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을 든 꽃-180화 (180/211)

검을 든 꽃 180화

에키네시아가 움직이는 바람에 그녀의 목 어림에 걸려 있던 것이 옷깃 밖으로 흘러나왔다. 가죽끈으로 꿰어놓은 조그만 나무조각. 그 형태가 몹시 익숙했다.

‘저건 분명…….’

유리엔은 그것을 한눈에 알아보았다. 나무를 대강 깎아 만든 랑기오사 모양의 조각. 그가 만들었던 물건이다. 마음을 가라앉히고 시간을 때우기 위해 별 의미 없이 만들고 버렸던 물건이었다.

그게 왜 여기에. 저런 조잡한 것을 왜 그녀가. 무슨 마음으로 저것을 가지고 있었…….

질문을 던지면서도 답을 알고 있었다. 불현듯 눈가가 시큰해졌다. 그녀의 검에 집중하던 정신이 그리로 쏠렸다. 성검을 쥐고 있던 유리엔의 손에서 찰나 힘이 빠져나갔다.

[뭐 하는 거냐!]

기겁한 성검이 고함을 질렀으나 늦었다. 어지간한 마스터라도 알아차리기 힘든 아주 미세한 방심이었으나 그의 앞에 있는 건 에키네시아 로아즈였다. 아슬아슬하게 유지되던, 그나마도 조금씩 밀리고 있던 균형이 한순간에 기울었다.

마검이 성검을 쳐냈다. 검을 놓치고도 남을 위력이었으나, 유리엔은 다른 자들처럼 그러지는 않았다. 손아귀에서 벗어나는 손잡이를 곧바로 다시 붙잡았다.

그러자 에키네시아는 검을 움켜쥐느라 무방비해진 그의 오른손목을 발로 짓밟았다. 반사적으로 마나를 집중시켜 버텼지만 그녀는 그런 무의식적인 반응으로 막을 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손목뼈가 으스러지는 소리가 났다.

“……!”

유리엔은 신음을 흘리지 않았다. 그럼에도 고통을 완전히 참을 수는 없어 전신이 경직되었다. 그에게로 검은 마나로 감싸인 투명한 칼날이 짓쳐들어 왔다.

그 칼끝이 뚜렷했다. 성검이 무어라 소리치는 것이 들리지 않았다. 눈에 비치지도 않는 속도로 날아드는 칼끝만이 아주 느리게 보였다.

시간이 정지하는 기분이 들었다.

주마등처럼 수많은 기억이 뇌리를 스쳐 지나갔다. 그 끝에 떠오르는 건 강렬한 욕망. 죽고 싶지 않았다. 금욕적으로 살았던 만큼 생존 본능도 강하지 않았던 그에게는 생경할 정도의 욕망이었다.

〈유리엔.〉

과거, 바스라질 것처럼 연약해진 표정으로, 메마른 입술로, 쥘 수 없는 성검을 내려다보며 자신의 이름을 부르던 에키네시아의 모습이 선연하다.

그녀의 손에 또다시 죽으면, 그녀는 또 그런 얼굴을 하게 될까. 그렇게 울게 될까.

지금, 이글거리는 새카만 마나 너머로 무표정한 에키네시아의 얼굴이 보였다. 그녀의 움직임을 따라 가죽 끈에 걸린 채 공중에서 흔들리는 랑기오사 모양의 나무조각이 보였다.

〈행복해지고 싶어서요.〉

언젠가 그녀가 했던 대답.

죽고 싶지 않다. 죽어서는 안 된다. 살아서 함께 행복해지고 싶었다. 그녀와.

오른손목이 완전히 부서졌다. 이제 오른손으로는 검을 휘두를 수 없다. 성검은 오른쪽에 있었다. 왼손으로 옮겨 쥐기엔 늦었다. 검으로는 저 칼날을 막지 못한다. 그럼 어떻게?

이론은 잘 알고 있었다. 잘 알다 못해 눈으로 보고 경험도 했다. 에키네시아가 계속해서 사용하고 있었으니까.

마나 코어가 뜨거워지는 느낌이 들었다.

백색 마나가 신체 외부로 튀어나왔다. 그것은 방패처럼 형상화되어 유리엔의 앞을 가로막았다.

