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을 든 꽃-170화 (170/211)

검을 든 꽃 170화

대신관은 천천히 성호를 그었다.

“아르 세밧티엠. 예언이 있었습니다.”

“예, 예언……. 진심이십니까?”

총행정관의 목소리가 쩍쩍 갈라졌다. 대신관이 친절하게 설명을 덧붙였다.

“신검 카이로스기오사가 간혹 신실하게 신을 섬기는 신관에게 신어(神語)를 속삭여주는 것을 알고 있으시겠지요. 시간을 관조하는 검이 부리는 변덕이자, 인간을 향한 신의 자애 말입니다. 우리는 신어라고 하지만 세간에서는 예언이라고 부르지요.”

“예언이 뭔지 모르는 게 아닙니다. 대신관님. 그러니까, 무슨 예언이 있었다는 겁니까?”

“에키네시아 로아즈에 대한 예언입니다. 금기라 자세한 내용을 알려드릴 수는 없으나, 그분을 의심해서는 안 된다는 건 장담할 수 있습니다. 성검의 주인께서도 이미 예언을 알고 있으셨습니다.”

아젠카 대신전에서 극히 드문 확률로 예언이 나오는 것은 사실이었다. 그것은 신관의 힘이 아니라, 카이로스기오사가 평생을 바쳐 신을 섬기고 자신을 모시는 신관들에게 보이는 가벼운 호의였다. 비단 미래의 일뿐만 아니라 과거의 일도 종종 언급하는 듯했지만 보통 사람들은 그것을 그냥 예언이라 불렀다.

그러나 예언이 실재한다는 것과 별개로 유리엔은 지금 대신관이 하는 말이 거짓임을 잘 알았다. 가장 최근의 예언이라고 해봤자 근 백여 년 전의 일이다. 게다가 대신관은 그에게 예언에 대해 한마디도 한 적이 없었다. 예언이 나올 경우 창천기사단과 공유하는 것이 원칙임에도 불구하고.

[대신관이 대체 왜 저러는 거냐, 주인?]

성검이 황당한 듯 말했다. 유리엔도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대신관이 태연히 그를 돌아보며 동의를 구했다.

“그렇지 않습니까, 군주여?”

노인은 빙긋 웃고 있었다. 무언가 알고 있는 것처럼.

유리엔은 입을 열었다가, 다물었다. 짧은 갈등 후에 그가 다시 입술을 떼었다.

“……그렇다. 내가 그녀를 보증하고, 대신전 또한 보증한다. 그녀는 인간이며, 그녀가 그런 실력을 얻고 마검의 살의를 극복해 낸 과정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

유리엔은 능숙하게 예언에 대한 확답을 피하고 사실만을 말했다. 그리고 어안이 벙벙해진 사람들을 한 차례 돌아보았다.

“에키네시아 로아즈는 악마가 아니다. 이에 동의하겠는가?”

애매한 정적이 흘렀다. 대신관만이 확고하게 동의했다. 유리엔은 잠시 간격을 두었다가 바론을 응시했다.

“부단장.”

“……예, 단장님.”

“경이 지켜본 에키네시아 로아즈는 어떠했나? 그녀는 어떤 사람이었지?”

유리엔의 물음에 바론의 낯빛이 약간 변했다.

바론은 에키네시아 로아즈를 사관학교 입학 전부터 주시하고 있었다. 유리엔이 그녀를 스콰이어로 지명했기 때문이었다.

입학하자마자 그녀는 유명인이 되었다. 그녀 자신이 특이했던 탓도 있지만, 역시 창천기사단장의 스콰이어로 지명된 점이 컸다. 모르고 싶어도 모를 수가 없을 정도였다.

신입생 순위전에서 그녀가 드러냈던 실력의 일부, 흰 까마귀 협곡 마물 토벌 때 바라하와 함께 살아 돌아왔던 것, 성녀 구출 이후 성녀가 대놓고 그녀를 따르던 모습, 디아상트 공녀의 암살을 막아낸 사건.

“제가 보았던 그녀는…….”

그는 말끝을 흐렸다. 바라하가 그녀에 대해 말하던 것이 떠올랐다. 그녀는 믿을 수 있는 사람입니다.

