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을 든 꽃-166화 (166/211)

검을 든 꽃 166화

떨리던 칼끝이 기억난다. 골짜기에서 대련을 청했던 때를 연상한다.

그에게 검을 겨누는 것만으로도 악몽이 되살아나 발작하듯 검을 내던졌던 그녀가, 하얗게 질린 얼굴과 젖어 흐무러질 것 같은 눈을 하고서도 검을 내리지 않았다. 유리엔은 자신을 향해 검을 들었던 그녀의 그 얼굴을 평생 잊지 못할 것이다.

그녀는 몇 번이나 검을 거두었고 비틀었고 멈춰 세웠다. 자신은 가차 없이 검을 휘둘렀다. 그녀가 그를 다치지 않게 하려는 것을 교활하게 이용하기까지 했다. 그럼에도 그녀는 결국 그를 구해냈다.

어둠이 걷혔던 순간. 늪에서 건져진 순간. 목 안쪽까지 텁텁하게 차오르고 사지를 억누르고 있던 검고 끈적한 것들이 썰물처럼 밀려나고, 머리가 아플 정도로 쉼 없이 울리는 죽이라는 메아리가 깨끗하게 사라지는 감각.

가슴팍에 와 닿는 부드러운 감촉과, 그를 올려다보는 보라색 눈동자가 선명했다. 그에게 숨을 불어 넣은 여자. 옥죄던 것들로부터 끌어올려져 보게 된 여자는 빛으로 빚어낸 사람처럼 보였다.

그 순간에 움직였던 심장도 뚜렷하게 떠오른다. 그녀가 누구인지도 모르면서, 그는 그 찰나에 또다시 그녀에게 반하고 말았다.

그리고 그 순간마저 전부 잊었다.

희고 여린 등. 그 등을 가른 상처들. 아무것도 모른 채 그 상처를 봉합해 주던 자신이 떠오른다. 어쩌다 그런 부상을 입었느냐고 묻기까지 했다.

〈글쎄요……. 그것보다 궁금하신 게 많을 텐데요.〉

당신이 입힌 상처라고 원망이라도 하지, 왜 아무 말도 하지 않았을까. 그는 답을 알고 있었다.

그녀를 알아보지도 못하고 그녀에게 했던 말들. 다가오던 그녀의 손을 쳐냈던 것. 마구잡이로 질문을 던지자 그녀가 지친 듯이 했던 대답.

〈천천히, 천천히 설명해 드릴게요. 지금은 말고요.〉

〈제가 좀 피곤해서요. 죄송합니다. 단장님.〉

대체, 무슨 심정이었을까. 그녀를 기억하지도 못하고, 그녀가 그를 구해낸 것도 모르고, 그에게 부상을 입은 상태로, 그녀를 의심하는 눈빛을 보이는 그를 보면서.

입 안에 피맛이 돌았다.

성검을 포기할 때 랑기오사가 말했듯이, 막연히 그녀라면 자신을 되돌릴 수 있을 거라고 예상했다. 그의 예상은 맞았다. 하지만 그 과정이 이러하리라고는, 아니, 어렴풋이 알고는 있었다. 다만 막연한 예상과 선명한 실제가 이리도 다를 줄은 몰랐다.

다 변명이다.

〈더 쓰다듬어 주세요.〉

그렇게 말하며 흐리게 웃던 그녀가 생각난다. 스스로의 뺨을 후려치고 싶어졌다.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 움켜쥔 주먹 속에서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들어 피가 배어 났다.

[……자해할 생각이 아니라면 손 펴라, 주인.]

그와 기억을 공유한 랑기오사는 내내 조용하다가 슬며시 지적했다. 유리엔은 몰려드는 사람들을 물리고 홀로 막사 안에 서 있었다.

손바닥을 펼치며 아래를 보았다. 부풀어 툭 떨어지는 핏방울을 따라 시선이 움직였다. 허리춤에 걸려 있는 랑기오사와 닮은 하얀 검이 보였다.