완전한 막이 되지도 못했고, 얇고 흐렸으며, 막은 면적 또한 극히 좁았다. 마나 실드라고 부르기에는 여러모로 부족했다. 그래도 당장 다가오는 칼날을 막을 순 있었다.

캉, 하고 쇳덩이끼리 부딪히는 듯한 소리가 났다. 마검이 유리엔의 바로 앞에서 정지했다. 눈을 한 번 깜박일 정도의 시간 동안.

금세 바르데르기오사에 덮어씌워져 있던 검기와 어설픈 마나 실드가 상쇄되었다. 하얀 마나는 안개처럼 흩어지며 사라졌다.

그 극히 짧은 틈에 유리엔은 왼손으로 성검을 움켜쥐는 것에 성공했다. 그것으로 마검이 다시 베어 들어오는 것을 막으려 했다.

카랑.

마검이 방향을 틀어 유리엔 대신 성검을 내리쳤다. 공격 방향이 갑자기 바뀌는 바람에 그는 당황해서 제대로 막지 못했다. 그녀는 그의 검을 튕겨내려 했으나 이번에도 유리엔은 손아귀가 터질지언정 검을 놓치지는 않았다.

튕겨나가는 대신 아래로 밀려난 성검을 그녀가 발로 밟아 고정했다. 발 아래에 깔린 검은 미동도 하지 못했다. 무방비하게 열린 그의 목을 향해 또다시 마검이 찔러온다.

조금 전 유리엔은 전투 와중에도 다른 사람이 보았다간 혀를 내두를 법한 성장을 이뤘다. 그럼에도 격차가 너무 컸다. 부상이 심한 탓도 있었다.

마나 코어가 있는 명치 쪽이 델 듯이 뜨거웠다. 과부하가 걸린 모양이었다. 반쪽짜리 마나 실드라 해도 지금 다시 만들어내는 건 불가능할 거다. 유리엔 자신도, 주인의 상태를 감지한 성검도 그것을 알았다.

[안 돼!]

랑기오사가 비명처럼 외쳤다. 유리엔은 백지가 된 상태로 다가오는 칼날을 보았다.

그리고 마검이 멈췄다.

무리한 움직임에 처음 써보는 기술까지 사용한 유리엔의 호흡은 거칠었다. 어깨가 눈에 띄게 들썩이고 있었다. 속에서 솟아오른 피가 입안에 고였다. 그는 그것을 토해내는 대신 삼켰다. 목젖이 움직였다.

투명한 칼끝은 그 목젖 바로 앞에 정지해 있었다. 아까 성검에 베인 상처에서 흐른 피가 멈추지 않아 제복의 흰 목깃 위로 붉게 번져갔다.

검이, 멈췄다. 사람을 죽이기 위해 움직이는 악마가, 스스로 검을 멈췄다.

유리엔은 턱밑에서 멈춘 검을 내려다보다가, 천천히 눈을 들었다. 에키네시아는 그를 보고 있지 않았다. 그녀는 제 목에 걸려 있는 랑기오사 조각을 응시하고 있었다.

곧 그녀가 그것에서 시선을 뗐다. 그러더니 그에게 검을 겨눈 채로 다가왔다. 유리엔은 칼날을 피하기 위해 약간 물러났으나 등 뒤의 벽에 막혔다. 벽이 충돌로 인해 약간 기울어진 상태라 그것에 기대앉은 유리엔도 비스듬해졌다.

에키네시아의 눈이 느릿하게 깜박였다. 더 가까이 가면 칼끝이 그의 목을 찌르게 된다.

그녀는 그를 찔러버리는 대신 마검을 눕히며 칼끝이 아니라 칼날로 그의 목을 지그시 눌렀다. 그렇게 거리를 확보하고 더 가까워졌다. 그에게 바짝 얼굴을 기울였다. 이상한 것을 관찰하는 짐승 같은 몸짓이었다.

상대의 눈동자에 비치는 자신의 모습이 보이는 거리. 제 호흡이 그녀에게 닿을 것 같아 유리엔은 숨을 멈췄다. 물방울이 그녀의 속눈썹 끝에 매달렸다가 깜박이는 움직임에 그의 뺨 위로 툭 떨어졌다.

