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을 든 꽃 167화
“가차 없으시네요.”
“시끄러워. 너 어째 갈수록 겁이 없어진다?”
그야, 괴물 같은 능력과 마검의 주인이라는 무시무시한 칭호를 가지고 있긴 해도, 주위의 사람에게 해를 입히지만 않으면 의외로 무른 사람이라는 걸 알게 되어서 말입니다.
던컨은 현명하게도 그 말은 속으로만 중얼거렸다. 로아즈 캠프에서 도주한 이후 한 달이 넘은 지금까지, 던컨은 내내 에키네시아와 동행하고 있었다.
자리를 비운 건 딱 한 번이었다. 그녀가 콜본에서 찾아낸 증거품들을 아젠카로 배달하기 위해서.
* * *
로아즈에서 탈출한 후 에키가 가장 먼저 한 것은 치료였다. 쉬지 않고 무리한데다가 등의 부상이 덧나서 며칠을 앓았다.
약만 대충 바르고 인적 없는 숲에 처박혀 있으려는 그녀를 끌어낸 것은 던컨이었다. 그는 그녀에게 쉴 은신처를 마련해 주고 쐐기 소속 치료 전문 마법사와 의사를 연결해 주었다.
에키는 던컨에게 돌아가도 된다고 했지만, 던컨은 쐐기에 소식만 전한 후 그냥 그녀의 곁에 남았다.
“왜 안 돌아가? 이제 죽일 생각 없다고 했잖아.”
“이대로 돌아가는 것보다 당신과 친분을 쌓는 게 조직에 더 유리하다고 판단했습니다. 아가씨도 제가 있으면 솔직히 유용하지 않으십니까?”
그 덕에 편히 쉬며 치료할 수 있게 된 상황에서 차마 쓸모가 없다는 소릴 할 순 없었다. 그녀는 대충 대꾸했다.
“있으니 편하긴 한데, 불편해도 상관없으니까 돌아가고 싶으면 돌아가.”
“안 돌아갑니다. 뭐든 시키십시오.”
[야, 저거 알아서 하인이 되겠다는데, 그냥 써먹지 그래? 정 써먹을 데가 없다 싶으면 죽여버려도 되고.]
아무리 봐도 뒷말이 본심인 것 같은 마검의 헛소리가 아니라도, 뭐든 시키라는데 굳이 내버려둘 생각은 없었다. 결국 에키는 그를 알차게 부려먹었다.
대강 회복하자마자 그녀가 향한 곳은 제국 북부의 콜본이었다. 쐐기로 서는 뚫을 수 없는 마법진이 설치되어 있어서 조사하지 못했던 세공품 공방이 있는 곳.
에키는 콜본에 도착한 다음날 밤에 공방을 뚫어버렸다. 던컨은 마나 역행(逆行)으로 공방을 둘러싼 마법진을 소리 없이 붕괴시켜 버리는 그녀를 보고 질려버렸다. 아직도 놀랄 거리가 남아 있었을 줄은.
심지어 그녀는 원리를 알고 그 방법을 쓰는 것도 아니었다. 순전히 마나를 느끼는 예민한 감각과 감에 의지해서 그런 짓을 하고 있었다.
“마나 역행이 뭔데?”
“아가씨가 방금 한 것 말입니다. 마법진을 이루는 마나의 흐름을 역으로 뒤집어서 마법 구조 자체를 붕괴시키는 방식의…….”
“은근히 똑똑하네, 너. 마법사였어?”
“소소하게 몇 가지 익힌 정도라, 마법사라기엔 무리입니다. 별로 재능이 있진 않아서요. 그나저나 어디서 그런 기술을 익히셨습니까?”
“경험에서 얻은 요령이야. 빨리 자료나 챙겨.”
아젠카에 오기 전까지 귀족가에서 나고 자란 아가씨가 그런 기술을 얻을 정도의 경험을 쌓을 일이 있긴 한가. 저것도 그 악몽 속에서 익힌 걸까. 의문스러웠지만 그녀에 대해 추리하는 걸 반쯤 포기한 상태인 던컨은 묵묵히 공방 안을 털었다.
