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을 든 꽃-176화 (176/211)

검을 든 꽃 176화

현자 헤레이스 리어폴드가 움직인 건 에키네시아가 세 번째 성벽을 무너뜨릴 때쯤이었다.

마탑의 7현자 중에서 저주와 정신 계열 마법에 가장 관심이 많은 자. 일생을 정신마법에 바친 그녀는 인간을 대상으로 실험하고 싶은 은밀한 욕망이 있었다. 그녀가 원하는 연구를 위해선 인간의 정신이 필요했으므로.

참고 있던 그 욕망을 알아채고 부추긴 것은 디아상트 공작이었고, 지원해 준 것은 황제였다. 그들의 지원에 따라 헤레이스는 마검의 마나를 이용한 실험을 주관했다.

성검의 주인마저 물들여 버린 가짜 마검은 그녀 최대의 역작이었다. 누구도 그 저주에서 벗어날 수 없으리라 자부했다.

물론 물들지 않는 마검의 주인이 나타날 줄은 전혀 짐작하지 못하고 가졌던 자신감이었다.

‘미쳤군, 저건. 대체 어디서 저런 게 튀어나왔지?’

그녀는 갈로서스의 삼중 성벽을 일직선으로 뚫어버리는 에키네시아를 보면서 경악했다.

성검의 주인도 계산했던 것보다 강해서 놀랐는데, 저건 더했다. 아무리 기오사를 가지고 있다지만 상상도 해보지 못한 무력이었다. 인간이 아니라 전설 속에 나오는 용과 비교해야 할 수준 아닌가.

‘정면으로 상대하는 건 절대 불가능하다.’

헤레이스는 품에서 유리병을 조심스럽게 꺼냈다. 병 안에 가시덩굴 같은 것이 있었다. 그것은 가짜 마검을 만들 때 사용했던 용의 유해를 바탕으로 한 저주였다.

마법사는 준비하는 자다. 그녀는 가진 것들을 활용해 저 여자를 무너뜨릴 저주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 * *

세 번째 성문 안쪽은 갈로서스의 중심부였다. 에키네시아가 여기까지 도달하는 데 걸린 시간은 느린 걸음으로 평지를 걷는 것과 큰 차이가 나지 않았다.

그녀의 걸음은 평온했으나, 사방은 난장판이었다. 도주하는 자, 떨며 주저앉는 자, 무너져 내린 성벽, 떨어진 횃불과 넘어진 화로에서 불이 번져 타올랐다.

이제 무기를 들고 접근하는 자는 없었다. 공포에 질려 사고가 마비된 자들은 그녀가 반격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아차리지도 못했다.

누군가가 그녀가 가는 방향에 있는 불길에 기름을 던져 넣었다. 기름을 먹은 불꽃이 해일처럼 몸을 일으켜 앞을 가로막았다.

에키는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그녀의 몸을 감싼 반투명한 검은빛 마나의 막은 아무렇지 않게 불꽃을 막아냈다.

[야, 너 그거 진짜 유용하다. 예전엔 일일이 피하거나 닿는 부분을 순간적으로 강화해야 했는데. 엄청 편하네.]

“대신 마나를 무식하게 소모하잖아.”

[내가 있는데 무슨 걱정이야? 살의도 뭐, 아까 괜찮다며?]

“지금 당장이야 괜찮지.”

[못 참겠으면 아무나 죽이자. 여기 죽일 놈 천진데.]

마검이 입맛을 다셨다. 에키는 눈살을 찌푸렸다.

“그러면 증명이 안 되잖아, 망할 마검아.”

[몰래 쓱싹하면 누가 알 게 뭐야. 사고로 죽었다고 하면 되지!]

“너, 내가 혹시 이성을 잃어도 네가 말려주겠다고 한 거 아니었어?”

[어, 음, 그, 그럴 생각이긴 한데……. 으음, 그래도 조금만 죽이면 안 돼? 이렇게 많은데! 다 적이잖아! 쪼끔만! 딱 열 명만!]

그녀는 말없이 오른손에 마나를 흘려 넣었다.

