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을 든 꽃 178화
에키는 고개를 숙이고 호흡을 멈추었다. 시야의 외곽이 일그러지고 있었다. 열기가 전신으로 퍼져나갔다.
“어차피 나를 죽이지 않는 게 네게도 이득이잖느냐. 짐의 항복을 받아 내었으니, 황태자가 큰 포상을 내릴 터. 바르데르기오사 오너로도 인정받겠군. 결국 다 짐의 덕이 아니냐? 짐이 아니었다면 네가 이런 엄청난 힘을 손에 넣을 수도 없었을 거다.”
두근, 두근, 심장이 요동치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황제는 웃고 있었다. 웃고, 있었다. 만족스럽게.
“자, 이제 짐을…….”
“……폐하. 폐하께서는 행한 일을 후회해 본 적이 없나요?”
“후회? 많이 해보았지. 가장 최근에 한 후회는 로아즈에 마검을 보낸 일이다.”
그녀가 고개를 들었다. 그 움직임은 짐승처럼 느껴졌다. 황제를 바라 보는 새카만 눈동자도, 말을 하며 발긋한 입술이 벌어지고 하얀 이가 보이는 모습도, 기묘하리만치 섬뜩했다. 그녀는 속삭이듯 말했다.
“정말로 그걸, 후회하셨어요?”
“다른 가문을 택할 걸 그랬다. 그랬다면 이리 되지도 않았을 거고, 카르엠도…….”
황제는 말끝을 흐렸다. 찰나 그녀를 보는 그의 시선에 분노가 어렸다. 자식을 망가뜨린 원수를 보는 부모의 눈빛이었다. 황제는 그것을 금세 감추었으나, 에키는 이미 보았다.
“아, 그런, 걸, 후회하시는 거군요.”
끓어오르는 것들을 꾹꾹 눌러 담은 발음. 그녀가 웃었다.
“겨우 그런 걸 후회한다고.”
이자는 지금, 제 아들이 불구가 된 것에 분노하고 그것 때문에 후회한다고 말하고 있다. 아들만이 소중한가. 그마저도 또 다른 아들인 유리엔은 안중에 없다 못해 죽이려 해놓고.
그녀가 가짜 마검에 물든 유리엔을 되돌리지 않았다면 유리엔은 죽었을 거다. 황제가 그것을 몰랐을 리 없다. 되레 적극적으로 유도했을지도 모르겠다.
그가 황제로 인해 죽었다면. 그 상상에 가슴 안쪽이 서늘하게 서걱거렸다. 차가운 불이 타오른다.
유리엔은 살려냈다. 하지만 살려내지 못한 사람들이 있다.
〈두 번의 기적은 없을 것이다.〉
카이로스기오사는 그렇게 말했었다.
로아즈의 시민들. 그녀의 손에 죽었다가, 시간을 되돌려 겨우 되살아난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이번에도 죽었다. 이제는 되살릴 수 없는데.
이자 때문이다.
그곳에 그녀가 있었다면 지킬 수 있었을 텐데. 이런 힘을 가지고도 지키지 못해서.
황태자가 로아즈의 복구를 지원해 주어도, 유리엔이 그녀가 돌아갈 자리를 만들어 주어도, 몰살당한 로아즈의 시민들은 돌아오지 않는다.
이자로 인해서 생겨난 돌이킬 수 없는 죽음들.
베지 못할 거라고? 처형할 수 없을 거라고? 맞는 말이었다. 황제니까. 황제. 이 미치광이가 황제라는 이유로, 그 모든 일을, 그 모든 죽음을, 그녀의 고통을, 그의 고통을, 그러고도, 살아남는다고. 저렇게 웃는 얼굴로?
이걸 살려둬야 해? 왜?
용서하고 싶지 않아. 용서할 수 없어.
죽이고 싶어.
