 변했는지 설명해 주기 전까지, 에키는 분명히 갈등하고 있었다. 떠나는 게 낫지 않은가를.
그녀는 차마 거짓말을 하지 못했다. 내리깐 눈꺼풀 위로 그의 시선이 느껴졌다. 한참을 침묵하던 그가 불쑥 말을 쏟아냈다.
“차라리 내게 화를 내라. 그대에게 신뢰를 주지 못한 나를 탓해라. 그대를 막지 못한 나를 비난해라. 내가 부족했음을 힐난하란 말이다.”
그답지 않게 사나운 목소리였다. 그녀가 아니라 그 자신을 향하는. 에키는 놀라 그를 올려다보았다.
“왜 그대는 나를 원망하지 않고 자책하며 모든 것을 홀로 감당하려고만 하는가? 그대가 떠나 있던 순간들이 얼마나, 그게 그대가 내게 주는 벌이라면 무엇보다도…… 효과, 적…….”
담담하게 이어지던 말이 허물어지며 물기가 섞여들었다. 그러더니 급하게 다가온 손이 그녀의 눈 위를 덮어 가렸다.
“보지 마라.”
“……왜요?”
“꼴사납게 울 것 같으니.”
그녀는 눈을 가린 그의 손을 떼어 내며 말했다.
“당신은 이미 몇 번이나 울었잖아요, 제 앞에서. 괜찮아요.”
유리엔은 그녀의 시선을 피하며 손으로 제 눈가를 숨겼다. 이번에는 에키가 손을 뻗었다. 발돋움을 하며 자신을 피하려는 그를 붙잡고, 눈가를 가린 손을 치웠다.
푸른 눈에서 부풀어 오른 눈물이 툭 떨어진다. 그가 더듬더듬 말을 늘어놓았다.
“나는…… 그대에게 의지가 되고 싶었다. 그대에게 도움이 되고 싶다. 그런데, 이토록 부족하기만 해서…….”
그는 제가 울고 있다는 사실이 수치스러운 듯 새빨갛게 얼굴을 붉혔다.
도움도 의지도 되지 못하고 부족하기만 하다니.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하는 걸까. 당신은 내가 돌아올 자리를 만들었고, 목숨을 걸고 나를 막아서 주었으며, 나 자신보다도 나를 믿어주었고, 누구보다 깊게 나를 이해해 주었다. 그리고 또, 셀 수도 없이 많이.
저절로 말이 흘러나왔다.
“율, 저는 당신에게 의지하고 있어요. 당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깊게.”
그녀는 한 손으로 그의 뺨을 감싸 제게로 당겼다. 다른 한 손으로 그의 손에 깍지를 꼈다. 그녀의 손은 그에 비하면 한참 작아서, 그녀가 먼저 파고들었음에도 그의 손에 완전히 감싸졌다.
“당신에게 의지하지 않았다면, 당신이 달라질지도 모른다는 사실 하나에 그렇게 불안해했을 리가 없잖아요.”
유리엔이 멀거니 그녀를 바라보았다. 에키는 짐작도 못했다는 듯한 그 얼굴을 보며 조금 웃었다. 말로 꺼내놓으니 더 명확해진다. 그녀는 그에게 기대고 싶었다. 오래도록 혼자 버려왔던 그녀에겐 그게 낯설어서, 그래서.
“저는, 갈로서스에서 스스로를 통제하지 못하면, 영원히 떠날 생각이었어요. 불행해지는 것보다는 행복을 포기하는 게 나으니까요.”
“……!”
그녀의 말과 행동으로 어느 정도 예상한 바였는데도, 유리엔은 소스라치게 놀랐다. 정말로 스스로를 시험해서 실패하면 영영 떠나버릴 생각이었다니.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차가워진다. 그는 그녀가 이대로 달아날까 봐 두려워져서 황급히 말했다.
“에키, 그대는 실패하지 않았다. 계속 말했잖나. 그대는 분명히 스스로 멈췄다. 마검을 변화시키기까지 했다. 제발, 자신을 의심하지 마라.”
“네, 멈췄죠. 마검이 확인해 줬어요. 제가 스스로 멈췄던 거라고.”
“마검이 깨어났나? 그래, 그대는…….”
그녀의 대답에 그의 낯빛이 극적으로 밝아졌다. 그리고 그 표정은 그녀가 이어간 말에 나락으로 굴러 떨어졌다.
“하지만 그 순간에 참지 못하고 살의를 받아들였던 건 사실이에요. 마검도, 제 의식을 유지해 줄 수는 있어도, 제가 스스로 살의에 취하는 건 막을 수 없다고 했어요. 그건 저만 할 수 있는 일이라고.”
“에키, 제발.”
그가 초조하게 빌었다. 그녀의 붙잡아 어깨를 움켜쥐고, 제 얼굴을 감싼 그녀의 손에 뺨을 기대며, 애원하듯 말했다.
“제발, 그대가 무엇을 두려워하는지 안다. 어떤 악몽이었는지 알고 있다. 그래도 나는…….”
“그러니까 당신이 저를 도와주세요.”
그의 애원이 멈췄다. 에키는 다물린 그의 입술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제가, 행복해질 수 있도록, 스스로를 믿을 수 있도록, 흔들리지 않게, 그렇게 계속 곁에서 저를 지탱해 주세요.”
다시 한 번 더, 입술이 스친다. 쪽 소리가 났다. 그녀가 웃었다.
“해주실 수 있나요?”
유리엔은 완전히 초점이 나가버린 눈으로 그녀를 응시했다. 울컥 치받는다. 눈물이 멈췄다. 그가 쉰 음성으로 답했다.
“내 모든 것을 바쳐서라도, 그리 하겠다.”
“전부를 주실 필요는 없어요, 그저 함께…….”
“아니, 나는 이미 그대의 것이다. 버리지 마라.”
유리엔이 그녀의 이마에, 눈가에, 그리고 코끝에, 얼굴 곳곳에 가만히 입술을 눌러왔다. 사랑스러워서 견딜 수 없다는 듯, 동시에 경애하듯.
에키는 눈을 감았다. 감은 눈꺼풀 위에 닿는 감촉이 세상 없이 다정했다. 그에게 녹아들고 싶어질 정도로. 그래서 충동적으로 답했다.
“……그럼, 저도 당신의 것이 될게요.”
그녀가 그를 끌어안으며 귓가에 이름을 불어넣는다. 율. 유리엔의 몸이 흠칫 떨렸다. 부드러운 몸이 그의 품에 안겨들었다. 달콤한 향.
그녀가 입을 맞춰 온다. 그가 응한다. 창에 기대며 그녀가 미끄러졌다. 달빛을 가리며 그가 드리워졌다. 달구어진 욕망과 무르익은 마음이 자연스럽게 선을 넘어간다. 흐트러진 옷깃 너머로 스친 피부에 열기가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