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을 든 꽃 183화
[모든 것을 알려주지는 마라. 뭐, 내가 참견하지 않아도 네가 알아서 잘하겠다만.]
“……그녀가 완벽한 바르데르기오사 오너가 되면서 발생한 현상입니다.”
유리엔은 성검의 주의를 들으며 짧게 답했다. 황태자는 입가를 만지작거리다가 재차 물었다.
“좀 더 자세히 설명해 줄 수 있느냐?”
“예전에 제가 전하께, 마검의 주인이 이성을 유지하는 한 그녀는 안전하다고 말씀드렸었지요.”
“그래, 그리고 혹여 그녀가 악마가 된다면 네가 막을 수 있다고도 했지. 그것을 증명하기 위해 증명식을 하겠다고 한 것 아니었나.”
“예. 하지만 이제는 그런 우려도, 안전을 위한 대비도 필요하지 않습니다. 그녀가 마검을 변화시켰으므로, 마검은 온전히 그녀에게 복종합니다. 앞으로는 혹여 그녀가 이성을 잃더라도 악마가 될 염려는 없습니다.”
망설임 없는 단언이었다. 유리엔은 에키네시아를 바르데르기오사 오너로 인정하겠다고 할 때에도 그녀의 위험성을 숨기지 않았었다. 그런 그가 저렇게까지 말한다면, 정말로 그녀는 이제 안전한 존재라는 뜻이다.
“마검이 변화했다……라, 그렇다면 차후에도 계속 ‘악마’가 아닌 바르데르기오사 오너가 등장할 수 있다는 뜻이냐?”
“보다 정확히는, 마검을 통제할 자질이 있는 자가 마검을 쥐면 ‘기오사 오너’가 되고, 그렇지 못한 자가 쥐면 ‘악마’가 됩니다.”
크루엔의 눈이 커졌다. 다른 기오사처럼 마검도 앞으로 지속적으로 기오사 오너가 배출된다는 소리다. 실패하면 악마가 된다는 위험이 있긴 해도 무조건 악마가 되던 과거와는 마검의 위상 자체가 달라질 것이다.
“……놀랍군. 그 자질이란 어떤 것이지? 어떻게 자질 있는 자를 구별할 건가?”
“그건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마검이 극도로 위험한 기오사임은 변함 없는 사실이므로, 마검과 관련된 정보는 엄중히 관리할 예정입니다.”
유리엔이 딱 잘라 말했다. 어느 정도 예상했던 바라 크루엔은 어깨만 으쓱이고는 더는 묻지 않았다. 유리엔이 차분히 말을 이었다.
“‘마검을 쥐었을 때 자격 있는 자는 오너가 되고, 그렇지 못한 자는 악마가 된다. 에키네시아 로아즈가 마검을 그렇게 변화시켰다.’ 이 사실은 공식적으로 밝힐 예정입니다. 서임식에서 바르데르기오사의 외형이 변화한 것을 확인할 수 있을 테니 그 이상의 검증은 필요하지 않겠지요.”
“그렇겠지, 그 기적에 대한 소문도 이미 들불처럼 퍼져나가고 있으니. 그 서임식이 역대 최초의 바르데르기오사 오너가 데뷔하는 자리인 셈이군. 성녀 데뷔 때보다도 더 많은 자들이 몰려들겠어.”
“최대한 성대하게 치를 예정입니다.”
“그게 낫겠지. 그나저나, 기오사를 변화시키다니……. 나는 기오사가 변화할 수 있는 검인지조차 몰랐다. 창천은 알고 있었나?”
“아니오, 그녀가 최초입니다.”
“맙소사, 그 나이에 너보다 강한 검사라는 것만 해도 충격적인데 말이다. 여러모로 전설을 쓰고 있군. 이러다 대륙 끝단의 어린아이조차 그녀의 이름을 알게 되는 것 아니냐?”
가볍게 던진 크루엔의 말에 유리엔의 입꼬리가 설핏 올라갔다. 그는 은근히 들뜬 어조로 답했다.
