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을 든 꽃 173화
에키네시아가 의외라는 듯 눈을 깜박였다.
“체포하지 않으시네요?”
“체포하길 원하나?”
“아뇨, 그건 아니지만요.”
그녀가 설핏 웃었다. 군영 안에 들어와 있으면서도 긴장감이라곤 느껴지지 않았다.
긴장하고 있는 건 그녀가 아니라 그녀를 둘러싼 황태자군과 기사들이었다.
에키네시아는 주위를 한 번 둘러보더니, 다시 황태자에게 시선을 주었다.
“황태자 전하께 거래를 청하러 왔습니다.”
“……거래?”
“전하께서는 제가 바르데르기오사 오너라는 걸 인정하시나요?”
귀족의 사병들과 창천기사단이 모여 있는 이 자리에서는 대답하기 몹시 난감한 질문이었다. 황태자는 창천이 성명을 발표하기 전, 유리엔과 논의했던 것을 떠올렸다.
디아상트 공작에 대해 모르고 있었던 데다, 유리엔이 음모에 휘말렸을 때 제대로 도움이 되지 못한 크루엔 황태자는 거의 모든 문제에서 유리엔의 주장을 수용해야 했다.
유일하게 난항을 겪은 것은 에키네시아의 문제였다.
〈창천이 인정하겠다고 한다면 제국 역시 그녀를 바르데르기오사 오너로 인정할 수밖에 없겠지. 실제로 그녀로 인한 피해가 있는 것도 아니고, 로아즈 참사를 저지른 자들은 따로 있으니 말이다.〉
황태자는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유리엔이 자신을 황제로 만들겠다고 한 후, 은밀히 조사를 한 끝에 그가 사랑하는 여자가 에키네시아 로아즈임을 알아냈었다. 위장 약혼에 대해 아는 입장에서는 정황이 너무 뻔해서 알기 쉬웠다.
갑작스럽게 지명된 스콰이어, 에키네시아 로아즈.
그때도 행적이 특이하다고는 생각했었다. 그래도 설마 마검을 굴복시킨 여자일 줄은 몰랐다. 그 유리엔이 반한 여자인 만큼 평범한 여자는 아닐 거라 짐작했지만 이건 너무 스케일이 크지 않은가. 온갖 반발과 의혹이 쏟아질 걸 예상하니 머리가 다 아팠다.
〈……단, 인정 자체는 그녀가 증명식을 제대로 치러낸 후로 하겠다. 지금으로선 창천도 완전히 그녀를 인정한 건 아닌 상태잖나.〉
〈알겠습니다. 즉위하신 후에 증명식을 진행할 터이니, 전하께도 증명식에 참석해 주십시오. 초대장을 보내겠습니다.〉
제국의 황제가 직접 참석한다는 건 보통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황태자는 유리엔의 청을 거절하기 어려웠다.
‘어차피 인정하려면 직접 보는 게 낫겠지. 게다가…… 정말 증명한다면, 사상 최초로 탄생하는 바르데르기오사 오너다.’
〈알겠다. 그건 그렇게 하지. 다만 증명식 이전에, 그녀가 자수하도록 해다오. 처벌은 수위를 최대한 낮추어 형식적으로 할 테니…….〉
유리엔의 낯빛이 굳었다. 황태자는 이번에는 실제로 한숨을 쉬었다.
〈유리엔. 너도 알다시피, 에키네시아 로아즈는 카르엠을 공격했다. 황족을 기습하여 불구로 만든 것을 벌하지 않고 넘어갈 순 없어. 아무리 상대가 2황자라 해도 말이다. 이건 제국의 권위 문제야.〉
그리 말하며 황태자는 내심 긴장했다. 그로서는 이 문제를 양보할 수가 없었다.
안 그래도 유리엔에게 심하게 의지하여 제위에 오르게 되는 상황이다. 황족을 불구로 만든 여자를 재판조차 없이 용서해 버리면 황제로서의 권위가 흔들릴 터였다. 허수아비 황제가 될 순 없었다.