[아! 아파! 그럼 다섯 명! 아야! 아! 알았어, 세 명만! 아님 하나라도, 앗, 따가! 씨이, 치사해!]

아치를 통과하여 다른 건물들을 지나 공터를 가로지르면 본성이었다. 그녀는 마구간이나 대장간, 식량 창고 등을 고스란히 무시하고 본성으로 향했다. 저 안에 황제와, 2황자와, 디아상트 공작이 있다. 걸음이 조금 느려졌다.

“발.”

[왜.]

부루퉁한 대꾸가 돌아왔다. 에키는 가슴 안쪽이 빠듯하게 조여 오는 것을 느끼며 심호흡을 했다.

“너를 믿어도 돼?”

[……어?]

“참을 생각으로 왔고, 각오도 했어. 그래도 만약에 내가 그렇게 된다면…….”

[어, 어어, 주인아, 근데 자아 유지가 될지 안 될지는 나도 모르는데…….]

“안 되는 건 어쩔 수 없겠지. 하지만 네가 성공했을 때, 너, 사람을 죽이고 싶은 걸 참고 나를 말릴 수 있어?”

[응?]

“방금도 몇 명만이라도 죽이자고 졸랐잖아. 본능이라며? 살인하면 그토록 기분이 좋아지는 네가, 사람을 죽이는 나를 말린다고? 정말 그게 가능해?”

[…….]

마검이 일순 침묵했다. 구체적으로 상상해 본 적이 없는 모양이었다. 그녀는 옅게 한숨을 쉬고 마검의 손잡이를 고쳐 쥐었다.

차갑고 매끄러운 금속의 감촉. 이것을 처음 쥐었던 순간과 똑같은 감촉이었다. 그 감촉 속에는 온기가 없었다. 그러나, 그녀가 9년이 넘도록 함께 해온 ‘발’은…….

“발.”

[으응…….]

“진심으로 나를 네 주인이라고 생각해? 내 검이 되고 싶어?”

[당연한 걸 왜 물어?]

“그럼, 내 명에 복종해 봐.”

[……!]

“명령이야, 바르데르기오사. ‘아무도 죽이지 마.’”

바르데르기오사의 자아가 요동치는 것이 연결된 혼으로부터 전해졌다. 에키는 마검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걸음을 옮겼다.

근위기사단이 본성 앞의 마당에 도열해 있었다. 본성의 창가에 몸을 숨긴 인기척들이 느껴졌다.

‘마법사들이겠지.’

아니나 다를까 마당에 발을 들이자마자 마법이 쏟아졌다. 여기까지 오는 동안 맞았던 것들과는 수준이 다른 마법이었다.

허공에 먹구름이 맺히고 번개가 내리쳤다. 발밑이 푹 파이며 지반이 꺼지고 불덩어리가 날아왔다. 주위로 퍼지지 않고 대상의 근처에만 맴도는 초록색 독안개가 몰려들었다.

마법사들은 그녀가 번개를 피할 거라 예상하고 피할 만한 땅을 뒤흔들었으나, 에키는 번개를 피하지 않았다. 마나 실드에 조금 더 마나를 불어넣는 것으로 번개는 허무하게 막혔다. 불덩어리도 마찬가지였다. 꺼진 지반은 내려앉는 것과 동시에 가볍게 뛰어 넘었다.

도착지에 몰려든 독안개도 마나 실드 내로는 들어오지 못했다. 그녀는 약간 빠르게 움직이는 것으로 고인 독안개를 떨쳐냈다. 뒤따라오던 독안개는 그녀가 근위기사단과 가까워지자 말려들 것을 염려했는지 저절로 흩어졌다.

상처는커녕 발목을 붙잡지도 못했다. 대기하고 있던 근위기사들의 뒷덜미에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마법진이 새겨진 은빛 갑옷과 투구로 전신을 감싸고 있어도 공포로 뒤덮인 눈동자는 숨길 수가 없었다.

에키는 근위기사들 앞에 멈춰 섰다. 마검을 늘어뜨리고 삐딱하게 선 채 그들을 응시했다.

“비켜 주실래요?”

침묵이 흘렀다. 근위기사들이 바짝 긴장한 채 검을 들었다. 에키는 가만히 그들을 보다가, 고개를 들어 위쪽을 보았다.

