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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을 든 꽃-168화 (168/211)

검을 든 꽃 168화

“예. 그분이 받는다면.”

“……잠시 기다려라.”

창천기사단장은 펜을 쥐고 한참을 멀거니 서 있었다. 몇 번 종이에 펜이 닿았다 떨어지자 얼룩이 졌다. 그는 얼룩진 종이를 구겨버리고 새 종이를 꺼내 무언가를 썼다.

그리 길지 않았는데도 어찌나 심혈을 기울여 쓰는지 던컨은 그가 혈서라도 쓰나 싶었다.

창천기사단장이 밀랍으로 봉한 편지를 그에게 건네주었다. 그리고 떠나기 전에 조용히 말했다.

“쐐기가 정보 판매 외에도 제법 지저분한 짓들에 손을 대고 있는 것을 안다. 나는 언제든지 너희를 쓸어버릴 수 있다. 하지만 너희를 쓸어내 봤자, 환경을 바꾸지 않는 한 새로운 조직이 자라기만 한다는 것도 안다. 그러니 선을 지켜라.”

“…….”

“그리고, 그녀를 배신하지도 이용하지도 마라. 그녀가 용서할지라도 나는 용서할 생각이 없으니.”

그렇게 말하며 그는 주머니를 하나 내려놓았다. 보석이 가득 들어 있었다. 언뜻 계산해도 제국에서 마검의 악마에게 건 현상금보다 많은 양이었다. 그녀를 배신하지 말고 잘 모시라는 의뢰인 동시에 경고였다.

던컨은 내심 억울했다. 아젠카의 군주이자 성검의 주인이고 대륙에 단 둘뿐인 제니스가 주시하고 있다고 경고하지 않아도, 쐐기는 마검의 주인이며 창천기사단장조차 제압한 제니스인 에키네시아를 어찌하려 드는 정신 나간 짓거리를 벌일 생각은 없었다.

사실을 나열했을 뿐인데 새삼 오싹했다. 던컨은 주머니를 챙겨 들고 깊게 허리를 숙인 다음 그곳에서 벗어났다.

그는 에키네시아가 머물고 있는 콜본으로 돌아가서 그녀에게 창천기사단장의 편지를 전해주었다.

에키는 봉투를 내려다보며 매만지다가, 던컨을 쫓아내고 문을 닫아건 다음 침대에 걸터앉았다. 밀랍을 뜯고 봉투를 열었다. 그곳에는 한 자 한 자 정성 들여 꾹꾹 눌러쓴 짧은 편지가 있었다.

-그대의 가족들은 모두 안전하다. 란셀리드 로아즈의 눈은 성녀가 무사히 고쳤다.

에키, 나는 그대가 돌아올 자리를 만들고 있다. 그대를 기다리고 있겠다. 나를 용서하기 어려울지라도, 부디, 그대가 돌아와 주었으면 좋겠다. 기다리겠다.

묻지 않았는데도 쓰여 있는 가족들의 안전. 두 번이나 쓰여 있는, 기다리겠다는 말. 에키. 부드러운 필체로 적힌 그녀의 애칭. 에키네시아도 에키네시아 경도 아닌 에키. 돌아올 자리.

에키는 그 단어들을 몇 번씩 되풀이해 읽었다. 에키. 돌아올 자리. 에키. 돌아올 자리.

용서하기 어려울지라도라니, 용서받아야 할 만한 일을 한 적도 없으면서. 아, 나를 걱정한다는 이유로 내게 로아즈의 일이나 휘말린 음모를 숨겼던 것은 확실히 좀 화를 내어야겠지만. 그 외의 것들은, 아마도, 그가 더 괴로울 테니까.

다 기억해 낸 걸까. 전부?

악마인 그녀가 돌아갈 자리를 만든다는 게 가능할까. 어떻게?

