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을 든 꽃 169화
유리엔은 로아즈 캠프에서 희생자와 부상자에 대한 수습과 사과를 한 이후 창천기사단과 함께 아젠카로 돌아왔다. 반쯤 잘린 상태였던 왼팔을 포함한 부상들은 성녀가 치료해 주었다.
치료를 받으며 그는 에키네시아의 부상을 떠올렸다. 그녀는 제대로 치료를 하긴 했을까. 그가 입힌 부상을 말이다. 생각할수록 미쳐버릴 듯해서 유리엔은 더는 생각하지 않았다. 해야 할 일이 너무나 많았다.
챙겨온 가짜 마검은 마탑으로 돌아가지 않고 창천을 따라온 현자 칼리스토 팽에게 분석을 맡겼다. 칼리스토는 구금되어 있던 제자 니콜 시즈튼까지 아젠카로 불러들여 함께 가짜 마검을 분석했다. 칼리스토는 누가 어떻게 이것을 만들어 냈는지 조만간 알 수 있을 거라 호언장담했다.
유리엔은 아젠카로 돌아오자마자 곧장 공식 성명을 위한 준비를 시작했다. 그는 테레사와 바론, 대신관, 그리고 총행정관을 불러 말했다.
“에키네시아 로아즈를 바르데르기오사 오너로 인정하겠다.”
“예?”
“군주님, 지금 뭐라 하셨습니까?”
어느 정도 짐작하고 있던 바론 외의 전원이 기겁했다. 유리엔은 담담하게 설명했다.
“그녀는 역사상 두 번째로 바르데르기오사를 각성시킨 자이며, 마검을 통제할 수 있는 마검의 주인이다. 이를 창천이 정식으로 인정하고 공표할 예정이다.”
“실례지만 군주님, 제정신이십니까?”
검은 머리를 틀어 올리고 안경을 쓴 가무잡잡한 중년의 여성이 오만상을 찌푸리며 대꾸했다. 그녀는 최근에 임명된 총행정관 수아드 술라이만이었다.
드라코툼바로 떠나기 전에 지금 같은 과중한 업무로는 에키네시아와 함께 있을 틈을 낼 수가 없으니 총행정관이 필요하다고 판단했었다. 그 뒤 유리엔은 기존 행정관들 중에서 골라 총행정관을 임명했다.
그가 그녀를 선택한 이유 중의 하나가 저 거침없는 언사였다.
기사들은 거의 유리엔을 숭배하다시피하고, 행정관들은 그를 어려워했다. 아젠카의 사람들은 그가 무슨 말을 하건 어지간하면 반발도 의문도 없이 그냥 받아들였다.
황족 출신인데다 최연소 마스터에 성검의 주인이니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심지어 초기부터 업적을 쌓으며 군주로서의 자질도 이미 검증된 상황이다. 에키네시아에 대해 아직 알려지지 않아서 최연소 제니스 기록까지 세웠으니 더하면 더했지 덜해지진 않을 터였다.
이런 환경에서 자신 앞에서도 아니면 아니라고 딱 잘라 말하는데다. 장기간의 실무 경험이 있고 유능한 수아드 술라이만은 총행정관으로 적격이었다.
외지 출신이면서도 아젠카에서 오래 일했다는 점도 장점이었다. 아젠카의 특수한 구조에만 익숙한 아젠카 출신 행정관들은 타국과 접촉할 때 당황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유리엔은 그녀의 무례한 언사를 딱히 지적하지 않았다.
“나는 지극히 정상이다, 수아드 총행정관.”
“에키네시아 로아즈가 2황자를 불구로 만들고 도주했다면서요!”
“얼마든지 죽일 수 있는 상황이었으나, 그녀는 아무도 죽이지 않았다.”
“지금 안 죽였다고 나중에도 안 죽인단 보장이 있습니까? 아니, 그리고, 지금 죽이지 않은 게 문제가 아니잖아요! 제국의 황자라고요, 황자!”
