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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을 든 꽃-172화 (172/211)

검을 든 꽃 172화

내전이 진행되는 동안 에키는 쐐기가 마련해 준 안가에서 줄곧 머물렀다.

그녀는 창천기사단이 바르데르기오사 오너를 어떻게, 왜 인정하겠다는 것인지를 던컨에게 알아오라고 시켰다.

던컨은 힘들게 창천 내부를 조사하고 다니는 대신 간단하고 쉬운 방법을 사용했다. 창천기사단장에게 대놓고 묻는 편지를 보냈다.

던컨의 예상대로 창천기사단장은 꼼꼼하게 설명한 답장을 보내주었다. 던컨이 아니라 에키네시아에게 보내는 답장이었다.

에키는 기오사 오너 전원의 동의와, 대신전의 지지와, 총행정관의 조건부 인정에 대해 설명한 편지를 받았다.

그녀는 그 행간에서 유리엔의 노력을 읽었다. 그리고 며칠간 고민에 빠졌다.

그는 정말로 그녀가 돌아갈 자리를 만들고 있었다. 그녀가 포기하려 했던 것을 되돌리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게다가 지워진 과거에는 그녀의 손에 죽었던 기오사 오너들이 그녀를 인정하고 지지하겠다고 한다. 따뜻한 먹먹함이 차올라서 어지러워졌다. 그 어지러움 속에서 그녀는 지워버린 과거를 떠올렸다.

〈유리엔? 역대 최악의 단장이지, 그따위 악마를 동정하는 바람에 기사단 자체가 사라졌잖아.〉

뒷골목의 정보상인이 했던 말. 그 말에 분노를 참지 못하고 살의에 물들어 그자를 토막 내버렸던 기억. 그럼에도 그 말을 부정하지는 못했던 비참함.

이번에도 또 유리엔은 자신의 모든 것을 내걸고 그녀에게 기회를 주려 한다. 그의 믿음을 배반하고 마검을 이겨내지 못해서 아젠카를 몰살시켰던 그녀에게.

기쁘면서도, 딱 그만큼 두려워졌다.

‘만약, 정말 만약에, 마검의 제어에 실패하면 어떡하지? 독을 마셨을 때처럼, 로아즈 참사에 대해 들었을 때처럼, 참지 못하게 되면……. 그럼, 나를 믿어준 대가로 유리엔은 또…….’

실수하는 것을 상상해 보았다. 겪어본 일이었기에 더 생생하고 끔찍하게 떠올랐다. 헛구역질이 나올 정도로 고통스러운 상상이었다. 그녀는 파랗게 질린 얼굴로 손바닥의 문양을 바라보았다.

차라리 실수하지 않도록 꾸준히 사람을 죽일까. 죽여도 괜찮은 자들을 찾아서. 전에 회색 산맥에서 습격해 온 암살자들을 죽였더니 확실히 살의를 참기가 편해졌는데. 간간히 살의를 해소해 주면…….

불현듯 그런 생각을 했다. 그리고 그런 생각을 한 자신에게 소스라치게 놀랐다. 진저리가 쳐졌다.

‘일상을 유지하기 위해 사람을 죽인다고? 미쳤구나. 그게 죽여도 될 만큼 나쁜 사람인지 아닌지는 상관 없어. 그렇게 살고 싶진 않아. 그렇게 살아선 안 돼.’

지키기 위해, 적에 맞서기 위해 베는 것과는 다른 문제였다. 살의의 해소가 일상의 일부가 되는 순간 그녀는 서서히 망가져갈 것이다. 그 끝은 악마와 다름없을지도 모른다. 그녀는 절대로 그런 삶을 살고 싶지 않았다.

바르데르기오사를 버리고 싶었다. 이걸 포기해 버리면 얼마나 편할까.

하지만 그녀는 마검을 버릴 수가 없었다. 지워버린 시간들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녀는 유리엔이 성검을 버리고 나서 기억이 엉망진창이 되었던 것을 보았다.

“……다른 기오사를 각성시키려면 얼마나 걸릴까.”

[주인이라면 분명히 다른 녀석도 각성시킬 수 있겠지만, 그래도 꽤 시간이 걸릴걸? 각성 조건을 정확히 모르니까 말이야. 팔란타기오사는 아마 쉽게 각성시킬 것 같지만…….]

