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을 든 꽃 165화
유리엔은 숨을 멈춘 채 상자 안에 놓인 랑기오사를 응시했다. 이리 쉽게 성검을 찾을 수 있을 줄은 몰랐다.
공작이 무슨 의도로 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에서 성검을 꺼내 내민 건지는 빤했다. 정말로 그를 위해 가져온 거라면 그 혼자 있을 때 은밀히 전달했을 테니까.
디아상트 공작은 자신이 절대 성검을 쥘 수 없으리라고 확신하고 있는 거다.
의도야 어찌되었든, 공작은 그에게 성검을 가져왔다. 그 점은 진심으로 고마울 정도였다. 그러나.
쥘 수 있을까.
유리엔은 확신할 수 없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선명하게 떠오르는, 살의에 물들어 있던 순간의 기억이 뇌리를 채운다. 공포에 질려 달아나는 병사. 2황자 휘하의 제국군이라 해도 말단 병사일 뿐이다. 무고한 피였다.
랑기오사가 귀에 못이 박히도록 설명해 주었던 ‘성검의 정의’를 되새겨 보았다. 성검이 악행을 판단하는 기준. 신이 아니라 인간이 만든 검이기에, 절대적인 정의가 아닌, 감정에 영향을 받는 가변적인 인간의 정의를 따르는 검.
인간의 사명감과 정의로 구성된 성검은 한 번도 악행을 저지르지 않은 자, 불의를 처단할 준비가 되어 있는 자, 정의를 추구하는 자를 주인으로 받아들인다.
그가 저지른 살인은 성검이 용서할 수 없는 악행일까. 아니면 타의에 의한 살인이었기에 악행까지는 아닐 것인가. 모든 것이 그 자신의 죄책감과는 별개로 랑기오사의 판단에 달려 있었다.
만약 성검이 그를 거부한다면…….
〈당신이 다시는 성검을 쥘 수 없게 되었더라도. 그래서 잊은 것들을 영원히 되찾지 못한다 해도.〉
〈그래도 괜찮아요.〉
에키네시아의 잦아들던 음성이 귓가에 맴돌았다. 가슴께를 적시던 감촉. 그녀의 괜찮다는 말은 정말 괜찮다는 뜻이 아닐 것이다. 그를 위해서 감내하고 견디겠다는 뜻이다. 유리엔은 그것을 모르지 않았다.
그래서 더 되찾고 싶었다. 대가를 지불하고 되찾을 수 있다면 무엇이든 지불하고 싶을 정도로. 랑기오사에게 애원할 수 있다면 애원을 해서라도.
주위 풍경이 희미해져 간다. 교활한 공작의 얼굴도, 숨죽여 지켜보고 있는 창천기사단원들의 얼굴도, 호기심 어린 눈으로 바라보는 현자들의 얼굴도, 그들 너머에서 아직도 들려오는 카르엠의 비명과, 난장판이 된 제국군의 소란마저도.
문득 솟아난 절박함이 물처럼 차올라 숨을 막았다.
제발.
무의식적으로 기원하며, 유리엔은 열려 있는 상자로 손을 뻗었다. 한 점의 얼룩도 허용하지 않을 것 같은 순백의 검으로 다가갔다. 천천히 회전하는 황금빛 문양들을 지나, 우아하게 장식된 손잡이에 그의 손끝이 닿았다.
만인에게 지탄받는 악인은 랑기오사를 만질 수조차 없다.
유리엔은 거부당하지 않았다. 그의 손가락이 느릿하게 손잡이를 말아 쥐었다. 입안이 바짝 마른다. 처음 랑기오사를 쥐었던 순간에도 이 정도로 절실하진 않았다.
갓 마스터가 되었던 유리엔 드 하르덴 키리에는 서임식 이후 바로 기오사 홀에 입장했었다.
기오사 홀은 창천기사단 본부의 지하에 있다. 기나긴 원형계단을 내려 가며 몇 겹의 보안과 마법진을 지나 기오사 오너가 문양을 인증해야지만 열리는 고대의 관문을 통과하면 넓은 복도가 나온다.
복도의 양쪽에는 방이 두어 개 있었다. 서임된 창천기사는 이곳에서 원하는 만큼 머물 수 있었다.
기오사에게 선택받지 못했다는 현실을 인정할 수가 없어서 장장 3년을 여기에서 버틴 기사도 있었다고 한다.
한 번 포기하고 나가면 특별한 공로를 세우거나 압도적인 실력을 보이지 않는 한 다시 기회를 얻지 못하기 때문이었다.
그 정도 제한을 두지 않으면 모든 기사들이 계속해서 기오사 홀에 들어가 보길 원할 테니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복도의 끝에 거대한 문이 있다. 희귀한 금속으로 만들어진 새하얀 문에는 많은 이름들이 새겨져 있었다. 기오사 홀에서 기오사의 선택을 받은 역대 오너들이, 홀을 나오면서 직접 새긴 자신의 이름들이다.
문은 보통 사람의 힘으로는 절대 열 수 없을 만큼 무겁다. 그러나 이 자리에 도달한 창천의 기사는 전원 마스터이기에, 홀로 이 문을 열고 기오사 홀 안으로 들어가게 된다.