머릿속이 하얗게 타올라 사라져간다. 부서지고 무너져 검고 붉은 불티가 날리는 환상이 보였다. 무언가가 목을 타고 넘어가는 듯한 감각. 그것을 삼켰다. 살의를 받아들였다. 새카만 얼룩이 돋아난다. 검을 휘둘렀다.
“크아아악!”
고통에 찬 비명이 감미로웠다. 벌레 같은 몸부림이 보기 좋았다. 믿을 수 없다는 듯 흔들리는 눈동자를 보니 즐거웠다.
한 번도 자신이 이런 식으로 죽으리라고는 생각해 보지 못한 자가, 죽음을 앞두고 짓는 공포에 질린 표정은 몹시 만족스러웠다.
[와……. 이게 뭐야. 우와. 와. 진짜 굉장하다. 기분 좋아.]
“크윽, 감히! 짐은, 지, 지, 짐은 제국의, 커헉.”
더 고통스러워해야지. 더 공포에 떨어라. 죽어가는 감각을 느껴봐.
“그, 그, 그만, 그만!”
그래도 내가 겪은 것들에 비하면 한참 모자라. 너로 인해 죽어간 사람들이 느낀 것들에 비하면 천분의 일도 되지 않을 테지. 네 피와 살을 가져다 그들이 묻힌 땅에 거름으로 주어야겠다.
[어, 시원하고 기분 좋긴 한데, 음, 좀 위험한 거 같……. 주, 주인아?]
“제, 발, 사, 살려……. 아아악!”
칼날이 살을 베는 감각에 기뻐해 본 건 처음이었다. 사람의 숨이 멎어가는 모습이 기꺼운 것도 처음이었다.
오랜 인내 끝에 받아들인 살의는 지독하게 달았다. 모든 것이 아득하게 멀어질 만큼.
* * *
유리엔은 갈로서스에 불길이 솟는 것을 보자마자 군영을 벗어났다. 황태자군에 있던 창천기사단원들은 단장을 뒤따르려다 따르지 말라는 그의 명에 멈췄다.
불패의 요새가 무너지고 부서지며, 제국군이 도주하기 시작한다. 그 광경을 보며 얼이 빠져 있던 황태자는 겨우 정신을 차렸다. 그는 정예를 추려 갈로서스로 향하면서 전군에 명을 내렸다.
“포위망을 구축해라. 빠져나오는 자들은 한 놈도 놓치지 말고 잡아야 한다.”
황태자군은 충실히 명을 따랐다. 창천기사단은 빠르게 이동하여 갈로서스의 뒤편을 지켰다.
그곳에서 그들은 근위기사단장을 포함한 근위기사단의 일부의 호위를 받으며 몰래 빠져나가던 마차와 맞닥뜨렸다. 2황자와 황자비가 탄 마차였다.
근위기사단은 사력을 다해 반항했으나 창천기사단의 상대가 되진 못했다. 그들은 모조리 제압되어 군영으로 이송되었다.
2황자를 잡았다는 전령이 도착했을 때, 황태자는 정예를 거느린 채 갈로서스의 첫 번째 성벽 위에 서 있었다. 전군을 동원하여 공성을 시도했음에도 넘지 못했던 성벽을,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 걸어 올라왔다.
전령에게 명을 내려 돌려보낸 그는 한쪽이 완전히 무너져 내린 두 번째 성벽을 바라보았다. 눈으로 보니 확실히 체감이 된다. 솜털이 곤두서는 느낌이었다.
“이게 여자 하나가 검 한 자루 들고 벌인 일이란 말이지.”
“검 한 자루가 아니라 기오사입니다.”
“아, 그래, 기오사. ……기오사가 이 정도 잠재력이 있는 물건이었나? 소름이 끼치는군.”
황태자는 호위기사의 말에 대꾸하며 헛웃음을 흘렸다. 경악이 역치를 넘어서자 웃음만 나왔다.
“혼자 갈로서스를 정복하다니. 그것도 전략을 쓴 것도 아니고 그냥 정면으로 들어가서. 역사에 기록했다간 후손들이 허황된 과장으로 치부할 업적 아닌가. 이걸 누가 믿어. 안 그런가, 경?”
