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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을 든 꽃-182화 (182/211)

검을 든 꽃 182화

그 어둠을 가장 먼저 발견한 것은 첫 번째 성벽 위에서 갈로서스 요새 내부를 지켜보고 있던 황태자와 호위기사였다.

낮 속의 밤. 허공을 잘라 물들인 것 같다. 그 어둠은 두려움을 불러 일으켰으나 동시에 경외감을 느끼게 만들기도 했다.

예민한 자들은 더 분명하게 그것을 감지했다. 무언가 압도적으로 강대하고 흉악한 것이 그 힘을 발휘하지 않고 그저 조용히 굽어보는 듯한 느낌.

“……경, 저게 뭐 같나.”

황태자가 얼이 빠져 물었다.

마스터급인 호위기사는 압박감에 후들후들 떨리는 팔을 간신히 주군으로부터 숨겼다. 저게 날뛰면 주위는 틀림없이 몰살이었다. 그런데도 놀라울 정도로 안정되어 있어 그럴 것 같지는 않았다.

저걸 대체 뭐라고 해야 할까. 호위기사는 넋이 나간 채로 대답했다.

“글쎄요, 재앙이라기엔 너무 평온하고……. 기적?”

황태자 근처에 있던 기사들도, 도망치던 제국군들도, 그들을 잡아들이던 황태자군도, 2황자를 이송한 후 단장을 찾아 요새로 오고 있던 창천기사단원들도, 모두 그 거대하고 고요한 어둠을 보았다. 요새로부터 멀리 떨어진 마을에서도 하늘의 일부를 물들인 어둠을 보았다.

어둠 속에서, 유리엔은 에키네시아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피부를 불규칙적으로 물들이고 있던 검은 얼룩이 서서히 변화했다. 문양을 새긴 것처럼 안정되고 깔끔한 형태로 바뀐다.

그녀는 제 손에 쥔 마검의 칼날을 들여다보았다.

문양이 떨어져나간 칼날은 매끈했다. 전부 떠오른 붉은 문양이 곧 칼날과 검은 손잡이를 감싸며 휘돌기 시작했다. 그 모습은 성검 랑기오사를 휘감고 도는 황금빛 문양들과 비슷했다.

홀린 듯이 그것을 지켜보던 에키네시아는 불현듯 제 몸이 다시 제 말을 듣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통제권이 돌아왔다. 깊게 베인 손목에서 날카롭고 선명한 통증이 느껴졌다. 그 통증에 찬물이 끼얹어지듯 정신이 들었다.

그리고 지친 듯한 마검의 음성이 들렸다.

[끝! 끝났다! 야, 일단 나 좀 잘게. 이따가 칭찬……해 주…….]

바르데르기오사는 말을 끝맺지도 못하고 잠들었는지 조용해졌다. 그녀는 붉은 문양이 휘감긴 마검을 늘어뜨리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검게 채색되었던 하늘이 조금씩 옅어지며 정상으로 되돌아온다. 구름이 가득해 희뿌옇게 흐린 하늘이었다. 갑작스레 이변을 겪었던 구름들은 그 충격 때문인지 결국 머금고 있던 눈을 뿌리기 시작했다. 올해의 첫눈이었다.

마검에서 흘러나왔던 검은빛이 검으로 되돌아왔다. 그녀는 그것이 마검에 마나로 누적되는 살의임을 알아보았다. 살의는 으르렁대며 날뛰는 대신 길들인 짐승처럼 얌전히 바르데르기오사의 내부로 갈무리되었다.

무언가 큰 변화가 있었는데, 정확히 무엇이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그녀는 얼떨떨하게 주위를 살폈다. 어둠이 완전히 걷혔다. 소리 없이 떨어지는 눈송이들 사이로 자신을 보고 있는 유리엔과 시선이 마주쳤다. 만신창이. 하얀 목깃이 새빨갛게 물들어 있었다.

그것을 보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완전히 기억이 났다. 그녀는 치미는 살의를 참지 못했다. 참지 못해서.

“유리엔!”

에키네시아는 비명처럼 그의 이름을 부르며 마검을 내팽개치고 그를 향해 달려갔다. 쉽사리 손에서 떨어지 마검이 눈이 쌓이기 시작한 바닥에 나뒹굴었다.

그에게 다가가며 그녀의 피부를 뒤덮었던 문양도, 머리카락과 눈동자의 검은빛도 씻겨나가듯 사라졌다. 연한 분홍색 머리카락이 팔랑거렸다. 보라색 눈동자가 물기로 젖어들었다.

유리엔은 막무가내로 제 품에 안겨드는 가느다란 몸을 상하게 할까 싶어 쥐고 있던 성검을 급히 내던졌다.

[윽, 너무하는 것 아니냐, 주…….]

항변하려던 성검은 말끝을 흐리더니 곧 입을 다물었다.

색이 다른 머리카락이 뒤엉켰다. 그녀의 팔이 그를 절박하게 끌어안는다. 그녀는 그의 목덜미에 뺨을 묻었다. 그가 한쪽 팔로 움켜쥐듯 그녀의 몸을 감쌌다. 그녀의 손목에서 흐른 피가 그의 어깨를 적시고, 그의 목에서 흐른 피가 그녀의 뺨에 묻어났다.

