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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을 든 꽃-177화 (177/211)

검을 든 꽃 177화

황제는 무표정하게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그가 눈을 들더니 천천히 주위를 살폈다.

곳곳에서 치솟은 불길, 요새 밖으로 달아나고 있는 제국군, 무너진 성벽과 성문, 공포를 숨기지 못하는 근위기사단, 마나 코어가 부서져 혼절한 헤레이스 리어폴드, 현자가 그렇게 된 이후 겁에 질려 숨어버린 몇 남지 않은 마법사들.

“……짐은 한 명의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엔 한계가 있다고 믿었다. 짐의 식견이 좁았구나.”

황제의 눈동자가 휘릭 굴러 다시 그녀를 향했다.

“너를 만들어낸 건 대체 누구냐? 타국의 밀정들이냐? 바다 건너 알려지지 않은 땅에서 왔느냐? 아니면, 인간이 아닌 건가?”

에키는 울컥 솟구치려는 것을 간신히 눌렀다. 누가 나를 만들어냈냐고?

“……저를 만들어낸 건 당신입니다, 폐하.”

그녀의 시선이 황제를 겨누고 있는 마검에 닿았다.

“바르데르기오사를 제게 선물해 주셨잖습니까.”

황제의 입술이 다물렸다. 그는 묘한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고만 있었다. 근위기사단은 황제의 눈치만 보았다.

에키는 마검 위에 마나를 덮어씌웠다. 검은 불꽃이 칼날을 타고 타올랐다.

“제 인내를 시험하지 마십시오, 폐하.”

“……짐이 어떻게 하란 말이냐?”

“항복하세요. 그리고 당신이 지은 죄의 대가를 받으십시오.”

“알겠다. 그리 하지.”

황제의 대답은 지나치게 순순했고, 너무 깔끔했다. 승복하지 못하고 발악하거나 무언가 수작을 부리리라 생각했는데. 에키는 허탈해져서 망연히 눈만 깜박였다. 근위기사들이 반사적으로 고함을 질렀다.

“폐하!”

“폐하, 안 됩니다! 폐하!”

“제국의 빛이 악마에게 굽혀서는……!”

그녀가 근위기사단을 노려보기 전에 황제가 먼저 그들을 향해 말했다.

“그럼, 다른 방법이 있느냐? 내가 너희에게 그녀를 제압하여 꿇어앉히라고 명하면 할 수 있느냐?”

“며, 명령이시라면…….”

“따르라는 게 아니라, 가능하냐고 물었다.”

“…….”

“불가능하다는 건 잘 아는 모양이로군.”

근위기사단이 할 말을 잃고 입을 다물었다. 마검이 투덜거렸다.

[뭐야, 걔가 젤 나쁜 놈 아니었어? 아닌가? 그 공작이 더 나쁜가? 어쨌든 미친 인간일 줄 알았는데 상황 파악 잘하네? 알아서 기잖아. 죽기 싫어서 저래? 재미없게.]

조악한 말투였으나 마검의 말은 그녀의 심정과 일맥상통했다. 황제가 그녀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우선 깃발을 내리라고 명하겠다. 성문은 부서졌으니 열 필요도 없겠군.”

느릿느릿하고 태연한 어조였다. 이렇게 허무하고 간단할 줄은 몰랐다. 에키는 겨누고 있던 마검을 늘어뜨리며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황제가 말을 이었다.

“다음은 어찌 할까? 네 앞에 무릎을 꿇으면 만족하겠느냐? 원하는 것을 말해 봐라.”

“왜 그러셨어요?”

물음이 불쑥 튀어나갔다. 자제할 수가 없었다. 그녀는 까끌한 음성으로 내뱉었다.

“왜, 로아즈에 마검을 보냈습니까? 그걸로도 모자라서 마석 목걸이까지 써가며 로아즈를 그 꼴로 만든 이유가 뭔가요?”

“아는 것을 왜 묻느냐? 내 아들을 위해서였다.”