수아드는 뒷목을 잡았다.
“황자를 기습해서 애꾸에 외팔이로 만들어버린 여자를 창천이 인정했다간 어찌 되는지 잘 아시지 않습니까! 그녀가 창천기사였던 것만으로도 골머리가 아픈데! 차라리 그냥 대놓고 전쟁을 준비하라고 하시든가요!”
격하게 말이 쏟아졌다. 애꾸에 외팔이, 라는 저속한 단어에 대신관이 탄식하며 입속으로 기도문을 외웠다.
“그 말대로다, 총행정관. 전쟁을 준비하도록.”
기도문을 중얼거리던 대신관은 유리엔의 대꾸에 아르 디오냐크, 라고 신음하고는 눈을 감아버렸다. ‘신이시여 자비를 베푸소서’라는 뜻의 고어로 신관들이 기도 시에 자주 사용하는 관용어였다.
수아드 총행정관의 입이 딱 다물렸다. 그녀가 휘둥그렇게 커진 눈으로 유리엔을 바라보더니, 천천히 바론 쪽을 돌아보았다.
“부단장, 군주님께 아무래도 저주의 후유증이 남으신 것 같습니다만.”
“……성검의 주인을 의심하는 겁니까, 총행정관?”
“선하다고 해서 판단력도 정상이라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어요! 제국과 전쟁이라니요! 가장 피해야 할 일을!”
수아드의 비명 같은 외침을 유리엔이 덤덤하게 받았다.
“수아드 총행정관, 다시 말하지만 나는 지극히 정상이다.”
“그럼 납득시켜 주세요. 다짜고짜 전쟁이라뇨, 아무리 저주 사건으로 아젠카가 제국과 전쟁을 불사하겠다는 분위기라 해도 정말로 전쟁을 일으키는 건……!”
“우선 이것을 읽어보도록.”
유리엔이 흥분한 수아드를 향해 서류를 내밀었다. 다른 이들에게도 한 장씩 돌렸다.
바론은 아는 내용이었다. 딱 절반까지는.
나머지 절반, 2황자에 의해 로아즈 영지에 바르데르기오사가 보내지고 에키네시아 로아즈가 그것의 주인이 되었다는 내용은 처음 보는 것이었다.
한동안 정적이 유지되었다. 그 정적은 점차 경악과 거칠게 들이쉬는 숨소리로 변화했다. 유리엔은 그 변화를 조용히 지켜보았다.
[전쟁을 피할 방법은 없겠느냐?]
랑기오사가 가라앉은 투로 물었다. 유리엔은 답하지 않았다. 주인이 답할 수 없는 상황임을 잘 아는 성검은 자문자답을 했다.
[하긴, 알음알음 퍼뜨려 황제의 수족을 전부 잘라내는 방식은 이제 쓰기 어려울 테니. 깨끗하게 처벌하긴 글렀고, 한바탕 진통을 겪을 수밖에 없겠군. 그것들이 죄를 묻는다고 얌전히 굽힐 것 같지도 않고.]
수아드가 가장 먼저 서류를 내려놓고 고개를 들었다. 그녀는 창백해진 얼굴로 중얼거렸다.
“군주님이 아니라 제국이 돌아버렸던 거군요. 대체 얼마나 멍청하면 바르데르기오사를 이용해 먹는다는 미친 짓거리를 다 하는지. 황제 머리에 든 건 뇌가 아니라 호두알이랍니까? 죽으려면 혼자 죽지 감당 못 할 지랄을 아주 대규모로……..”
“총행정관, 언사를 좀……”
“아, 실례했습니다, 대신관님. 하도 어이가 없어서.”
대신관이 낮게 한숨을 쉬었다. 수아드는 관자놀이를 꾹꾹 주무르더니 유리엔을 향해 깊게 머리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군주님. 감히 군주를 의심했습니다.”
“신경 쓰지 마라. 나는 그대가 직언하는 점을 높이 사서 총행정관으로 임명한 것이니.”