“당연한 일입니다. 그녀는 존경받아 마땅한 사람이고, 전설로 남을 기사가 될 테니까요. 모든 이가 알게 되겠지요. 그녀의 검이 얼마나 대단한지, 그녀가 얼마나 강하고 눈부신 혼을 가지고 있는지, 그녀가…….”
[적당히 해라, 주인. 표정 관리도 좀 하고.]
성검이 깊은 한숨과 함께 톡 쏘았다. 유리엔은 그제야 맞은편에 앉은 황태자가 얼이 빠진 얼굴로 자신을 보고 있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는 순식간에 평소와 같은 담담한 낯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이미 크루엔은 한껏 들뜬 유리엔을 똑똑히 목격해 버렸다. 잠시 어색한 침묵이 흐른 끝에, 크루엔이 더듬더듬 입을 열었다.
“그, 그래, 알겠다. 그녀를 보기 위해서라도, 서임식에 내 꼭 참석하마.”
[내가 오래 사니 정말 별의별 꼴을 다 보는구나. 설마 더한 꼴을 볼 일은 없겠지?]
“……다음 문제로 넘어가겠습니다. 전하.”
유리엔은 성검의 푸념을 못 들은 척하며 빠르게 화제를 전환했다.
몇 가지 전후처리 관련 논의를 마무리한 뒤 남은 것은 에키네시아가 갈로서스를 정복하기 전에 황태자와 했던 거래 문제였다.
엄밀히 말하면 그녀는 ‘아무도 먼저 공격하지 않고’라는 말을 지키지 못했다. 요새가 붕괴하면서 일어난 사고사를 제외해도, 황제와 마법사 몇, 근위기사로 위장하고 있었던 기사 몇이 그녀의 손에 죽었다.
하지만 크루엔 황태자는 그것을 지적하지 않았다. 제국이 건국된 이래로 단 한 번도 정복되지 않았던 요새를 단신으로 정복한 업적과 비교하면 그 정도의 극소수 사망자는 사실 없는 수준에 가까웠기 때문이다.
실제로 그녀는 반격하지 않고 요새만 부수었고, 황태자군에 붙잡힌 대다수의 포로가 그 과정을 목격하고 증언했다. 마법사나 근위기사들은 ‘비켜달라’는 그녀의 요청을 들었다는 것을 부정하지 못했다.
게다가 몇 안 되는 사망자들은 애초에 싸워야 할 적군이었고, 황태자가 승리한 지금은 처벌해야 하는 반역도들에 불과했다. 가장 껄끄러울 수 있는 황제의 죽음은 목격자가 한 명도 없었다.
에키네시아와 되도록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고 싶은 황태자 입장에선 따지고 들 필요가 없었다. 좀 더 솔직히 말하면, 그가 직접 처리하기는 힘들고 그렇다고 살려놓기엔 불안한 황제를 죽여준 것이 고맙기까지 했다.
“기오사 오너 인정이야 이미 끝난 거고, 처벌권을 로아즈에 넘기는 문제는……. 그녀는 정확히 어떤 방식을 원하던가?”
“2황자와 헤레이스 리어폴드만 넘겨주시면 됩니다. 그들의 재판을 로아즈에서 영주의 권한으로 할 수 있게 해주십시오.”
“황자비나 2황자의 후궁들은?”
황자비가 어떤 취급을 받았는지, 2황자의 후궁들이 어떤 과정을 거쳐 후궁이 되었는지 크루엔이나 유리엔이나 대강 알고 있었다. 이 문제에 대해 이미 에키네시아와 의논을 마쳤던 유리엔은 쉽사리 대답했다.
“황자비와 후궁들은 무고하니 전하께서 선처해 주시면 됩니다.”
“알았다. 참, 마석 목걸이에 관여했던 자들은 어떻게 할 거냐?”
“그들 또한 전하께 처벌을 맡기겠습니다.”
“성가시니까 알아서 다 사형시키라는 소리로 들리는데.”