“아들을 위해 그런 짓까지 한다고요?”

“아비가 아들을 위해 노력하는 건 당연한 일이잖느냐. 자식에게는 뭐든 해주고 싶은 것이 자연스러운 부모의 마음이다.”

유리엔과 비슷한 새파란 하늘색 눈동자로 저런 말을 하고 있었다.

서로 숨기던 것을 털어놓은 이후 그녀와 유리엔은 예전보다 더 깊은 이야기를 나눴었다. 그 때에도 유리엔은 어린 시절의 이야기는 잘 하지 않았다. 그러나 언뜻언뜻 내비치는 것과, 돌아가는 상황만으로도 황제가 그에게는 한 번도 아비였던 적이 없다는 정도는 알 수 있었다.

유리엔을 증오하면서, 아비가 아들을 위해 노력하는 게 당연하다고? 심지어 그걸 위해 눈 하나 깜짝 않고 로아즈를 몰살시키면서? 자연스러운 부모의 마음이, 뭐가 어째?

아찔할 정도로 분노가 솟았다. 그녀는 부들부들 떨리기 시작한 손으로 마검을 고쳐 쥔 다음, 조용히 되물었다.

“……유리엔 드 하르덴 키리에 경은 폐하의 아들이 아니었습니까?”

“그건 내 아들이 아니지.”

“말도 안 되는 소리 마, 당신 아들이잖아!”

절로 음성이 높아졌다.

아무렇지도 않은 부정이었다. 한 치의 고민도 없는 듯한. 유리엔의 존재 자체를 인정하지 않는 것처럼.

저런 자의 아들로 살았던 유리엔의 어린 날들은 얼마나 혹독했던 것일까. 저러면서 카르엠을 위해서는 자식이랍시고 그 모든 짓들을 저질렀다고.

시야가 거뭇해지려 했다. 에키는 한 손으로 눈가를 문지르며 호흡을 골랐다.

황제는 발코니의 난간에 기댄 채 아래로 몸을 숙였다.

“에키네시아 로아즈. 무언가 착각하고 있는 모양인데, 그건 정말로 내 아들이 아니다.”

황제의 음성은 침착했다. 침착하게 유리엔을 ‘그것’이라 표현하고 있었다. 사람 취급조차 하지 않고 있구나. 입을 열었다간 욕이 쏟아질 것 같아 그녀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 황제가 말을 이었다.

“그것은 내 동생이 황후의 배에 심은 씨앗의 결과물일 뿐이다. 황후를 잡아먹은 기생충이고, 인간이 아닌 괴물이었지.”

헛소리였다. 황제의 동생은 일찍이 낙마 사고로 죽었다. 황후가 2황자인 카르엠을 임신하기 전부터 이미 고인이었다. 에키는 기가 찼다.

“죽은 사람이 임신도 시킬 수 있던 가요?”

“로널드는 죽은 척을 한 거다. 그 놈이 그리 쉽게 죽을 리가 없어.”

황제가 너무 진지하게 늘어놓아서 순간적으로 의심이 생길 정도였다. 정말 황제의 동생이 죽지 않았던 걸까? 죽은 척만 하고, 황후와 정을 통해 유리엔을 낳았다고? 그래서 그렇게까지 유리엔을 미워한 걸까?

하지만 황제는 동생인 로널드 공을 암살했다는 소문을 무마하기 위해 부러 더 거나하게 장례식을 치렀었다고 들었다. 시신을 공개하고 조문객들이 직접 관에 꽃을 넣는 관례까지 행했다. 로널드 공의 시신을 본 사람은 한둘이 아니었다.

에키는 황제의 눈을 바라보았다. 반들거리고 초점이 명확하지 않은 푸른 눈. 망상을 현실이라 믿고 미쳐버린 걸까.

“증거가 있나요, 폐하?”

“물론 있다. 커튼이 흔들렸지.”

“네?”