기대하지 않았던 일이다. 돌아가지 못하는 것을 각오하고 있었다. 행복해지기 위해 시간을 되돌렸지만 그녀의 행복보다 사랑하는 사람들의 안전이 중요했으므로. 애초에 그들이 안전하지 않으면 그녀가 행복해질 수도 없었다.

유리엔은 황제의 사형은 어려울 거라 말했었다. 로아즈 참사가 일어났으니 상황이 변했을지도 모르지만, 어쨌든 제국의 황제쯤 되면 제대로 된 형벌을 내리기 어렵다. 정확히는 그녀의 마음에 찰 정도의 벌을 내리긴 어려울 것이다.

그래서 사태가 가라앉으면 직접 황제, 2황자, 디아상트 공작을 베어버리러 갈 생각이었다. 로아즈에 그들의 피와 살점을 뿌려줄 작정이었다. 행복을 포기했으니 복수라도 해야 하지 않겠는가.

돌아갈 자리. 에키는 다시 그 부분을 읽었다. 마검을 뽑아 드는 순간 포기했던 것을 포기하지 않아도 될 방법이 있는 걸까.

눈가가 시큰해졌다. 그녀는 종이에 얼굴을 묻었다. 그리운 냄새를 찾고 싶었지만, 메마른 냄새와 희미한 잉크 냄새만이 났다.

* * *

그랜마는 초록색 털실 뭉치를 내려 놓으며 에키네시아를 바라보았다. 에키가 더 이상 정보를 막지 않았기에, 그녀는 던컨으로부터 거의 모든 이야기를 들었다. 그것들과 돌아가는 판도를 지켜보며 그랜마는 한 가지 결정을 내렸다.

“던컨, 내 아가.”

“예, 보스.”

“오늘부터 너는 핸드가 아니란다. 아가씨와 우리 사이의 가교가 되어 주렴.”

핸드는 보스의 직속 행동원을 부르는 명칭이었다. 그랜마의 곁에 상주하는 게 원칙이다. 더 이상 핸드가 아니라는 것은 결국 그랜마가 던컨이 에키네시아 곁에 있는 것이 쐐기에 더 유리하다고 결정했다는 뜻이었다. 던컨의 눈이 약간 커졌다. 그는 머리를 조아렸다.

“감사합니다, 보스.”

“저기요, 제 의견은요?”

황당해진 에키가 묻자 그랜마가 푸근하게 웃었다.

“데리고 있으면 쓸 만하고 편하다지 않았니. 우리 아가를 잘 부탁할게, 아가씨. 겸사겸사 우리 조직도 잘 좀 봐주면 좋고.”

에키는 묘한 얼굴로 그랜마를 응시했다. 지워버린 시간에도 그랜마는 비슷하게 행동했다. 대가 없이 정보를 제공하고, ‘잘 좀 봐달라’고 했었다.

그랜마의 잘 좀 봐달라는 건 의외로 소박한 뜻이었다. 그저 그들에게 칼을 겨누지는 말아달라는 뜻에 불과했다. 이왕이면 그녀가 돌아다니면서 얻은 정보를 조금 나눠주면 좋고.

‘그때야 박살을 냈었으니 당연한 거라고 생각했는데, 이번에는 아무도 안 죽였는데도 이러네.’

쐐기 입장에선 사실 당연한 생존전략이었다. 에키네시아 본인만 해도 감당 못 할 거물인데, 창천기사단장까지 얽혔으니 제발 건드리지만 말아달라고 빌며 알아서 길 수밖에 없다. 그 와중에 이득은 알아서 챙기면 된다. ‘던컨과 나름 친밀해진 모양이니 잘되었구나. 보고를 들어보니 꽤 정에 약한 성격인 것 같으니. 잘 지내기만 해도 우리에겐 이득이야.’

그랜마는 그렇게 생각하며 에키를 향해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

“우리 아가 일은 이걸로 끝이고, 아가씨에게 전할 중요한 소식이 있단다.”

“뭔가요?”

