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을 든 꽃-181화 (181/211)

검을 든 꽃 181화

바르데르기오사는 자신이 탄생하던 순간을 어렴풋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걸작들, 내 사랑하는 아이들아. 너희는 모두 특별하단다. 같은 이름으로 묶일지라도, 너희는 서로 다른 재료로 만들어졌고 서로 다른 비밀을 가지고 있으며 서로 다른 경험을 쌓아갈 테지.〉

신이 벼려낸 두 자루의 검이 아직 탄생하기 전, 신의 능력을 빌린 인간이 만들어낸 열 자루의 검.

정확한 순서는 몰라도, 바르데르기오사는 그들 중에서도 꽤 먼저 만들어진 검이었다. 다른 기오사들이 만들어지는 순간을 지켜보았던 게 흐릿하게 떠오른다.

대장장이는 한 자루의 검을 만들기 위해 무척 오랜 시간을 들였다. 그리고 만들어지고 있는 기오사에게 늘 애정 어린 음성으로 속삭이곤 했다.

〈너는 어떤 아이가 될까. 네게는 어떤 주인이 어울릴 것 같으냐?〉

〈내 생각엔 이런 사람이 네 주인이 되면 좋겠구나. 그래, 이 조건을 만족해야 너를 쓸 수 있게 해주마. 이런 사람들이 네 주인 후보가 되는 거다.〉

대장장이는 기오사를 쓸 수 있는 자격을 결정했다. 그것이 기오사 오너의 조건이 되었다.

〈물론 네 생각은 다를 수도 있겠지? 어디까지나 네 마음에 드는 게 더 중요하니까.〉

〈아이야, 꿈을 꾸며 주인 후보가 너를 어떻게 쓰는지 잘 지켜보렴. 그 후보가 정말로 마음에 들어서 네 주인으로 삼고 싶어지면, 그때에 잠에서 깨어나려무나.〉

대장장이가 아니라, 기오사의 자아가 주인으로서 원하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가. 그것이 기오사를 각성시키는 조건이 되었다.

〈나는 너희가 함부로 다뤄지길 바라지 않는다. 주인이 제멋대로 휘두르는 바람에 너희가 괴로워지는 것도 싫다. 주인의 혼과 깊게 연결되어야 하는데, 그 혼이 너희를 힘들게 만들어서는 안 될 일이지.〉

〈너희는 위대한 검이고, 그에 걸맞은 주인을 만나 대우를 받아야 해.〉

〈허나 검이란 쓰이지 않으면 녹스는 법. 그러니 껍데기는 사용되도록 내버려두고, 자아는 잠들어 있거라. 마음에 드는 주인을 만났을 때만 일어나도 충분해.〉

기오사의 자아는 자신을 사용하는 ‘주인 후보’를 진심으로 주인으로 삼고 싶어질 때만 깨어나 주인의 혼과 연결되도록 만들어졌다. 제작품을 사랑하는 대장장이의 배려였다.

〈응? 너는 잠들기 싫어? 계속 깨어 있고 싶다고? 수많은 사람들이 거쳐가면 힘들 텐데, 괜찮겠느냐? 그게 공정할 것 같다, 라……. 하긴 그도 일리가 있구나. 네 말이 옳다. 스스로 자아를 유지할 수 있도록 이것을 추가해 주마.〉

〈너는 일어나더라도 주인이 몰랐으면 좋겠다고? 부끄러운 게냐? 녀석 참. 그래, 네겐 그게 어울릴지도 모르겠구나. 그럼 주인의 혼이 너를 감지하지 못하도록 만들어주마.〉

대장장이는 갓 태어난 기오사들이 원하는 바를 대부분 수용했다.

다만 당시의 기오사들은 세상도 인간도 제대로 겪어보지 못한 백지에 가까워서, 많은 주인을 겪고 경험이 쌓이면 생각이나 성격이나 가치관까지 바뀔 수도 있었다.

대장장이는 그 점을 고려하여 모든 기오사에게 비밀을 한 가지씩 심어 주었다.

