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을 든 꽃 184화
아젠카로 돌아와서 치료받고 잠들기까지, 유리엔은 내내 그녀에게 말했다.
〈몇 번이나 말했지만, 그대가 자책할 이유는 없다. 그대가 원해서 나를 베려 한 것도 아니고, 그대는 스스로 검을 멈추기까지 했다.〉
정말 그럴까.
에키는 그 찰나의 기억이 애매했다. 막연히 안 돼, 라고 생각했던 건 기억이 나는데, 무슨 일이 일어났던 건지 명확히 알 수가 없었다. 확실한 건 그녀가 황제의 앞에서 살의를 참지 못했다는 진실뿐이다.
살의를 스스로 받아들였던 순간이 선명하다. 고통에 찬 신음이 음악보다도 감미롭게 들리고, 비릿한 피 냄새가 무엇보다도 향기롭게 느껴졌었다. 그렇게 달콤할 수가 없었다. 그 순간의 그녀는 분명히 살인을 즐겼다.
황제를 죽였던 건 후회하지 않는다. 좀 더 길게 고통을 느끼도록 만들었어야 한다는 아쉬움이라면 모를까, 그 선택 자체는 후회하지 않았다.
그녀 외에도 그 자로 인해 죽은 자와 고통 받은 자가 너무나 많았다. 유리엔의 아비이기를 스스로 포기한 자였고, 유리엔 역시 그를 아버지로 여기지 않았다. 그래도 그의 혈육이라는 이유로 넘어가주었다가 벌어진 일들만 봐도 더는 살려둘 수 없었다.
그녀가 후회하는 것은 스스로 행했던 시험에서 실패했다는 사실이었다. 자신은 참지 못했다. 냉정하게 베지 못하고 감정에 물들어 버렸다. 그 결과 이성을 완전히 잃어버리고 악마가 되어 날뛰고 말았다.
‘또 그런 일이 일어난다면 유리엔이 이번처럼 살아남는다는 보장이 없어. ……역시 여기에 있어서는 안 되는 게 아닐까.’
유리엔은 그녀가 스스로 멈췄다고 말하지만, 그녀는 안다. 유리엔이 죽을 뻔한 순간이 몇 번이나 있었다. 마지막의 마지막에 결국 멈추긴 했어도, 같은 상황이 왔을 때도 그럴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에키는 유리엔을 가만히 들여다보다가, 오른손바닥으로 시선을 옮겼다. 익숙한 검은 문양이 보였다.
스스로를 통제하려던 ‘시험’에서 실패했는데도 불구하고 그녀가 결심했던 대로 떠나지 않은 건 바르데르기오사가 보인 이상한 현상 때문이었다.
“발.”
작게 불러보았다. 마검은 여전히 대답이 없었다. 좀 잔다고 했던 기억이 나는데, 대체 언제 일어날 생각인 건지.
그녀는 걸터앉아 있던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로 다가갔다. 창문을 약간 열었다. 차가운 공기를 마시니 복잡하던 머리가 조금 맑아졌다. 심호흡을 하고, 흐릿한 달빛이 비치는 창 앞에 서서 마검을 끄집어냈다.
투명한 칼날, 검은 손잡이. 익숙한 형태였으나 딱 하나 뚜렷한 변화가 있었다. 칼날에 있던 문양이 붉은빛으로 변해 손잡이와 칼날 근처를 휘감으며 회전하고 있다. 랑기오사를 휘감은 황금빛 문양처럼.
‘정말 성검처럼 문양으로 자아를 유지할 수 있게 된 걸까.’
마검의 변화는 그런 의미일까. 하지만 마검이 자아를 유지하는 것에 성공했다 해도, 그녀는 살의를 받아 들인 뒤부터 마검의 목소리를 제대로 듣지 못했다. 검을 멈춘 후에나 겨우 들리기 시작했었다.
마검이 살인을 즐기는 대신 그녀를 말리려 했던 건 기특하지만, 이래서야 같은 일이 발생해도 마검이 그녀를 말리는 게 불가능하지 않겠는가.
“발, 일어나.”
유리엔이 깨지 않도록 목소리를 낮춰 불러보았다. 마검은 조용했다. 문양만이 느릿느릿 휘돌았다. 에키는 미간을 찌푸렸다.