“그러게 말입니다. 신께서 갈로서스에 천벌을 내렸다고 쓰는 쪽이 더 믿을 만하지 않을까요?”
“아냐, 경, 생각해 봐. 그녀는 젊다 못해 어리지. 그녀가 역사에 남길 일이 이것뿐일 것 같아? 그때마다 신이 기적을 일으켰다고 쓸 순 없잖아.”
“……일대기가 환상소설이 되겠는데요.”
“그러게 말이다.”
황태자는 허탈하게 답하고는 턱을 긁적였다.
“그나저나, 에키네시아 로아즈도 유리엔에게 마음이 있는 거겠지?”
“3황자 전하를 위해 마검을 드러낸 것 아니었습니까? 당연히 마음이 있겠지요.”
“그녀가 좋아하는 게 성검의 주인이라 정말 다행이군. 장한 내 동생.”
“그때 전하께서 디아상트 공녀와 3황자 전하의 약혼을 끝까지 밀어붙이지 않으신 것도 정말 다행입니다.”
그때를 떠올린 크루엔 황태자는 부르르 몸을 떨었다.
“……경, 난 착하게 살고 성군이 될 거야. 평안히 오래 살고 싶으니까.”
“꼭 그래 주십시오, 주군. 저도 오래 살고 싶거든요.”
* * *
[예감이 좋지 않아.]
난장판이 된 갈로서스 내부를 달리는 유리엔을 향해 성검이 중얼거렸다. 유리엔은 대답하지 않고 속도를 조금 더 올렸다.
요새 내에 주둔하던 제국군은 이미 대부분 달아난 모양이었다. 요새는 거의 비어 있었다. 앞길을 방해하는 건 무너진 돌더미나 불길뿐이었다. 그는 곧바로 요새의 중심부로 향했다.
“으아악!”
앞쪽에서 갑자기 일단의 무리가 튀어나왔다. 기사들 몇, 그들은 투구를 내던지고 달리면서 조금이라도 더 빨라지기 위해 갑옷을 마구잡이로 벗었다. 근위기사단이 전투 시에 착용하는 은빛 갑옷이었지만 근위기사 같지는 않았다. 로브를 쓴 마법사 몇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뛰어갔다.
하나같이 새파랗게 질린 낯이었고, 유리엔에게는 신경도 쓰지 않았다. 유리엔은 그들이 자신을 지나쳐가는 것을 멀거니 보다가 안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아치를 지나 본성의 마당에 발을 들이는 순간, 공기가 달라졌다. 피부가 저릿저릿했다. 그리고 짙은 피냄새가 풍겨 왔다.
[이건…….]
털썩, 하고 무언가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본성의 발코니 쪽이었다. 마법사로 보이는 자의 시체가 발코니에서 떨어져 아래에 나뒹굴었다. 새빨간 피가 흙을 적시며 흘러나왔다.
유리엔은 그 위를 보았다. 발코니의 난간에 에키네시아가 서 있었다.
몇 달 만에 보는 그녀였다. 꿈에서 그리다 못해 감은 눈꺼풀 안쪽에 들러붙어 사라지지 않던 얼굴이었다. 그러나 감격할 시간도, 눈물 흘릴 여유도 없었다.
검게 물든 머리, 일렁이는 검은 눈동자, 흰 피부 곳곳을 물들인 검은 얼룩, 뺨과 옷자락에 튄 붉은 피, 오른손에 움켜쥔 투명한 칼날의 마검. 정안을 뜨자 보이는 것은…….
검게 타오르는 태양.
[제기랄, 피해라!]
성검이 외치는 것과 거의 동시에 유리엔은 훌쩍 뛰어 제 자리를 벗어 났다. 그가 벗어난 자리에 검은 마나로 휘감긴 검이 쾅, 하고 틀어박 혔다. 파헤쳐진 땅에서 흙과 자갈이 분수처럼 튀어 올랐다.