유리엔이 반박할 경우, 형식적인 재판을 거쳐 말만 감옥인 호화로운 방에서 잠깐 머무는 정도로 끝내면 된다고 설득할 생각이었다. 유리엔 역시 상황을 모르지는 않을 테니 설득할 수 있겠지. 황태자는 조심스럽게 그의 기색을 살폈다.
유리엔은 잠시 침묵했다. 침묵 끝에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은 의외의 방향이었다.
〈제가 전하께 마검과 얽힌 사건에 대해 알려드리는 대가로, 원하는 것이 두 가지 있다고 했던 것을 기억하십니까.〉
〈물론 기억한다. 그중 하나는 디아상트 공녀와의 약혼을 하지 않는 것이었지. 위장 약혼 계획 말이다. 나머지는 후일에 요구하겠다고 했, 이런.〉
불길한 예감에 말을 하다 말고 황태자가 이맛살을 찌푸렸다. 유리엔은 기다렸다는 듯이 요구했다.
〈다른 하나를 지금 요구하겠습니다. 에키네시아 로아즈에게 한정적인 면책특권을 부여해 주십시오.〉
면책특권이 부여되면 특정한 범위 내의 일에 한해서 어떠한 결과가 발생하더라도 법적인 책임을 묻지 않는다. 처벌하지 못한다는 소리다.
황제가 원하더라도 귀족 대회의에서 통과되어야 부여 가능한 특권이었다. 다만 황제 본인은 부여 과정 없이, 범위가 한정되지 않은 전면적인 면책특권을 가지고 있었다. 현 황제의 공식적인 처벌이 어려운 것도 그런 맥락에서였다.
〈……명분이 없으면 불가능하다. 알고 있겠지?〉
〈그녀는 황실이 악용한 마검의 피해자이자, 마검을 통제하는 것에 성공함으로써 더 큰 피해를 방지해 낸 공로자입니다. 그러니 보상 차원에서 그녀에게 마검과 관련된 사건에 한정된 면책특권을 부여하는 것은 가능하지 않습니까.〉
〈그건…… 가능할 것 같다만. 허나 아무리 마검과 관련된 사건이라 해도, 직계 황족을…….〉
〈2황자는 그녀에게 마검을 보낸 주범입니다. 당연히 범위에 포함되겠지요. 또한 2황자와 황제가 마검을 악용하고, 전하께서 그에 반대하여 양위를 요구하게 된 이상, 그들은 제국의 황족이라 할 자격이 없지 않습니까? 그러니 제국의 권위를 논할 이유도 없습니다.〉
황태자의 말문이 막혔다. 유리엔이 서늘한 눈으로 그를 응시했다.
〈아니면, 그들을 벌하면서도 황족으로 예우할 생각이셨습니까? 그들에게서 황족의 자격을 박탈함으로써 마검의 음모와 황실을 완전히 분리하는 게 차후 제국을 다스리기에도 유리하지 않겠습니까.〉
빈틈없이 준비된 대답이었다. 따질 구석이 없었다. 따져봤자 이미 대답이 다 준비되어 있을 듯한 예감마저 들었다. 머리를 부여잡은 황태자는 결국 양손을 들어 보였다.
〈알았다. 그 문제는 내가 제위에 오르는 즉시 어떻게든 통과시키마.〉
크루엔 황태자는 기억 속에서 빠져나와 눈앞의 여자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아마 자신이 면책특권을 얻으리라는 것도 모르고 있겠지. 그는 천천히 입술을 떼었다.
“창천이 바르데르기오사 오너를 증명하겠다고 했다. 그것을 본 후에 인정하도록 하지.”
“음, 그렇다면 지금은 절 뭐라고 생각하시는 건가요? 악마?”
에키네시아가 웃으며 말했다. 황태자는 대체 그녀가 무슨 의도인지 알 수가 없어서 미간을 슬쩍 구긴 채 답했다.