“미리 소식을 전하지 않고 찾아갔던 날, 황후의 침실에 있던 커튼이 흔들렸다. 그 안에 로널드가 숨어 있었겠지.”

“……그 커튼의 뒤를 확인해 보셨어요?”

“보지 않아도 알 수 있다. 짐은 알아. 그놈이, 줄곧 내 근처에 맴돌며 따라다니더니, 감히 황후까지 넘보았단 말이다!”

황제는 갑자기 목소리를 높이며 버럭 소리쳤다. 난간을 움켜쥔 손등에 핏줄이 불거졌다. 에키는 황망히 물었다.

“로널드 공이 폐하를 따라다녔다고요?”

“그래, 내내 짐을 따라다녔다. 항상 기분 나쁜 눈으로 나를 바라보곤 했지.”

아무리 봐도 전부 망상이었다. 정말 미쳤구나.

뒤쪽의 근위기사들이 술렁이고 있었다. 그들도 황제가 저런 상태인 걸 알지 못했던 모양이었다.

어쩌면 황제가 즉위하자마자 사고로 위장해 동생을 죽였다는 소문이 사실일지도 모르겠다. 제 손으로 죽인 탓에 동생의 환영을 지속적으로 보고 미쳐갔는지도 모른다.

세월이 흐른 지금은 제대로 알아내기 어려울 이야기였다. 저런 미치광이의 광증에 휘말려 모든 것이 어그러졌었다는 것을 깨달으니 더 알고 싶지도 않았다. 역겹고 허탈했다.

“……그래서, 그런 망상으로 유리엔을 증오하고, 당신이 아들이라고 생각하는 2황자를 위해 로아즈를 희생시켰다고요. 정말 그게 다인 거군요. 겨우 그런 이유로, 무고한 피를 그토록 많이…….”

“제국의 규모에 비하면 고작 한 줌의 희생이다. 게다가 차기 황제에게 보탬이 될 테니, 천한 것들에게는 과분한 영광 아닌가.”

미약한 성가심이 묻어나는 무심한 대꾸. 에키는 순간 피가 거꾸로 솟는 기분을 느꼈다. 입술이 제멋대로 움직였다.

“고작, 한 줌? 당신에게는 그 죽음들이 그 정도 무게밖에 안 되었어?”

말끝이 거칠게 부서져 내렸다. 영광? 영광이라고? 저 미치광이가 지금 무슨 개소리를 하는 건가. 진심으로 그렇게 믿었어?

내 15년을 지옥에 처박고. 로아즈 성을 몰살시키면서. 그게 당신에게는 이렇게 가벼웠어?

요동치는 감정을 따라 마나가 끓어 넘쳤다. 검은 마나가 몸 밖으로 선명하게 드러나며 출렁였다. 주위의 공기가 달라지고 대지가 긁혔다.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자들이 움찔 몸을 굳혔다.

[야, 야, 진정해. 위험 수위야.]

마검이 불안하게 속삭였다. 에키는 한 손으로 얼굴을 덮었다. 안 돼. 냉정을 잃어선 안 된다. 감정에 휘둘렸다간 실패하게 될 거다.

그녀가 초인적인 인내심으로 흘러넘치는 마나를 갈무리하는 동안 황제는 약간 창백해진 안색으로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짐이 미쳤다고 생각하겠지?”

그가 돌연 입술을 비틀었다.

“사실 짐도 알고 있다. 전부 짐의 망상이라는 것을. 황후가 죽은 게 3황자 때문이 아니라는 것도 잘 알고 있다. 갓난애에 불과한 그것이 무슨 죄가 있었겠느냐.”

[저거 왜 아까부터 멀쩡한 소리랑 미친 소리를 번갈아 해? 미친 거야, 미친 척하는 거야?]

마검이 이해할 수 없다는 듯 투덜거렸다. 에키 역시 혼란스러워져 황제를 바라보았다. 황제는 대단히 차분한 투로 말했다.

“그런데 왜 짐이 알면서도 그리 했을 것 같나?”