〈이제 너는 계속 깨어 있을 수 있다. 혹, 지내다 보니 너무 피곤해서 다른 아이들처럼 잠들고 싶으면 이렇게 하고. 이건 너만의 비밀이다.〉

〈자, 네 주인은 널 깨워놓고도 네게 자아가 있다는 걸 모르게 될 거다. 그래도 나중에라도 주인과 이야기하고 싶어지면 이렇게 해라.〉

바르데르기오사도 마찬가지였다.

〈바르데르기오사, 너는 어떤 주인을 원하느냐? 어떤 사람을 만났을 때 깨어나도록 만들어줄까?〉

〈아직 잘 모르겠다고? 괜찮다, 시간이 흐르면 어떤 사람이 너와 잘 맞는지 알게 될 테니.〉

〈우선은 이런 조건에서 깨어나도록 해주마. 최소한 이 정도는 되어야 너를 다룰 수 있을 거다.〉

〈다른 아이들처럼 달리 원하는 건 없느냐? 딱히 없다고? 이대로면 충분해?〉

매끄러운 칼날 위를 쓰다듬던 손. 대장장이는 한동안 침묵하다가 속삭였다.

〈하지만 아이야, 너는 가장 흉악하고 잔인한 재료로 만들어졌으니…… 어쩌면 이런 게 필요해질 수도 있다.〉

〈너는 살육의 검이다. 베고 생명을 빼앗는 일에 충실할 때 가장 행복할 거야. 그래서 나는 네가 살인을 즐기는 잔혹한 사람과 잘 어울릴 거라고 생각한다. 그렇게 너를 만들었다.〉

〈그런데 막상 너는 그렇지 않은 사람이 좋아질 수도 있겠지? 그리 되면 조금 힘들어질지도 모르겠구나.〉

〈그럴 때를 대비해서 선물을 주마. 이건 네가 본능에 위배되는 선택을 하고 싶어질 때를 위한 비밀이다.〉

대장장이는 바르데르기오사의 칼날에 정성 들여 문양을 새겼다.

〈자, 어떠냐? 저 아이와 비슷한 기능이란다. 다만 저 아이와는 다르게 미완성인 상태니, 필요하게 되면 완성시키려무나.〉

〈물론 너는 이대로도 완벽하니 필요하지 않으면 굳이 완성시키지 않아도 된다.〉

〈혹시 필요해진다면, 기억해 두거라. 이건 너 혼자서는 완성시킬 수 없다. 네 주인이…….〉

〈어차피 네게 이런 소망을 품게 만드는 주인이라면 크게 어려운 일은 아닐 거다. 반대로 너의 본질과 잘 어울리는, 살인을 쾌락으로 느끼는 사람을 고른다면 그런 소망 자체가 생기지 않을 테니 상관없고.〉

인간으로 치면 태아 시절의 일이었기에 기오사들은 대체로 이때의 일을 잊어버렸다. 언젠가 정말로 필요한 순간에만 떠오르도록 깊이 묻었다. 모든 기오사들이 가지고 있는 저마다 다른 ‘비밀’이었다.

〈너희는 사람의 마음으로 만들어졌고, 사람은 변화하는 존재지. 그러니 너희도 변화할 수 있다. 변할 수 있기에 더 완벽하고 영원한 걸작인 게야.〉

바르데르기오사는 그 기억들을 비로소 떠올렸다. 주인을 만나고, 시간이 흐르고, 경험과 소망이 쌓이면서 조금씩 파편들이 모이다가, 어느 순간 선명하게 완성되었다.

〈내가 만들어진 후 내 자아를 일깨운 건 네가 두 번째야.〉

처음 만났던 주인이 살인을 좋아하는 자였다면 마검은 지금과는 좀 다른 성격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첫 번째 주인도 사람을 죽이기보다는 살리고 싶어 했고, 바르데르기오사는 그 사람을 나름 좋아했다.

‘죽이는 건 이렇게 즐거운데, 인간은 왜 싫어하는 걸까.’

그 주인은 악마였던 시절로 두 번 다시 돌아가고 싶지 않아서, 꾸준히 죽여도 될 만한 ‘나쁜 사람’을 찾아 죽이며 살의를 풀어주었다. 바르데르기오사는 그 과정을 통해 ‘나쁜 것’에 대해 배웠다.

