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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을 든 꽃-179화 (179/211)

검을 든 꽃 179화

공격이 빗나가자 에키네시아가 희미하게 미간을 찌푸렸다. 그녀는 마검을 고쳐 쥐며 몸을 낮추었다. 검기를 자꾸 피하니 직접 벨 심산인 듯했다.

[안 돼, 절대 검을 맞대지 마라!]

성검이 경고하지 않아도 유리엔 스스로도 알아채고 있었다.

그녀가 아무리 강하다 해도 살의를 흡수할 틈 정도는 낼 수 있을 거라고? 흡수할 틈은커녕 접근하는 것도 무리다. 정면으로 검을 받다간 반드시 죽는다.

만일 또 마검에 휘둘려서 그를 죽였다간, 그녀는 이번에야말로 절대로 막을 수 없는 재앙이 되어버릴 거다.

죽을 수 없다. 그렇다고 그녀를 두고 이 자리를 피할 수도 없다. 중독된 상태도 아니니 마검은 먹이를 찾아 헤맬 거고, 갈로서스 외부에는 황태자군이 있었다. 요새 내의 제국군이면 몰라도 황태자군을 죽였다간 그녀가 돌아갈 자리가 망가진다.

에키네시아의 모습이 훅 하고 사라졌다. 유리엔은 빠르게 있던 자리에서 벗어났다. 쾅, 쾅, 쾅, 그가 발을 디딘 자리마다 새카만 마나로 터져나갔다.

그녀를 막아야만 했다. 할 수 있든, 없든 간에. 여기서 막지 못하면 증명식도 의미가 없었다.

어떻게?

그 순간 떠오른 것은 에키네시아가 부단장에게 보냈던 편지의 내용이었다.

던컨이 보여주었던 편지. 그녀가 직접 쓴, 악마가 된 자신을 상대하는 방법. 대체 어떤 심정으로 스스로를 죽일 방법에 대해 썼는지 짐작도 가지 않았다.

내용 자체는 건조하고 담담했으며 그리 충격적인 것도 없었다. 그럼에도 읽으면서 정신이 나갈 것만 같았던 편지였다. 그 내용을 되새기려는 것 자체가 고통이었다.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도 유리엔은 그것을 한 줄 한 줄 떠올렸다.

-악마의 최우선 목표는 살의를 충족하는 것, 그러니까 살인이에요. 또한 마검의 재료에는 악의도 있기 때문에…… 되도록 악의적인 방식으로 죽이는 걸 선호해요.

성벽을 수직으로 타고 올라간 유리엔은 성벽 위를 달렸다. 에키네시아가 그를 뒤쫓았다. 빗나간 검기에 성벽이 과자 조각처럼 부스러졌다.

-단번에 숨통을 끊는 게 대부분이지만 천천히 죽이기도 하고, 사냥을 즐기듯 구석으로 몰아넣기도 하죠. 상대가 강하거나 반항이 심할수록 그런 경향을 보여요. 자신을 다치게 한 자에게는 더 집요한 악의를 품어서…… 도발을, 하기도 하고요.

과거, 피투성이 분수대에 걸려 있던 오래된 시체들. 그 앞에서 그를 기다리던 ‘악마’의 모습. 그 광경을 떠올리면 악의 어린 도발이 무슨 뜻인지 알 수밖에 없었다.

-그 점을 이용하셔야 해요. 중상을 입으면 도주를 우선하지만, 미약한 부상만 입히면 다른 인간보다 우선해서 따라올 겁니다. 어떻게든 제게 상처를 내세요. 아주 작은 긁힘이라도 괜찮습니다. 그럼 그 사람을 따라…….

상처를 입히라고. 가능한지 여부는 둘째치고, 차라리 제 몸뚱어리를 베었으면 베었지 그녀에게 상처를 입히고 싶지는 않았다.

하지만 유리엔은 그녀를 부상 없이 제압할 실력이 없었다. 사력을 다해도 불가능할 판에 그런 여력이 있을 리가 없다. 그녀가 그를 다치지 않게 제압할 수 있었던 것과 달리.