2황자 측, 정확히는 황제의 최측근인 근위기사단장과 디아상트 공작은 이 세공품 공방에서 주기적으로 주문을 했었다. 주문 기록이 남아 있었지만 기록상에 있는 것은 평범한 장신구류들뿐이었다.
진짜는 공방 지하의 비밀 공간에 있었다. 마검의 마나가 담긴 마석이 쌓여 있고, 만들다 만 마석 목걸이들이 굴러다녔다.
디아상트 공작의 수하가 여기에서 마석 목걸이를 제작했던 흔적이었다. 근위기사단장이 그것을 받아간 기록도 발견했다. 그 외에도 디아상트 공작과 2황자 측이 내통한 문건이 다수 있었다.
대부분의 마법적 방비를 무용지물로 만들어 버리는 에키네시아와, 이 분야 전문가인 던컨은 하룻밤만에 거의 모든 증거를 확보했다.
그리고 에키는 그것들을 정리해서 던컨을 시켜 아젠카로 보냈다.
“이것만 보내시는 겁니까?”
“왜? 뭐 빠졌어?”
“편지라든가, 전할 말은 없으십니까?”
던컨은 진작 에키네시아와 창천기사단장의 관계를 알아차린 상태였다. 그의 조심스러운 질문에 그녀는 묘한 얼굴로 침묵했다. 괜히 물었나 싶어질 때쯤에야 그녀가 입을 열었었다.
“그가…… 성검을 되찾았다고 했었지?”
그 소식은 그녀가 부상을 치료 중일 때 전달했었다. 소식을 듣자마자 에키가 그를 내보내고 문을 걸어 잠그는 바람에 던컨은 그녀가 어떤 반응을 보였었는지 알 수 없었다.
“네. 전에 말씀드렸다시피, 화려하게 되찾았지요. 치솟는 황금빛이 근처 마을에까지 보였다고 하니.”
“……그럼, 이제 기억하는 걸까.”
그 목소리는 너무 작아서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죄송하지만 못 들었습니다. 뭐라고 하셨습니까?”
“아무것도 아니야. 전할 말은 없으니 그냥 그것만 조용히 배달하고 와.”
그녀는 그 말을 끝으로 돌아섰다. 던컨은 망설이다가 다른 것을 물었다.
“아가씨는 이제 아젠카로 돌아가실 생각은 없는 겁니까?”
에키네시아는 그를 돌아보지 않았다. 그녀가 고개를 움직이자 늘어뜨려진 머리카락이 살짝 흔들렸다. 곧 그녀는 담담하게 대꾸했다.
“돌아갈 수가 없잖아.”
“음모가 밝혀질 때까지 말입니까?”
“글쎄. 영원히 못 돌아갈지도 모르지.”
“예?”
“나는 마검의 주인이고, 악마가 되어버릴 가능성이 있는 존재잖아. 아무리 통제할 수 있다고 해도 믿기 어렵겠지. 누가 자기 근처에 위험한 요소를 두고 싶겠어. 당연한 거야.”
이제 와서 이걸 버릴 수도 없는 노릇이고 말이야. 그랬다간 다 잊어버릴 테니. 시끄러워, 발. 널 이제 안 버리겠단 소리는 아니거든? 너 때문에 내가 지금 무슨 고생을 하고 있는데. 버릴 수만 있으면 당장 버릴 거야, 망할 마검아. 너무하긴 뭘 너무해.
그녀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던컨은 그 혼잣말을 들으며 다른 생각에 빠져 있었다. 이전의 삶으로 돌아가지 못할 거라니, 배척받는 게 당연하다니. 저게 저렇게 덤덤하게 할 수 있을 만한 말인가.
“창천기사단장도 당신을 믿지 못합니까?”