바론은 바라하가 말할 수 없다고 한 에키네시아의 비밀이 무엇인지 이제 알았다. 그의 스콰이어는 그녀가 마검의 주인이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던 모양이다.

바라하는 정말로 위험하다면 약속이나 사적인 감정을 배제하고 보고를 할 사람이었다. 그런 성품이었기에 스콰이어로 삼았고 후계자로 점찍어 키우고 있었다.

그런 바라하가 알고도 침묵했다는 건 그녀의 마검에 대해 숨기더라도 아무 문제가 없었기 때문이다. 실제로도 지금까지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또한 에키네시아 로아즈는 바라하의 생명을 구한 은인이었다. 동시에 유리엔의 은인이기도 했다.

〈네. 반, 드시, 함께, 돌아오겠어요.〉

일주일의 시간을 달라며 담담하게 요구하던 그녀가 유리엔을 정말 되돌릴 수 있냐는 물음에 더듬거리며 답하던 얼굴이 생각났다.

그녀는 유리엔을 구하기 위해 마스터임을 밝히고, 제니스임을 밝혔다. 이런 의심을 사게 되리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리고 결국 유리엔을 구해냈다. 그를 물들인 것이 가짜 마검임을 증명하기 위해 마검을 소유하고 있음도 밝혔다. 이런 결과를 예상했을 텐데도.

그녀는 창천의 문장을 제 손으로 뜯어내기도 했다. 마검과 관련된 문제에서 창천과 자신을 분리하기 위해.

자신이 지켜본 에키네시아 로아즈가 어떤 사람이었냐고?

‘마검을 가지고 있는 자’라는 편견을 걷어내고, 그녀라는 사람에 대해서만 생각하면, 바론이 할 수 있는 대답은 한 가지뿐이었다. 도저히 다른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바론은 입가를 몇 차례 매만지고는 손을 내려놓았다. 결심한 듯 눈을 길게 감았다 떴다.

“……그녀는, 악마일 리가 없습니다.”

마검의 소유자를 악마가 아니라면 무엇이라고 표현해야 하는가. 답은 정해져 있었다. 그가 깊게 심호흡을 하고 말을 이었다.

“살릭기오사의 오너로서, 에키네시아 로아즈가 악마가 아니라 바르데르기오사의 오너라는 판단에 동의합니다.”

광검의 주인이 동의했다. 수아드 총행정관이 갑자기 태도를 바꾼 부단장을 휘둥그레진 눈으로 쳐다보았다. 유리엔은 바론에게 살짝 고개를 숙여 보이고는 테레사를 향해 시선을 주었다.

“테레사 경. 그대는?”

테레사는 유리엔이 바론에게 질문한 순간부터 이미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녀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에키네시아 로아즈가 마검을 얻게 된 경위와 로아즈에서 있었던 일을 보면 왜 그녀가 2황자를 베었는지 충분히 이해가 갑니다. 그 상황에서 그자를 죽이지 않은 것만 보아도 그녀는 악마가 아닌 게 확실합니다.”

그렇게 말하며 그녀는 자신이 아는 에키네시아 로아즈를 떠올렸다. 처음 그녀와 제대로 대화했던 때를 떠올려본다.

어떻게 프랑 알마리의 철벽을 한 번에 깰 수 있었는지 이제야 알겠다. 그 나이에 제니스가 될 정도라면 정말로 간단한 일이었겠지. 에키네시아는 의심하며 추궁하는 테레사에게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 얼마든지 둘러댈 방법이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말이다.

자신에게 맞는 드레스를 골라주던 그녀와, 성녀를 가르쳐주며 함께 춤을 추었던 그녀를 떠올렸다. 미하일이 에키네시아에 대해 말하던 것을 기억한다. 그녀가 독을 마신 상태로 공녀의 암살을 막아냈던 사건도 생각이 났다.

아젠카에 오기 전부터 에키네시아는 마검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그러니 테레사가 떠올린 그 모든 순간들에도 그녀는 마검을 지닌 상태였을 것이다.

“그녀가 안전한 존재임은 잘 알고 있습니다. 쉽사리 악마가 될 만한 자였다면 진작 사단이 났겠지요.”

마검과 마검의 악마에 대한 상식으로는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다. 테레사가 겪은 에키네시아 로아즈는 그러했다.