자신의 실력이 약해빠진 쓰레기처럼 느껴졌다. 천재라니, 한심하기 짝이 없는 것을. 깨문 입술에서 피맛이 났다.

-상처를 입히는 것도 쉽지 않을 거예요. 정면으로 검을 맞대는 건 금물입니다. 함정이나 지형지물을 활용하세요. 참, 독을 쓰는 건 되도록 피하세요. 중독되면 여유를 부리는 대신 빠르게 죽이는 것에만 집중하게 되어서 더 위험해져서요.

그를 뒤쫓던 에키네시아의 고개가 휙 하고 돌아갔다. 그쪽에 미처 도망가지 못한 제국군 병사가 있었다. 그녀는 유리엔을 버리고 그리로 방향을 틀었다.

유리엔은 급하게 그녀의 등을 향해 검기를 날렸다. 에키네시아는 피하는 대신 마나 실드를 발동하며 주저 앉은 병사를 향해 덤벼들었다.

-쉽게 죽일 수 있는 인간은 후순위로 미루는 경향이 있으니, 최대한 강한 사람이 유도해야 해요. 위험하다고 판단한 자일수록 먼저 처리하려고 하거든요.

제니스인 유리엔은 중첩된 검기를 날릴 수 있었다. 날아간 검기가 에키네시아의 마나 실드와 격돌하며 그것을 흩뜨렸다.

검에 덧씌운 중첩검기였다면 완전히 뚫었을 텐데, 날려 보낸 검기라 그 정도 위력은 되지 못했다.

유리엔은 그녀가 다치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결코 다행이 아닌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

마나 실드가 부서지자, 그녀가 멈춰서 유리엔을 돌아보았다. 병사는 아슬아슬하게 살아남았다. 그녀는 신음인지 울음인지 모를 소릴 내며 바닥을 기어 도망가는 병사를 쫓아가지 않았다.

-마나를 사용하고 있는 저를 죽이는 건 무리예요. 혹시 가능하다고 해도 피해가 심하겠죠. 그러니까 유인해서…….

에키네시아가 다시 그를 뒤쫓기 시작했다. 유리엔은 달리며 빠르게 주변을 훑었다. 갈로서스 공성전 대패 소식을 듣고 황태자가 보내준 요새의 설계도를 대강 살펴보았던 터라 구조가 눈에 익었다. 어디로 그녀를 이끌어야…….

[가깝다!]

유리엔은 넘어지다시피 몸을 기울였다. 머리 위로 서늘한 칼날이 스쳐 지나갔다. 일어나는 대신 그대로 성벽 아래로 떨어졌다. 바로 앞에 감시탑이 하나 솟아 있었다.

랑기오사에 맺힌 유리엔의 검기가 그의 키 몇 배는 될 법한 길이로 순식간에 증폭되었다. 그는 떨어지며 성벽을 박차 감시탑으로 돌진했다. 스쳐 지나가며 거대해진 검기로 탑을 통째로 베어냈다. 잘린 탑의 상단이 에키네시아 쪽으로 날아갔다.

콰아앙!

성벽과 감시탑이 충돌하며 어마어마한 소리가 났다. 먼지가 구름처럼 치솟고 파편이 우박처럼 쏟아졌다. 순간적으로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잠시 후에 먼지가 걷히자 마나 실드 속에 서 있는 에키네시아가 보였다. 그녀는 헤매지 않고 곧바로 유리엔이 있는 방향을 바라보았다.

그는 감시탑에서 좀 떨어진 곳에 있는 석조 건물 위에 서 있었다. 그녀가 병사 숙소의 지붕을 밟고 건너 뛰며 그를 향해 달려갔다. 유리엔은 달아나지 않았다.

다가온 에키네시아가 그를 향해 마검을 휘둘렀다. 유리엔은 아슬아슬하게 그것을 피했다. 빗나간 검이 건물의 지붕을 갈랐다. 먼지 구름이 피어오른 사이 유리엔이 미리 흠집을 내어놓은 지붕은 그녀가 충격을 주자마자 그대로 아래로 내려앉았다.

