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을 든 꽃 163화
그들은 하루 종일 이동했다. 이동하는 내내 에키는 그에게 최대한 설명을 해주었다. 해가 지고 나서도 뛰어난 시력 덕분에 한동안은 더 움직이다가, 완전히 어두워진 후에야 쉴 준비를 했다.
유리엔은 당연한 듯이 나서서 식사를 준비했다. 몸에 밴 행동이었다. 그가 만든 요리는 여전히 맛있었다. 이 상황이 어쩐지 우스워서 에키는 조금 웃었다.
식사를 마친 후에 각자 붕대를 갈았다. 낮에 날뛰는 바람에 그녀의 부상은 또 덧나 있었다. 유리엔은 그녀가 붕대를 가는 것을 돕다가 벌어진 상처를 보고 눈살을 찌푸렸으나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에키는 약통을 정리하며 입을 열었다.
“내일 오후쯤에는 캠프에 도착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캠프라면…….”
“맞아요, 창천기사단과 제국군이 머물고 있는 캠프예요. 기억나세요?”
“어느 정도는.”
유리엔은 미간을 좁히며 고심했다. 조각난 퍼즐처럼 흩어져 있는 기억들을 그러모아 되새겼다.
“로아즈 시에 마검이 나타나 학살이 일어나서 토벌단을 꾸렸었고, 성검에 대한 의혹이 있어서 그것을 증명했었다. 그리고…….”
중얼거리던 그가 퍼뜩 놀라 고개를 들었다.
“잠깐, 로아즈? 그대의 성이 분명…….”
에키는 쓰게 웃었다.
“네, 제 가문이에요.”
“그럼 그대의 가족들은? 무사한가?”
“……단장님의 안배 덕분에, 다행히 무사해요.”
그녀의 말에 언뜻 생각이 났다. 사열식이 끝난 직후, 그녀와 닮은 보라색 눈동자의 소년에게 마도구를 건네주었던 일.
‘보라색 눈동자?’
무언가 강렬한 것이 떠오르려 했다. 그러나 그것이 완전히 떠오르기 전에 에키가 그에게 말을 걸었다.
“내일 캠프에 가면, 아마 난리가 날 거예요. 그때 사태를 진정시키는 걸 제게 맡겨 주셨으면 해요.”
“경이?”
“네. 단장님께선 지금 기억이 혼란스러운 상태시니.”
“무슨 뜻인지 알겠다.”
유리엔은 창천기사단과 현자들이 악마가 된 그와 전투를 벌였다는 것을 오늘 걸으며 에키로부터 들었었다. 이것도 듣고 나니 점차적으로 기억이 떠올랐다. 제 검에 베여 피를 흘리던 단원들의 모습이.
천만다행인 것은 창천기사단원 중에 그에게 죽은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사실이었다. 하지만 제국군 중에는 그의 손에 죽은 자들이 있었다. 되새길수록 그 순간의 기억이 선명해졌다.
유리엔은 필요할 경우 살인을 꺼리지 않는다. 검을 드는 기사인 이상 당연한 일이었다. 악을 처단하는 것은 성검의 본능이기도 했다. 무한한 자애를 베푸는 건 엘기오사지 랑기오사가 아니었으므로.
그러나 살의에 휘둘려 행한 살인은 전투나 토벌 와중에 사람을 베는 것과는 너무나 다른 감각이었다.
유리엔은 멀거니 제 손을 내려다보았다. 원해서 저지른 짓도 아니건만, 움직여 애꿎은 목숨을 거둔 건 제 몸뚱이인 터라 찌르는 듯한 죄책감이 일었다. 그는 가만히 손을 말아 쥐었다.
악마인 모습을 보였던 데다 기억도 혼란한 상태인 그가 해명하려 해봤자 상황은 꼬이기만 할 것이다.
“……확실히 경의 제안대로 하는 편이 낫겠군.”
“그럼, 한 가지만 약속해 주세요.”
“말해라.”
“무슨 일이 일어나더라도 저를 믿고, 나서지 말아주세요.”
에키가 또렷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 유리엔은 잠깐 침묵하다가, 그 눈을 마주하며 되물었다.
“무슨 일이 있더라도?”
“네. 저를 믿고 그렇게 약속해 주실 수 있나요?”