“다들, 창가에서 물러나는 게 좋을 거예요. 물러나지 않으면…….”

따끔하는 감각. 말이 뚝 끊겼다. 발치로 시선을 옮겼다. 기척 없이 땅에서 솟아난 검은 가시덩굴이 발목을 휘감고 있었다. 익숙한 모양이었다. 유리엔을 휘감고 있던 그것.

그녀는 가시덩굴이 뻗은 방향을 따라 천천히 시선을 움직였다.

마당을 대각선으로 가로질러 도달한 본성의 그늘에, 로브를 눌러쓴 현자가 주름진 손을 바닥에 대고 있었다.

현자의 밑에는 피로 그린 마법진이 있었고, 텅 빈 마석들이 주위에 뒹굴었다. 마법진의 중심, 현자의 손 근처에서 가시덩굴이 땅을 파고들었다. 그것이 땅 속에서 뻗어와 그녀에게 닿았다.

현자의 입술이 달싹였다. 그녀의 발목에 달라붙은 가시덩굴에 검은빛이 피어올랐다. 그와 동시에, 두 번 다시 안 올 기회라는 걸 눈치챈 근위기사 중 하나가 목이 터져라 외쳤다.

“공격!”

근위기사들이 덤벼들었다. 그러나 그들의 검은 허공을 갈랐다. 순식간에 사라져버린 그녀를 찾아 시선들이 헤매었다.

현자는 오싹한 기분에 고개를 들었다. 한쪽 발목에 잘린 가시덩굴을 매단 에키네시아가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보랏빛 위에 검은 물감을 덧칠한 듯한 눈동자가 곱게 휘어졌다.

“당신이었구나, 그 저주를 만든 게.”

헤레이스 리어폴드의 입술이 허옇게 질렸다.

“어, 어, 어떻게 저주를…….”

[나도 조종 못 하는데 저딴 게 주인을 조종하려 들어? 성검의 주인한테 들러붙었던 거랑 별 차이도 없는 게. 같잖아서 못 봐주겠다, 그치?]

마검이 종알댔다. 에키는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나는 마검의 주인이야. 마검을 바탕으로 만든 저주가 나한테 통할 것 같았어?”

헤레이스가 손을 움찔거렸다. 품 안에 있는 최후의 수단, 탈출용 마도구를 쥐려는 행동이었다. 에키는 그녀의 가슴팍을 걷어차 넘어뜨리고 손목을 지그시 밟았다. 부러지지 않을 정도로만 힘을 실었다.

그제야 에키가 어디 있는지 알아차린 근위기사들이 쫓아오려다 현자를 밟고 있는 그녀를 보고 멈칫했다. 에키는 등 뒤의 기사들에게 신경도 쓰지 않았다.

“당신, 왜 그딴 걸 만들었어? 혹시 원하지 않는데 억지로 만들게 된 거야?”

헤레이스는 희게 질려 대답하지 못했다. 에키가 고개를 기울였다. 숙이는 고개를 따라 검게 물든 머리카락이 아래로 늘어졌다.

“아니면, 당신 자신의 의지로 그것을 만들었어? 로아즈에 뿌려진 마석 목걸이도 당신 작품이야?”

대답하면 죽는다. 그런 직감이 들었다. 헤레이스는 입을 꾹 다문 채 그녀의 눈을 피했다. 이대로 죽을 순 없었다. 현자쯤 되면 주문을 입 속으로만 외우는 마법도 가능했다. 그녀는 안간힘을 다해 마법을 준비했다.

에키는 그 침묵에서 긍정을 읽었다. 억지로 얽매여 한 것도 아니고, 원해서, 스스로, 그딴 물건들을 만들었단 말이지. 어디에 어떻게 쓰였는지 모를 리도 없는데.

무얼 원해서 그랬는지 따윈 궁금하지 않았다. 일순 눈앞이 새빨갛게 젖어드는 듯했다. 목을 잘라 로아즈 성문 앞에 내던지고 싶다. 그녀는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

“그래, 그렇구나.”

