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을 든 꽃 174화
에키네시아의 물음에 황태자는 겨우 정신을 차렸다. 그녀의 말대로, 황태자로서는 손해 볼 게 없는 거래였다.
병사를 내어달라는 것도 아니고 기사를 데려가는 것도 아니다. 실패해 봤자 그녀 혼자 죽을 뿐이다. 반면 성공할 경우 저 정도 요구는 아주 소박한 수준이었다.
게다가 정말로 혼자서 갈로서스를 정복할 정도라면, 유리엔이 말한 것이 과장이 아니라는 뜻도 된다.
‘그 정도의 강자가 미쳐 날뛰는 것도 아니고 멀쩡히 이성을 가지고 힘을 제어한다, 라……. 영향력이 가능도 안 되는군.’
황태자는 약간 멍한 상태로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좋다. 받아들이지.”
“전하!”
반쯤 넋이 나가 있던 측근들이 기겁하여 황태자를 불렀다. 에키네시아는 넋이 나가 있는 창천기사단 측 사람들 쪽을 흘깃 확인하고는 말했다.
“감사합니다. 따로 계약서를 쓰지 않아도, 전하의 명예와 이 자리의 모든 분들이 증인이 되어 주시리라 믿어요.”
그 말을 끝으로 그녀가 군영 안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창을 겨누고 있던 자들이 창날을 아랑곳 않고 다가오는 그녀에게 당황해서 상관을 돌아보았다. 황태자가 물었다.
“잠깐, 어디로 가는 건가, 로아즈 영애?”
“거래에 동의하셨잖아요? 갈로서스로 가겠습니다.”
“……지금 바로?”
“예, 전하. 좀 비켜달라고 명해 주시겠어요?”
사람들의 표정이 멍청해졌다. 황태자는 황망히 그녀를 바라보다가, 느릿하게 명했다.
“……비켜주어라.”
창이 거두어졌다. 에키네시아는 군영을 똑바로 가로질렀다. 시선이 개미 떼처럼 달라붙었지만 돌아보지 않았다.
그녀는 군영을 통과하여 갈로서스 요새로 향했다.
* * *
내전 기간 동안 유리엔은 간간히 던컨의 연락을 받았다.
던컨은 로아즈 일가의 상태를 살피러 오기도 했고, 로아즈의 생존자들이 어떻게 지내는지 확인하러 오기도 했다. 사관학교의 분위기를 읽으러 온 적도 있고 그 외의 아젠카 사람들이 어떻게 지내는지 보러 온 적도 있었다.
에키네시아는 그렇게 던컨을 통해 간접적으로 친분이 있는 사람들의 안부를 살폈다. 그러면서도 그녀는 끝까지 누구에게도 연락을 하진 않았다. 무언가를 두려워하는 것처럼.
던컨은 에키네시아가 명을 내리면 힘들여 조사하고 다니는 대신 그냥 편하게 유리엔에게 문의하곤 했다. 유리엔은 던컨이 무언가 물으면 꼬박꼬박 편지를 써서 전해주었다. 던컨은 대신 그에게 에키네시아가 어떻게 지내는지를 알려주곤 했다.
에키네시아는 답장을 한 번도 쓰지 않았다. 다만 그녀는 던컨이 유리엔에게 묻는다는 걸 알면서도 그것을 제지하지 않았고, 자신의 소식을 전달하는 것도 막지 않았다.
성검은 던컨이 가끔씩이나마 에키네시아의 소식을 전해주지 않았다면 제 주인이 지금보다도 더 미쳤을 거라 확신했다.
소식 자체보다, 에키네시아가 제 소식이 유리엔에게 전해지는 걸 막지 않는다는 사실이 더 도움이 되었다.
해야 할 일이 너무나 많아서 용케 제정신을 유지하고 있긴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유리엔의 상태는 점점 안 좋아지고 있었다.