‘만약 내가 그때 검을 멈췄던 것이 우연에 불과하고, 마검이 자아를 유지해도 나를 말릴 방법이 없다면…….’
그가 깨어나기 전에 떠나는 편이 나을지도 모른다.
거부하고 싶은 결론이었다.
그녀는 유리엔이 잠든 침대 쪽을 흘깃 바라보았다. 울음의 전조처럼 눈가가 달아오르는 게 느껴졌다. 떠나고 싶지 않다. 절대로. 그렇다고 장담할 수 없는 도박에 그의 목숨을 걸 수는 없다.
그럼, 기억이 부분적으로 훼손되는 것을 각오하고 마검 대신 다른 기오사를 각성시키는 것을 시도해야 할까.
‘본능을 참고 변화하면서까지 나를 말리려 노력한 녀석인데, 버려야 하는 걸까.’
빙글빙글 도는 붉은 문양을 바라보았다. 열심히 하고 있으니 성공하면 자길 버리지 않을 거냐고 묻던 마검이 떠올랐다. 입안에 쓴맛이 돌았다. 그녀는 초조하게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그 기묘한 현상에 대한 설명이 지금 당장 필요했다.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던 건지, 어떻게 자신이 검을 멈출 수 있었는지도 알아야만 했다.
마검이 스스로 일어날 때까지 기다리려 했는데 더는 못 기다리겠다. 그녀는 최후의 수단을 써보기로 마음먹었다.
손에 보랏빛 마나를 두르고 마검을 내리쳤다. 반응은 즉시 나타났다.
[으악! 아! 아야! 야! 좀 살살 깨우라고 전에도 내가-!]
“발!”
에키는 저도 모르게 반가운 음성으로 마검을 부르며 움켜쥐었다. 진심으로 안도하며 밝아진 그 얼굴과 음성에 마검은 몹시 당황했다.
[어, 어, 어? 너 왜 그래? 뭐 잘못 먹었어?]
“네가 계속 안 일어나서. 왜 이렇게 오래 자?”
[적응하느라 그랬……. 어어, 주인아, 나 보고 싶었어? 우와, 나 걱정한 거야?]
“걱정은 무슨. 기오사인 널 왜 걱정해? 어떻게 된 건지 빨리 설명이나 해.”
[쳇, 그럼 그렇지.]
마검이 투덜거리더니 부루퉁하게 덧붙였다.
[칭찬 먼저 해줘.]
“뭐?”
[나 진짜 힘들었단 말이야. 칭찬해 줘. 잘했다고 해줘. 빨리!]
에키는 황망히 칭얼거리는 마검을 내려다보다가 대충 칭찬을 해주었다.
“……잘했어, 발.”
[헤헤. 으헤헤.]
마검이 히죽히죽 웃기 시작했다.
[좀 더 해줘. 난 착한 검이니까 더 칭찬 들어도 돼!]
“그러니까, 대체 뭘 한 건데.”
에키는 옅게 한숨을 쉬고, 실실거리고 있는 마검에게 다시 물었다.
“네가 나를 멈췄던 거야? 그를 베기 전에?”
[아니, 난 그런 건 못 해. 그건 네가 해야 할 일이었거든.]
“……내가?”
[주인이 진심으로 살의를 즐기고 있으면 내가 아무리 말해 봤자 소용 없어. 그걸 거부해야 내 말이 들리니까. 그래도 네 의식이 완전히 무의식 속으로 가라앉지 않도록 붙잡고 있었던 건 나지만.]
“붙잡고 있었다고? 어떻게?”
[어, 음, 잠들지 않게 계속 깨우는 거랑 비슷해. 그거 진짜진짜 힘들었어! 이 몸이라서 가능했던 일이라고! 나 착하지? 얼른 더 칭찬해! 잔뜩 칭찬해!]
살의에 휩쓸리는 와중에 계속 귓가에서 앵앵거렸던 소리가 떠올랐다. 그 덕에 완전히 악마가 되지 않고 어렴풋하게나마 의식이 유지된 모양이었다.
‘정말 노력했구나. 나를 막기 위해서.’
