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을 든 꽃 175화
황제는 무표정하게 방 안을 들여다 보았다. 호화로운 방 안에서 집기가 마구잡이로 날아다니고 있었다. 카르엠이 시뻘겋게 충혈된 눈으로 소리를 질렀다.
“빌어먹을! 꺼져! 꺼지란 말이다!”
“꺄아악!”
머리 쪽으로 날아온 촛대를 간신히 피한 여자가 비명을 질렀다. 울음을 터뜨리며 문 쪽으로 달아나던 여자는 문간에 서 있는 황제를 발견하고 놀라 멈춰 섰다.
“화, 화, 황제 폐하…….”
“남편을 두고 어딜 가려느냐, 황자비.”
“죄, 죄송합니다. 폐하, 하, 하지만, 저, 저, 전하께서, 전하께서…….”
“내가 네게 무어라 명했는지 잊었느냐?”
황제는 거친 손으로 여자의 팔뚝을 움켜쥐었다. 여자가 바들바들 떨며 호소하려 했으나 그는 막무가내로 그녀를 잡아끌고 방 안으로 들어갔다.
커다란 침대 위에 기대앉아 씩씩거리고 있던 카르엠이 흠칫 놀랐다. 황제는 자신을 돌아보는 아들의 한쪽 눈을 덮은 붕대와, 헐렁한 한쪽 소매에 시선을 주었다. 그 시선을 알아차린 카르엠의 몸이 움츠러들었다.
황제는 여자를 침대 위로 밀쳤다. 카르엠의 발치에 널브러진 여자는 금방이라도 기절할 듯한 안색이 되었다. 그녀를 바라보는 카르엠도 창백해졌다.
황제가 말했다.
“카르엠. 내가 네게 무어라 했더냐? 짐은 아이를 만들라 명했다.”
“…….”
“내게 손자를 안겨다오, 내 아들아.”
기묘할 정도로 다정한 목소리였다. 카르엠은 황제의 시선을 피했다. 황제는 입꼬리를 비틀어 올리며 속삭였다.
“불구의 몸으로 제국을 물려받을 순 없잖느냐. 차기 황제의 아비가 되는 것도 나쁘지 않을 터. 걱정 말거라, 너를 그리 만든 것은 내 반드시 목을 잘라다주마.”
황제의 새파란 눈동자가 번들거렸다. 그 순간, 밖에서 쿵 하고 커다란 소리가 울렸다. 황제는 인상을 쓰며 소리가 들린 방향을 흘깃 본 후 몸을 돌렸다.
“내 기대를 잘 따라주리라 믿는다, 카르엠.”
그 말을 남기고 황제는 카르엠의 방을 나왔다.
그는 무언가를 생각하며 한동안 문 앞에 서 있었다. 그러다 복도를 몇 발짝 걷자 다급한 발소리가 다가왔다. 희게 질린 남자가 헐떡이며 소리쳤다.
“폐, 폐하, 큰일 났습니다!”
“웬 소란이냐. 또 크루엔이 헛된 공격을 시도해 왔느냐?”
“아닙니다, 그게 아니라……!”
남자의 말을 잡아먹으며 또다시 쿵, 하고 굉음이 울렸다. 황제는 복도의 창으로 다가갔다.
갈로서스는 세 겹의 성벽으로 둘러 싸인 요새다. 황제가 있는 곳은 가장 안쪽인 동시에 가장 높은 곳이었다. 그래서 아래로 바깥 성벽이 고스란히 내다보였다.
굉음이 울린 방향을 본 황제의 눈이 커다랗게 뜨였다.
두 번째 성벽의 한쪽이 무너지고 있었다. 성벽의 하단부에 뻥 뚫린 구멍이 생기는 바람에 하중을 견디지 못한 윗부분이 무너져 내렸다. 거대한 성벽이 삽시간에 주저앉는 모습은 충격적이었다.
“마, 마, 마검의 악마가…… 나타났…….”
황제의 옆에서 창밖을 본 남자가 굳은 혀를 억지로 움직여 간신히 보고를 했다. 황제는 창틀을 힘주어 움켜쥐었다.
* * *
원들턴 디아상트 공작은 이렇게까지 된 상황이 믿기지가 않았다. 자신의 구상에는 문제가 없었다.
장녀는 황태자비로 만들었고, 차녀는 3황자와 약혼할 예정이었다. 드라코툼바 성에 창천기사단장이 방문하는 바람에 놀라긴 했으나, 때마침 결절이 터져 증거를 인멸해 주었다.
게다가 2황자를 부추겨 3황자를 함정에 밀어 넣기까지 했다.