쉬지 않았고, 그나마 빈 시간에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멍하니 있고, 입맛을 잃었고, 제대로 자지 못했다. 잠드는 대신 아메시스트나 보관해둔 커프스 버튼을 넋 놓고 들여다보곤 했다. 몽유병 환자마냥 새벽에 아젠카를 돌아다닌 적도 있었다. 이팝나무 가로수 길이나, 분수대 같은 곳을.
신경이 칼끝처럼 예민해졌고, 혼자 훈련을 할 때 검에 살기나 광기가 실리기도 했다. 힘 조절이나 마나 조절에 실패해서 손잡이를 으스러뜨리거나 칼날이 터져나가기도 했다. 훈련용으로 비치된 검이 몇 자루 부서져나갔고 단장 전용 연무장 정비 횟수가 잦아졌다. 다른 기사와의 대련은 일체 하지 않았다.
흰 까마귀 협곡에서 결절이 발생해 에키네시아가 사라졌을 때와 비슷했다. 그나마 그때보다는 나은 건 그녀가 무사하다는 확신과, 내전이 끝나면 그녀가 돌아오리라는 희망이 있기 때문이었다.
‘만일 내전이 끝나고 증명식 준비를 마쳤는데도 마검의 주인이 돌아오지 않으면, 이번에는 영영 주인을 잃어버리겠군.’
성검은 제 주인이 어느 날 갑자기 황제나 2황자를 찾아가서 난도질해 버리더라도 놀라지 않을 준비를 했다. 자살하는 꼴만은 보고 싶지 않긴 했는데 그 꼴도 볼지 모른다는 각오까지 했다.
워낙 완벽하게 일처리를 하고 있는 데다, 다른 사람에게 신경질을 내거나 화풀이를 하지도 않아서 주위 사람들은 아무도 몰랐다. 그러나 줄곧 함께 있는 성검이 보기에 유리엔의 상태는 그 정도로 심각했다. 그나마 디트리히만이 유리엔이 이상하다는 것을 알아채고 있었다. 원인을 짐작한 디트리히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친구의 상태를 자주 살피기만 했다.
12월 1일, 던컨은 편지를 보내는 대신 직접 유리엔을 찾아왔다. 그는 며칠 전에 처음으로 에키네시아가 자신의 소식을 전달하는 것을 막았다고 알려주었다.
〈며칠 나갔다 올 건데, 내가 떠났다는 걸 그에게 알리지 마. 너도 따라오지 말고.〉
그 말을 남기고 그녀는 안가를 떠났다. 이유도 목적지도 알려주지 않았다.
하지만 줄곧 그녀 곁에서 명을 받으며 내전의 전황을 전달하고 있었던 던컨은 눈치를 채고 말았다. 갈로서스 공성전의 대패 소식을 전한 뒤부터 계속 무언가를 고민하다가 갑자기 떠난다고 하면 어디로 갈지는 뻔했다.
“아가씨가 그때와 비슷해서, 아무래도 알려야겠다 싶었습니다. 당신에게는 받은 의뢰비도 있으니.”
던컨에게 유서를 맡기듯 편지 두 통을 맡기고 돌아가라고 했을 때. 그때와 비슷했다. 던컨은 그래서 그녀의 명을 어겼다.
유리엔은 희미하게 미간을 찌푸렸다.
“그때라니?”
“제게 편지를 맡겨 보내고, 홀로 악마가 되었던 당신을 만나러 갈 때 말입니다.”
그는 일순 평정을 잃었다. 던컨이 움찔 놀라 상체를 뒤로 물릴 정도
“……떠난 지는 얼마나 되었지?”
“며칠 되었습니다.”
“갈로서스로 간 것이 확실한가?”
“어디로 간다는 말씀은 없으셨지만, 정황상 가실 곳이…….”
황제가 농성을 벌이고 있는 곳. 가문을 잃은 디아상트 공작과, 불구가 된 2황자도 그 곳에 있었다.
[복수를 하러 간 건가?]
랑기오사가 혼잣말처럼 물었다. 유리엔은 흐트러지려는 표정을 간신히 가다듬으며 눈을 내리깔았다.