[우와! 죽이는 거야? 우와! 우와 아!]

마검이 허공에 들어 올려졌다. 유리처럼 투명한 칼끝을 본 헤레이스의 얼굴이 허옇게 질렸다.

“흐어억!”

“현자님!”

칼끝이 현자의 가슴팍을 파고들었다. 근위기사들이 비명을 지르며 덮쳐들었다.

에키의 등을 노리고 다가온 공격들이 반원을 그리는 검의 궤적에 튕겨 나갔다. 몇 자루는 주인의 손아귀를 터뜨리고 허공을 날았고, 몇 자루는 부러졌다.

그녀가 왼손으로 뽑아 들어 휘두른 낡아빠진 허리춤의 검이 만들어낸 일이었다.

헤레이스는 비명을 지르며 몸부림쳤다. 살아 있었다.

이용방식이 약간 다르긴 해도 마법사나 마스터나 마나를 쓰는 것은 동일하기에, 마법사들도 명치에 마나 코어가 있었다. 에키는 마검으로 정확히 현자의 그것만을 꿰뚫었다.

마나 코어가 부서지는 통증은 상상을 초월한다. 온 신경이 타들어가는 느낌일 것이다. 헤레이스는 눈을 까뒤집다가 거품을 물고 혼절했다.

[엥? 안 죽였네. 왜 안 죽여? 어, 아니다, 너 방금 살의 넘칠 뻔한 거였으니까, 이게 나은 건가? 으? 어려워…….]

마검이 혼란스럽게 중얼거렸다.

현자에게서 튀어 오른 피가 뺨에 닿았다. 에키는 손등으로 피를 닦고 검을 거뒀다. 현자를 내버려두고 돌아서서 근위기사단을 바라보자, 그들이 주춤 물러섰다.

그녀는 무심히 그들을 보다가 발목에 아직 달라붙어 있는 가시덩굴을 검으로 걷어 내팽개쳤다.

“에키네시아 로아즈.”

돌연 건조한 부름이 들려왔다. 머리 바로 위, 튀어나와 있는 발코니에서였다.

“분명 짐이 이름을 외울 가치도 없던 계집이었는데, 잊을 수가 없어졌다. 대단하구나.”

발코니에 서서 그녀를 내려다보는 자의 머리칼은 은빛이었다. 나이에 비해 젊어 보이는 준수한 얼굴. 푸른 눈동자. 장신의 몸을 감싼 검붉은 망토에는 가늘게 뽑은 순은으로 수 놓은 하얀 사자의 문장이 있었다.

제국의 황제 로라스 드 하르덴 키리에.

에키는 제국의 귀족이었기에 황제를 본 적이 몇 번 있었다. 오래된 기억이라 흐릿했지만 얼굴을 알아보기엔 충분했다.

황제는 기억보다 수척해져 있었고, 눈 주위가 휑하니 어두웠다. 번들거리는 눈동자에는 핏발이 약간 서 있었다.

황제의 얼굴을 보는 순간 분노가 솟구치지 않을까 했는데 의외로 머리가 차가워졌다. 초췌한 모습 덕분일지도 모른다. 편안히 지내지는 못 했다는 증거니까.

“……하르덴의 영광된 빛, 백색 갈기의 왕, 남부의 정복자이자 북부의 구원자, 동부의 건설자이자 서부의 설계자, 사해(四海)를 수호하는 군주, 위대한 키리에 제국의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그녀는 예법대로 유려하게 읊으며 마검을 들어 올렸다. 투명한 칼날을 따라 현자의 피가 주륵 흐르다가 날에 스며들며 사라졌다.

“알고 계시는 대로…… 저는 로아즈의 장녀, 에키네시아 로아즈입니다. 무척이나 폐하를 뵙고 싶었습니다.”

그녀의 칼끝이 황제의 미간을 겨냥한 채 정지했다. 그의 눈썹이 작게 꿈틀거렸다. 에키는 검을 겨눈 채 살짝 무릎을 굽히며 인사를 했다. 가죽바지 차림임에도 풍성한 치맛자락이 있는 듯한 인사였다.

“뵙게 되어 정말로 영광입니다, 폐하.”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