“악마가 될 수도, 기오사 오너가 될 수도 있는 존재라고 생각한다.”
“그렇군요. 그럼, 황태자 전하.”
그녀가 고개를 들어 눈을 가늘게 떴다. 군영 너머, 절벽에 웅크려 있는 거대한 요새를 바라보았다. 요새의 꼭대기에는 하얀 사자의 깃발이 펄럭이고 있었다. 그녀는 그것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제가 전사자를 내지 않고 갈로서스 요새를 부순다면, 저를 기오사 오너로 인정하실 수 있나요?”
주위의 공기가 얼어붙는 것이 느껴졌다. 황태자는 얼이 나가 멍청히 되물었다.
“……뭐?”
“공성에 실패하셨다고 들었어요. 딱히 돌파구가 보이지 않아서 장기전으로 가야 할지도 모른다고요. 그러지 않으셔도 돼요. 제가 저 요새를 무너뜨려 드리죠.”
창천기사단의 협조까지 받고 있는 황태자군이 정복하지 못한 요새를 혼자서 정복하겠다고. 심지어 전사자를 내지 않고? 근처의 사람들이 턱이 빠져라 입을 벌렸다. 미쳤냐는 속삭임이 오갔다.
에키네시아는 주위 반응을 신경 쓰지 않고 평이한 어조로 이어 말하고 있었다.
“달아나거나 항복하는 자는 베지 않을 거예요. 일부러 공격하지도 않겠습니다. 그렇게 저 요새를 정복하는 것으로, 제가 악마가 아니라…….”
그녀는 잠시 호흡을 골랐다. 그리고 타오르는 것처럼 보일 정도로 강렬한 눈동자로 말했다.
“……살의를 통제할 수 있는 마검의 주인이자, 바르데르기오사 오너임을 증명하겠습니다.”
짧은 정적, 곧이어 퍼져나가는 경악. 그 속에서 황태자는 유리엔과 했던 대화를 다시 떠올렸다.
〈그 여자가 그렇게 좋으냐? 처벌한다 해도 어차피 보여주기 식에 불과할 텐데, 면책특권까지 얻어낼 정도로?〉
〈예.〉
유리엔은 망설이지 않고 대꾸했었다. 지나치게 빠르고 단호하게 나온 대답에 물은 황태자가 놀랄 정도였다. 그러고는 아무렇지도 않게 덧붙였다.
〈만일 그녀를 위해 필요하다면, 저는 제위를 노렸을지도 모릅니다.〉
오싹한 발언이었다. 현 상황에서 유리엔이 진심으로 제위를 노리면 황태자로서는 막을 수가 없었다. 로아즈 사태의 여파와, 디아상트 공작의 배반이 그러지 않아도 기울어져 있던 균형을 더 기울게 만들어 버렸다.
황태자는 턱을 굳힌 채 유리엔을 바라보았다.
〈너…….〉
〈하지만 그녀가 원한 것은 평온이고, 그것은 권력의 중심에 얽혀드는 것과는 거리가 멀지요. 저 역시 아젠카를 떠날 생각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저는 그저 전하께서 성군이 되어주시길 바랄 뿐입니다.〉
공손한 어투였으나 황태자에게는 부드러운 협박처럼 들렸다. 성군이 되지 않으면 엎어 버리겠단 소리 아닌가. 식은땀이 흐르는 듯했다. 확실히 제 이복동생은 그 여자에게 미쳐 있는 게 틀림없었다.
‘그녀를 이용해서 유리엔을 움직일 수 있을지도 모르겠군.’
나쁜 의도는 아니었다. 만일을 대비하는 반사적인 생각일 뿐이었다. 그럼에도 유리엔은 황태자의 생각을 읽은 것처럼 말을 이었다.