“율, 내가, 당신을…….”

그녀가 울음을 터뜨렸다. 그는 어쩔 줄 모르는 손으로 품 안의 여자를 감싸다가, 우는 얼굴을 조심스럽게 들어 올렸다. 눈이 마주쳤다. 그녀가 헐떡이며 울음과 뒤섞인 말을 쏟아내려 했다.

“다, 당신을, 내가, 또…….”

“아니, 그대는…….”

“참, 참지 못해서…….”

“에키네시아.”

유리엔이 흐트러지는 그녀의 말을 잘랐다.

“그대는 참았다. 분명히 그대는, 스스로 검을 멈췄다.”

그는 그녀의 얼굴을 손끝으로 더듬고,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고, 잔뜩 젖어 눈물을 흘리고 있는 눈동자를 들여다보며 말했다.

“그리고 또 기적을 일으켰다. 그러니 아무것도…….”

침착한 말과 달리, 그녀를 들여다보는 그의 얼굴은 전혀 침착하지 못했다. 얇은 성에 같던 냉정이 그녀를 확인하자 녹아 떨어졌다.

“보고 싶었다.”

차분히 이어지던 말들 사이로 쉰 음성이 불쑥 튀어나왔다. 통제되지 않고 튀어나간 감정이었다. 그는 시선을 떼지도 않고, 눈을 깜박이지도 않고, 그녀의 얼굴을 감싼 채 속삭였다.

“보고 싶었다. 그대를 줄곧 보고 싶었다. 정말로, 너무나도, 보고 싶어서…….”

그녀로 인해 엉망으로 다쳐 놓고서는, 아무런 죄도 묻지 않고, 추궁도 없이, 공포도 없이, 그저 되뇌는 말들. 그의 말끝이 허물어졌다. 에키네시아는 그의 눈동자가 흠뻑 젖어드는 것을 보았다.

“자리를 만들어도, 돌아오지 않을까봐, 그대가 나를 용서하지 못하는 건 당연하지만, 그래도, 보고 싶었, 하지만 그대의 허락도 없이 그대를 만나러 갈 수도 없어서, 기다리기로 결심하고서도, 그대가 다시는 나를 보려 하지 않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미칠 것 같아서, 내가, 잘못…….”

더운 눈물이 뚝뚝 떨어져 내렸다. 그녀는 횡설수설하는 그의 말들을 반도 알아듣지 못했다. 그저 멍하니 눈물을 떨구는 남자를 지켜보았다.

지금 자책해야 할 사람이 누구인데 뭐라는 건지 모르겠다.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는데, 자신을 보고 싶었다는 건 확실히 알았다.

그리고, 그가 그녀가 알던 유리엔으로, 그녀가 지워버린 시간들을 유일하게 공유하고 있는, 그 유일하고 특별한 사람으로 되돌아왔다는 것을 깨달았다.

덕분에 자괴감과 혼란과 자책이 일순 날아가 버렸다. 그제야 너무나 오랜만에 그와 만났다는 걸 자각했다. 심장에서 범람한 것이 머릿속을 휩쓸어가기 시작했다.

“나야말로 참지 못했다. 그대가 돌아오지 않으면, 무슨 수를 써서든 찾아내려, 계획까지 했, 미안하다, 그대에게 그렇게 상처를 주고도 나는, 도저히 견딜 수가 없어서…….”

에키네시아는 뭔지 모를 사과를 해대는 그의 뺨을 양손으로 붙잡았다. 반짝이는 은발에 눈송이를 얹은 채 울고 있는 남자는 전투의 여파로 엉망인데도 불구하고 홀릴 듯이 아름다웠다.

그녀의 눈에 비치는 그는 하얗게 빛나고 있다. 그녀의 빛이 여기에 있었다.

“에키, 나는, 여기에도, 그대를 막아야 한다는 것보다, 그걸 핑계로 그대를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보고 싶어서, 그대에게 용서를, 흡.”

이상하게 목이 메여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그래서 사과하지 말라고 말하는 대신 그의 입을 막았다. 제 입술로.

피 맛이 났다. 그럼에도 오랜만의 입맞춤은 지독하게 달았다. 금세 양쪽 다 정신이 나갔다. 숨결이 뒤섞이며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서로를 그러안기 시작했다. 몸 상태도 까맣게 잊어버린 채로.

[……여러모로 제정신이 아닌 것 같다만, 뭐, 이번엔 이해해 주마, 주인.]

랑기오사는 조그맣게 중얼거리고는 다른 쪽으로 시야를 집중했다. 눈발이 점점 거세졌다. 폐허나 다름없어지 갈로서스가 새하얗게 덮여갔다.

성검과 똑같이 주인한테 내던져진 불쌍한 마검은 눈을 반쯤 덮고 누워 있었다. 무언가 크게 변했으니 지쳐서 쿨쿨 자고 있을 것이다.

마검 주위를 빙글빙글 휘감아 도는 붉은 문양이 언뜻 보였다. 성검은 제 본체 주위를 도는 황금빛 문양과 그것을 번갈아 확인했다. 정말 해낼 줄은 몰랐는데. 기특한 녀석.