“그런 뜻은 아닙니다. 로아즈의 인력으로 그들을 일일이 색출하여 죄질에 따라 처벌하기엔 무리가 있어…….”
“농이다, 농. 확실히 죄의 경중을 따져 처벌할 테니 걱정하지 마라.”
황태자가 손을 내저으며 말하고는 서류철을 하나 꺼냈다.
“그리고 이건 디아상트 공작, 아니지, 전 디아상트 공작 윈들턴 디아상트가 범한 죄에 대한 책임과 배상의 의미로 디아상트가 내놓은 것들이다. 새로운 디아상트 공작이 요청한 대로 전부 로아즈에 넘기도록 하마.”
서류철을 받아든 유리엔은 그 내용물에 약간 놀랐다.
제국에서 영지의 크기와 질은 가문의 세력을 결정한다. 영지가 부족하면 작위가 강등되기도 했다.
당연히 디아상트 공작가는 그 위세만큼 넓고 광대한 영지를 가지고 있었다. 그 영지의 반절에 달하는 어마어마한 양의 토지증서들이 서류철에 담겨 있었다.
가주를 교체함으로써 멸문은 피했지만, 그래도 디아상트의 힘으로 마검의 음모를 주도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았다. 자숙의 의미로 영지 절반을 내어놓은 것이다. 새로이 공작이 된 로잘린 디아상트의 서명이 첨부되어 있었다.
크루엔이 느긋하게 깍지를 끼며 말했다.
“참, 윈들턴 디아상트의 시신을 넘겨 주겠다고 전해 달라더군. 그것을 로아즈로 보낼 때 선황의 시신도 함께 보내마. 로아즈 백작에게 원하는 대로 처리해도 된다고 전해다오.”
“선황의 시신까지 말입니까?”
“선황은 더 이상 황족이 아니니, 황족의 시신이 아닌 셈이다. 이걸로 조금이라도 그녀와 로아즈의 분노가 풀렸으면 좋겠군.”
“……알겠습니다. 그대로 전하겠습니다.”
“그리고 약속대로 로아즈 성의 재건에 관한 예산을 편성했다고 전해다오.”
황태자는 예산서를 건넨 다음, 은빛 밀랍으로 봉하고 비단을 덧댄 두루마리를 꺼내 보여주었다.
“또한, 마검의 음모를 밝혀내고 내전을 종료한 에키네시아 로아즈의 공로와, 황실로 인한 피해를 보상하는 차원에서, 로아즈를 공작가로 승격할 예정이다. 디아상트의 영지를 증여받았으니 영지도 충분하고. 아, 증여세는 특별히 면제다.”
빙긋 웃은 황태자가 두루마리를 까닥거렸다.
“작위는 내가 즉위한 후에 로아즈 백작에게 직접 수여하도록 하지. 그러고 보니 로아즈의 작위는 에키네시아 로아즈가 계승하는 건가?”
“아니오, 그녀는 창천의 기오사 오너로 사는 것을 선택했습니다. 로아즈는 예정대로 란셀리드 소백작이 이어받을 겁니다.”
“그런가.”
황태자는 아쉬운 표정을 짓고는 두루마리를 내려놓았다. 기오사 오너로 창천에 머물면 그녀의 국적은 아젠카가 된다. 그래도 그녀의 가문이 제국의 공작가가 될 테니 에키네시아와의 끈은 유지가 되는 셈이다.
“그럼, 이제 마지막으로 남은 것은…… 그 서류에 비워져 있는 네 성이로구나.”
유리엔이 마검의 음모에 대해 알려 주는 대신 받았던, 크루엔이 황제가 될 경우 효력을 발휘할 친필 서류. 황실의 성을 버림으로써 제국과 유리엔의 관계를 완전히 단절하고, 황실이 더는 그에게 간섭할 수 없다는 것을 보장하는 서류였다.
현재 유리엔이 보관하고 있는 그 서류에는 그의 이름 뒤편이 지워진 채 비어 있었다. 황태자가 물었다.