기오사 홀은 하얗고 둥근 방이었다. 들어간 직후 마주하게 되는 정중앙에는 풍성한 천을 두른 얼굴 없는 신과, 신의 발치에 매달린 인간 대장장이의 조각상이 있다.
신은 양손에 두 자루의 신검을 본뜬 것을 들고 있었다. 시간검 카이로스기오사는 형태가 잘 알려져 있기에 정교했으나, 공간검 라키아기오사는 누구도 형태를 알지 못해 대강 뭉쳐놓은 점토 같은 모양이었다. 그 조각은 영원히 미완성일지도 모른다.
조각상 아래 제단에는 창천의 신념과 맹세가 네 장의 날개를 편 매 문양과 함께 새겨져 있었다. 그리고 그 제단 아래에서부터 길게 파인 열 개의 홈이 벽으로 이어진다.
각각의 홈은 다양한 색의 보석 가루로 채워졌고, 가장자리를 따라 고대어로 몇 줄의 문장이 쓰여 있었다. 그 홈이 닿는 곳에 있는 기오사를 상징하는 색과 문장들이었다.
홈과 둥근 벽이 만나는 곳마다 부조로 장식된 제단이 있었다. 제단에 있는 부조도 기오사마다 달랐다.
랑기오사는 황금으로 채워진 홈의 끝에 있는, 대리석과 금으로 장식된 제단 위에 놓여 있었다. 그 제단에는 마물을 베는 용사와, 전쟁터에 선 기사, 용과 싸우는 전사, 그리고 악마를 상대로 검을 든 천사 등의 부조가 새겨져 있다.
랑기오사의 제단 위쪽 벽에는 고대어로 ‘랑기오사’가 쓰여 있다. 그 뜻은 ‘올바름의 시험’이었다.
스물세 살의 유리엔이 가장 먼저 향했던 것은 랑기오사 쪽이 아니었다. 홀에 들어서자마자 무언가에 이끌리듯 다가갔던 것은 둠기오사였다. 귀검(鬼劍)이라는 이명이 있는 죽음의 검. 인간의 공포와 미련으로 만들어진 기오사.
왜 그것부터 쥐어봤던 건지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어쨌든 그는 둠기오사의 오너 조건을 충족하지 못했다.
다음으로 손을 뻗었던 것은 지금은 테레사의 것이 된 수호검 디몽기오사였다. 인간의 슬픔과 보호 본능으로 만들어진 검에는 아득하게 깊은 바다의 물결 같은 푸른빛이 일렁이고 있었다.
유리엔은 디몽기오사도 얻지 못했다. 스스로를 희생해서라도 지키고 싶은 것도, 목숨보다도 절실히 지키고 싶은 것을 잃어버린 슬픔을 느껴본 적도, 그때에는 없었기 때문에.
그 다음에 시도해 본 것은 정복검 레밍기오사였다. 인간의 기쁨과 정복욕으로 만들어진 새빨간 불꽃의 검. 디몽기오사와는 대척점을 이루며 서로 공명하는 쌍검이다.
정복검은 스스로를 불태워서라도 이루고 싶은 것이 있는 야심가를 주인으로 받아들인다. 그 검은 유리엔을 거부했다. 당연한 일이었다. 그는 그때까지는 열망을 모르는 인간이었다.
그 후에야 유리엔은 성검 랑기오사의 앞에 섰다.
[나는 널 보자마자 딱 감이 왔는데, 넌 왜 나부터 쥐지 않고 엉뚱한 녀석들을 건드리다 온 거냐?]
랑기오사의 첫 말은 그것이었다. 희미하게 웃음기가 묻은 음성이 이어졌다.
[이제부터 너는 내 주인이다.]
감고 있던 눈을 떴다. 유리엔은 상자 속에서 랑기오사를 꺼내 들었다. 쥐자마자 살의를 판별하고 조종하기 시작하는 마검 같은 경우를 제외하면, 보통 기오사의 선택을 받기 위해서는 피를 묻혀봐야 했다.
그는 랑기오사를 왼손에 쥐고 오른손바닥을 살짝 베었다. 흰 손바닥에 그어진 생채기에 방울방울 피가 맺혔다. 하얀 칼날에도 그 일부가 묻어났다. 뚫어질 듯 손바닥을 들여다 보았다. 그 말고도 주위 모든 사람의 시선이 그곳에 쏠렸다.
저 너머에서 들리는 제국군의 소란 외에는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는 정적 속. 피가 천천히 멎었다. 상처가 지워지듯 사라지며, 손바닥의 중심에 자그만 황금빛이 맺혔다.
그리고 동시에, 성검이 하얗게 타오르며 황금빛이 불꽃처럼 솟구쳤다. 강렬하고 성스러운 빛이었다.
정신없이 돌아다니던 제국군 측 사람들도 그 빛은 보지 못할 수가 없었다.