마검은 풀이 죽은 어조로 그녀의 혼잣말에 답했다. 에키는 대꾸하지 않고 세운 무릎에 얼굴을 파묻었다. 마검이 강아지마냥 낑낑거리는 소리를 내더니 그녀를 불렀다.

[있잖아, 주인아.]

“…….”

[넌 내가 싫은 건 아니지? 그치? 나한테 누적되는 살의에 휘둘리는 게 싫은 거잖아. 그거만 아니면 나 괜찮지?]

“맨날 사람 죽이자고 하는데 괜찮기는.”

[야, 말만 그렇지 널 조종하는 것도 아니잖아! 희망사항 정돈 말할 수도 있지!]

“시끄러워.”

에키가 오른손을 움켜쥐었다. 마나를 흘려 넣자 마검이 징징거렸다.

[아! 아! 따갑잖아! 우씨, 난 진지하단 말이야! 주인아, 진짜 내가 싫어? 살의 아니라도 싫어? 나 꽤 착하지 않아?]

“전에 말했잖아. 함부로 사람 죽이자는 소리 안 하면 착한 검으로 인정해 주겠다고.”

그녀는 건성으로 대답하고 다시 무릎에 고개를 묻었다.

바르데르기오사 오너로 인정하겠다는 창천의 성명과, 그녀를 위한 자리를 만들고 있는 유리엔을 보고서도 마냥 기뻐할 수가 없었다.

돌아갈 자신이 없다. 조금 전, 아무렇지도 않게 살인을 수단으로 생각한 스스로를 보니 더욱. 유리엔이 그녀를 믿어주기 때문에 더욱.

그리고 그가 정말로 모든 기억을 되찾은 건지, 그녀가 알던 그로 되돌아온 건지도 확신할 수가 없어서. 다시 마주했을 때 기억을 되찾았는 데도 불구하고 원래의 그와 다르다면 더는 못 견딜 것 같아서.

에키. 그가 편지에 쓴 그녀의 애칭을 떠올리며, 그의 목소리를 상상해 본다. 그립다. 괜찮을 거라 생각한다. 그녀가 알던 그로, 세상에서 유일하게 그녀를 이해할 수 있었던 그대로 되돌아왔으리라고 믿는다.

그럼에도 만에 하나, 그렇게 믿고 만났는데도 유리엔이 예전 같지 않다면. 영원히 예전 같은 관계로는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을 깨닫는다면, 충격받지 않을 자신이 없었다.

‘한순간이라도 이성을 놓아버리면, 나는…….’

그녀는 지나치게 강했다. 예전보다도 더 강해졌다. 몸이 덜 만들어졌다 해도 마나를 활용하는 동안에는 그것도 단점이 되지 못한다. 마나 실드까지 익혀 버렸으니.

가짜 마검에 물든 유리엔을 되돌리기 위해 떠나면서 부단장에게 썼던 편지에, 에키는 자신이 악마가 되었을 경우 어떻게 막아야 하는지를 상세히 써놓았었다. 그 편지를 쓰면서도 어이가 없어 웃음이 나왔었다.

악마가 된 자신을 적으로 놓고 막을 계획을 짜려니 정말이지 막막해서. 스스로를 죽일 방법에 대해 미친 듯이 고민하는 상황이 비극인지 희극인지 알 수가 없어서.

또다시 마검에 휘둘려 소중한 사람을 해칠 바에야 영원히 돌아가지 않는 게 나았다. 행복한 풍경 속에 들어가지 못해도 멀리서 지켜볼 수 있다면 괜찮지 않을까. 그 속에 있다가 제 손으로 망가뜨리는 것보다는 홀로 떠도는 삶이 낫다.

‘무서워.’

양손으로 얼굴을 덮었다. 겁이 났다. 스스로를 믿을 수가 없어졌다. 완벽하게 통제할 자신이 없다. 오랜 악몽과 도사리고 있던 공포가 코끝까지 차올라 숨을 벅차게 한다. 어떻게 해야 할까.

역시 마검을 버리고 다른 기오사를 각성시키는 방법뿐인가. 자신이 오너 조건을 충족한 기오사가 어떤 건지는 잘 알고 있다. 그중에서 각성시킬 수 있을 만한 기오사가 뭔지도 안다. 다만 실제로 각성시켜 본 적이 없기에, 얼마나 시간이 걸릴지는 알 수 없었다.

