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을 든 꽃 164화
“가, 가짜 마검? 그럴 리가…….”
“그게 사람을 악마로 만들어 버리는 것을 똑똑히 보았는데, 가짜라니?”
“헛소리!”
“기오사를 만들어 냈다고? 그런 게 가능해?”
충격적인 말에 경악과 웅성거림이 퍼져나갔다. 에키는 발끝으로 가짜 마검을 툭 치며 중얼거렸다.
“무슨 수로 만들어 냈는지는, 만든 사람한테 물으면 되겠죠.”
그녀가 사람들 너머로 카르엠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사람들의 시선이 그녀의 시선을 따라 하나 둘 2황자에게 가 닿았다. 카르엠의 낯이 붉으락푸르락 달아올랐다. 그가 버럭 고함을 질렀다.
“개소리를 뭘 진지하게 듣고 있나! 저것이 돌변하여 날뛰기 전에 빨리 처리해야 할 것 아닌가!”
“개소리라뇨, 누구보다 잘 아실 분이. 당신이 그걸 단장님이 쥐도록 만들었잖아.”
그녀의 말에 주위가 얼어붙었다. 에키는 자신의 가슴팍에 달려 있던 황금빛 매 문장을 한 손으로 뜯어냈다. 손끝에서 금실이 하늘하늘 날렸다. 반짝이는 금속 문장이 흙바닥에 떨어졌다.
“이 순간부터, 창천기사의 자격을 버리겠습니다. 그러니 지금부터 제 행동은 아젠카와 상관 없는 독단입니다.”
술렁임. 커다랗게 떠져 흔들리는 푸른 눈동자. 에키는 웃으며 오른손의 장갑을 벗었다.
“제가 어떻게 단장님이 마검이 아니라 저주에 당했다고 확신했을까요. 저는 진짜 마검이 어디에 있는지 알고 있었거든요. 저기 나뒹구는 가짜가 아니라…….”
가죽 장갑이 아무렇게나 바닥에 나뒹굴었다. 검은 문양이 또렷하게 드러났다. 하얀 손에서 투명한 칼날이 솟아났다. 그녀는 마검을 움켜쥐었다.
“진짜 바르데르기오사를 말이죠.”
숨 막히는 정적이 사방에서 죄어들었다. 그리고 곧 비명이 터져나왔다.
“으, 아, 아아악!”
“아, 악마, 악마다!”
불과 며칠 전에 마검을 든 유리엔에게 죽을 뻔한 사람들이었다. 제국군들 중에는 공포에 질려 무기를 내던지고 달아나려는 자까지 있었다.
창천의 기사들이 검기를 끌어 올렸다. 바론은 반사적으로 살릭기오사를 꺼내 쥐었다. 현자들이 주문을 외며 마법을 준비하는 것이 보였다.
유리엔은 창백해진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맡기겠다고 약속했지만, 이런 식일 줄은 예상도 못했다.
이렇게 준비 없이 대놓고 마검을 드러내다니. 대체 어떻게 안전하다는 걸 증명하려고? 자신이야 그녀에게 대책 없이 기울어지는 상태니 수긍했다지만, 다른 사람들이 그리 쉽게 납득할 리가 없었다.
바르데르기오사에 쌓인 악명과 전설이 아니더라도 유리엔이 얼마 전에 악마가 되어 날뛴 덕에 그럴 수밖에 없었다. 목줄을 죄고 사지를 결박하더라도 안심하지 못해서 일단 죽여놓고 살펴보자는 의견이 대다수일 텐데.
‘그녀를 죽이는 건 불가능하겠지만, 그래도…….’
자신이라도 그녀가 안전하다는 것을 보장해 주어야 하지 않나. 성검을 잃었고 악마가 된 적이 있어서 발언권이 약해졌겠지만 그래도 그는 창천기사단의 단장이자 아젠카의 군주였다.
나서려던 그는 에키네시아와 눈이 마주쳤다. 그녀가 작게 고개를 저었다, 약속을 지키라는 듯이. 유리엔은 반사적으로 멈추고 말았다.