〈그 검은 안 돌려주셔도 돼요.〉

마검을 든 그녀를 경계하는 그를 향해 그녀가 속삭인 말. 시선을 마주치고 있지 않았다. 내리깐 눈, 목소리 끝에 묻어나던 떨림, 일부러 검을 돌려받지 않은 행동.

그녀에게 아메시스트를 돌려주지도 않고, 왜 이렇게까지 하냐고 묻던 자신. 아무것도 모르면서 그녀에게 입 맞추고 싶다는 소리나 지껄이던.

그녀는 무슨 심정으로 그에게 키스를 했을까.

그리고 대체 무슨 심정으로, 자신을 믿고 나서지 말아달라고 약속을 요구했을까.

그 말에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고, 아무 생각 없이 성검을 되찾을 수 있을지나 물어보고 있었던 스스로의 모습이 끔찍하다.

캠프에 돌아와서 그녀가 마검을 공개하는 것을 보고도, 약속했다는 이유로 그녀가 홀로 모든 것을 짊어지게 내버려둔 자신의 모습도.

병신 새끼.

유리엔은 디트리히가 종종 내뱉던 저속한 말을 스스로에게 내뱉어 보았다. 모자랐다. 돌아버릴 것 같았다. 자해하고 싶어진 건 태어나 처음이었다.

[너로서는 어쩔 수 없었던 상황이잖느냐. 마검의 주인도 이해해 줄 거다.]

성검이 조심스럽게 말을 건네 왔다. 유리엔은 이를 악물고 답했다.

“이해한다고 해서 상처 입지 않는 것은 아니잖나.”

[…….]

랑기오사는 할 말을 잃고 침묵했다. 부정도 긍정도 할 수 없었다. 유리엔은 거친 손놀림으로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고, 얼굴을 문질렀다.

에키네시아. 에키. 그대는 어떤 심정으로 그런 선택을 했는가? 평온한 삶도, 있을 자리도 포기한 지금, 그대는 어디에 있는가?

휘몰아치는 것들을 꾹 눌러 삼켰다. 그의 푸른 눈동자가 흠뻑 젖어 들었다가, 가라앉으며 짙어졌다. 목을 조르는 뺨을 치든 욕을 하든 에키네시아가 그에게 해야 할 일이다. 자신은 스스로를 벌할 자격도 없었다.

그러니 자책은 여기까지다. 지금 그가 해야 할 일은 후회와 절망이 아니었다. 그녀가 그렇게나 숨기고 싶어 했던 마검을 드러내면서까지 만들어낸 틈을 헛되이 보내지 않는 것.

복잡하고 끔찍하게 꼬여 있는 상황. 그리고 이 상황을 만들어낸 자들. 처음부터 용서할 생각 따윈 없었지만 이제는 아주 갈기갈기 찢어 버리고 싶었다.

그러려면 무엇을 해야 할지 잘 알고 있다. 그녀를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할지도 안다. 유리엔은 선택했다.

모든 것을 치워버리고, 그녀가 돌아올 자리를 만들겠다.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영광된 자리로. 그저 돌아오기만 해도 모든 것이 해결되도록. 그렇게 그녀를 기다리겠다.

더 이상 자책하고 있을 시간은 없었다. 그는 아메시스트를 더듬어 움켜쥐고 울음 같은 숨을 길게 토해내었다. 그것으로 감정을 갈무리했다. 그는 행동하기 시작했다.

12막. 만들어가는 것과 용서할 수 없는 것.

8월 30일. 3개월마다 한 번씩 열리는 생도 전체 순위전이 있는 날이었다.

‘신입생 순위전 말고는 순위전에 참가를 못 하는구나. 사관생도의 핵심인데 구경도 못 해보네.’

