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을 든 꽃-171화 (171/211)

검을 든 꽃 171화

회의가 끝난 후, 유리엔은 대신관과 독대했다. 단둘이 남자 대신관이 먼저 입을 열었다.

“성검의 주인께선 그녀에 대해 어디까지 알고 계십니까?”

“무슨 뜻이지?”

“그녀가 순례자임을 알고 계신 건지 여쭙는 겁니다.”

“……순례자?”

처음 듣는 표현이었다. 유리엔의 의문에 대신관이 순순히 답했다.

“순례자란 카이로스기오사의 시험을 통과함으로써, 신께서 인간을 위해 예비해 둔 기적을 얻은 분을 일컫습니다. ‘시간의 검이 자격 있음을 인정했으니, 곧 신의 뜻이 순례자께 있음이라. 신의 종들은 그 걸음을 거스르지 말지어다.’”

대신관은 작게 성호를 긋고, 신관들의 표현보다 좀 더 명확한 표현으로 다시 설명했다.

“우리는 이미 흘러간 시간을 되짚어 과거로 돌아오신 분을 순례자라 부릅니다.”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이야기다.

[……맙소사, 대신전이 알고 있었다고? 대체 어떻게? 카이로스기오사가 알려주기라도 한 건가?]

성검이 당황했다. 유리엔은 경악을 간신히 감추고 대신관을 응시했다.

“그녀가, 시간을 되짚어 과거로 돌아왔다고? 대신전은 대체 어떻게 그것을 알았지?”

“카이로스기오사가 사용되었는데, 모르는 것이 더 이상하지 않겠습니까? 아젠카의 신관들은 평생을 바쳐 신을 섬기며 신검을 모시는 몸입니다.”

대신관은 부드럽게 웃어 보였다.

“누가 순례자인지는 최근에야 확신했지만, 순례자가 나타났다는 사실 자체는 처음부터 알고 있었습니다. 존재를 알아도 순례자가 스스로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 한 참견하지 않는 것이 원칙이라 침묵하고 있었을 뿐입니다. 첫 번째 순례자가 나타났을 때 대신전이 그러했듯이 말입니다.”

“첫 번째 순례자라면…… 전설 속의 마검사 말인가.”

“등장한 시기는 일치합니다만, 마검사에 대한 기록은 정확한 것이 없어 확신할 순 없습니다. 아마도 그 분이리라는 추측만 있을 뿐입니다. 대신전은 카이로스기오사의 변화를 통해 순례자의 존재만을 알 수 있을 뿐 누구인지는 알지 못하니까요.”

대신관은 에키네시아가 어떻게 시간을 되돌렸는지까지는 모르는 모양이었다. 그녀가 어떤 악몽을 겪었는지도. 다행인지 불행인지 모를 일이었다.

유리엔은 호흡을 고르고 다시 물었다.

“카이로스기오사가 어떤 변화를 보였기에 대신전이 알 수 있는 건가?”

“카이로스기오사는 시간을 관조하는 검, 따라서 언제나 깨어 있는 검입니다. 그러나 세계 전체의 시간을 되감아 새롭게 편성한다는 거대한 기적을 일으키고 나면 일정 시간 동안 휴식을 위해 잠들 수밖에 없지요. 그리 되면 칼날을 타고 시시각각 흐르던 빛이 완전히 사라집니다. 3월 17일의 새벽에 바로 그 현상이 발생했습니다.”

“그래서 알게 된 거로군.”

“예. 과거, 첫 번째 순례자가 나타났을 때 그 현상을 목격한 당대의 대신관께서 몹시 당황하자, 휴식을 끝낸 신검이 신어를 속삭여 주었다고 합니다. 그 기록이 대대로 전해 내려오고 있지요. 그래서 그 현상의 의미를 알 수 있었습니다.”

“혹, 이번에도 신검이 예언을 주었나?”

“엄밀히 말하면 신어이지, 예언이 아닙니다. 일어난 기적에 대한 설명에 가까운 신어를 들었습니다.”