그리고 카르엠이 고함을 질렀다.
“저것을 봐라, 역시 창천이 마검을 숨기고 있었던 거다! 저 악마를 당장, 컥!”
순식간이었다. 어느새 카르엠의 앞에 선 에키가 그의 멱살을 잡아채 넘어뜨리고 가슴팍을 발로 밟았다. 카르엠이 반사적으로 몸부림치자 그녀의 부츠가 갈비뼈를 으스러지도록 짓눌러 고정했다. 그는 숨 막히는 신음을 토해내며 반항을 멈췄다. 곁을 지키던 근위기사들이 뒤늦게 그녀를 발견하고 절규했다.
“황자 전하!”
검기가 실린 검과, 기겁한 현자들이 발동한 마법이 쏟아지기 전의 찰나. 그녀는 제 발 아래에 깔린 2황자를 내려다보았다. 이 목을 베어버리는 건 얼마나 쉬운 일인가.
하지만 여기서 사람을 죽였다간 그야말로 마검의 악마다. 게다가 카르엠에게 그런 편안한 죽음을 주고 싶지 않았다.
‘적어도 로아즈가 흘린 피만큼은 살아서 고통받아야지.’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녀 자신이 이자를 절실히 죽이고 싶기 때문에 죽여서는 안 되었다. 살의에 잠식되어 버릴 테니까.
그렇다고 내버려두고 싶지도 않았다. 그러기에는 분노가 가라앉질 않는다. 멀쩡하게 돌아다니게 했다간 또 무슨 짓을 저지를지 모른다는 현실적인 이유도 있었다.
마나 실드가 펼쳐졌다. 급하게 발동된 마법과 화살과 날아온 검기가 모조리 튕겨졌다. 현자들과 기오사 오너가 있고 마스터가 한둘이 아니니 오래 버티진 못할 테지만 이 정도 여유는 있었다.
그녀는 공포에 질려 자신을 올려다보는 초록색 눈동자를 응시하며 말했다.
“이건 그에게 마검을 선물해 준 보답이에요, 빌어먹을 황자 전하.”
바르데르기오사가 카르엠의 어깻죽지에 박혔다. 유리엔이 스스로 잘라낸 것과 같은 위치였다. 고통에 익숙하지 않은 카르엠이 찢어지는 비명을 내질렀다.
“크아아악!”
그녀는 그대로 검을 내리그어 그의 왼팔을 잘라냈다. 그녀의 손에서 솟구친 마나가 칼날이 되어 잘린 왼팔을 으스러뜨렸다. 다시는 회복할 수 없도록. 살점이 튀었으나 그녀는 눈도 깜박이지 않았다.
“그리고 이건 동생 것.”
탁 튕긴 손가락을 따라 튀어오른 마나가 카르엠의 왼쪽 눈에 틀어박혔다. 안구가 터졌다. 카르엠에게서 사람 같지 않은 기괴한 비명이 솟구쳤다.
더 강력한 마법이 준비되는 기척이 느껴졌다. 더는 못 버틸 것이다. 그녀는 마지막으로 속삭였다.
“나머지 피 값은 나중에 받으러 올 테니까, 되도록 얌전히 처박혀 있으세요. 차라리 죽여달라 애원하게 만들어 버리기 전에.”
검기와 마법이 허공을 갈랐다. 그녀는 이미 그 자리에 없었다. 그 자리에 남은 것은 끔찍한 고통으로 몸부림치는 카르엠뿐이었다. 잘린 어깨와 눈에서 피가 분수처럼 쏟아졌다.
“전하! 전하!”
“세상에, 빨리 치료를……!”
“악마는 어디로 간 건가!”
“저기에!”
에키는 나는 듯이 달렸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 방법이 가장 나았다.
마검을 숨긴 채 일을 진행하려면 계속 발목을 잡힐 것이다. 그러다가는 또 무슨 더러운 음모에 휘말릴지 모른다.