그 물음이 그의 반발을 막았다. 믿어줄 수 있냐고. 그로서는 믿겠다고 답할 수밖에 없는 물음이었다. 유리엔은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다. 약속하지.”
기억이 온전했다면 절대로 하지 않았을 수긍이었다. 현재 상황과 에키네시아에 대해 알고 있었던 유리엔이라면, 그녀가 어떤 식으로 해명하려는 건지 눈치를 챘을 테니까.
지금의 그는 낯선 죄책감과 흩어진 기억, 그리고 이해하기 어려운 감정을 감당하는 것만으로도 벅찼다. 게다가 깨어난 이후로 계속 그녀가 주도하는 대로 움직이는 상태였다. 자연스럽게 그녀를 믿고 의지하게 된다.
에키는 희미하게 웃었다.
창천기사단이 마검을 숨겨 두었다는 오명에 휩쓸리고, 유리엔이 악마가 된 것을 알게 된 이후부터 계속해서 생각하고 있었다. 어떻게 하는 것이 나을지.
시간을 들이면 증명할 수 있다. 가짜 마검을 입증하고, 란셀리드가 인질로 이용되었음을 증언하고, 마석 목걸이의 유래를 밝히고, 콜본에서 디아상트 공작과 2황자 간의 관계에 대한 증거를 찾고, 마석 노트가 공작의 것임을 증명해서 창천에 대한 의심을 완전히 벗은 후에, 로아즈로 보내진 마검의 음모를 공표하고, 로아즈 참사로 흐려졌을 그 증거를 수색하고, 그리고 또…….
‘그런 식으로는 너무 늦어.’
상식적이고 올바르게 진행하기 위해서는 시간이 걸린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유리엔도 분명 그것을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그가 차근히 돌아가는 계획을 택한 것은, 정의와 신념만을 위해서는 아니었다. 마검의 주인인 그녀를 보호하기 위해서였다.
‘나를 지키려고, 내게 마검이 있다는 사실을 감추려 하니 이렇게 복잡해지는 거야.’
그렇게 시간을 들인 결과가 무엇이었던가. 로아즈에서는 참사가 일어났고, 란셀리드는 죽을 뻔했으며, 유리엔은 악마가 되었었다.
그들의 적은 그들이 생각했던 것보다 더 악랄하고, 더 추악했으며, 더 난폭했다. 그러니 정석적으로 유리엔이 휘말린 음모를 밝혀나가면, 그 자들이 또 무슨 짓거리를 벌일지 알 수가 없었다.
그녀 주위의 사람들이 위험해지는 것은 이제 지긋지긋했다. 그래서 마음을 먹었다.
복잡한 매듭을 푸는 대신 잘라내 버리기로. 모든 화살이 그녀 자신에게 향하도록.
‘난 얼마든지 버틸 수 있으니까.’
그 결심의 배경에는 유리엔에 대한 신뢰도 있었다. 기억이 온전하지 않아도 그는 그였다. 바론에게 준 서류나 던컨이 가지고 있을 두 번째 서류에 정리된 내용만으로도 그는 무엇을 해야 할지 알아차릴 터다.
그녀의 가족도, 간신히 살아남은 로아즈의 생존자들도, 아젠카에 있는 사람들도, 그리고 유리엔 본인도 그가 지킬 것이다. 그러니 그녀는 매듭을 끊기만 하면 된다.
“……경, 성검이 어디에 있는지 혹 알고 있나?”
제 손을 들여다보고 있던 유리엔이 문득 물었다. 에키는 고개를 저었다.
“단장님이 성검을 포기한 건 아마 가짜 마검을 쥔 직후일 거예요. 부단장님 말로는 디트리히 경이 그 일 이후에 몰래 그 근처를 뒤졌다는데, 성검은 보이지 않았다더군요. 따로 수색을 더 할 예정이라고는 하셨지만…….”
“……누군가가 빼돌렸을 확률이 높겠군.”
“정황상 아무래도 그렇겠죠.”
그녀가 한숨을 쉬었다. 유리엔은 깊게 생각에 빠져들었다. 어떻게든 성검을 되찾고 싶었다. 절박한 심정이었다.
에키는 그런 그를 조용히 지켜보았다. 긴 은발을 늘어뜨린 채 앉아 눈을 내리깔고 있는 그는 서늘한 조각상처럼 보였다.