구불거리는 검은 머리카락이 속도에 못 이겨 떠올랐다가, 사락거리며 가라앉는다. 에키네시아는 땅에 틀어박힌 마검을 뽑아내며 유리엔 쪽을 돌아보았다. 유리알 같은 눈동자. 인간의 것이라기엔 지나치게 차가운.
[……완전히 물들었군.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성검이 신음 섞인 음성으로 중얼거렸다. 유리엔은 떨리는 손으로 랑기오사를 꺼내 들었다. 그를 바라보는 에키네시아의 고개가 갸웃 기울어졌다. 그리고 아무렇지도 않은 손짓 한 번.
본성 마당의 입구에 있던 유리엔은 그녀가 손짓하자마자 대지를 박차고 아치 위로 뛰어올랐다. 새카만 초승달 같은 검기가 그가 있던 허공을 가르고 지나가 멀찍이 있던 식량 창고에 틀어박혔다.
건물이 무너져 내리는 소리와 함께 밀가루가 안개처럼 비산했다. 넘어진 화로에서 흐른 기름을 먹으며 타고 있던 불에서 불티가 튀었다.
귀청이 떨어질 듯한 굉음과 함께 거대한 폭발이 일어났다. 뒤에서 불어온 거센 바람이 아치 위에 올라선 유리엔의 머리카락을 엉망진창으로 흔들었다.
유리엔은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그는 호흡을 잊은 채 아래에 있는 에키네시아를 응시했다. 막막하고 먹먹한 것이 한가득 차오른다.
‘에키.’
그녀의 인내심을 안다. 그녀가 이성을 잃어버렸다면, 그녀를 그렇게 만든 쪽이 잘못이었다.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몰라도 무조건 그녀가 옳을 것이다. 유리엔은 그녀를 믿었다.
그와 별개로, 그는 그녀를 막아야만 했다. 막을 수 있는 건 자신뿐이었다.
〈만에 하나 그리 되더라도, 그 때에는 내가 그녀를 진정시키겠다.〉
총행정관을 향해 자신이 했던 말이다. 그러나.
막을 수 있을까.
랑기오사를 쥔 손 안에서 땀이 배어났다. 유리엔 자신이 제니스가 되었기에 더 명확히 느껴졌다. 그녀가 얼마나 강한지, 그리고 그녀와 그의 격차가 어느 정도인지가.
공간이 완전히 그녀에게 장악되어 있었다. 그녀가 한 호흡에 움직일 수 있는 간격 안에 들어가는 순간 목숨을 장담할 수 없게 될 거다. 가느다란 그녀의 몸이 까마득한 거인처럼 보였다.
독을 마시고 이성을 잃었을 때와는 차원이 달랐다. 그때의 그녀가 얼마나 약화된 상태였는지 확실히 알겠다. 지워진 과거에 싸워본 악마였던 그녀에 비해, 지금의 그녀가 훨씬 더 강해졌다는 것도 한눈에 알았다.
또 하나. 가짜 마검을 쥐고 있던 그를 상대할 때 그녀가 어느 정도로 자제했는지도 깨달았다. 유리공예품을 다루듯 조심스럽게 굴었고, 살기는커녕 투지도 보이지 않았었던 거다.
그에 비해 지금은 눈이 마주친 것만으로도 오싹 소름이 돋는다. 담이 약한 자라면 시선만으로도 굳어 버리거나 기절할지도 모른다. 가까이 다가갈 엄두가 나지 않았다.
빤히 그를 올려다보던 에키네시아가 다시 고개를 갸웃거렸다. 마검을 쥔 손이 움찔거렸다.
[주인!]
유리엔은 아치 아래로 뛰어내렸다. 흉포한 마나가 그가 있던 자리를 갈랐다. 반토막 난 아치가 무너졌다. 아치를 무너뜨리고도 힘이 줄지 않은 검기가 공기를 찢어발기며 요새 내의 병사 숙소에 처박혔다. 건물이 도끼로 패인 장작처럼 갈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