황태자의 장인이라 당장 어찌할 수 없는 디아상트 공작이야 그렇다 쳐도, 2황자를 무사히 내버려둔 상태로 잡혀 격리된 채 그녀가 악마가 아니고 안전하다는 걸 해명하고 있을 수도 없었다.
그런 상태로 얽매여 있는 건 인질로 잡히는 거나 다름없었다. 그렇게 되면 주위 사람들을 지킬 수도 없다.
그러니 도주해야 했다.
등 뒤로 화살과 마법과 검기가 따라붙었다. 그녀는 반격하지 않고 쳐내거나 막기만 하며 조금 전에 타고 왔던 말 위에 올라탔다.
말을 몰아 캠프를 벗어났다. 멀리서 경악한 얼굴로 말고삐를 쥐고 있는 던컨이 보였다. 눈이 마주치자 무슨 생각을 한 건지 그가 급히 말에 올라타 손짓을 했다.
고향이니만큼 로아즈 시 근처의 지리는 잘 알고 있었다. 에키는 던컨이 어디로 향하는지 금세 알아차렸다. 로아즈 성 근처의 강에 놓여 있는 다리.
한참 앞서 있는 던컨이 먼저 다리를 건넜다. 로아즈 시의 수원이 되는 이 강은 폭이 넓고 물살이 강해서 단단한 암석으로 견고하게 다리가 건설되어 있었다.
에키는 다리를 건너며 뒤를 흘깃 돌아보았다. 근위기사들이 말을 타고 쫓아오고 있었다.
상대하는 것은 쉬우나 상대해서는 안 된다. 죽여서도 안 된다. 악마라는 것을 부정하기 어려워지니까.
그래서 그녀는 다리의 중간 지점을 지나치자마자 뒤쪽을 향해 검을 뿌렸다. 그녀의 마나로는 부족해 순간적으로 마검의 마나를 끌어올렸다.
거대하고 새카만 검기가 거인의 칼날처럼 다리를 내려쳤다. 암석이 으스러지며 다리가 무너져 내렸다.
“으악!”
“머, 멈춰!”
기겁한 근위기사들이 고삐를 당기며 말을 멈춰 세웠다. 몇몇은 늦어서 강으로 떨어졌다.
마검의 주인은 뒤를 돌아보지 않고 사라져 버렸다.
* * *
캠프는 아수라장이 되었다. 유리엔은 에키네시아를 뒤쫓으려는 창천기사단을 억지로 멈춰 세웠다. 바론이 희게 질린 얼굴로 그를 향해 말했다.
“단장님, 그녀는 제니스입니다! 제니스가 마검에 물들다니 얼마나 끔찍한 일이 벌어질지……. 당장 쫓아야 합니다!”
“바론 경, 그녀가 악마로 보이나?”
“그건 분명히 바르데르기오사였습니다. 문양에서 꺼내기까지 했으니 확실합니다. 늦기 전에 막아야 합니다!”
“그래서, 그녀가 악마로 보이냐고 물었다. 악마라면 왜 아무도 죽이지 않았지?”
유리엔이 그를 가로막은 채 짓씹은 말을 뱉어냈다. 어정쩡하게 근처에 모여 있던 창천기사들의 시선이 그에게 집중되었다. 현자들도 그들을 지켜보고 있었다. 바론이 이를 악물었다.
“당장은 괜찮다 쳐도 마검을 쥐고 물들지 않을 리가 없습니다. 2황자를 잔인하게 베는 것을 보셨지 않습니까! 그러니 지금 당장 막아야 합니다. 단장님께서도 결국 악마가 되셨잖습니까!”
“그건 진짜 바르데르기오사가 아니었다. 그리고, 악마가 된 나를 되돌린 게 누구인지 그새 잊었나?”
서늘한 물음에 바론이 입을 다물었다. 마검을 보고 충격에 빠졌던 머리가 그제야 약간 식었다. 바론이 진정하자 유리엔은 마른세수를 했다.