“전쟁이 일어날 것 같구나.”

“설마, 제국과 아젠카가 결국……..”

“아젠카가 아니라, 황태자와 황제 사이의 전쟁이야, 아가씨.”

에키가 입을 다물었다. 그랜마는 뜨개실이 들어 있던 바구니를 엎었다. 싸구려 실뭉치 아래에 깔린 종이가 뒤집혔다. 그 종이에는 빽빽하게 글자가 쓰여 있었다.

“엊그제 황태자가, 황제와 2황자가 로아즈에 마검을 보낸 경위와 마석 목걸이를 이용해 로아즈 참사를 일으킨 경위를 밝히고, 황제가 더 이상 제위에 있을 자격이 없다고 선포했거든.”

시작되었나. 에키의 눈이 가라앉았다. 그랜마가 그녀에게 종이를 밀어 주며 말했다.

“며칠 전에 로잘린 디아상트가 수도로 돌아왔던 게 시작이었지. 그녀가 윈들턴 디아상트 공작의 죄를 고발했단다. 자신은 이미 결혼했으니, 창천기사단장과의 약혼은 무효라고 말이지. 엄밀히 말하면 약혼식을 치르기 전이라 약혼 상태도 아니었지만.”

“……그녀가 자신에게 가족이 있었다는 걸 밝혔나요?”

“그래, 디아상트 공작이 공녀에게 독이 든 차를 보냈던 증거와 함께 전부 밝혔단다. 이미 혼인한 공녀를 강제로 창천기사단장의 약혼녀로 보내고, 독살까지 시도하다니, 정말 거대한 스캔들이었지.”

공작을 우선 쳤구나. 그녀가 보내 준 증거가 도움이 되었을까. 에키는 그랜마가 밀어준 종이를 흘깃 살폈다. 그랜마는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아주 혼돈이었단다. 공작의 최측근을 제외한 디아상트 공작가 전체가 기다렸다는 듯이 공녀의 편으로 돌아섰거든.”

“공작가가 공녀의 편으로 돌아섰다고요?”

“폭로하기 전에 물밑에서 아주 바쁘게 움직였던 모양이더구나. 현재 실질적인 공작가의 수장은 로잘린 디아상트 공녀란다.”

“대체 어떻게 그런…….”

에키의 표정이 멍해졌다. 상상도 못 했던 이야기였다.

디아상트 공작을 함부로 건드리지 못했던 이유는 그가 황태자의 장인이자, 황태자 세력의 구심점이나 다름없는 존재였기 때문이다. 시간을 되돌리기 전 황태자가 황제가 된 이후에 디아상트 공작을 처리한 것도 아마 같은 이유일 것이다.

2황자와 디아상트 공작의 결탁에 대해 공개하기 힘든 것도 그 때문이었다. 가장 큰 우군이 사실 적이었음을 알게 되면 황태자의 세력 자체가 붕괴할 우려가 있었다.

하지만 이런 식이라면 다르다. 디아상트 공작만을 축출해내고 새로운 디아상트의 수장이 황태자를 지지하면 ‘디아상트 가문이 황태자를 배신했다’가 아니라 ‘윈들턴 디아상트가 황태자를 배신했다’라는 개인의 문제가 되니까.

“디아상트 영지를 관리하던 공작부인과, 공작의 어미인 대부인, 장녀인 황태자비, 공작가의 방계들까지 나서서 이런 짓을 벌인 공작을 인정할 수 없다, 공작이 물러나고 로잘린 디아상트 공녀가 작위를 계승해야 한다고 주장했지. 공작에게 남은 편은 제도의 공작저에 있는 인원과 공작이 별도로 키웠던 자들뿐이라더구나.”

로잘린 디아상트는 분명 굉장한 여자였고 인질이었던 가족도 되찾았지만, 아무리그래도 혼자서 공작을 상대로 상황을 저렇게까지 만들긴 어려웠다. 유리엔의 입김이 들어갔을 거라는 직감이 들었다.