에키네시아는 미래를 위해서는 복수를 포기할 수도 있다고 했었다. 그러나 그건 로아즈 참사가 일어나기 전의 일이다. 로아즈 참사 이후 그녀는 2황자를 불구로 만들고 달아났다.
그녀는 유리엔보다 더 그들을 죽여 버리고 싶을 것이다. 하지만 면책특권을 받아두었고, 내전 중인 상태니 설령 그녀가 그들을 죽이더라도 문제는 없었다.
그럼에도 설명할 수 없는 불안감이 치솟았다. 던컨이 ‘그때’와 비슷하다고 한 말이 불안감을 부채질했다.
그녀가 있을 자리를 완벽히 만들기 전에는, 그녀를 찾아갈 생각이 없었지만…….
생각은 그 지점에서 뚝 끊겨버렸다. 유리엔은 그대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알려줘서 고맙다.”
급하게 마지막 말을 남기고 그는 본부로 돌아갔다.
창천기사단 본부 별관에 머물고 있던 현자 칼리스토 팽과 니콜 시즈튼은 갑작스럽게 들이닥친 기사단장을 맞이해야 했다.
“이동마법을 쓸 수 있겠는가?”
“예? 어디로 말입니까?”
“갈로서스.”
칼리스토는 난감한 낯이 되었다.
“꽤 멀군요. 미리 만들어둔 마도구가 있는 것도 아니고, 이동마법은 제 전문 분야도 아닌 터라 시간이 걸립니다. 인원이 많으면 열차를 타는 쪽이 빠를 겁니다. 몇 명입니까?”
“한 명이라면 얼마나 걸리지?”
“한 명이면…… 반나절 정도면 가능할 것 같습니다. 다만 마석이 좀 필요합니다.”
“얼마든지 쓰도록. 최대한 빨리 부탁한다.”
유리엔이 급한 일을 처리하는 동안, 칼리스토와 니콜이 이동마법을 준비했다.
유리엔은 늦은 오후에 갈로서스 근처로 이동할 수 있었다. 황태자군 진영 근처였다. 그는 곧바로 황태자를 찾아갔다.
“너까지 무슨 일이냐?”
황태자는 묘한 얼굴로 유리엔을 맞이했다. 유리엔은 초조함을 간신히 숨긴 채 입을 열었다.
“전하, 에키네시아 로아즈가…….”
“왔었다. 조금 전에.”
유리엔의 안색이 변했다. 그가 무어라 더 물으려던 순간, 먼 곳에서 폭발음이 들렸다. 그들은 반사적으로 소리가 들린 곳을 바라보았다. 갈로서스 요새에서 불꽃이 일었다.
* * *
갈로서스는 황폐한 평지에 홀로 우뚝 솟은 바위산 위에 세워졌다. 그것은 산이라기보다는 황토빛 절벽처럼 보였다.
절벽 위에 삼중으로 층층이 지어진 황갈색 성벽은 몹시 두터웠다. 빙빙 도는 좁은 비탈길만이 요새에 접근하는 유일한 길이었다.
길의 끝에 있는 성문은 쇳덩이로 만들어진 철문이었다. 성벽 위에는 활을 든 병사들이 빼곡했다.
에키네시아는 낡은 검을 허리에 차고 빈손으로 비탈길을 걸어 올라갔다.
문득 목 근처를 더듬었다. 걸친 후드와 옷깃 아래로 목에 걸고 있는 것이 만져졌다. 그것은 성검 랑기오사의 형태를 한 조그만 나무조각이었다.
성녀를 구하러 갔을 때, 유리엔이 밤새도록 쉼터를 지켜보며 만들고 버렸던 나무조각 중에 그녀가 유일하게 챙겨놓았던 것이다.
유리엔에게 아메시스트까지 줘버리고 빈손으로 떠나오면서 이것만은 계속 가지고 있었다.