뭉클한 기분이 들었다. 그녀는 말을 잃었다가, 살짝 잠긴 음성으로 말했다.
“고마워, 발. 정말 잘했어. 정말로…….”
바르데르기오사가 의식을 붙잡아놓지 않았다면 상상하기조차 싫은 결 말을 맞이할 뻔했다. 에키는 저도 모르게 침대에 있는 유리엔을 다시 확인했다.
달빛을 받아 반짝이는 은발이 베개 주위에 흩어져 있다. 내리감은 속눈썹이 길게 드리우는 그림자. 평온히 흐르는 숨. 이 사람을 잃을 수도 있었다. 잃지 않았다. 덜컥 눈물이 고이려 해서 그녀는 급하게 눈가를 눌렀다.
그녀가 허둥거리는 사이 헤실대고 있던 마검이 들뜬 어조로 종알거렸다.
[음음, 물론 난 대단했지만, 주인도 대단했어! 역시 내 주인이야!]
“대단하긴 뭘 대단해. 네가 깨우기 전까진 살의에 형편없이 휘둘렸는데.”
[엥? 아냐, 방금도 말했잖아. 내가 깨운다고 해서 받아들인 살의가 사라지진 않는걸. 난 널 깨워놨을 뿐이고, 그 충동이나 욕망을 참고 검을 멈추는 건 너 스스로 한 거야. 주인이 그거 못 했으면 내가 아무리 말리려 해봤자 못 멈춰. 들리지도 않을 텐데 뭘.]
“……스스로 한 거라고? 내가?”
[내 말이 들린 건 네가 검을 멈춘 후잖아. 안 그래?]
스스로 멈췄다니, 어떻게 했더라? 그럼 또 할 수 있는 걸까? 그녀는 그 순간을 떠올리려 애썼다. 정신없이 검을 휘두르다가, 갑자기 ‘내’가 누구인지를 자각하면서…….
[살인의 쾌락에 휩쓸리지 않고 거부했잖아. 네가 어떻게 거부했는지는 나도 모르지만, 그거 거부 안 했으면 누적된 살의 다 해소될 때까지 계속 사람 죽였을걸. 엄청 죽었겠지. 우와, 그것도 신났겠……. 이, 이게 아니라, 어, 어쨌든 그랬으면 내가 지금처럼 변하지도 못했어.]
“어떻게 변했는데? 랑기오사처럼 늘 각성상태가 된 거야?”
[응! 이제 나도 랑처럼 주인의 혼과 별개로 자아를 유지할 수 있어. 그리고 앞으로 내 주인이 어떤 사람이 될지도 결정했어!]
“……어떤 사람?”
[너 같은 사람.]
에키는 잠시 숨을 멈췄다. 마검은 천진하게 말을 이었다.
[나를 쥐어도 살의에 휘둘리지 않을 사람. 내가 만들어내는 살인에 대한 욕구를 참을 수 있는 사람. 어떤 상황에서도 자기 자신을 잃지 않는 사람. 그런 사람을 주인으로 삼을 거야.]
“너는, 그래도 돼? 사람을 죽이는 건 네 본능이잖아?”
[본능을 참을 줄 알아야 어른이 되는 거라며?]
예전에 그녀가 흘리듯 했던 말이었다. 이런 말까지 기억하고 있을 줄은 몰랐다. 에키는 멀거니 투명한 칼날을 내려다보다가 중얼거렸다.
“기오사니까 상관없다더니, 다 컸네, 발.”
[그것도 칭찬이지? 그치?]
“……그래, 칭찬이야.”
[헤헤. 있잖아, 주인아, 나 변했으니까, 이제 내 주인이라고 말하고 다닐 수 있는 거지? 그 허연 놈 말고 내가 네 검이 되는 거 맞지? 나 안 버릴 거지?]
한껏 들뜬 어조로 쏟아지는 물음들에 에키는 말을 잃었다. 그녀의 침묵을 뭘로 해석했는지 마검이 열심히 말을 이었다.
[날 쥐면 살의와 악의에 물드는 거나, 살의가 지속적으로 쌓여서 해소하지 않으면 넘치는 건 그대로지만, 그건 어쩔 수 없단 말이야. 내 본질이니까. 대신 이제 주인이 늘 의식을 유지하도록 도울 수 있어! 이번에는 문양이 미완성이라 힘들었지만 완성되었으니까 앞으로는 더 잘할 거야!]