무심코 나온 그 질문은 창천기사단장을 힐난하는 어조에 가까웠다. 그도 그럴 것이, 그녀가 악마가 되었던 창천기사단장을 구해내기 위해 뭘 했는지 누구보다 잘 아는 것이 던컨이었다.
그녀가 던컨을 돌아보더니 픽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는 절대 그러지 않아. 너무 믿어서 탈인데.”
“그럼 어째서…….”
“그러니까 더 돌아갈 수 없는 거야.”
나 때문에 그가 또 최악의 기사단장 소리를 듣는 건 싫거든. 그녀가 작게 덧붙인 말을 던컨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럼, 다른 것은 필요 없으십니까?”
“어떤 거?”
“가족들의 안전을 확인하거나, 가족들에게 전하고 싶은 말이라든가요.”
에키네시아는 한참을 침묵했다. 그러고 나서 나지막이 말했다.
“아니, 따로 접촉하지 마.”
“알겠습니다.”
그리 말하는 그녀의 얼굴이 너무 울적해서, 그는 더 이상 묻지 않았다. 던컨은 곧바로 아젠카로 출발했다.
로아즈 캠프는 철수했고, 제국과 아젠카 사이에는 긴장감이 흐르고 있었다. 참사에 대한 수사가 진행되고 있긴 했으나 여러모로 지지부진했다.
아젠카는 그들의 단장을 악마로 만든 것과, 로아즈 참사를 일으킨 것이 저주라고 주장했다. 그리고 저주를 건 자의 처벌을 요구했다. 대놓고 누구인지를 지목하지는 않았으나 누구를 가리키는지는 다들 알고 있었다.
황제는 마검의 악마가 이 모든 사태의 배후이며, 창천이 마검을 숨기고 있었다고 주장하는 상태였다. 억지 논리에 가까웠으나 막무가내였다. 2황자가 악마에게 당해 불구가 된 탓에 반쯤 이성을 잃었다는 말이 있었다.
아젠카와 제국 사이에 당장 전쟁이 발발하지 않은 것은 황태자 덕분이었다.
황태자는 황제를 상대로 명확한 증거가 나오지 않는 한 판단하지 않겠다는 유보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었다. 정면으로 반박하지는 않았으나 실상 반박하는 것이나 다름없는 짓이었다.
황태자와 황제 사이의 긴장감 탓에 제도의 분위기는 뒤숭숭했다.
제국 내에서도 황제의 주장을 진심으로 믿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아귀가 맞질 않으므로.
반면 아젠카는 창천기사단장에게 저주를 걸었던 제국을 용서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 중론이었다.
마검의 마나를 정화하기도 했고, 저주에서 풀려나자마자 성검을 되찾았고, 심지어 그 과정에서 제니스라는 것이 알려진 덕분에 유리엔의 평판은 더 상승한 상태였다.
다만 에키네시아 로아즈가 제니스라는 건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다. 마검의 주인이라는 사실이 더 중요했기 때문이었다.
아젠카에서 그녀는 감히 창천을 속이고 잠입했던 악마로 취급되고 있었다. 창천기사단은 아직 그녀에 대해 공식적인 언급을 하지 않고 있었으나 사람들 사이에 도는 소문은 그러했다.
던컨은 거리와 상점가를 돌며 그런 분위기를 대강 읽었다. 그 후에 창천기사단에 접근했다.
쐐기의 유일한 마스터라 해도 창천기사단 본부에 숨어드는 것은 무리여서, 직접 접촉하는 대신 다른 방법을 취했다. 아젠카에 있는 조직원을 시켜 한 통의 편지를 보냈다.
증거 자료를 전달하기만 하는 거라면 바로 보내면 된다. 하지만 던컨은 일부러 자료의 일부만 첨부해서 편지를 썼다. 자정 즈음에 지정한 장소로 나오면 나머지 것들을 전해 주겠다고, 에키네시아 로아즈가 보내는 거라는 말을 첨부했다.