“그로 인해 28일에, 제도에서 공작가의 분쟁에 대한 귀족 대회의가 열렸지. 황제는 윈들턴 디아상트만이 디아상트 공작이라고, 로잘린 디아상트를 인정하지 않았단다. 하지만 황태자가 황제를 무시하고 로잘린 디아상트를 디아상트의 수장으로 인정해 버렸어.”

“그게 가능해요? 귀족의 작위 계승은 가문 내에서 결정하는 게 원칙이라지만, 형식적으로라도 황제의 인가를 받아야 하잖아요. 황태자가 인가를 하는 건 불가능할 텐데.”

“불가능하지. 그러니까 황태자는 결국 황제가 더 이상 황제가 아님을 선포한 거나 다름없는 짓을 한 거란다. 그러면서 대회의에서 황제에게는 황제의 자격이 없다고 고발한 거지.”

“……마검의 음모에 대해 밝혔군요.”

“그건 완벽하게 준비된 고발이었단다. 대회의에서 공녀가 공작이 드라코툼바 성에서 마검을 연구하고 있었다는 걸 폭로해 버렸어. 황태자는 그 자리에서 공작과 근위기사단장의 관계와, 마검 관련 음모에 대해 추궁하며 황제에게 양위를 요구했단다.”

“황제가 그것을 받아들였나요?”

“그럴 리가 있겠니, 아가. 황제는 노발대발하여 반역을 저지르는 황태자를 가두라고 명령했지. 근위기사단이 움직였고, 미리 대비했던 황태자는 무사히 달아났단다. 제도를 빠져나가서 근처의 도시로 몸을 피했어. 그러고 나서 어떻게 될지는, 아가씨도 예상이 가겠지?”

“내전이겠군요.”

에키는 그랜마가 건네준 종이를 내려다보았다. 황태자와 황제 측의 세력이 정리되어 있었다. 언뜻 훑어봐도 황태자 측이 많았지만, 대부분이 귀족의 이름이었다. 제국군이 황제에게 있으니 황제를 굴복시키기는 쉽지 않을 터였다. 종이를 살피는 그녀에게 그랜마가 말했다.

“그렇지. 그리고 어제, 마검을 악용하고 저주를 만들어낸 황제와, 2황자, 디아상트 공작을 포함한 관계자들의 처벌을 요구하는 창천기사단의 서한이 도착했다고 하더구나. 황태자가 서한을 받자마자 바로 공표해서 우리도 알게 되었단다.”

창천이 황태자를 지원하면 제국군도 충분히 밀어버릴 수 있을 것이다. 그래도 전쟁은 전쟁이다. 황제 소속의 제국군이야 그녀의 알 바가 아니지만, 아젠카의 사람들이 다치거나 죽을지도 모른다. 에키는 복잡한 심정으로 종이를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그랜마가 테이블을 똑똑 두드려 그런 그녀의 주의를 끌었다.

“아가씨에게는 내전보다 더 중요할 정보가 따로 있더구나.”

그녀가 의아한 낯으로 고개를 들었다. 그랜마는 주름진 얼굴에 의미심장한 미소를 띠며 쪽지를 꺼냈다.

“이걸 보려무나. 창천기사단이 황태자에게 보낸 서한에 포함되어 있던 내용이란다.”

에키는 그녀가 내미는 쪽지를 받아들어 펼쳤다. 글자를 읽는 순간 그녀의 숨이 멈췄다.

-또한 창천은 바르데르기오사의 주인, 현재 제국에서 마검의 악마로 불리고 있는 에키네시아 로아즈를 악마가 아닌 기오사 오너로 인정할 예정이다.

그녀는 로아즈 참사와 관계가 없으며, 죄인들에 의한 피해자에 불과하다. 따라서 그녀의 수배령을 거둘 것을 제국에 정식으로 요청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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