조금만 더 힘을 주면 목을 벨 수 있는데, 그녀는 그 상태로 더 이상 힘을 주지 않았다. 동공이 구별되지 않을 정도로 새카만 눈동자가 이리저리 움직이며 그의 얼굴을 샅샅이 탐색했다.

그러더니 그 눈이 유리엔의 눈을 찾아 시선을 맞댄다. 갸웃거린다.

‘악마’는 기묘한 반응을 보이고 있었다. 긴장도 살기도 흐트러졌다. 짓밟혀 고정되어 있던 성검도 어느새 풀려났다. 공격은 무리더라도 떨쳐내고 달아나거나 살의 흡수를 시도해 볼 절호의 기회였다.

그러나 유리엔은 그저 가만히 그녀의 시선을 받았다. 성검 역시 입을 다물었다.

정적. 똑 하고 떨어지는 물방울. 검을 휘감은 마나가 미세하게 웅웅거리는 소리. 불길이 타오르며 타닥이는 소리. 먼 곳에서 들리는 갖가지 소음. 매캐한 냄새와 물비린내와 뒤섞인 피 냄새.

그녀의 흰 얼굴에 젖어 달라붙은 검은 머리카락 너머로 보이는 희뿌연 하늘. 오전에는 맑았던 하늘에 어느새 구름이 가득했다. 눈이 올지도 모르겠다.

유리엔은 정안을 떠보았다. 여전히 악의로 물들어 새카맣게 변한 불꽃이 보였다. 그녀는 마검의 살의와 싸우고 있는 게 아니라 그것을 받아 들여 동화되어 버린 상태 그대로였다.

하지만 무언가 달라졌다. 검게 변한 혼은 열화와 같이 타오르는 대신 모닥불처럼 잔잔히 일렁였다. 발산되지 않고 침잠하고 있다. 무슨 현상인지 알 수가 없었다.

알 수 없지만, 아무래도 상관없는 기분이 든다.

유리엔은 왼손에 쥐고 있던 성검을 놓았다. 조심스럽게 손을 들어 올렸다. 그녀의 뺨에 손끝이 닿았다가, 천천히 뺨을 감싼다. 엄지가 그녀의 입술 가장자리를 스쳤다.

그녀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여전히 마검을 겨누고 있지만, 죽이려 들지 않는다. 그의 손길을 피하지도 않는다. 가만히 그를 보고만 있었다.

이성이 아니라 직감으로 와 닿는 것이 있었다. 유리엔은 입을 열었다.

“에키.”

그대에게 내 목소리가 들릴까.

“에키네시아.”

* * *

발, 네가 사람을 죽일 때 어떤 기분이었는지 알겠어. 이렇게 달콤하고 나른하고 행복한 기분이었구나.

모든 것이 멍했다. 에키네시아는 생각을 하지 않았다. 따뜻한 물에 잠겨 눈을 감았다. 몸뚱이는 내키는 대로 움직였다.

꺼져가는 숨이 감미롭다. 하지만 모자라. 더 죽이고 싶어. 죽이고, 망가뜨리고, 울부짖는 게 보고 싶어.

벌레처럼 약한 것들. 모래성처럼 무너지는 것들. 전부 손쉽게 부스러진다. 베고, 또 베고, 피가 튀고, 죽고, 누군가가 피했다.

피했다?

하얀 남자가 그녀의 공격을 피했다. 제법이었다. 조금 더 빠르고 강하게 베어보았다. 또 피했다. 강하구나.

희고 강한 것을 쫓았다. 자꾸 도망친다. 성가셨다. 가는 길에 있는 다른 것을 먼저 죽이려 했다.

마나 실드가 뚫렸다. 처음이었다. 에키네시아는 물끄러미 하얀 것을 보았다. 내버려 뒀다간 나를 다치게 할 수도 있는 것. 우선적으로 처리해야 할 것.

쫓아갔다. 공격했다. 몰아넣었다. 그것의 목에서 피가 흐른다. 하얀 것 위에 번져나가는 붉은 빛.

여전히 달콤하게 느껴지는데, 이상하게 기분이 나빴다. 왜? 지금까지는 다 기분이 좋았는데.