어떻게 나올지 반쯤 시험하는 마음이었다. 에키네시아의 창천기사단장을 향한 마음은 잘 알겠는데, 창천기사단장이 에키네시아를 어느 정도로 생각하고 있는지는 알 수가 없어서.
창천기사단장은 약속한 시간에 약속한 장소에 정확하게 나타났다. 던컨이 미리 따로 잡아둔 아젠카의 여관방으로, 그것도 요구한 대로 홀로.
던컨은 그가 정말로 혼자서 나타날 줄은 몰라서 조금 당황했다. 소문대로 은으로 만든 조각상처럼 섬세하고 아름다운 남자였다. 그러나 베일 듯한 예기가 그 아름다움보다 먼저 느껴졌다.
왜 혼자 왔는지는 마주 앉자마자 알았다. 헛수작을 부리지 말라는 의미인지 그는 은은히 마나를 흘리고 있었다. 검을 맞대보지 않아도 알 수 있을 정도로 까마득한 강자였다. 과연 창천기사단장은 경호 따위가 필요한 사람이 아니었다.
던컨은 칼날 아래에 목덜미를 들이미는 기분으로 그와 독대했다. 증거 자료를 전해주자 곧바로 훑어본 그가 자신을 노려볼 때는 등줄기에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이것을 그녀가 보냈다고? 증명할 수 있나? 너는 그녀와 무슨 관계지?”
괜히 만나서 전해 주겠다고 했다는 후회가 좀 들었다. 에키네시아 로아즈가 전혀 안 그렇게 보이는 외양으로 무시무시한 괴물이라면 이 자는 그냥 대놓고 괴물이었다.
“……쐐기 소속의 핸드입니다. 그 분의 명으로 자료를 전하러 왔습니다. 이걸 보시면 믿으실 수 있을 겁니다.”
던컨은 예전에 에키네시아가 맡겼던 두 통의 편지를 꺼내 그에게 주었다. 부단장 바론에게 보내는 것, 그리고 그녀의 가족에게 보내는 것.
그녀는 필요 없어진 이 편지들을 태워 버리라고 했지만, 쓸 일이 있을 것 같아 몰래 간직하고 있었었다.
“그녀가 악마가 되었던 당신을 찾아갈 때, 혹시 자신이 돌아오지 못하게 되면 전하라고 맡겼던 편지들입니다.”
창천기사단장은 편지 겉면에서 에키네시아 로아즈의 필적을 확인했다. 그리고 잠깐 고민하더니 두 통의 편지 중에서 부단장에게 보내는 편지의 봉인을 뜯었다.
던컨은 편지의 내용을 읽어내리는 그의 새파란 눈동자가 경련하듯 떨리는 것을 보았다. 봉인되어 있던 편지라 읽어보지 못해서 무슨 내용인지 궁금해졌지만, 물어봐선 안 된다는 직감이 들었다.
편지를 다 읽은 창천기사단장은 그것을 곱게 접어 다시 봉투에 넣었다. 편지의 끄트머리가 떨리고 있어서 던컨은 그가 손을 약간 떨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는 로아즈 일가에게 보내는 편지는 뜯지 않고 그대로 챙겼다.
“그녀는 지금 어디에 있나?”
“답할 수 없습니다.”
“……그녀가 그러기를 원했나?”
던컨은 입을 다물었다. 창천기사단장이 손으로 얼굴을 문질렀다. 그녀는 괜찮은, 아니, 아니다. 그가 하려던 말을 흩뜨리며 깊은 숨을 토해냈다.
“내게 전할 것은…… 이것이 다인가? 다른 말 같은 것은…….”
“없습니다.”
얼굴을 덮은 손가락 사이로 보이는 창천기사단장의 눈동자가 형형했다. 그 눈은 약간 미쳐 있는 것 같기도 했고, 젖어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몇 차례의 깜박임에 곧 그런 기색은 씻은 듯이 사라졌다. 그는 손을 떼고, 그린 듯이 우아한 낯과 정갈한 자세로 돌아와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
“그럼, 그녀에게 편지를 전해줄 수는 있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