“그렇군…….”

[나는 전혀 몰랐던 사실이다. 바르데르도 모르는 것 같았고. 하지만 듣고 보니 대신전이 눈치를 못 채는 게 더 이상하겠군. 매일같이 신검을 지켜보고 기록하는 자들 아니냐.]

성검이 신음을 흘리며 말했다. 유리엔은 망설이다 물었다.

“대신관. 내게 그대가 들은 신어에 대해 알려줄 수 있는가?”

“자세한 내용은 순례자 본인이 아니면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순례자에 대해 이렇게 언급하는 것 자체가 대신전으로서는 이례적인 일임을 이해해 주셨으면 합니다.”

“……알겠다. 충분히 이해했다.”

고개를 끄덕인 그는 다른 것을 물었다.

“순례자가 누구인지도 최근까지는 모르고 있었다고 했지. 어떻게 그녀가 순례자임을 확신했고, 왜 나서게 되었는지는 답해 줄 수 있나?”

“작금의 상황과, 마검에 물들지 않는 마검의 주인이라는 것, 그분이 달성한 비정상적일 정도의 경지를 보고 에키네시아 로아즈 님이 순례자임을 확신했습니다. 스스로를 드러내지 않으셨기에 침묵을 유지하려 했으나, 순례자께서 삿된 존재로 몰릴지도 모르는 상황이라 융통성을 발휘하기로 결정했지요.”

“그래서 그녀를 보증하겠다고 나선 거로군. 정말로 큰 도움이 되었다. 진심으로 감사한다. 무언가 원하는 것이 있는가?”

대신관이 손사래를 쳤다.

“아닙니다. 신검에게 기적을 일으켜도 되는 존재로 인정받았다는 것은 곧 신이 인정한 사람이라는 뜻, 순례자를 지원하는 것은 대신전의 의무이자 영광이지요.”

아르 세밧티엠. 성호를 그은 대신관이 빙긋 웃어 보였다.

“그저 나중에…… 순례자께서 허락하신다면, 한 번쯤 대화를 나눠보고 싶긴 합니다. 신의 기적을 그 혼으로 직접 만들어낸 분이시니.”

* * *

기오사 오너 중에 에키네시아에 대한 공식 성명에 아직 동의하지 않은 것은 성녀 샤이뿐이었다. 유리엔은 다른 기오사 오너들과 총행정관, 대신관의 서명이 담긴 서류를 들고 성녀를 찾았다.

샤이는 창천기사단 본부 내에 있는 란셀리드 로아즈의 병실에 있었다.

“이제 잘 보이나요? 제가, 이런 치료는 처음이어서…….”

조심조심 묻는 소녀의 음성이 방 밖으로 들려왔다. 문 밖에 서 있던 수석 신관 아론이 다가오는 유리엔을 발견하고 조용히 인사를 했다. 유리엔은 병실에 들어가지 않고 잠시 기다렸다.

“괘, 괜찮습니다, 성녀님. 아주 잘 보여요.”

“어디 아픈 곳은 없나요? 조금이라도 이상한 곳이 있으면 말씀해 주세요.”

“성녀님, 마, 말을 낮춰 주십시오. 성녀님께서 치료해 주신 것만으로도 영광이어서…….”

“아니에요. 제가 제대로 치료하지 못해서 그동안 불편하게 지내셨잖아요. 에키 언니가 아플 때도 도움이 안 되었는데……. 정말 저는 여러모로 부족해서.”

란셀리드가 더듬거리며 답하고, 성녀가 시무룩하게 대꾸했다. 소년이 이상하다는 듯 묻는 것이 들렸다.

“누님을 아세요? 성녀님께서 어떻게?”

현재 별장에서 보호하고 있는 로아즈 백작 부부에게는 직속 정보원이 대부분의 사정을 설명했지만, 내내 병상에 있었던 란셀리드 로아즈는 에키네시아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하고 있었다.

“그럼요. 전 언니 덕분에 아젠카에 올 수 있었는걸요. 에키 언니는 정말로 강하고 대단한 사람이에요.”