안타깝게도 3황자는 망가지지 않았지만 대신 2황자가 확실히 망가졌다. 게다가 랑기오사를 찾아 주었으니 3황자는 자신을 신뢰하면 신뢰했지 의심할 리도 없었다.
아끼는 아들이 망가지면서 황제는 더 이상해졌다. 이대로 망가진 2황자와 미친 황제를 치운 다음 황태자를 황위에 올릴 생각이었다.
차녀를 이용해 3황자를 처리하고, 장녀가 황태자의 아이이자 자신의 손자를 출산하는 것을 기다린다. 손자가 태어나면 마검과 하르덴 황실이 얽힌 음모를 밝히고, 정의를 위해 눈물을 흘리며 어쩔 수 없이 사위를 베는 영웅이 될 예정이었다.
갓난 손자를 황위에 올리며 어린 손자를 대신해 제국을 다스리는 대공이 된다. 그 뒤는 쉬울 것이다. 천천히 제국을 장악하고, 황실의 문장을 바꾸면 된다.
그런 장대한 계획이었다.
그러나 현실은 엉망진창이었다.
차녀가 배신을 했고, 가신과 혈족들은 차녀를 공작으로 인정한다는 헛소리를 하고 있었다. 장녀는 연락조차 없다.
콜본의 공방을 들키고 드라코툼바에서 나온 노트까지 공개되는 바람에 마검을 가지고 수작을 부린 배후라는 것까지 드러나 버렸다.
자신은 가문을 황실로 만들기 위해 이토록 헌신했건만, 가문은 자신을 배신했다.
이제 공작 곁에 있는 자들은 이미 한 배를 타버려서 공작을 떠나면 죽을 수밖에 없는 자들뿐이었다.
‘대체 어쩌다 이렇게 된 거지.’
거슬러 올라가보면 역시 로아즈 가문이 몰살당하지 않았을 때부터 균열이 생겨났다.
결국 에키네시아 로아즈가 악마가 되지 않은 것이 문제의 시작이다. 그 여자는 심지어 완벽하게 몰아넣어 악마로 만들어놓은 3황자를 되돌려 놓기까지 했다.
‘에키네시아 로아즈부터 치웠어야 했어. 설마 그런 게 가능할 줄은.’
이를 갈던 공작은 소란해진 바깥을 뒤늦게 알아차렸다. 그는 창밖을 내다보았다.
“이게 무슨…….”
밖은 아비규환이었다. 병사들이 창을 내던지고 달아났다. 전장을 이탈하려는 병사를 제지해야 할 지휘관이나 기사들마저 도망치거나 겁에 질려 숨고 있었다.
그들이 멀어지는 방향에서 두 번째 성벽이 기울어졌다. 기우뚱한 성벽이 그대로 아래로 쏟아졌다. 먼지구름이 솟구쳤다. 그것은 몹시 비현실적인 광경이었다.
그 먼지구름 너머에 서 있는 건 가느다란 여자였다.
* * *
에키네시아는 마검을 쥐고 세 번째 성문을 넘었다.
처음에는 활이 날아왔다. 병사들이 포위를 시도했고 기사들이 검을 들었다. 그러나 그 모든 공격을 마나 실드로 막거나 피하며 두 번째 성벽을 부수자 반응이 달라졌다.
막을 수 없다.
성문을 부수고 두 번째 성벽에 닿을 때까지 그녀는 뛰지 않았다. 반격도 하지 않고 그냥 걷고 있는데 가로막는 것도 공격하는 것도 불가능했다. 그나마도 기사들을 상대로는 막거나 피하기라도 하지 병사들이나 화살은 아예 그녀의 안중에 없었다.
갈로서스는 방어를 위해 성벽마다 성문 위치가 달랐다. 두 번째 성벽의 성문은 정반대편에 있었다. 에키는 그 곳까지 가는 대신 그냥 성벽 앞에 섰다.
전에 쐐기의 창고를 부쉈을 때와 같은 방식으로 마나를 활용했다. 맨 손이 아닌 검을 기반으로, 게다가 그때에 비해 압도적으로 많은 양의 마나를 불어넣었다. 성벽이 대상이니만큼 주저할 이유도 없다.
그녀는 전혀 자제하지 않고 마음껏 검을 휘둘렀다.
그 결과는 성벽의 하단부에 뚫린 거대한 구멍이었다. 아래가 뚫린 성벽은 그대로 허물어졌다.
한 명의 인간이 검으로 발휘한 파괴력이라기에는 믿을 수 없는 수준이었다. 현자급 마법사가 긴 시간을 들인 마법도 이 정도 위력을 보이기는 어려웠다.