그 건물은 요새에서 쓸 물을 보관하는 곳이었다. 어지간한 수영장보다 넓고 우물처럼 깊은 수조가 바로 아래에 있었다. 천장째로 내려앉은 그들은 수조의 한가운데에 빠졌다.

“……!”

-저는 날거나 물 위를 걷지는 못해요. 불리한 곳으로 몰아넣으세요.

물보라가 솟구쳤다. 겨울이 시작된 터라 물은 시릴 정도로 차가웠다. 대비하고 있었던 유리엔과 달리 에키네시아는 찰나 당황했다. 1초도 되지 않는, 극히 짧은 빈틈이었다. 유리엔은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봉인구를 준비해두세요. 마나를 봉인한 다음에 저를 죽이시면 돼요. 제압했다면 망설이지 마세요. 가둬 놓을 생각도 하지 마시고, 자비나 배려를 베풀지도 마세요. 저를 믿지 마세요. 틈을 줬다간 낭패를 볼 수도 있으니까, 그냥…… 바로, 죽여주세요.

그 문구는 다른 부분보다 흐트러진 글씨로 쓰여 있었다. 그녀가 그것을 쓰며 무엇을 떠올렸을지 아는 사람은 유리엔 뿐일 것이다. 아젠카를 멸망시켰던 기억을 떠올리며 썼겠지. 그러니 자신을 믿지 말라고, 자신에게 기회를 주지 말라고 한 거다.

유리엔은 그럴 수 없었다.

물거품이 시야를 가득 채웠다. 푸르스름한 물결 너머로 검게 흐늘거리는 머리카락이 보였다. 찰나의 빈틈을 노려 그녀의 손목을 움켜쥐었다.

미리 꺼내서 왼손에 쥐고 있었던, 예전에도 썼던 봉인구를 그 손목에 빠르게 얽었다. 이번에는 중독된 상태가 아니므로 그대로 마나의 흐름을 봉해버리면 된다.

[주인, 성공했……!]

성검의 말끝이 뚝 잘렸다. 봉인구의 사슬을 잠그기 직전, 에키네시아가 알아차렸다. 시야를 왜곡시키는 물과 부글거리는 물거품 너머로 그녀가 입꼬리를 올렸다. 유리엔은 반사적으로 마나를 움직여 몸을 보호했다.

퍼어엉!

그녀를 중심으로 둥글게 마나가 터져 나오며 모든 것이 튕겨나갔다. 물이 밀려나 솟구치며 수조의 바닥까지 드러났다. 그 바닥마저도 구체에 짓눌린 것처럼 파이며 금이 갔다.

마나 실드를 스스로 만든 마나 소드와 의도적으로 충돌시켜 폭발을 일으키는 기술이었다. 배운 적도 없고 들은 적도 없는 기술을 그녀는 본능적으로 사용했다. 부어넣은 마나의 양이 무식하게 많아서 끔찍할 정도의 위력이었다.

유리엔은 벽을 부수며 형편없이 날아갔다. 옆 건물의 기둥에 부딪히며 간신히 멈췄다.

마나 실드를 쓰지 못하는 그는 충격을 고스란히 받았다. 마나로 몸을 보호해 넝마가 되는 꼴은 피했으나 몇 군데는 확실히 부러진 듯했다. 입 밖으로 울컥 피가 쏟아졌다. 내장도 상한 모양이었다.

[젠장, 괜찮으냐? 봉인구는?]

랑기오사가 초조하게 물었다. 유리엔은 왼손을 펴보았다. 손 안에 있던 일부 외에는 충격에 으스러져 버렸다. 딱 봐도 더는 기능하지 못할 듯했다.

에키네시아가 수조 위로 뛰어올랐다. 머리카락이 흠뻑 젖어 전신에 달라붙어 있었다. 건물 틈에 처박힌 그를 향해 다가오는 걸음마다 젖은 발자국이 남았다.

[도망쳐라, 당장!]

성검이 고함을 질렀다. 유리엔은 몸을 일으키다 한 차례 휘청였다.