몹시 아름다웠으나, 그녀는 더 아름다운 그를 알고 있었다. 그녀를 보고 웃던 그.
눈앞에 그가 있는데도 그가 그리웠다. 웃는 모습이 보고 싶었다. 예전 같은 미소를 다시 볼 수 있을까. 분명 무사히 되돌아온 것만으로도 신께 감사했는데, 기억하지 못해도 괜찮다고 말하기까지 했는데, 지켜보고 있으니 어쩔 수 없는 욕심이 돋아났다.
예전처럼 웃고, 예전처럼 수줍어하고, 예전처럼……. 얼마 되지 않은 기억들인데도 까마득하게 느껴진다. 그녀는 가만히 눈을 감았다.
* * *
7월 26일, 해가 기울어가는 오후.
던컨은 나뭇가지에 앉아 멀찍이서 로아즈의 창천기사단 캠프 쪽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러다 에키네시아가 맡긴 두 통의 편지와 하나의 서류를 내려다보았다. 자신이 그 여자가 감시하고 있지도 않는데 쐐기로 돌아가지 않고 여기에 있는 이유는 뭘까.
‘……유언 같아서인가.’
던컨은 고아로 자라며 뒷골목에서 구르다가 조직의 후원을 받아 검을 배우고, 쐐기의 간부로 오랜 기간 지냈다. 마스터인 덕에 젊어 보이지만 실제 나이는 삼십대 후반이었다.
인생의 굴곡만큼 별의별 사람들을 다 만나보았다. 하지만 에키네시아 로아즈 같은 사람은 처음 보았다. 고작 며칠 함께 있었을 뿐인데 놀란 횟수는 셀 수도 없었다.
그녀의 수발을 들며 돌아다니는 건 의외로 그의 성미에 맞았다. 그녀는 어떤 면에서는 그의 주인인 그랜마와 비슷하지만, 다른 점이 더 많았다. 까탈스럽지 않고 태도가 기사보다는 용병에 가까운데도 묘하게 우아한 몸가짐이라던가. 사실 백작 영애이니 귀족 아가씨다운 게 정상이긴 하지만. 어쨌든 그 다른 점들이 꽤나 인상적이었다.
흥미와 감탄은 호감으로 기울기 쉬운 감정이다. 그 대상이 자신이 익힌 분야에서 놀랍도록 탁월한 실력을 가지고 있다면 더더욱 그렇다.
던컨은 가능하면 계속 그녀를 따라다니고 싶었다. 그건 남녀 간의 감정이 아니라 그저 에키네시아 로아즈라는 인간에 대한 순수한 호감과 호기심이었다. 그렇다고 쐐기를 배신하고 싶진 않았다.
‘그녀 근처에 있는 것만으로도 엄청난 것들을 알게 되니 조직에도 도움이 되지 않을까. 그녀 자신에 대한 것도 그렇고.’
아예 그랜마에게 허락을 받아볼까 싶었다. 아마 그랜마는 반길 것이다. 조직을 혼자서 짓밟을 수도 있는 강자를 던컨이 전담하면서 친분을 쌓는 건 쐐기 입장에서도 환영할 일일 테니까.
그러니까 그녀가 무사히 돌아왔으면 좋겠다. 던컨은 그런 생각을 하며 산의 끝자락에 시선을 주었다. 그 덕에 그는 누구보다 먼저 그들을 발견했다.
“……!”
던컨은 출발할 때 에키네시아와 자신이 탔었던 말 두 마리를 산길 초입에 숨겨뒀었다. 돌아오는 길에는 제 말만 타고 왔고, 그녀가 탔던 말은 잠깐 돌본 후에 그 자리에 그대로 두었다.
그가 두고 왔던 바로 그 말 위에 한 쌍의 남녀가 탄 채 캠프로 달려오고 있었다. 멀리서도 확연히 구별되는 엷은 분홍빛 머리카락과, 햇살을 받아 반짝이는 은발이 바람에 휘날렸다.
던컨보다 조금 늦게 그들을 발견한 캠프가 소란스러워졌다. 비명, 경악, 고함, 종소리, 무언가가 떨어지고 부서지는 소리, 무기를 꺼내드는 소리까지.