“……발.”
[너야 지금의 나 정도로도 문제없겠지만, 앞으로 내 주인이 될 사람들은 아닐 수도 있겠지? 그러니까 열심히 연습할게. 애초에 살의를 참지 못할 인간은 내 주인이 되지 못하게 할 거고. 랑이 악행을 저지르면 자기를 더 이상 못 쥐게 만드는 것처럼, 악마가 되면 더는 날 쥘 수 없게 만드는 식으로 말이야!]
마검은 뻐기듯 자랑스럽게 말했다. 어린아이 같은 어투와 달리 말이 담고 있는 것들이 깊었다. 인간의 살의로 만들어진 마검이 이래도 되는 걸까. 에키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넌 정말 그래도 괜찮아?”
[어차피 별로 달라지는 것도 없는 걸. 야, 넌 원래 아무리 졸라도 사람 잘 안 죽였잖아.]
“그건 그렇지만, 그래도.”
[괜찮다니까! 꽤 고민한 선택이란 말이야. 어때, 주인아? 나 진짜 착하지?]
손 안에 느껴지는 마검의 냉기가 더는 섬뜩하지 않았다. 에키는 웃으며 속삭였다.
“그래, 착하다. 넌 누구보다 착한 검이야, 발.”
마검이 흐물흐물 풀어지는 음성으로 무어라 횡설수설해 댔다. 사람을 죽일 때만큼이나 기분이 좋아 보였다. 그러더니 마침 생각났다는 듯 종알거렸다.
[그럼 주인아, 착한 검이니까 상도 줄 거야?]
“무슨 상?”
[아무나, 아니지, 나쁜 놈으로 하나만 죽이게 해줘. 내가 조종해서 직접 하고 싶어! 이왕이면 오른팔로! 왼팔은 질렸어!]
그 헛소리에 그녀의 감동이 부스러졌다. 그녀는 인상을 쓴 채 칼날을 노려보았다.
“너, 본능 참는다며?”
[참는 거랑 조르는 건 다른 문제지.]
“뭐가 달라? 죽이자고 하는 건 똑같잖아!”
[내가 졸라도 안 될 때는 안 들어 주잖아? 죽여도 되면 죽일 거고. 너 같은 사람만 고를 거니까 앞으로 다른 주인들도 다 그러겠지?]
“그게 무슨 상관이야.”
[상관있어! 안 되면 주인이 안 된다고 할 거니까, 난 그냥 맘껏 조르기만 하면 되잖아! 우와, 나 엄청 똑똑한 것 같아.]
에키는 기가 찬 눈으로 마검을 내려다보다가 픽 웃었다. 그리고 곧 소리 내어 웃음을 터뜨렸다.
웃음소리 때문인지 유리엔이 일어나는 기척이 느껴졌다. 깨울 생각은 없었는데. 그녀는 당황해서 입을 막으며 약간 물러났다.
“……에키?”
일어나 앉으며 약간 쉰 목소리로 그녀를 부른 그가, 그녀의 모습을 보자마자 얼어붙었다. 에키는 그의 낯이 창백해지다 못해 하얗게 질리더니 애원하는 듯한 표정을 짓는 것을 보고 당황했다.
“율? 왜…….”
“에키, 제발…… 그러지 마라. 내가 무엇이든 할 테니, 제발…….”
유리엔이 허둥지둥 침대에서 일어나 그녀에게로 다가왔다. 언젠가 그녀가 보고 싶어 했던 대로, 막 잠에서 깬 전혀 단정치 못한 모습이었다. 엉망으로 흐트러진 머리칼이 헐거운 셔츠 위로 제멋대로 쏟아졌다.
다가온 그가 멍하니 자신을 보고 있는 그녀를 제 품에 가두며 끌어안았다. 그녀의 손에 마검이 들려 있는 걸 망각한 태도였다. 에키는 그를 찌를 뻔한 마검을 급하게 문양으로 되돌렸다. 단단한 팔이 그녀의 몸을 얽어맸다.
“유, 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