음성만으로도 성녀가 한껏 뺨을 붉히고 있다는 게 느껴졌다. 란셀리드가 황당하다는 듯 ‘네? 누님이 어떤 사람이라고요?’라며 되묻는 소리가 들렸다.

유리엔은 더 듣는 것은 무례한 일이다 싶어 약간 물러서서 다른 생각을 했다.

란셀리드 로아즈는 인질로 붙잡혔던 당시의 일을 거의 기억하지 못했다. 대체로 정신을 잃고 있는 상태였고, 극심한 고통까지 겪었으니 충격으로 잊을 만도 했다.

차라리 잊어버리는 게 나았기에 유리엔은 딱히 소년의 기억을 되살리려 하지 않았다. 란셀리드의 증언이 없어도 2황자가 저지른 짓을 증명할 방법은 많았다.

잠시 후에 샤이가 병실을 나왔다. 소녀는 복도 끝에서 기다리고 있는 유리엔을 보고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단장님?”

“그대에게 부탁할 것이 있어 왔다.”

유리엔은 차근히 창천기사단이 발표할 공식 성명에 대해 설명했다. 글자를 익힌 지도 얼마 되지 않은 샤이로서는 알아듣기 어려운 내용이 많아서 상당한 시간이 걸렸다. 겨우 이해한 소녀는 감탄하며 양손을 모아 쥐었다.

“언니도 기오사 오너였군요! 역시……!”

“그녀가 바르데르기오사의 오너임을 창천이 공식적으로 인정하려 한다. 다른 이들이 쉽게 납득하기 어려운 문제라, 기오사 오너들 모두가 동의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편이 낫다. 그래서 그대의 서명이 필요하다. 동의할 수 있겠나?”

샤이가 큰 눈을 깜박였다.

“언니가 바르데르기오사의 오너라는 걸 사람들이 믿지 못하나요? 왜요?”

“바르데르기오사는 살의와 악의로 만들어진 마검이고, 지금까지 마검을 쥔 사람들은 모두 학살하는 악마가 되었다. 그러니 의심할 수밖에.”

“하지만 언니는 사람을 죽이고 싶어 하지 않는 걸요. 보기만 해도 알 수 있잖아요?”

샤이는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유리엔은 희미한 쓴 웃음을 띠었다.

“두렵기 때문에 믿기 어려운 것이다.”

“사람들이 언니를 무서워하나요?”

“그녀가 실수하면 죽게 되니,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모두가 무서워하지 않아도 되는 방법은 없나요?”

“믿음이 만들어지고, 상식이 바뀌고, 공포가 가시려면 오랜 시간이 필요하겠지. 창천이 공식적으로 그녀를 인정하는 것은 그 시간을 줄이기 위한 방법이다.”

“그러니까…… 언니를 믿어도 된다고, 모두에게 대신 말해 주는 건가요? 그런 거라면 저, 얼마든지 할 수 있어요.”

조그만 이마에 주름을 만든 채 고심하던 샤이가 열심히 말했다. 유리엔은 잠시 말문이 막혔다가, 조금 더 부드러워진 음성으로 답해 주었다.

“그래. 여기에 서명하고 동의한다는 건 바로 그런 뜻이다. 더불어 만에 하나 그녀가 실수를 저지르려 할 경우, 우리가 막겠다는 뜻이기도 하다.”

“언니는 실수하지 않을 거예요. 그래도 만약에, 언니가 실수를 하게 되면…… 단장님이나 다른 분들이 막아주실 거잖아요? 저는 언니를 막을 순 없겠지만, 다친 사람들을 치료할 수는 있으니까……. 그러니까 괜찮다고 생각해요.”

샤이는 머뭇거리면서도 야무지게 답하고는, 유리엔이 내민 종이에 삐뚤빼뚤한 서명을 남겼다.

“다들 언니를 무서워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언니는 정말로 좋은 사람인 걸요.”

소녀가 수줍게 웃었다.