성벽이 허물어지는 것과 동시에 황제군의 사기도 허물어졌다. 그 자리를 채운 것은 공포였다.
그들은 이런 상황을 대비한 훈련을 한 적이 없다. 전략과 전술이 무의미한 순수하고 압도적인 힘이었다. 저 힘이 성벽이 아니라 그들을 향한다면?
뒤늦게 뛰쳐나온 마법사와 마스터급 기사가 그 즈음부터 그녀에게 공격을 시도했다. 그러나 마법도, 검기도 그녀를 감싼 막을 뚫지 못했다.
수준이 낮았다. 에키는 일부러 그 것들을 고스란히 맞아주었다. 상대가 안 된다는 것을 깨닫고 도망가라는 의도였다.
마법도 검기도 먹히지 않는 것을 목격하자 공포는 전염병처럼 번져나갔다.
안 그래도 죽지 못해 명을 따르고 있던 군이었다. 그녀가 세 번째 성벽에 도달할 때쯤 제국군은 이미 군대가 아니라 도망치는 군중이 되어 있었다.
세 번째 성벽의 성문은 첫 번째 성벽과 일직선상에 있었다. 첫 번째 성문보다 더 컸다.
성문 앞에 선 그녀는 바르데르기오사를 고쳐 쥐었다. 좀 더 많은 마나를 끌어올렸다. 피부에 검은 얼룩이 번지며 살의가 전신에 차 올랐다. 온몸에 스며든다. 마나 코어가 까맣게 물들어가는 감각.
[와, 네가 연달아서 이만큼이나 내 마나 끌어가는 건 진짜 오랜만인 거 같아. 나까지 어지럽네. 넌 괜찮아?]
전부 죽여버려.
마검의 음성 너머로 나른한 속살거림이 들렸다. 환청이었다. 솜털이 곤두선다. 근처에 있는 인간의 숨결들이 느껴졌다. 그게 너무 거슬렸다. 그 숨을 끊어버리고 싶어졌다.
지독한 유혹이었으며 손발이 저릿해질 정도의 욕망이었다. 메마른 입 안에 서늘하고 시원한 물이 밀려드는 느낌. 삼켜서는 안 되는 것을 삼켜버리고 싶은 충동.
이 정도는 예상했다. 겪어본 적 있는 감각이다. 감정이 널뛰는 것이나 독 때문에 생기는 이성을 갉아먹는 고통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에키는 깊게 숨을 들이키며 눈을 감았다 떴다. 죽이긴 뭘 죽여. 코웃음을 치고 검을 휘둘렀다.
갈라진 성문이 천천히 뒤로 넘어갔다. 성문을 타넘어 갈로서스 요새 중심부에 발을 들였다.
* * *
디아상트 공작은 멀거니 창밖을 보았다.
에키네시아 로아즈가 갈로서스를 파괴하고 있었다. 창천기사단의 일부가 합류한 황태자군을 상대로도 굳건히 버텨냈던 요새를, 단신으로. 심지어 제국군을 무시하고 요새만 부수고 있다.
저건 이미 전쟁이니 싸움이니 할 대상이 아니었다. 자연재해 수준이다.
자신이 조금 전까지 저런 걸 미리 치워버려야 했다고 후회하고 있었나. 공작은 식은땀이 흐른 목덜미를 닦아냈다.
저 여자가 마검을 쥐게 된 건 자신의 수작이었다. 제국 연회장에 가 보면 흔히 볼 수 있는 평범한 영애가 자신이 꾸민 음모로 인해 마검의 주인이 되었다.
드라코툼바 성에서 선대가 남겨둔 바르데르기오사를 발견한 후 오랜 기간 계획을 세우고 실행하면서, 공작은 단 한 번도 이런 결과를 상상해 본 적이 없었다.
마검의 첫 희생자가 되라고 고른 백작가의 딸이 괴물 같은 검의 천재여서 기오사 오너가 되리라고 누가 상상하겠는가. 머릿속에 들어 있지도 않았던 변수였다.
‘아니……. 어쩌면 3황자는 알았을지도.’
로아즈를 선택한 건 2황자였다. 2황자는 3황자가 관심을 보인 여자가 있다는 이유로 후보 가문들 중에 로아즈를 골랐다.
3황자는 그녀가 저런 존재라는 것을 알고 관심을 두었던 걸까. 지금의 공작으로서는 알 수 없는 일이었다.
비로소 공작은, 통제할 수 있다고 믿었던 것들이 사실은 제가 감당할 수 없는 것들이었음을 깨달았다.
‘끝났구나.’