빛을 목격한 사람들이 하나 둘 말을 멈추고 제자리에서 굳었다. 유리엔의 근처에서부터 고요가 동심원처럼 퍼져나갔다. 마침내는 카르엠을 돌보고 있던 군의관과 신관마저 손을 멈추고 고개를 들었다. 근처에 있는 디아상트 공작의 눈동자가 요란하게 흔들렸다.
손바닥에 생겨난 황금빛이 번져나가 확장되며 서서히 하나의 문양을 형성한다. 정갈하고 아름다운 문양이었다. 그리고.
[……생각보다는 일찍 왔구나. 그래도 두 번 다시는 나를 기다리게 하지 마라, 주인.]
몹시 익숙한 음성이 그의 영혼을 울렸다.
성검 랑기오사가 다시 주인을 받아들였다. 신음과 감탄과 경악이 파도처럼 몰아쳤다.
이제 아무도 그에게 악마가 되었던 과거를 비난할 수 없을 터다. 그가 조금이라도 악했다면 결코 성검이 받아들이지 않았을 테니까. 그러니 결백한 그가 아니라, 그를 함정에 빠뜨리고 저주로 물들였던 자들에게 죄를 물어야 한다.
유리엔이 다시 성검의 주인이 되었다는 것은 그런 의미였다. 바론은 채신머리없이 환호할 것 같아 지그시 입술을 물었다. 단원들 사이에서 숨죽이고 있던 디트리히는 그런 부담 없이 시원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당사자인 유리엔은 몰아치는 충격을 느끼고 있었다.
혼이 연결된다. 성검의 자아와 그의 영혼이 이어져 맞물리며, 기억 속에 비어있던 지워진 시간들이 채워진다. 그것이 메꿔지는 충격으로 수면 아래에 가라앉아 있던 기억들과, 어렴풋하고 흐리던 기억들마저 모조리 끌려나온다.
시야가 아찔해지고, 구토감이 일 정도로 어지러워졌다. 그리고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것들이 선명해졌다.
“단장님!”
그가 일순 휘청거리자 곁에 있던 기사 하나가 급히 부축했다. 유리엔은 금세 균형을 잡고 바로 섰다. 그리고 피가 날 정도로 입술을 짓씹었다.
기억이 선명해지자 가장 먼저 느껴진 것은, 제 목을 스스로 조르고 싶은 충동이었다.
* * *
가짜 마검에 잠식된 후에도 그의 자아는 분명히 유지되고 있었다. 에키네시아는 자신을 잠식한 살의와 끝없이 싸웠었지만, 유리엔은 그런 상황은 아니었다. 그를 물들인 것이 마검이 아니라 마검의 마나를 기반으로 용의 뼈를 이용해 만들어진 일종의 저주였기 때문이다.
사지가 얽매여 꼼짝을 할 수 없는데 감각만이 살아 있는 기분이었다. 유리엔은 그 상태로 자신의 몸이 테레사와 디트리히, 현자 칼리스토를 공격하는 것을 지켜보았다. 제국군 병사를 죽이는 것을 지켜보았고, 창천기사단과 여섯 현자를 상대로 검을 휘두르는 것을 보았다.
그 순간의 처참한 기분이, 제 손발을 잘라서라도 검을 멈추고 싶은 절박함이, 미쳐버릴 것 같은데 외면할 수조차 없는 광경들이 뚜렷했다.
만약 그의 검을 테레사가 버텨내지 못했다면, 낯이 익지 않은 병사들뿐만 아니라 그가 아는 사람들, 그가 아끼던 사람들까지 죽었다면…….
상상만으로도 토할 것 같았다. 자괴감 같은 온건한 단어로 표현하기 어려운 감정이 얼음조각이 되어 전신을 파헤칠 것이다. 자신을 죽여서라도 멈춰주기만 한다면 그 사람이 신처럼 느껴질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에키네시아 로아즈는 이런 감각을 6년간 버텨냈다는 소리다. 스무 살에 마검을 쥐자마자 가족들을 죽이고, 스물여섯 살에 마검을 극복해 낼 때까지.
생지옥이 따로 없다. 머리로 알고 이해한다고 여겼던 것과 실제 일부나마 체감해 보는 것은 차원이 달랐다. 왜 마검의 마나에 물들었던 자들이 하나같이 미쳐 죽었는지 알겠다. 그걸, 그런 것을, 버텨내고 이겨내기까지 했다고.
까마득했다. 손끝이 떨렸다. 그녀는 그가 생각했던 것보다도 더 대단한 사람이었다. 어쩌면 그녀의 재능보다 그녀의 정신력이 더 대단할지도 모르겠다.
동시에 그녀가 원해서 저지른 것도 아닌 일들로 그토록 죄책감에 시달린 이유도 완전히 이해가 되었다. 손을 타고 흐르는 핏물의 감촉까지도 아직 생생하다고 했던가.
잊을 수 있을 리가 없다. 당연하다. 누구인지도 몰랐던 제국군 병사의 얼굴마저 이토록 선명한 것을. 대체 그녀가 감내한 고통은 어느 정도의 깊이일 것인가.
그런 그녀에게 그는.
마검을 쥔 채 숲 속에서 에키네시아와 마주섰던 것이 선명히 떠올랐다. 그 순간에 그녀가 내쉬던 숨소리까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