* * *

1629년 9월 1일.

제국의 황태자 크루엔 드 하르덴 키리에가 황제 로라스 드 하르덴 키리에를 향해 반기를 들었다. 내전이 시작되었다.

귀족들의 사병 위주로 구성된 황태자군은 제국군에 비하면 명백히 열세였다. 귀족 대회의에서 달아난 황태자가 자리를 잡은 성을 제국군이 침공하면서 벌어진 첫 전투에서 황태자군은 대패했다. 황태자는 빠르게 성을 포기하고 간신히 군을 보전하여 후퇴했다.

그러나 제국군의 압도는 오래가지 않았다. 명분이 황태자에게 존재했기 때문이었다.

마검에 대한 음모가 알려지면서 중립을 지키던 자들이 대부분 황태자에게 합류했다. 각 지역을 지키는 방위기사단들의 합류가 결정적이었다.

방위기사단이 포함된 황태자군은 제국군을 상대할 만했다. 후퇴하는 황태자군을 추격하던 제국군은 리비오레 강가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방위기사단의 매복으로 인해 상당한 손실을 입었다.

제국군의 추격이 늦춰지자 황태자군은 거점을 마련하고 군을 정비했다.

그 무렵에 아젠카에서 파견된 창천기사단의 일부가 황태자군 진영에 도착했다. 제국 출신의 창천기사 그레고리가 이끄는 지원군이었다.

지휘체계의 혼선을 방지하기 위해서 창천기사단장은 황태자군에 합류하지 않았다. 기오사와 관련된 문제라 해도 결국 제국 내의 내전이므로 기오사 오너들 또한 움직이지 않았다. 내정 간섭이라는 비판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창천의 원군은 제국 출신의 기사들과 지원자를 중심으로 꾸려졌다. 수는 얼마 되지 않았으나 제국군과 황태자군 사이의 균형을 기울게 하기에는 충분했다. 마스터는 혼자서 부대에 필적하는 존재인 데다, 동행한 준기사들도 어지간한 기사 대여섯 명 몫은 해내는 덕분이었다. 그 때부터 황태자군은 제국군을 밀어붙이기 시작했다.

황태자는 내전을 길게 끌고 싶지 않았다. 창천기사단이 합류한 후의 첫 전투에서 제국군을 상대로 크게 승리하자, 속전속결로 제도를 향해 진격했다. 명분도 군세도 밀리는 제국군은 쉽사리 와해되고 투항해 왔다.

11월 23일, 내전이 발발한 지 약 3개월 만에 키리에 제국의 수도 하르덴이 황태자군에 포위되었다.

남은 제국군은 얼마 되지 않았다. 함락은 시간문제로 보였다. 그러나 상황은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흘러갔다.

황제가 제도를 버리고 갈로서스 요새로 도주했다. 황제의 상징인 은사자 인장과 주요 문건을 포함한 핵심적인 것들을 챙긴 채였다.

근위기사단 전체와 남은 제국군, 현자 헤레이스 리어폴드와 그녀를 따르는 마법사들, 그리고 디아상트 공작의 수족들과 이제 와서 변절 방법이 없어 남은 2황자파 귀족들의 사병이 갈로서스 요새에 모여들었다.

좁은 길 외에는 깎아지른 절벽이라는 천혜의 지형에 세워진 갈로서스는 지금까지 한 번도 정복된 적이 없는 난공불락의 요새였다. 그 안에서 황제는 타국에 원군을 청하는 사신을 보냈다. 동시에 항복을 권하는 황태자군의 사절단을 억류했다.

황태자군의 갈로서스 공성전은 처참한 대패를 기록했다. 산을 돌아 요새에 잠입하려던 황태자군의 일부는 현자와 마법사들에게 차단되었다. 갈로서스는 뚫리지 않았다.

내전은 지지부진한 농성전으로 흐를 기미가 보였다.

그리고 12월 1일, 갈로서스 공성전 대패로 인해 골머리를 앓고 있던 황태자군에 마검의 주인이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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