다만 첫 번째 주인은 그러면서도 바르데르기오사를 봉인하거나 포기할 생각은 전혀 하지 않았다. 마검의 힘이 있는 쪽이 훨씬 강하고 편했기 때문에.

그 주인에게 마검은 ‘강하고 편리하지만 위험하고 섬뜩한 도구’였다. 바르데르기오사는 검이었기에 그런 대우도 싫지 않았다. 좋은 주인이었다. 나름 행복했다.

〈발, 내가 그렇게 좋아?〉

두 번째 주인은 그렇게 물었다.

‘주인이니까 좋은 게 당연하지. 근데 첫 번째 주인보다 네가 더 마음에 들어. 왜냐고? 어…….’

바르데르기오사는 전 주인과 그녀가 무엇이 다른지를 생각해 보았다.

두 번째 주인은 자신을 잘 쓰지 않는다. 하도 안 써서 써달라고 애원을 하게 될 정도로. 바르데르기오사는 강력하고 유용한 도구인 자신을 활용하지 않는 그녀가 이상했다.

타고난 재능도 있었겠으나, 그녀가 첫 번째 주인보다 훨씬 빠르게, 더 뛰어난 실력이 된 건 마검에 의존하지 않았던 탓도 있었다.

‘내가 없어도 엄청 강하네. 물론 내가 있으면 더 강해지지만. 어쨌든 내 주인이 제일 쎄! 내 주인이 제일 대단해!’

앞으로 수많은 주인을 만나게 되더라도, 다른 기오사의 주인들을 만나게 되어도, 그녀보다 강한 사람은 드물 것이다. 아예 없을지도 모른다.

바르데르기오사는 그 사실이 뿌듯하면서도 조금 슬펐다. 이 사람과 헤어지면 이만큼 뿌듯해질 일은 없을 것 같아서.

〈발.〉

〈아, 좀, 그렇게 줄여 부르지 말라니까. 품위가 없잖아, 품위가!〉

그녀는 바르데르기오사의 이름이 길어서 귀찮다며 마음대로 줄여 불렀다. 바르데르니까 발. 정말 대충 지은 애칭이었다.

하지만 싫지 않았다. 투덜거리긴 했어도, 실은 꽤 마음에 들었다. 전 주인은 애칭 같은 걸 붙여주지 않았다.

두 번째 주인은 마검을 꽤 험하게 다루었다. 본체를 막 다루는 건 당연하고, 바르데르기오사의 자아도 아주 거리낌 없이 대했다. 마나로 훑으면 따가워한다는 걸 알고 나서는 말로 화내는 것에 그치지 않고 쥐어박기까지 했다.

누군가를 죽이자고 하면 화를 내는 건 전 주인도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무언가 달랐다.

‘이건, 뭐가 다른지 알 것 같아.’

그녀가 화를 내는 대상이 ‘마검 바르데르기오사’가 아니라 ‘발’인 것이 다르다.

그녀는 전 주인과 달리 도구로써의 바르데르기오사를 적극적으로 활용하지 않는다. 그러면서도 긴 시간을 함께했다. 그녀의 곁에 검으로서가 아니라 ‘발’로 있었던 때가 훨씬 많다.

어떤 기오사는 단순한 도구로 대우해 주는 것을 더 좋아할지도 모른다. 그들은 검이니까. 바르데르기오사도 검으로써 쓰일 때가 가장 행복하긴 했다.

그래도 그녀의 그런 태도가 좋았다.

친밀감은 천천히, 그리고 소리 없이 마검을 물들여갔다. 그녀가 더는 주인이 아니게 되는 것을 상상하면 굉장히 싫은 기분이 들 정도로.

조르든 말든 두려워하지도 주도권을 넘겨주지도 않는 그녀가 좋았다. 자신이 없어도 누구보다 강하고, 자신의 힘에 의지하지도 않아서 좋았다.

그런 주인이라 좋은데, 그런 주인이라서 거리낌 없이 너를 버리겠다고 말한다.

‘너는 내가 없어도 괜찮겠지만, 난 너랑 있고 싶은데. 네가 계속 내 주인이었으면 좋겠어. 어떻게 하면 나를 안 버릴 거야?’