그녀는 그 조그만 나무조각을 목걸이로 만들었다. 그와 가까이 있을 때는 반쯤 까먹고 있던 물건이었는데, 그와 멀어진 이후로는 계속 들여다보는 바람에 손때가 탈 정도가 되었다.
천 너머로 형태를 덧그려 보다가 손을 내려놓았다. 비탈길을 올라갈수록 바람이 거세졌다. 겨울을 목전에 둔 차가운 바람이 후드 자락을 헤집었다.
성문 앞에 도달할 때까지 그녀는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았다. 허리에 찬 칼을 뽑지도 않은 여자가 홀로 걸어서 올라오고 있으니 적잖이 당황할 수밖에 없다. 성문 앞에 멈춰 서자 성벽 위의 병사들이 고민하는 기색이 느껴졌다.
“누구냐!”
누군가가 소리쳤다. 에키는 대답하지 않고 성문을 올려다보았다. 성문은 요새의 크기에 비하면 작은 편이었으나 그럼에도 목을 꺾어 올려다 봐야 할 높이였다.
제국이 건국된 이래로 한 번도 뚫리지 않은 성문이었다.
그녀가 아무 말도 하지 않자 화살이 한 대 날아왔다. 그녀는 고개를 살짝 틀어 그것을 피했다. 성벽 위의 웅성거림 사이로 마검의 투덜거리는 음성이 들려왔다.
[진짜 왼팔도 조종하면 안 돼?]
“안 돼. 죽이지 않는 게 목표니까.”
[쳇, 쳇.]
“그래도 널 쓰잖아. 그걸로 만족해.”
에키는 장갑을 벗으며 호흡을 골랐다.
용을 상대할 때만큼이나, 아니, 아마도 그것보다 많은 양의 마검의 마나를 쓰게 될 거다. 그렇게 이 요새를 부수고 나면, 그 안에 숨어 있을 디아상트 공작과, 2황자와, 황제를, 검게 물든 상태로 마주하게 되겠지.
아무도 죽이지 않은 채 살의만 한껏 꺼내 쓴 몸으로, 가장 죽여버리고 싶은 자들 앞에.
‘참고 생포하거나……. 아니면 베더라도 냉정을 유지하거나.’
스스로에 대한 시험이었다. 동시에, 실패할 경우에 대한 대비이기도 했다. 이곳은 적진이었다. 자신을 시험해 보기에 적당한 장소.
화살이 몇 발 더 날아왔다. 그녀의 몸에 닿는 것은 없었다.
오른손을 늘어뜨렸다. 투명한 칼날이 돋아나듯 나타났다. 후드의 매듭을 풀었다. 거세게 부는 바람이 펄럭이는 후드를 잡아채 날렸다.
드러난 머리카락이 길게 흩날렸다. 풀 한 포기 보이지 않는 황토빛 풍경과 어울리지 않는 꽃잎 색이었다.
“아, 악마?”
누군가가 중얼거렸다. 그 중얼거림에 화답하듯, 머리카락을 타고 검은 빛이 번져갔다. 머리카락과 눈동자가 검게 차오르면서 투명한 칼날 위에 검은 마나가 타올랐다.
그녀는 허리의 검을 뽑지 않고 양 손으로 새카만 손잡이를 쥐었다. 칼날을 타고 검기가 확장되었다. 칼날의 몇 배에 이를 정도로.
바르데르기오사에는 랑기오사와 같은 증폭 능력이 없으므로 순수한 마나로 확장된 검기였다.
그것을 목격한 자들이 비명과 고함을 내지르는 것과 동시에, 검이 성문을 갈랐다. 육중한 쇳덩이가 사선으로 갈라지며 뒤로 넘어갔다. 소리 없이 갈라진 성문은 바닥에 닿으며 비로소 소리를 만들어냈다.
쿠우웅. 먼지구름이 안개처럼 피어 오르며 사람의 목소리를 모조리 묻어버리는 천둥 같은 굉음이 울려 퍼졌다. 난공불락이라 불리던 갈로서스의 종말이 시작되는 소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