아무래도, 상식을 바꿔야 할 때가 온 모양이었다.

“……마검을 쓰면서도 살의에 지배받지 않는다면 바르데르기오사 오너로 인정하는 건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테레사는 저주에 걸렸던 단장을 간신히 막아냈던 당사자였다. 맞댄 칼날 너머로 새카맣게 일렁이던 단장의 눈빛을 기억하고 있다. 그 때의 단장과 달리 마검을 든 에키네시아는 침착했다.

게다가 그녀는 단장의 저주를 풀어냈다. 유리엔이 테레사에게 검을 겨눈 것을 사과하러 왔을 때 직접 알려주었다. 살의를 흡수하는 방식이었다고.

에키네시아의 병문안을 가서 쿠키를 주었을 때 그녀가 지었던 표정이 갑자기 떠올랐다.

기대하지 않았던 호의에 당황하고, 어쩔 줄 몰라 하면서도, 기뻐하던 얼굴. 생생한 사람의 얼굴이었다. 그 때에도 그녀는 마검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므로 그녀는.

테레사는 흐릿하게 웃으며 말했다.

“디몽기오사 오너로서, 에키네시아 로아즈가 바르데르기오사 오너임을 인정합니다.”

유리엔은 테레사를 향해서도 살짝 고개를 숙여 보였다.

나이가 어려서 이 자리에 부르지 못한 엘기오사 오너와 에키네시아 본인을 제외하면 현존하는 모든 기오사 오너가 동의한 셈이다. 이제 남은 것은 수아드 총행정관뿐이었다.

수아드는 순식간에 바뀌어버린 분위기에 눈썹을 모았다.

그녀는 에키네시아 로아즈에 대해 알지 못했다. 그래서 가지고 있는 정보와, 창천과 아젠카에 유리한 방향이라는 목적과, 합리만으로 판단했다.

“지금은 괜찮다고 해도, 그녀가 끝까지 살의에 잠식되지 않는다는 보장이 있습니까? 그녀가 완벽하게 마검을 통제하고 있는 게 확실한가요?”

유리엔은 거짓말을 하고 싶지는 않았다. 거짓으로 에키네시아가 돌아올 자리를 만드는 것은 의미가 없는 짓이다. 그래서 그는 솔직하게 의문에 답했다.

“그녀 자신이 이성을 잃어버리거나 미치지 않는 한, 그녀는 바르데르기오사를 통제할 수 있다.”

“그건 이성을 잃으면 통제할 수 없다는 뜻이잖습니까. 신도 아니고 사람이 평생 제정신으로 산다는 게 말이 됩니까? 군주보다 뛰어난 제니스라면서요. 그녀가 정신이 나가면 다 죽는단 소리 아닙니까? 총행정관으로서 그런 위험을 감수할 수는 없습니다.”

수아드는 속으로 한숨을 푹푹 쉬었다. 혼자 반대하니 악역 같은 꼴이었다. 그래도 그녀는 자신의 역할을 저버릴 수 없었다.

에키네시아 로아즈를 창천의 이름으로 기오사 오너로 인정하는 것은 위험 부담이 컸다. 그녀가 황자를 공격한 일은 어떻게 넘긴다 쳐도, 만에 하나 에키네시아가 악마가 되어버리면 끝장이었다.

그녀를 기오사 오너로 인정한 창천이 모든 책임을 지게 된다. 희생자가 발생하면 지금까지 창천이 유지해 온 명예와 이름이 하루아침에 송두리째 시궁창에 처박힐 터다.

깐깐해져야 했다. 다른 사람들이 믿을 때에도 끝까지 의심하고 최악을 대비해야 했다. 그것이 기사인 아젠카의 군주를 대신해 행정을 총괄하는 총행정관의 임무였다.

물론, 수아드가 이렇게 일할 수 있는 것은 유리엔이라는 군주가 그녀의 역할을 온전히 이해하고 있는 덕이었다. 유리엔은 수아드의 반대에 분노하지도 압박하지도 않았다. 대신 차분히 말했다.

“그런 일은 없을 것이다. 만에 하나 그리 되더라도, 그 때에는 내가 그녀를 진정시키겠다.”

“……군주께서 그녀를 막을 수 있습니까? 분명 그녀가 군주를 압도한다고…….”