또 한 가지 걱정스러운 것은 기억의 범위였다. 기오사는 지워진 시간들을 품고 있지만, 그 범위는 아마도 그 기오사가 겪은 일에 한정될 것이다.

자신은 신검을 제외한 모든 기오사를 모았으므로 어떤 기오사를 각성시키는 자신의 과거에 대해 기억할 수 있겠지만, 언제나 함께 있었던 마검만큼 완벽한 기억을 얻지는 못할 터다.

전에는 회귀했다는 것만 알면 될 것 같아 별로 걱정하지 않았던 일이었다. 하지만 기억을 잃어버린 유리엔을 보고 나니 그 점이 몹시 걱정되었다.

게다가 기오사를 얻으려면 창천으로 돌아가야 했다. 훔쳐낼 게 아니라면, 결국 유리엔과 마주해야 하고 바르데르기오사를 증명해야 한다는 건 똑같았다.

‘처음 계획했던 대로 모든 것을 숨기고 3년 이상의 시간을 들였다면 여러모로 훨씬 나았을 텐데.’

그래도 전부 드러내버린 것을 후회하지는 않는다. 유리엔을 잃어버릴 순 없었으니까.

속은 엉망진창으로 헤져가고, 복잡해진 머리는 터져버릴 것 같다. 입술을 꽉 깨무는데 한동안 조용하던 바르데르기오사가 다시 말을 꺼냈다.

[주인아, 있잖아, 네가 이성을 잃을 때 내가 말릴 수 있게 되면, 나 안 버릴 거야?]

에키는 멍하니 고개를 들었다. 저게 무슨 소리지?

“……뭐? 말린다고? 네가?”

[어어, 사실 성공한 건지 못한 건지도 구별이 안 가고 혼자서는 확인하기도 어려워서, 아직 자신은 없는데…….]

마검은 성검과 함께 논의했던, 문양을 통해 자아를 유지하는 것에 대해 그녀에게 설명해 주었다. 상상도 해보지 않았던 이야기에 에키는 경악했다.

“그런 게…… 가능해?”

[랑이랑 같이 이것저것 시험해 보긴 했거든. 내 문양이 의미 없는 장식이 아닐 거라는 건 랑도 동의했고. 근데 솔직히 잘 모르겠어.]

“둘이서 무슨 얘길 자꾸 하나 했더니.”

[아무튼! 열심히 하고 있단 말이야! 주인아, 성공하면 나 안 버릴 거지? 그러니까, 어, 음, 그래도 버릴 정도로 내가 싫진 않지?]

마검은 빽 고함을 지르다 말고 뒤로 갈수록 목소리를 조그맣게 줄였다. 눈치를 보는 기색이었다.

그녀가 살의에 물들어 이성을 잃어버리더라도, 마검이 자아를 유지할 수 있다면? 전혀 예상하지 못한 쪽에서 새로운 가능성이 열렸다. 의외인 만큼 강렬한 가능성이었다. 지금까지 전신을 파헤치던 고뇌와 공포가 일순 잠잠해졌다.

에키는 황망히 오른손바닥의 검은 문양을 내려다보았다. 마검이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 줄은 몰랐고, 이렇게 버려지기 싫어할 줄도 몰랐다. 대놓고 버리겠다고 말해도 투덜거리기만 하지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는 것 같아서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들이는 줄 알았는데.

‘그러고 보니 아무도 못 죽이게 되더라도 나랑 잘 지내고 싶다고도 했었지…….’

기묘한 기분이 들었다. 그녀에게 바르데르기오사란 악몽 그 자체였으나, ‘발’은 마냥 증오할 수만은 없는 존재였다. 발치에 맴돌며 종아리에 이마를 부비는 못나고 성질 나쁜 강아지를 보는 심정과 비슷했다.

그녀는 무심코 왼손으로 손바닥의 문양을 쓰다듬었다. 마검이 기겁했다.

[주인아, 때리려면 바로 때려! 괜히 겁주지 말고!]

에키는 피식 웃었다. 마냥 철없는 줄 알았던 마검이 이런 노력까지 한다면, 그녀도 어떻게든 해봐야 하지 않을까.