그녀는 그가 말하면서 문득 눈을 굴려 제 뒤를 흘깃 확인하는 것을 놓치지 않았다. 그 찰나의 움직임을 보는 순간 그녀는 황제가 왜 순순히 항복했고, 저런 말들을 구구절절 늘어놓는지를 깨달았다.

그러고 보니 곁에 아무도 없다. 아무리 막다른 곳에 몰렸다 해도 제국의 황제인데, 측근도 시종도 하나도 없이 홀로 서 있었다.

게다가 눈치만 보고 있는 근위기사들. 저게 정말 근위기사단일까? 근위기사단의 갑옷을 입고 있다지만 겁에 질려 움찔거리기만 하는데? 아까 쳐낸 공격들도 근위기사라기엔 약했다. 근위기사단장도 보이지 않았다.

머리가 차게 식었다.

“폐하.”

“그러는 쪽이 훨씬 편했기 때문에-.”

“무얼 기다리고 계십니까?”

황제의 말이 끊겼다. 에키는 가볍게 땅을 박차 황제가 있는 발코니로 뛰어올랐다. 무게가 없는 듯한 움직임이었다.

황제는 흠칫 놀라며 뒤로 물러섰다. 좁은 난간 위에 올라선 그녀가 그를 굽어보았다. 검게 물든 눈동자가 일렁였다.

“시간을 끌고 계신 거네요, 그렇죠?”

황제가 입을 다물었다. 에키는 난간에서 뛰어내려 그를 지나쳐 안으로 들어갔다. 그녀를 막으려 뻗어오는 황제의 손은 물 흐르듯 피했다.

그녀는 곧 급하게 짐을 싸느라 엉망이 되어버린 호화로운 방을 발견했다. 누군가 귀한 신분의 사람이 도주한 흔적. 사람의 기척은 없었다. 시중드는 자조차 보이지 않았다. 모두 이미 달아난 것처럼.

화급히 따라 들어온 황제의 기척이 뒤에서 느껴졌다. 에키는 천천히 그를 돌아보았다. 황제가 자신을 희생하면서까지 도망치게 하려 한 귀한 신분의 사람. 누구일지는 뻔했다.

“2황자를 도망시키셨군요, 폐하. 제국의 인장 같은 것도 다 그에게 들려 보냈나요?”

“…….”

“그래서 헛소리를 해대며 시간을 버셨군요. 눈물겨운 부정이시네요.”

늘어놓은 말들이 전부 거짓은 아닐 것이다. 아마 내밀한 진심. 그러나 완전히 정신이 나간 자도 아니었다.

황제는 에키를 무시하고 방 안을 확인했다. 2황자가 이미 떠난 것을 알아차린 그가 안도하는 기색을 내비쳤다. 그 안도가 혐오스러웠다. 에키는 이를 악물었다.

“2황자가 그렇게 사랑스럽나요? 그런 짓들을 저지르고, 어떻게든 빼내려 폐하의 목숨마저 미끼로 내어 놓을 만큼?”

“어차피 너는 짐을 죽이지 못한다.”

황제의 표정이 돌변했다. 광기가 사그라들고, 무표정 위로 희미한 비웃음이 떠오른다.

“너를 지켜보고 있었다. 요새를 부수면서도, 살인은 일부러 피하고 있더군. 현자에게 살의에 물드는 과정에 대해 들은 덕에 추측이 쉬웠다. 아무래도 너는 사람을 함부로 죽이면 악마가 되어버리는 모양이지?”

“…….”

“창천이 바르데르기오사 오너로 인정하겠다는 말을 꺼낸 마당에, 악마가 되고 싶진 않겠지. 그래서 방금도 참은 것이잖느냐.”

황제의 웃음이 비릿하게 깊어졌다.

“너는 짐을 베지 못해. 황태자도 짐을 처형할 순 없다. 짐은 제국의 황제이고, 그놈의 아비니까. 항복한 아비를 죽이고 황위에 오르는 패륜아가 될 순 없을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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