“총행정관, 내가 성검으로 살의에 물든 자들을 되돌렸던 것을 잊었나?”

수아드가 아, 하고 깨달은 듯한 표정을 짓더니 화들짝 놀라며 안경을 치켜 올렸다.

“군주님, 그, 그 방법으로 마검의 악마도 진정시킬 수 있습니까?”

“마석 목걸이는 바르데르기오사의 살의를 이용해 만들어진 것이다. 그것을 정화해 보았으니 가능하다. 살의를 흡수하여 성검으로 변환, 배출하는 원리 자체는 동일할 터. 게다가 그녀가 아무리 강하다 해도 나 또한 제니스니, 살의를 흡수할 틈 정도는 낼 수 있다.”

유리엔의 설명에 수아드가 생각에 잠겼다. 유리엔은 빈말을 하지 않는다. 실제로 로아즈에서 마검에 물든 자들을 되돌린 사실도 있었다. 대부분 미쳐 죽었다지만, 가장 강한 기사였던 데릭이라는 자는 살아남았다고 들었다. 정신력과 체력의 차이인 듯하다고 했다.

마검의 주인이 이성을 잃어 악마가 된다고 해도 막을 방법이 있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학살의 위험만 아니라면 바르데르 기오사 오너를 인정하는 건 아젠카의 총행정관으로서도 찬성해야 할 일이었다.

새로운 기오사 오너의 탄생은 결코 가벼운 문제가 아니었다. 수아드는 머릿속으로 계산을 시작했다.

바론과 테레사는 조용히 기다렸고, 예언을 팔아 우길 문제가 아니었으므로 대신관도 참견하지 않았다. 에키네시아 로아즈를 마검의 주인으로 공표하려면 필수적으로 해결해야 할 문제이기도 했다.

계산이 끝났다. 수아드는 제안을 내놓았다.

“증명식이 필요합니다. 그녀가 바르데르기오사 오너임을 보여주고, 안전하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는 공식적인 행사 말입니다. 성검의 주인이 악마의 제어자라는 것도 보여주어야 합니다. 그래야 안심시킬 수 있습니다.”

“그건 그녀를 인정하는 것에 동의한다는 뜻인가?”

“네, 조건부로 말이지요.”

수아드가 고개를 기울였다.

“아젠카 뿐만 아니라 각국 대사를 모조리 초대하여 제대로 된 증명식을 치러내면 인정할 수 있습니다. 대신관님이 적극 지지하신다고 했지요? 대신전의 보증도 대대적으로 선전합시다. 예언이 있었다는 것도 포함해서. 그래도 되겠습니까?”

그녀가 대신관을 돌아보며 물었다. 대신관은 한쪽 눈썹을 들어 올리더니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입니다, 총행정관. 대신전은 최선을 다해 지원할 것입니다.”

“알겠습니다. 증명식 일시는 제국의 망할 호두알부터 좀 처리하고 나서……. 죄송합니다. 크흠. 큼. 어쨌든 증명식은 제국의 내전이 마무리된 후에 진행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구체적으로 어떤 증명을 하자는 건가?”

“그건 차차 논의하도록 하죠. 어쨌든 최대한 화려하게 증명해야 합니다. 일반인들도 볼 수 있도록. 역사상 최초로 바르데르기오사 오너가 탄생했다고, 대륙 구석구석까지 소문이 퍼질 정도로 말이에요.”

방향을 결정한 이상 미적거릴 이유는 없었다. 수아드는 매우 적극적인 태도로 의견을 내었다. 듣고 있던 테레사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총행정관, 그렇게까지 화려하게 진행해야 할 이유가 있습니까?”

“거창하게 증명해서 마검의 소유자를 ‘악마’가 아니라 ‘바르데르기오사 오너’로 인식을 바꿔놓는 것이 중요합니다. 만약 최악의 사태가 벌어져서 단장님이 수습하게 되더라도, ‘역시 악마잖아’라는 말이 아니라 ‘바르데르기오사 오너가 실수를 했군’이라는 말이 나오도록 말입니다.”

수아드는 안경 너머로 눈꼬리를 휘며 덧붙였다.

“인정할 거면 확실하게, 제대로 해야죠. 쓸데없는 소문이나 의심이 나오지 않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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