지금까지 한 고민이 결국 도피에 가깝다는 것은 자각하고 있었다. 자신은 실패가 두려워서, 이미 겪어본 악몽을 또 겪을까 두려워서 조금의 위험이라도 피하고 싶은 거다.

유리엔도, 아젠카의 사람들도 그녀를 믿어 주겠다고 하고, 마검도 노력하는데, 이렇게 아무것도 해보지 않고 도피해 버릴 순 없었다. 그렇다고 뭐든 잘될 거라 막무가내로 믿기에는 치러야 할 대가가 너무 크다.

그녀는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해볼까.”

[……뭘?]

“네 주인이 되는 것.”

[엥? 무슨 소리야? 넌 이미 내 주인인데?]

그녀는 가만히 손을 말아 쥐었다. 유리엔이 편지에 썼던 바르데르기오사 오너라는 증명. 그는 구체적인 방법은 논의 중이라고 했었다.

‘창천과 유리엔에게 책임을 넘기지 말고, 스스로 증명해 보자. 내가 정말로 살의를 통제할 수 있는지도 시험해 볼 겸. 나를 시험해서, 성공한다면…… 그 때 돌아가는 거야.’

그런 결심이 들었다.

* * *

황태자 크루에 드 하르덴 키리에는 이런 사태를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에키네시아 로아즈는 황태자군의 진영에 맨몸으로 나타났다. 후드 차림, 손에 든 건 어디서든 살 수 있는 흔한 칼 한 자루.

지키던 병사들이 진영에 접근하는 그녀를 보고 누구냐고 물으며 창을 겨누자 그녀가 후드를 벗었다. 후드에 가려져 있던 엷은 분홍색 머리카락이 쏟아져 내렸다. 그 머리카락을 보고도 그녀가 누구인지 모를 수는 없었다.

군영 전체에 비상이 걸렸다. 내전이 발발하고 창천이 성명을 내면서 황제가 내렸던 수배는 유명무실해졌으나, 황태자가 아직 제위에 오르지 못했으므로 수배 자체는 남아 있었다. 그녀가 악마인지, 바르데르기오사 오너인지는 아직 확실해지지 않았다.

그녀는 활이 겨누어지든 말든, 군영 내의 창천기사단과 마스터급 기사들이 모조리 몰려오든 말든, 팽팽한 긴장감 속에서 태연히 기다렸다.

“황태자 전하를 뵐 수 있을까요?”

악마잖아, 아니, 악마라면 이렇게 가만있을 리가 없는데, 뭐야, 어떻게 된 거야? 창천의 성명대로 정말 마검을 통제할 수 있는 거야? 웅성거림과 의문 속에서 황태자는 직접 그녀를 만나러 갔다. 위험하다고 주위에서 극구 말렸으나 듣지 않았다.

크루엔은 처음으로 에키네시아를 보았다. 그녀는 칼과 창과 활들 사이에서 덤덤한 얼굴로 서 있었다.

‘상상했던 것과 다른데. 여러모로.’

기사라기엔 몸집이 가늘었다. 치장하지 않은 상태인데도 머리카락 때문인지 화려한 느낌이다. 그렇다고 강렬한 미인은 아니고, 앳되고 예쁘장했다. 화사한 드레스를 입고 꽃처럼 웃으며 연회장에 있어야 할 것 같은 인상이었다.

그러나 건조한 표정과 눈빛이, 창칼 속에서도 덤덤한 태도가 이질적인 분위기를 형성했다. 저 여자가 마검의 주인이고, 그 유리엔이 미쳐 있는 여자란 말이지.

“……에키네시아 로아즈, 맞나?”

“네, 황태자 전하.”

그녀가 무릎을 살짝 굽혀 인사하며 답했다. 아젠카식 경례도 아니고, 제국식 기사의 예법도 아니고, 그냥 주억거리는 인사도 아닌, 우아한 레이디의 예절이었다. 가죽옷에 후드 차림과는 어울리지 않았으나 그녀 자신의 외모와는 몹시 잘 어울렸다.

황태자는 그 인사를 보고 그녀를 어떻게 대해야할지 결정했다. 창천의 기사나 악마가 아닌 백작 영애 에키네시아 로아즈로. 그는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이곳에는 무슨 일로 왔지, 로아즈 영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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