에키는 실없이 그런 생각을 하며 걸음을 재촉했다. 제국 북부의 관광지 콜본의 거리였다. 그녀의 고향에서는 아직 더위가 남아 있을 시기인데 이곳은 벌써부터 바람이 차갑다. 서늘한 공기를 들이마시자 목 안쪽을 꽉 채우고 있던 답답함이 조금 가셨다.

‘앨리스는 성실하니까 문제없고. 미하일도 테레사가 잘 이끌어줄 거고, 바라하 선배는 사실 사관생도의 수준이 아니니 1위 고정일 거고. 파티마 선배랑 테오도……. 뭐, 다들 잘하겠지.’

몇 안 되는 위즈덤 클럽원들을 하나하나 떠올려 보았다. 전원에게 지도대련을 했던 터라 그들의 검술도 연달아 떠올랐다.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몇 년은 된 것 같은 기억이었다.

길가 한쪽에 사람들이 바글바글했다. 그들이 몰려 있는 벽에 초상화와 함께 수배 전단지가 붙어있었다. 그녀는 눌러쓴 후드 끝자락을 당겨 내렸다.

“마검의 악마라니…….”

“로아즈 영지면 저기 저 남부에 있는 거잖아? 완전히 반대편인데, 설마 여기까지 오겠어?”

“모르지, 악마니까.”

“얼마 전에는 창천기사단장이 악마가 됐다더니만, 아젠카에 사는 친척 말로는 창천은 별일 없다던데. 단장이 진짜 악마가 됐으면 그렇게 평화롭겠어? 이것도 못 믿겠구만.”

“그거요, 실은 마검의 악마가 된 게 아니고 무슨 저주에 걸렸던 거라던데요? 그래서 저주 푸니까 되돌아 왔대요.”

“그랬어? 어이고, 그럼 그렇지. 성검의 주인이 악마는 무슨.”

“근데 어떤 놈이 저주를 걸었대? 그분이 어디 원한 사고 다닐 분은 아니잖아? 그랬으면 진작 성검을 잃었을 텐데.”

“3황자 전하한테 저주를 걸 만한 게 누구겠소. 원한도 없는데 이를 바득바득 갈아대고 있는 놈이야 뻔하지. 하여간……!”

“쉿, 목소리 낮추게. 그러다 자네 큰일 나.”

“누구? 누군데?”

“저 알아요, 마검의 악마가 저주를 걸었다던데요! 저기 저 수배지에 있는 저 여자 짓이래요!”

“그건 말도 안 되는 헛소문이고, 내가 듣기로는 말이야…….”

“어차피 네가 들은 것도 소문 아니냐? 대체 뭐가 맞는 거야?”

“아니, 그럼 저주를 푼 건 또 누구야?”

왁자지껄했다. 사람들마다 하는 말이 다 달랐다. 누군가가 짜증을 냈다.

“에이, 뭐가 이리 복잡해? 난 모르겠다.”

“그런데 마검이면 가는 곳마다 학살이 일어나는 것 아닌가? 그런 소식은 못 들었는데.”

“거, 왜, 남부에 성 하나가 하루아 침에 텅 비었다며. 생존자도 거의 없다던데, 거기서 날뛰었나 보네. 거기가 로아즈 아녀?”

“어쨌든 이 여자가 악마라고? 그럼 봐도 신고하기 전에 죽을 텐데? 제보하라는 게 무슨 의미가 있노?”

“그러게 뭐가 좀 이상하다니까요. 진짜 악마면 더 난리가 나야 하는 거 아니에요? 창천기사단이 막 추격해야죠. 근데 겨우 수배지나 나붙고 끝이라니.”

“설마 악마에도 가짜 진짜가 있겠어. 남부에서 난리가 나서 여기까진 안 들려오는 거겠지.”

“이건 좀 다른 얘긴데요, 여관 손님들이 얘기하는 걸 메리가 몰래 들었다고 전해 주더라고요. 요즘 수도 분위기도 심상찮아서 저것도 어쩌면 다 꾸며낸 걸지도 모른다고…….”