“아닙니다. 제가 흥분하여 선을 넘었습니다. 나중에 시말서를 제출하겠습니다.”
수아드는 재차 사죄를 구하고는 심호흡을 하며 이어 말했다.
“그나저나 이래서야 제국을 도저히 내버려둘 수 없겠군요. 그럼 성전을 선포하게 되는 겁니까?”
“아니, 제국과 아젠카의 전면전은 피할 생각이다. 표면화는 황태자의 몫으로 넘기고, 아젠카는 황태자를 지원하는 방향으로 움직인다.”
“제국 내의 내전이 되는 거로군요. 그럼 그 방향으로 준비하겠습니다. 디아상트와의 약혼 문제는 어떻게 하실 겁니까?”
“따로 계획해 둔 것이 있다. 그 문제는 차후에 논의하기로 하지.”
“알겠습니다.”
줄곧 조용하던 테레사가 돌연 입을 열었다.
“단장님, 에키네시아 로아즈는 그럼 로아즈에 마검이 배달된 직후에 바로 마검의 주인이 되었던 겁니까?”
“그렇다.”
바론이 끼어들었다.
“그녀는 대체 어떻게 악마가 되지 않은 겁니까? 제니스라서?”
“그녀가 제니스이기에 마검을 이겨낼 수 있었던 것이긴 하지만, 제니스라 해서 모두 마검을 통제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제니스? 에키네시아 로아즈가 제니스란 말입니까?”
테레사가 사색이 되어 물었다. 유리엔이 대답하기 이전에 바론이 힘이 빠진 음성으로 대꾸했다.
“그녀가 2황자를 공격할 때, 마나 실드를 쓰는 것을 경도 보았지 않나.”
“그게 마나 실드였습니까? 마검의 능력 같은 것이 아니라?”
“나도 문헌으로만 접해본 기술이지만, 분명히 마나 실드였다. 마검의 능력이었다면 일단 마나가 검은빛이었겠지. 그리고 내가 알기로는 마검에 그런 방어적인 능력은 존재하지 않아.”
바론의 설명에 테레사는 뒤늦게 깨달은 낯이 되었다. 그리고 반쯤 넋이 나갔다.
“제니스라니, 맙소사, 그 나이에…….”
그들의 대화를 지켜보던 수아드가 입을 떡 벌리더니 삐걱거리는 움직임으로 유리엔을 돌아보았다. 그녀에게서 목이 졸린 듯한 목소리가 났다.
“제, 니스요? 제가 아는 그, 제니스? 단장님과 같은 경지 말입니까?”
“엄밀히 말하면 그녀와 나는 같은 경지라기엔 격차가 크다.”
“단장님이 더 뛰어난 것은 당연한 일이겠지요. 그래도 그 나이에, 정말이지 놀랍습…….”
“총행정관, 내가 그녀보다 뛰어나다는 것이 아니라, 그녀가 나를 압도한다는 뜻이다.”
“……예?”
수아드가 그대로 굳어버렸다. 테레사가 믿기지 않는다는 시선을 보냈다. 바론은 어느 정도 예상하고 있었던 일이기에 그렇게까지 놀라진 않았다. 그가 입가를 문지르며 중얼거렸다.
“그녀가 저주에 걸렸던 단장님을 제압했으니…… 당연하겠지요.”
유리엔은 한 명의 기오사 오너, 여섯 명의 현자, 열 명의 마스터를 상대하면서 부상당한 상태로도 호각이었다. 그런 유리엔을 제압해서 저주를 풀고 돌아왔으니 에키네시아 로아즈는 그를 상회하는 강자일 수밖에 없다.
논리적으로 따져보면 합당했으나 상식적으로 받아들이기엔 어려운 사실이었다. 농담으로밖에 들리지 않는다.
다들 충격에 빠진 가운데에서 대신관만이 의외로 담담한 안색이었다.
테레사가 신음 섞인 음성으로 말했다.