난리가 난 와중에 월등한 덩치 탓에 눈에 확 띄는 부기사단장이 튀어나왔다. 달려가는 걸음이 어찌나 급한지 중간에 넘어질 듯 비틀거리기까지 했다.
캠프가 가까워지자 말의 속도가 줄었다. 은발의 남자가 먼저 내려서 분홍 머리의 여자에게 손을 내밀었다. 제복 차림의 그녀는 멈칫했다가, 곧 몸에 배인 귀족적인 태도로 그의 손을 잡고 말에서 내렸다.
그사이 부기사단장이 그들 앞에 도착해서 멈춰 섰다. 에키네시아가 그를 향해 경례했다.
그 광경을 멀리서 지켜보던 던컨은 저도 모르게 입가를 실룩였다. 미소까진 되지 못했어도 분명한 안도가 드러난 표정이었다.
그는 자신이 그런 얼굴을 하고 있는 줄도 모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제 필요 없어진, 그녀가 맡겼던 것들을 아무렇게나 품에 쑤셔 넣고 짐을 챙기기 시작했다.
* * *
캠프가 발칵 뒤집혔다.
캠프에 남아 있던 인원은 얼마 되지 않았다. 제국군은 대부분 포위에 동원되었고, 창천기사들은 수색을 나갔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남아 있는 것은 2황자와 디아상트 공작, 그들을 호위하기 위한 부대와 근위기사들, 창천기사단의 보조인원 일부와 악마와의 전투에서 부상당했던 열 명의 기사들, 마탑으로 돌아가는 대신 캠프에서 회복하고 있던 현자들, 비전투원인 샤이, 그리고 바론이었다.
유리엔을 보자마자 경계를 서고 있던 병사들이 새파랗게 질려서는 창과 활을 들었다. 소식을 듣고 뛰쳐나온 부상당한 창천기사들은 전부 검을 들고 있었다. 체력이 부족했던 샤이가 급한 부분만 치유했기 때문에 대부분이 아직 붕대를 감고 있었다.
순식간에 몰려든 자들이 그들을 둘러쌌다. 하나같이 귀신을 보는 듯한 얼굴로 유리엔을 보고 있었다. 다른 표정을 짓고 있는 것은 미리 알고 있었던 바론뿐이었다.
바론은 한껏 차오른 눈물을 간신히 참고 있었다. 부기사단장이라는 지위가 아니었다면 나이고 뭐고 꺽꺽 대며 울었을지도 모른다. 에키는 그를 향해 경례를 했다.
“기사 에키네시아 로아즈, 임무를 마치고 귀환했습니다.”
“……수고했다. 그리고 고맙다, 정말로. 정말로 고맙다.”
바론이 목이 메여 답했다. 겨우 며칠 사이에 몇 년은 늙은 것 같은 안색이었다. 그것에 마음이 쓰려 유리엔이 바론에게로 다가가 입을 열려는 순간, 2황자를 위시한 인원들이 나타났다. 카르엠은 은발의 유리엔을 보자마자 악귀처럼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뭣들 하느냐, 악마가 나타났는데!”
새된 고함소리에 제국군이 반사적으로 창을 치켜세우고 활을 겨누었다. 근위기사들이 검을 뽑아드는 소리가 요란했다.
물론 창천기사단은 귓등으로도 그 말을 듣지 않고 멀거니 자신들의 단장만 쳐다보았다. 뒤늦게 나타난 현자들은 놀라 서로 수군거리기만 했다.
유리엔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그러나 그는 약속대로 나서지 않고 침묵했다.
대신 에키가 한 걸음 앞으로 내디디며 망토로 둘둘 말고 있던 것을 꺼냈다. 그녀는 2황자를 무시하고 현자들과 창천기사단 쪽을 향해서 말했다.
“단장님은 악마가 아닙니다. 마검의 악마가 되었던 적 자체가 없어요. 그래서 되돌아오신 거예요.”
“그게 무슨…….”
“단장님을 물들였던 건 바르데르기오사가 아니라 저주였거든요.”
그녀는 망토에서 풀어낸 물건을 내던졌다. 챙그랑, 하는 소리와 함께 ‘마검’이 그녀의 발치에 나뒹굴었다. 그것을 알아본 사람들이 혼비백산하여 뒤로 물러났다. 에키는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이건 가짜예요. 누군가가, 단장님을 악마로 만들어 처형하려는 목적으로 만들어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