[듣…… 않…….]

무언가가 아주 조그맣게 앵앵거렸다. 아까부터 계속 그랬던 것 같은데 이제야 알아차렸다. 뭐야, 뭐가 이렇게 시끄럽게 굴어? 뭐라고 하는 거야? 그것에 집중을 기울여 보았다. 그러느라 지체한 사이.

“에키.”

다가온 손이 부드럽게 눈가를 훔쳐 낸다. 낮고 깊은 음성이 귀에 또렷하게 들려왔다. 그게 죽어가는 인간의 비명만큼 감미롭게 들렸다. 왜?

알게 뭐야. 죽여버려. 전부 죽여버려!

기갈처럼 절실한 욕망이 몸을 움직인다. 그녀가 움직이는 순간 그녀의 목 어림에서 무언가를 본 남자가 집중을 잃었다. 그 틈을 노려 귀찮게 버티는 손목을 망가뜨리고 심장을 꿰뚫으려 했다. 귓가의 앵앵거림이 커져갔다. 무시했다.

마나 실드 비슷한 것에 찰나 막혔다. 약간 놀랐지만, 별 건 아니었다. 부수고, 그새 하얀 남자가 도로 움켜쥔 검을 짓밟아 고정했다.

확실히 강하다. 이렇게 강한 것은 처음 보았다. 심지어 싸우는 와중에 조금 더 강해졌다. 얼른 죽여야 할 위험한 것이었다. 이제 검을 들지 못할 테니 죽이면 된다. 숨통을 끊으려 했다.

죽여.

검을 휘두르는 와중에 시야에 거슬리는 게 보였다. 거슬려서 견딜 수가 없어서 검을 멈췄다. 자신의 목에 걸려 있던 것이 움직임에 떠오르며 시야 끄트머리에 걸렸다가, 멈추자 내려앉았다.

나무 조각.

아까 이것을 본 남자가 크게 동요했었다. 왜였을까. 아, 이거, 저자가 쓰는 검과 똑같은 모양이야. 내가 왜 이걸 걸고 있지?

……‘내’가 누구지?

살의에 젖어 아무 생각을 하지 않고 있던 머리에 그 의문이 떠오르는 것과 동시에.

무슨 상관이야, 죽여.

이건 뭔가 다른 것인가? 알고 싶어.

두 가지 욕구가 떠올랐다. 에키네시아는 무의식적으로 둘 중 하나를 따랐다.

검을 겨누고 하얀 남자를 꼼꼼히 살펴보았다. 그것은 반항하지도 공격하지도 않고 얌전히 있었다. 몸이 만신창이다. 제가 그렇게 만들어 놓고서는 그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어째서? 똑같은 인간인데 왜 불쾌하지?

모르겠다. 약간 떨어진 곳에서 살아 있는 것들의 기척이 느껴진다. 이걸 얼른 죽이고, 저것들도 죽이러 가야 하는데. 더 죽여야 했다. 목이 마른다. 그런데.

손이 움직이지 않았다.

‘안 돼.’

뭐가.

‘그 사람은 안 돼.’

왜?

‘더는 후회하고 싶지 않아. 그러니까 안 돼.’

하얀 것이 팔을 들어 올렸다. 공격일지도 모르는데 몸이 반응하지 않았다. 공격이 아닐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확신대로 그것은 그녀의 뺨을 만지작거리다가 손바닥으로 감쌌다.

묘한 온기. 묘한 익숙함.

“에키.”

묘한 목소리. 묘한 발음. 숨결이 거슬린다. 죽여버리고 싶어. 죽이고 싶지 않아. 저 인간이 무슨 말을 하는 거지?

“에키네시아.”

아. 내 이름이구나.

이름? 내 이름?

‘내’가 누구지?

나는.

다시 한 번 그 의문을 떠올리고, 그 의문에 대한 대답을 깨달은 순간, 물속에 잠겨 있는 것처럼 아득히 멀었던 감각들이 갑자기 확 밀려들었다. 피부에 소름이 돋은 것까지 느껴졌다.

그제야 내내 울리고 있던 소리가 그녀의 영혼 전체를 뒤흔드는 듯한 음성이 되어 명확히 들려왔다.

[주인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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