“스무 살 제니스라니, 심지어 단장님을 압도하다니, 믿기지가 않습니다. 아무리 천재라도 이건…….”
바론이 그녀의 탄식에 동의하며 유리엔을 보았다. 그는 약간 걱정스러운 낯이었다.
“마검을 쥐고도 물들지 않는다는 것도 이해가 안 갑니다. 정말 그녀는 살의에 지배받지 않는 겁니까?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합니까?”
“그녀의 정체가 대체 뭡니까? 단장님께서는 뭘 알고 계신 겁니까?”
“그녀는…… 사람이 맞긴 합니까?”
테레사가 불안한 투로 묻고, 수아드가 덧붙였다.
나타나지 않은 지 오래 되었으나, 사람의 탈을 쓸 수 있는 마물이나 용에 대한 이야기는 전설이 아니라 역사의 일부였다. 그러니 그녀가 인간이 아닌 게 아니냐는 의심이 나오는 것도 이상하지는 않았다.
검술의 경지에 대해 잘 모르는 일반인들은 오히려 천재라는 말로 납득할 수 있겠지만, 이 자리에 모인 이들은 검에 관해서 잘 아는 만큼 더욱 납득하기 어려웠다.
아무리 책을 읽는 속도가 빠르다고 해도 도서관의 모든 책을 5분 만에 전부 읽을 수는 없다. 스무 살 제니스는 그런 경지였다.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수준.
유리엔은 이런 의문을 예상했다. 에키네시아 로아즈가 스무 살에 마검을 쥐기 전에는 검을 쥐어본 적조차 없다는 사실까지 밝혀지면 의문은 더 심해질 터였다. 그래서 그녀가 그토록 제 실력을 감추려 했던 것이 아닌가.
그렇다고 그녀가 시간을 되돌렸음을 알릴 수는 없었다. 만약 알려야만 하더라도 그건 그녀가 결정할 문제였다. 그녀가 드러내지 않은 사정을, 그녀에게는 잊고 싶은 악몽일 과거를 그가 마음대로 밝혀선 안 된다.
결국 여기서 유리엔이 할 수 있는 일은 자신이 쌓아온 신뢰와 명예로 그녀에 대한 의문을 덮어버리는 것 뿐이었다.
어차피 아무리 의심해 봤자 그녀가 스무 살 제니스이며, 마검에 지배당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고, 진실을 알아낼 방법도 없다. 결심한 그는 지그시 눈을 감았다가 떴다.
“그녀는 마물 같은 것이 아니다. 내가…….”
“그분의 신원은 대신전이 보증하겠습니다.”
갑자기 대신관이 끼어들었다. 유리엔이 흠칫 놀라 그를 돌아보자, 노인의 얼굴에 묘한 표정이 번졌다. 망설이면서도 결단을 내린 듯한.
“아르 디오냐크. 그분이야말로 신께서 친히 예비하신 사람입니다. 신의 안배와 뜻이 그분께 있습니다. 따라서 그분은 삿된 존재가 아니라 축복받은 존재입니다. 그분을 의심하는 건 신에 대한 의심이나 다름없습니다.”
“대신관님? 지금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난데없이 쏟아지는 찬양에 가까운 말들에 수아드 총행정관이 어이가 없다는 얼굴로 되물었다. 대신관은 종교적인 표현이 아니라 좀 더 세속적이고 명확한 표현으로 다시 대답했다.
“에키네시아 로아즈 님의 능력과 정체가 삿된 것이 아님을 대신전이 공식적으로 보증하겠다는 뜻입니다. 대신전은 그분을 기오사 오너로 인정하는 것 또한 전적으로 지원하겠습니다.”
“잠깐만요, 대신전이 대체 왜……?”
대신관은 이런 문제에서 이런 태도로 우겨댈 사람이 아니었다. 세속적인 문제에 잘 참견하지 않는 대신전이 이토록 적극적으로 나설 이유도 없었다. 유리엔마저 당황을 숨기지 못하고 대신관을 쳐다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