“윽!”

오른쪽 다리가 부러졌다. 마나로 부러진 다리를 지탱해 일어서려던 그는 급하게 벽에 기대 주저앉으며 고개를 틀었다. 뺨을 스치고 머리카락의 일부를 자른 투명한 칼날이 벽에 틀어박혔다. 머리를 돌리지 않았으면 즉사했을 위치였다.

갈라진 상처에서 새빨간 피가 흘러내렸다. 물기와 뒤섞여 묽어진 피가 뺨을 타고 아래로 투둑 떨어졌다.

에키네시아가 그를 들여다보았다. 마주친 눈동자 속에 살의가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그녀는 마검을 도로 뽑아 휘둘렀다. 유리엔은 랑기오사를 들어 그것을 막았다. 금속이 맞물려 긁히는 날카로운 소리가 비명처럼 귀를 파고들었다.

[바르데르! 들리나? 제발!]

칼날이 맞닿자 성검이 애타게 마검을 불렀다. 마검의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기긱거리는 힘겨루기가 잠시 이어졌다. 에키네시아가 눈살을 찌푸리더니 마나를 일으켰다. 칼날을 타고 슬금슬금 검은빛이 휘감겼다. 유리엔도 검기를 덮어씌웠다. 하얀 빛이 백색 칼날을 감쌌다.

그가 버티자 그녀는 중첩검기를 만들어냈다. 마스터라면 이 시점에서 이미 검과 함께 반토막이 났을 터다. 그러나 그는 중첩검기를 사용해서 막을 수 있었다. 쉬운 일은 아니었다.

“큭…….”

유리엔의 팔이 부들부들 떨렸다. 그녀의 팔은 가느다랗고 연약했으나 그 팔을 타고 흐르는 마나의 양이 어마어마했다. 보통 사람이라면 근육이 터져나갈 수준이었으나 그녀의 몸은 마나를 받아들이며 버텼다.

유리엔이 급속도로 지쳐가는 것과 달리 에키네시아는 여유로웠다. 그녀는 유리엔의 얼굴을 똑바로 응시하며 검을 짓눌렀다.

조금씩, 조금씩 균형이 기울어졌다. 유리엔 쪽으로 칼날이 점점 다가갔다. 조금 더 밀리면 랑기오사의 날에 그의 목이 베일지도 모른다.

그녀의 젖은 머리카락에서 물방울이 떨어져 그를 적셨다. 유리엔이 신음 섞인 숨을 뱉어냈다.

[바르데르! 바르데르! 내 주인이 죽으면 네 주인이라고 괜찮을 것 같으냐? 어떻게든 해보란 말이다, 망할 마검!]

성검은 왈칵 화를 내며 소리를 질렀다. 솔직히 대답이 돌아오는 걸 기대하고 소리친 건 아니었다. 그러나 가느다랗게, 맞닿은 칼날 너머에서 대답이 돌아왔다.

[랑…… 잘…… 주인이…… 듣…… 않…….]

무언가에 막힌 것처럼 제대로 들리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랑기오사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자아가 있나? 정말로? 잠들지 않았어? 문양으로 자아를 유지하는 것에 성공한 건가? 희망이 있는 건가? 그런데 바르데르기오사의 자아가 남아 있다면, 왜 여전히 마검의 주인은 살의에 휘둘리는 상태지?

당황하던 랑기오사는 제 본체의 날이 유리엔의 피부에 닿은 것을 알아차렸다. 주인의 피가 칼날에 스민다.

[주인!]

유리엔은 에키네시아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녀가 눈을 깜박이자 속눈썹에 맺혀 있던 물기가 눈물처럼 흘러 떨어졌다. 그는 저도 모르게 검을 쥐지 않은 손을 뻗어 그것을 닦으려 했다.

에키네시아는 얼굴로 다가오는 그 손을 피하지 않았다. 거친 손끝에 그녀의 부드러운 피부가 닿았다. 그는 속삭이듯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에키.”

그 부름에 그녀의 몸이 흠칫 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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