황태자군이 공성에서 대패하고 황제가 타국에 사신을 보내는 것을 보면서, 그래도 버티면 상황을 반전시킬 수 있지 않을까 희망을 품었다. 황태자군을 와해시키고 로잘린으로부터 디아상트를 되찾아 올 계책을 열심히 구상하기도 했다.
다 부질없는 짓이었다. 에키네시아 로아즈의 손에 박살 나고 있는, 난공불락일 줄 알았던 갈로서스와 다름없는 꼴이다. 허탈할 지경이었다. 저런 존재를 적으로 돌렸다니.
‘모든 게 끝났다.’
공작은 창에서 돌아섰다. 서랍을 열고 그 안에 있던 작은 유리병을 꺼냈다. 투명한 액체가 그 안에서 찰랑거리고 있었다.
푸누스. 로잘린을 3황자에게 보내면서, 그녀가 가지고 있던 티 캐디에 집어 넣었던 독과 같은 독이었다.
자신을 몰아내고 디아상트를 차지한 딸을 떠올렸다. 언젠가 제 손으로 처리할 작정이었던 딸이다. 로잘린은 아내를 닮은 심약한 장녀 로즈마리에 비해 자신을 많이 닮았다.
그래서 로잘린을 더 아꼈다. 아마 로잘린이 아들로 태어났다면 후계자로 삼았을 터다.
그랬기에 한 번은 놓아주었다. 평민 화가와 결혼하겠다 헛소리를 하는 것을, 마음대로 하라며 보내주었다.
어지간하면 놔둘 생각이었다. 그러나 3황자의 목줄이 급하게 필요해져서 도로 끌고 왔다. 디아상트를 황실로 만들기 위한 어쩔 수 없는 희생이었다.
아끼는 딸을 처리할 각오를 해야 하는 게 내심 씁쓸했었다.
평민의 피가 섞였다 해도 로잘린이 낳은 게 아들이었다면 그 애는 거뒀을지도 모르는데, 또 딸이라 후계로 삼을 수가 없었다. 바로 죽여 버리거나 살의 실험용으로 넘기지 않은 건 나름의 자비였다.
로잘린이 알았다간 더 분노했을 공작의 진심은 이러했다.
공작은 푸누스 병을 들여다보았다.
‘내가 죽어도 디아상트는 무사하겠지. 아니, 오히려 더 융성해질지도 모르겠군. 로잘린이 황태자의 편에 섰으니.’
자신은 실패했지만, 디아상트 가는 살아남았다. 로잘린 디아상트가 있으므로. 가문을 위해 희생시키려던 딸이 배신했는데, 그 배신이 되레 가문을 살리게 된다. 아이러니했다.
단 한 번도 그 아이가 디아상트 공작이 되는 미래를 상상해 보지 않았는데.
제국법은 여성의 계승을 금지하지는 않았다. 직계 남성을 우선하지만 가주가 원할 경우 여성에게도 세습할 수 있었다. 물론 실제로 여성이 작위를 이어받는 일은 극히 드물었다.
공작은 아들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딸에게 작위를 물려주는 것은 아예 생각도 못 하고 있었다. 디아상트를 황실로 만들고자 한 구상의 배경에는 가문을 물려줄 아들이 없다는 사실도 일부 영향을 끼쳤다.
데릴사위 따위는 싫었다. 손자를 황제로 만들어 황실의 명패를 바꿈으로써 디아상트를 이어가는 게 공작에게는 훨씬 매력적이었다.
딸의 심정이나 입장은 전혀 고려하지 못하고, 고정관념과 권력욕에만 매몰되어 있었다. 스스로가 모든 상황을 통제할 수 있다고 믿었다. 사람을 조종하고 이용할 대상으로만 보았다.
그것이 윈들턴 디아상트의 한계였다.
푸누스 병을 들여다보며, 공작은 어렴풋하게 그것을 깨달았다. 파멸을 눈앞에 두자 비로소 그동안 보이지 않던 것이 보였다.
‘내 삶은 잘못된 것이었나. 제국을 꿈꾼 건 허황된 망상이었나.’
장기말로 쓰려 했던 딸이 자신보다 더 현명했던 건가. 평생 스스로가 잘못되었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다. 처음으로 든 의심과 회한은 끔찍했다.
그는 서랍 안쪽에 있는 펜과 종이를 잠시 보다가, 금방 시선을 뗐다. 유리병을 열고, 단숨에 들이켰다.
딸을 죽이려 보냈던 독과 똑같은 것이 목을 타고 넘어갔다. 내장이 타들어가는 고통이 느껴졌다. 빈 병이 바닥에 떨어졌다.
공작은 유서를 남기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