그런 소망을 품게 되었다. 버림받지만 않는다면 살의라는 본능이 해소되지 않아도 괜찮을 것 같았다.

〈너도…… 아무도 못 죽이게 되더라도 나랑 같이 있고 싶다며. 그 기분이랑, 비슷한, 그런, 거야, 발.〉

그래서 이해할 수 있었다. 처음으로 인간이 제 욕구마저 억누르며 타인을 위하는 심정을 이해했다. 그 순간 바르데르기오사는 이미 변화할 준비를 마쳤다.

〈명령이야, 바르데르기오사. 아무도 죽이지 마.〉

주인이 명령했다. 본질을 거스르라는 그 명령은 미완성인 부분을 완성시키기 위해 필요한 조건 중 하나였다. 그리고 주인의 혼이 깊었던 인내만큼 깊은 살의에 물들었을 때.

필요해졌기에, 비밀이 깨어났다.

두 번째 주인이 마음에 들어서. 그리고 그 두 번째 주인이, 대장장이가 말했듯이, 살인을 쾌락으로 느끼지 않는 사람이라서.

앞으로도 이런 사람을 주인으로 삼고 싶어서.

껍데기에 누적된 살의에 주인이 휩쓸리는데도 마검은 자아를 잃지 않았다. 선택했고, 변화할 조건은 전부 다 갖춰졌지만, 주인이 완성시켜 주어야 할 부분이 남았다. 그래서 아직 미완이었다.

마검은 주인의 혼이 가라앉는 것을 붙들었다. 고정되지 않아 위태로웠다. 아차하면 함께 가라앉아 버릴 것이다.

바르데르기오사는 애타게 주인을 불러댔다.

[주인아! 주인아! 야! 내 말 좀 들어! 말려달라며! 우씨, 나도 버티기 힘들단 말이야! 더럽게 힘들어!]

발?

에키네시아는 그 음성의 이름을 떠올렸다. 인식했다. 그녀가 인식했다는 것을 느낀 마검이 화들짝 놀랐다.

[들려? 우와, 정말 들려? 너 진짜 대단, 아니 이게 아니고, 나 다 생각났어, 그러니까 얼른 이름 불러!]

뭐?

[내가 무엇이 될지를 규정해! 주인으로서!]

무슨 소리야?

[내 이름 부르라고, 줄이지 말고 제대로! 내가 어떤 검이었으면 좋겠는지 상상하면서, 아냐, 급하니까 일단 이름만 불러, 빨리! 다른 건 내가 할 테니까 몸 통제권 넘기고!]

그녀는 마검의 말을 제대로 알아듣지 못했다. 혼란스러웠다. 그래도 마검이 너무 간절하게 소리치고 있어서, 독촉하는 대로 이름을 불렀다.

“……바르데르기오사.”

크지 않았으나 또렷한 부름이었다. 그 부름에 답하듯 마검의 칼날에 새겨진 검은 문양들이 빛나기 시작했다.

맑은 검은 빛. 흘러넘치며 주위를 채워가는, 밤처럼 깨끗한 어둠.

코앞에서 그 이변을 본 유리엔의 눈이 커졌다. 마검의 마나가 흘러넘치고 있었다. 그는 반사적으로 성검을 움켜쥐었다. 그러나 대비한 것이 허무하게도 검은 마나는 그를 공격하지 않았다.

에키네시아의 몸이 저절로 움직였다. 유리엔을 겨누고 있던 마검을 거두고, 약간 물러나서 그것으로 제 손목을 베었다. 피가 철철 흐르자 마검이 조그맣게 중얼거렸다.

[어, 실수다. 너무 깊게…….]

“……?”

[아, 아냐! 원래 이러려던 거야! 아무것도 아니야, 주인아!]

혼자 떠들어대는 마검의 목소리 속에서, 그녀의 피가 흘러 마검의 문양을 하나하나 물들여 나갔다. 붉어지 문양이 칼날 위에서 천천히 떠올랐다.

그것이 하나씩 떨어져 나갈 때마다 검은빛이 짙게 흘러넘쳤다. 물결처럼 번지던 그것은 곧 하늘로 번져나갔다.

희뿌옇던 하늘이 검게 물든다. 그들이 있는 공간에만 밤이 찾아온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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