“새로운 성은 어떻게 할 작정이냐, 유리엔? 원한다면 대공의 가문을 줄 수도 있다만. 대가 끊겨 황실에 반납된 성 중에도 괜찮은 게 많고, 내가 새로 지어줄 수도 있고.”
그렇게 말하면서도 크루엔은 유리엔이 거절하리라는 것을 짐작했다. 더 이상 황실이나 제국의 정세에 얽혀들기 싫어 성을 지우려는 그가 또 다시 제국의 가문을 받을 리가 없었다.
유리엔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저는…….”
* * *
갈로서스 공성 직후, 유리엔은 황태자군의 의무병과 마법사들에게 응급처치를 받았다. 그리고 에키네시아와 그는 다음날 아침이 되자마자 마나 열차를 타고 아젠카로 출발했다.
창천기사단은 마무리를 하고 며칠 뒤에 귀환할 예정이었다.
원래 유리엔은 창천기사단과 함께 귀환하려 했다. 그러나 부상 치료 중에 유리엔이 마나 코어 과부하를 겪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에키가 빠른 귀환을 강력하게 주장하는 바람에 일찍 돌아가게 되었다.
마나 코어가 망가지면 치명적이니 걱정하는 게 당연하긴 했지만 과한 반응이었다. 유리엔의 마나 친화력은 과부하 한 번쯤 겪었다고 흐트러질 수준이 아니었다. 부상도 꽤 중상이긴 했지만 치명상까진 아니었다.
그는 괜찮다고 하려 했으나 그녀가 불안함을 숨기지 못하는 것을 보고 순순히 그녀의 의견을 따랐다. 황태자가 제발 그냥 가라고 떠민 탓도 있었다.
갈로서스 요새의 붕괴와 낮을 물들인 밤은 최초의 바르데르기오사 오너 탄생이라는 전설의 시작에 걸맞은 사건이었다. 그로 인해 에키네시아를 향하는 시선은 외경심에 가까웠다. 찬탄하면서도 두려워하는 반응.
그래서 그녀가 불안해하자 주위는 거의 공포에 질렸다. 그 분위기를 빠르게 알아차린 황태자는 뒤처리는 알아서 할 테니 돌아가서 치료나 하라며 그들을 보냈다.
붕대투성이인 유리엔이 아젠카로 돌아가 샤이에게 치료를 받을 때까지, 에키의 온 신경은 유리엔의 안전에 기울어 있었다. 이변을 일으킨 이후 잠들어서 계속 깨어나지 않고 있는 마검에 신경을 쓸 틈조차 없었다.
유리엔의 치료를 마친 샤이는 탈진하여 쉬러 돌아갔다. 급히 찾아왔던 부단장이며 하인들까지 단장의 휴식을 위해 모조리 물러나고, 사택으로 돌아온 유리엔의 곁에 남은 것은 에키 혼자였다. 누구도 그녀에게 물러나라는 말을 하지 않았다.
늦은 밤이었다. 하녀들이 전에 에키가 썼던 침실을 준비해 두었다고 전해주었다. 그녀는 알았다고 대답하고 그들을 보냈다.
유리엔은 제 침대에서 잠들어 있었다. 에키는 바로 자신의 침실로 가는 대신 그의 침대 가장자리에 걸터 앉았다.
치료를 끝낼 때까지 태연하던 유리엔은 샤이가 엘기오사를 거두는 것과 동시에 혼절하듯 잠들어 버렸다. 많이 무리를 해서 몸이 강제로 휴식을 취하려 하는 것뿐이라고 듣고 나서야 에키는 겨우 안심했다. 마나 코어도 별다른 이상이 없다고 했다.
그를 내려다보았다. 그녀가 냈던 뺨의 상처마저 깨끗이 사라진 그는 고르게 숨을 쉬고 있었다. 이제야 그가 무사하다는 실감이 난다. 비로소 생각을 할 여유가 찾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