끊임없는 웅성거림이 들려왔다. 에키는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그들을 지나쳤다.

어둑하고 복잡한 골목 사이로 한동안 걷자 목적지가 보였다. 글자 일부가 떨어진 낡은 간판을 달고 있는 술집이었다.

그녀는 삐걱거리는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텅 빈 1층의 구석 테이블에 뜨개질을 하고 있는 노파가 있었다.

쐐기의 보스, 그랜마. 여기서 보게 될 줄은 몰랐던 사람이라 에키는 멈칫 섰다. 노파의 옆에 서 있던 던컨이 고개를 들어 에키를 보았다.

“어디를 다녀오셨습니까?”

“……그냥 산책.”

건성으로 답한 그녀가 노파의 맞은 편으로 다가왔다. 던컨이 반사적으로 의자를 빼주었고, 에키는 익숙한 듯 그 의자에 앉았다. 그랜마가 쉼 없이 놀리던 대바늘을 멈추더니 주름진 눈으로 던컨을 올려다보았다.

“전속하인이 다 됐구나, 아가.”

“…….”

“야단 치는 게 아니니 그리 긴장하지 마렴.”

식은땀을 흘리는 던컨에게서 시선을 뗀 그랜마가 맞은편의 에키를 바라보았다. 에키는 그녀가 짜고 있던 털실을 검지와 엄지로 슬쩍 들어 올렸다. 촌스러운 초록색의 싸구려 털실이었다.

“……위장이에요, 취미예요?”

“취미지, 아가씨. 술집에서 뜨개질을 하는 게 위장이라기엔 우습잖니.”

그랜마가 홀홀 웃었다. 아무리 봐도 매춘과 마약 빼고 다 하는 뒷골목 조직의 보스라기엔 지나치게 목가적인 인상이었다. 에키는 들어 올렸던 털실을 내려놓고 턱을 괴었다.

“콜본까지는 무슨 일로 왔죠?”

“아가씨를 보러 왔지. 내가 아끼는 아이가 아가씨에게 홀랑 넘어간 모양이니.”

“보스…….”

던컨이 난감한 듯 작게 그랜마를 불렀다. 그랜마는 던컨 쪽을 돌아보지도 않고 다시 대바늘을 놀리기 시작했다. 에키는 어깨를 으쓱였다.

“전 분명히 돌아가도 된다고 했어요. 이제 비밀도 아니니까.”

그랜마는 던컨이 에키네시아 로아즈가 마검의 주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는 바람에 그녀에게 한동안 끌려 다녔던 것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더 이상 비밀이 아니다. 대놓고 수배 전단지까지 붙은 상황이니 당연한 일이었다.

에키의 말에 던컨이 눈썹을 모았다.

“제가 있는 편이 낫다고도 하셨잖습니까, 아가씨. 확실히 유용하다고요.”

“있으니 편하긴 하다고 한 거지, 남으라고 한 적은 없는데.”

“단물만 쏙 빼먹고 버리시는 겁니까?”

“내가 네 주인도 아니고, 버리긴 뭘 버려.”

“그러면서 서류 작성에, 배달에, 정보 수집에, 각종 잡무까지 시키셨습니까?”

“언제는 뭐든 시키라며? 난 분명히 하기 싫으면 그냥 돌아가도 된다고 했어.”

“일을 시키면서 안 해도 된다고 하면 그걸 누가 믿습니까. 결국 하라는 거 아닙니까?”

던컨이 툴툴거렸다. 그 태도가 제법 친근해서, 그랜마의 눈이 가늘어졌다.

“아가, 짝사랑 중이었니?”

“……그건 절대로 아닙니다, 보스.”

그가 무슨 헛소리냐는 듯 찡그리며 답했다. 에키는 한숨을 쉬었다.

“잘 부려먹고 있긴 하지만, 어쨌든 제가 붙잡고 있었던 건 아니니까요. 데려가세요, 그랜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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