〈그리고, 전하께서는 제니스이자 마검의 주인이라는 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제대로 아실 필요가 있습니다. 제니스란 경지에 대해서도 최근에 알게 되셨고, 그녀가 전무후무한 존재라 파악하기 힘드시겠으나, 황제가 되실 터이니 알아두셔야 합니다.〉
〈……?〉
〈전하, 그녀는 혼자서도 제국을 상대할 수 있습니다.〉
제국은 대륙에서 가장 강대한 국가였다. 전원이 마스터이고 기오사 오너까지 포함되어 있는 아젠카의 창천기사단과 전면전을 벌여도 상대할 수 있는 유일한 나라이기도 했다. 그런데 지금 뭐라고?
황태자는 자신의 귀가 잘못되었나 의심했다. 제대로 들었음을 깨달은 다음에는 자신을 압박하기 위해 유리엔이 과장해서 말하는 게 아닌가 싶어졌다.
그러나 유리엔의 태도는 거짓을 말한다기엔 지나치게 침착했다. 그가 이런 식으로 허세를 부릴 자가 아님도 알고 있었다.
그의 표정을 본 유리엔이 나직이 말했다.
〈제니스의 초입에 겨우 발을 들인 저도 홀로 근위기사단 전체를 상대하는 것이 가능합니다. 그런데 그녀는 저보다 뛰어난 제니스이며, 마검을 통해 무한에 가까운 마나를 공급받습니다. 이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르시겠습니까?〉
저주에 걸렸던 유리엔이 어느 정도의 무력을 보였는지는 잘 안다. 그가 부상을 입고 물러난 이유가 밀려서가 아니라 마나가 소모되어서라는 것도 보고를 들어 알고 있었다.
그런 그가 하는 말이다. 황태자는 마른침을 삼켰다. 유리엔은 서류를 정리해 일어나며 조용히 경고했다.
〈제국은 그녀를 감당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 전하, 그녀를 이용할 생각은 하지 마십시오.〉
크루엔 황태자는 그때 유리엔이 했던 말들이 거짓말이 아닐 거라 생각하면서도, 완전히 믿지는 않았다.
그러나 만약에, 정말로, 그녀가 갈로서스를 홀로 정복할 수 있는 존재라면…… 제국을 상대할 수 있다는 게 허언이 아닐 것이다.
그는 약간 초조한 손놀림으로 입가를 문질렀다.
“로아즈 영애, 그러니까, 지금 그대가, 혼자서 갈로서스를 정복하겠다고? 아무도 죽이지 않고?”
“혹 요새를 무너뜨리는 과정에서 사고로 죽는 건 저도 어쩔 수 없겠지만, 제가 먼저 공격하는 일은 없을 거예요.”
“그런…… 그런 일이 가능하다고?”
“네. 대신 제가 성공하면 저를 기오사 오너로 인정해 주세요. 그리고 로아즈 참사를 사주한 자들에 대한 처벌권도 로아즈에 넘겨주셨으면 해요. 폐허가 된 로아즈에 대한 황실의 지원도 필요합니다. 이게 제가 원하는 거래 조건이에요.”
“……만일 영애가 실패한다면?”
“실패하면 저는 악마가 되겠죠. 마검의 살의를 통제하지 못하면 말이에요.”
“아니, 그런 의미의 실패가 아니라…….”
“아, 제가 죽거나 요새를 정복하지 못할 경우요?”
에키네시아가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태연히 말했다.
“제 실패엔 그런 경우는 없는데요.”
“…….”
할 말이 없었다. 오만하다 못해 미친 게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사람들이 해괴한 것을 보듯 그녀를 쳐다보았다. 너무 어이가 없어서 긴장감마저 흐트러졌다. 대패를 기록한 공성전에서 동료를 잃은 자들은 눈빛이 사나워지기까지 했다.
“음, 그래도 만에 하나 그렇게 되어도, 전하께는 손해가 아니잖아요? 거부하실 이유가 없는 거래라고 생각해요. 어떻게 하시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