자신들이야 눈밭에 파묻혀도 아무런 문제가 없고, 제니스인 저들도 눈이 오든 말든 내버려둬도 상관없겠지.

그렇게 판단하고 시야를 돌려 보았다. 눈을 헤치며 황태자가 기사들과 함께 다가오고 있었다. 성검은 주인을 불러 저들이 오고 있다는 것을 알릴까 하다가, 정신을 못 차리고 있는 연인을 보고 혀를 찬 다음 그냥 신경을 껐다.

1629년 12월 1일, 마검의 주인에 의한 갈로서스 함락을 마지막으로 제국의 내전이 끝났다. 승자는 황태자 크루엔 드 하르덴 키리에였다.

13막. 끝나는 것과 끝나지 않는 것

그리 길지 않은 내전이었다 해도 전쟁은 전쟁이었다. 전쟁이란 끝난 후에도 끝나지 않는 법이다. 전후처리와 논공행상이라는 2차전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그건 크루엔이 책임져야 할 일이었다. 갈로서스가 함락되자마자 황태자는 내전을 주도한 세 명의 신변부터 확인했다.

윈들턴 디아상트는 자살, 2황자 카르엠은 생포, 로라스 황제는 시신으로 발견되었다.

황제의 시신은 멀쩡하지 않았다. 죽어가며 느낀 고통을 드러내듯 얼굴마저 일그러져 있었다. 누가 죽였는지는 명백했다.

폐위될 황제였고, 적이었다지만 그래도 제국의 황제이자 황태자의 친부였다. 정이 남아 있거나 한 것은 아니었으나 여러모로 찝찝했다. 그럼에도 황태자는 그 문제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꺼내지 않았다.

대외적으로는 에키네시아 로아즈에게 주어진 면책특권과, 황태자가 반기를 든 시점에서 황제는 이미 황제가 아니게 된다는 명분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게 아니라도 황태자는 그녀에게 무어라 할 생각이 없었다.

“갈로서스가 무너지고 대낮에 밤이 찾아오는 꼴을 똑똑히 보고도 명예니 권위니 할 정도로 멍청하진 않다.”

따로 말을 하지는 않았으나 크루엔은 내심 그녀를 인간이라기보다 전설 속에나 나오던 용으로 취급하기로 마음먹었다. 치외법권이란 소리다. 저 정도 수준의 무력이면 그 편이 나았다.

그리고 그녀의 연인이 유리엔이라는 사실에 다시 한 번 감사했다. 유리엔이 미쳐 있는 여자가 그녀라는 것도 진심으로 다행이었다. 괴물 둘이서 금슬 좋게 살도록 아무도 안 건드리는 게 최선이었다.

“그래서 너희 언제 결혼하냐.”

크루엔과 마주 앉아 차를 머금던 유리엔이 사레가 들려 요란하게 기침을 했다.

크루엔은 생경한 눈으로 이복동생을 바라보았다. 저게 사레도 들릴 수 있는 놈이었군. 맙소사, 지금 얼굴이 붉어진 건가?

“……그렇게 놀랄 질문이었나?”

“그, 그보다, 아까 말씀드리려던 증명식 문제가…….”

“왜 대답이 없느냐? 설마 결혼할 생각까진 없었나? 연애만 하고 결혼은 다른 여자랑 하려고?”

아니라는 걸 뻔히 알면서 크루엔은 능청스럽게 물었다. 유리엔의 낯이 싹 굳더니 눈빛이 서늘해졌다. 황태자는 급히 고개를 저었다.

“농이다, 농. 네가 말을 돌리려 하기에…….”

“두 번 다시 그녀를 그런 농에 엮지 마십시오.”

“내가 잘못했다. 용서해 다오.”

크루엔이 순순히 고개를 숙였다. 유리엔은 잠시 침묵하다가 그의 사과를 받아들였다.

그들이 있는 곳은 황궁의 접빈실이었다. 갈로서스 공성전 이후 처음 의논하는 자리였다.

유리엔의 부상이 심했고, 그의 상태가 좋지 않자 에키네시아가 극도로 불안해했기 때문에 그들은 바로 아젠카로 돌아갔었다. 뒤처리는 전부 황태자의 몫이었다.

그러고 나서 전보만 주고받다가 2주 만에 중요한 문제들을 논의하러 온 터였다. 정확히는 내일 있는 황태자의 즉위식에 유리엔이 창천기사단장으로서 참석하러 온 김에 만났다.

“그래서, 증명식이 뭐?”

“증명식을 하지 않기로 했습니다.”

“……그, 예정되어 있던 바르데르기오사 오너 증명식 말인가?”

“예. 그녀는 스스로를 증명해 냈으므로, 타인의 인정을 받을 필요가 없습니다. 대신 같은 규모로 서임식을 할 예정입니다.”

스스로를 증명했다. 그 말에 황태자는 갈로서스에서 목격한 기이한 현상을 떠올렸다.

“그러고 보니 그 이변은 대체 뭐였느냐? 마검에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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