마검을 대놓고 드러내고, 가짜 마검으로 음모를 꾸몄다고 선언하고, 카르엠의 왼팔과 눈을 망가뜨리기까지 했다. 이렇게 되면 황제가 끝까지 그녀를 악마로 몰며 잡아 죽이려 들 것이다.
그녀가 창천의 문장을 스스로 뜯어냈으니 창천은 빠져나갈 구멍이 생긴 셈이다. 창천이 그녀와의 관계를 부정하면 결국 모든 화살을 그녀에게 돌릴 수 있다.
유리엔은 상대적으로 자유로워진다. 가짜 마검임을 증명하기도 쉽고, 어떻게 악마가 되었다가 되돌아올 수 있었는지 설명할 수 있고, 지금의 그가 안전하다는 확신도 줄 수 있다.
마검의 존재를 더 이상 숨길 필요가 없어지므로 모아두고 조사하던 증거들을 자유롭게 꺼낼 수 있다. 창천이 마검을 감춰두고 이용한 것이 아니냐는 의혹은 마검의 음모를 밝히면서 해명이 가능하다.
……이걸 의도한 거였나. 모든 것을 그녀 탓으로 돌려놓고, 그녀가 악마로 쫓기는 사이에 안전하게 음모를 밝혀내라고?
어지러웠다. 유리엔은 마디가 하얗게 될 정도로 주먹을 움켜쥐었다. 창천기사단원들이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명을 내리고 움직여야 하는데 그저 아득해졌다. 그녀가 빌려준 뒤 돌려받지 않은 하얀 검. 허리에 걸려 있는 그것이 갑자기 무겁게 느껴졌다.
그런 그에게 누군가가 다가왔다. 희끗한 붉은 머리. 디아상트 공작이었다.
“정말로 되돌아 오셨군요. 마검을 극복하신 겁니까?”
“……그건 바르데르기오사가 아니었소, 디아상트 공.”
“어쨌든 참으로 다행입니다. 전하께서 무사하길 애타게 바라고 있었습니다. 제 딸을 위해서라도 말입니다.”
공작이 온화하게 웃었다. 유리엔은 무표정하게 그를 바라보았다. 기억이 뒤죽박죽이라 해도 디아상트 공작이 드라코툼바 성에서 마검을 연구했었다는 것은 확실히 기억하고 있었다. 로잘린의 가족을 구해낸 일도.
공작이 손짓을 하자 뒤에 있던 하인이 상자를 가져왔다. 공작은 웃으며 말했다.
“이것을 전해 드려야겠군요. 오늘 아침에 제 수하가 로아즈 시내에서 발견한 것입니다. 아젠카에 돌려보내려 했는데, 주인이 오셨으니…….”
시종이 상자를 열었다. 그 안에는 하얗게 빛나는 우아한 검이 놓여 있었다. 황금빛 문양이 그것을 휘감아 돌며 은은하게 빛났다.
성검 랑기오사.
근처에 있던 사람들의 눈이 커졌다. 여기저기서 헛숨을 들이키는 소리가 들려왔다. 공작은 매끄러운 어조로 말했다.
“정말로 제대로 돌아오신 거라면, 성검을 쥐실 수 있겠지요.”
디아상트 공작은 제국군 측에 유리엔의 손에 죽은 자들이 있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무고한 자를 죽였고 살의에 물들었으니 창천기사단장은 이제 성검을 쥘 수 없을 것이다.
성검을 쥐지 못한다는 건, 창천기사단장이 더는 정의롭지 않다는 증거가 된다. 한 번 악마가 되었으니 또다시 악마가 될지도 모른다는 의심을 일으킬 수 있다. 창천기사단의 존경도 흐려질 것이다.
공작은 현자들이 지켜보고 있는 것을 흘깃 확인했다. 부드럽게 휘어진 눈매 속에서 그의 눈동자가 교활하게 빛났다.
‘뭐, 만에 하나 잡는다 해도 성검을 되찾아준 대가로 공로와 신뢰를 얻으면 그만이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