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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을 든 꽃-162화 (162/211)

검을 든 꽃 162화

에키는 완전히 당황했다. 수많은 의문이 있을 텐데, 이런 것을 가장 먼저 물을 줄은 몰랐다. 그것도 저런 표정으로.

“그, 으, 그러니까, 그건…….”

어쩔 줄 모르는 그녀의 태도 자체가 무엇보다 정확한 대답이었다. 유리엔은 그녀에게 대체 왜 그랬냐며 화를 내고 싶은 충동과, 갑자기 솟구치는 눈물을 쏟고 싶은 충동과, 그녀를 끌어안고 가는 턱을 움켜쥐어 입을 맞추고 싶은 충동을 동시에 느꼈다.

그러나 그는 그중 어느 것도 드러내지 않고, 그녀가 들고 있던 마법 가방을 빼앗아 들기만 했다. 얼결에 가방을 뺏긴 에키는 그가 앞서 걷는 것을 멀거니 지켜보았다.

“시간이 없다고 하지 않았나. 우선 가지. 이쪽인가?”

“아, 네. ……단장님, 지금, 제 말을 전부 믿으시는 건가요? 왜요?”

그녀는 그를 뒤따르며 저도 모르게 따지듯 물었다. 유리엔은 뒤를 돌아보지 않고 되물었다.

“거짓이 있었나?”

“아뇨, 그런 건 아니지만, 그래도.”

“그럼 되었다.”

“……제가 두렵지 않으세요?”

떨리는 음성이었다. 에키는 그 자리에 우뚝 서서 말했다.

“아깐 경계하셨잖아요. 어떻게 갑자기 믿을 수 있게 되신 건가요?”

“경은 악마가 되지 않았고, 마검에 휘둘리지도 않았다. 돌아서는 자들은 살려 주기까지 하지 않았나. 그럴 필요가 없는 자들인데도.”

걸음을 멈춘 유리엔이 그녀를 돌아보았다. 그는 한 차례 호흡을 고르고 차분하게 말했다.

“에키네시아 경, 나는 명백한 사실을 막연한 공포에 질려 외면할 생각은 없다. 이미 주어진 단서들을 조합하지 못할 정도로 어리석지도 않다.”

“……주어진 단서라니, 어떤 걸 말하시는 건가요?”

“경은 저자들을 향해 2황자가 주인이냐고 물었지. 저들은 부정하지 않고 살기를 보였다. 또한 저들은 그대가 들고 있는 마검을 보고도 당황하지도 달아나지도 않았다. 예상하고 온 것처럼. 내게 있던 랑기오사가 사라졌고, 경이 들고 있는 망토 속에는 마검과 똑같이 생긴 물건이 있다. 따라서 내가 처한 상황은 경이 말한 그대로겠지. 그리고 나는, 경의 부상을 보았다.”

차분하게 시작했던 말이 이어지면서 조금씩 끓어올랐다. 그의 턱에 바짝 힘이 들어갔다.

“경, 나는 내게 등을 맡겼던 자를 의심할 정도로 어리석지 않다. 분명히 보이는 희생을 모른 척할 정도로 수치를 모르는 자도 아니다. 기적에 가까운 일이 일어났음을, 그것을 해 낸 것이 경임을 알아차리지 못할 정도로 둔하지도 않다. 마검을 소유하고 있다는 것을 밝힌다는 게 어떤 의현을 짊어지는 일인지도 잘 알고 있다. 무엇보다도…….”

내가 모르는 것들을 알고 있는 몸이, 자꾸만 그대를 향해서. 머릿속이 멍해질 정도로 열기가 오르고, 가슴과 목이 돌처럼 굳어지려 하고, 원인 모를 애달픔이 눈가를 달구고, 이해할 수 없는 충동이 솟아나서.

유리엔은 혼란을 내리누르며 지그시 눈을 감았다. 그는 신음처럼 물었다.

“……에키네시아 경. 내게 경은 무엇이었지? 경에게 나는 무엇인가? 왜, 악마가 된 나를 그대 홀로 찾아와서, 이렇게까지 하는가?”

그녀의 말문이 막혔다. 뭐라고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다.

당신은, 당신의 모든 것이 저로 인해 움직인다고 했어요. 제가 당신의 이유라고 했어요.

그리고 제게 당신은 유일한 사람이에요.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누구보다도 특별한 사람.

이런 말들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그 말들이 담고 있던 깊이를 모른다면 그저 얄팍한 단어의 나열에 불과하다.

그는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지워진 것들은 고통스러운 시간이었으나 그 고통의 깊이가 곧 감정의 깊이였다. 그것을 모르는 그와는 절대로 예전처럼 깊어질 수 없다. 그녀는 입술을 깨물었다.

유리엔은 입술을 깨무는 그녀를 가만히 지켜보고 있었다. 그녀의 눈이 울 것처럼 젖어든다. 그가 나직이 물었다.

“경.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시간들 속에, 모든 이유가 있나?”

이번에는 답할 수 있는 질문이었다. 입을 열었다간 간신히 참고 있던 울음이 샐 것 같아 그녀는 그저 고개만 끄덕였다. 그가 매달리듯 묻는다.

“나는 왜 그것들을 잊어버렸지? 마검에 물든 후유증인가? 에키네시아 경, 내가 그것들을 되찾을 방법은 없는 건가?”

“……되찾고 싶으세요? 그게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어쩌면 모르시는 게 나을지도 몰라요.”

그렇게 말하면서 그녀는 그가 잊어버린 것들을 떠올렸다. 그가 토해냈던 울음을 생각한다.

유리엔이 그녀에게 주었던 위로와 공감은 그녀가 절실히 바라던 것이었으나, 단지 그것을 위해 그도 고통을 기억해 주길 바라는 건 이기적인 바람일지도 모른다. 본래 혼자 감내하려던 악몽이 아니었던가.

정말로, 그를 위해서는 그녀를 모른 채 사는 쪽이 훨씬 나을 수도 있다. 이렇게 된 것이 올바른 운명일지도 모르겠다.

어차피 캠프로 돌아가면…….

“아니, 알아야 한다. 그럴 리가 없으니까.”

유리엔이 망설임 없이 고개를 저었다. 그 점은 전혀 고민하지 않는 듯한. 한없이 가라앉던 그녀의 정신이 멈췄다.

“……어떻게 그렇게 확신하세요?”

“경이, 내가 기억하기를 원하고 있잖나.”

“네?”

“그런 표정으로 나를 보면서, 모르는 게 나을지도 모른다고.”

그는 이를 악물었다. 울음을 참는 여자의 얼굴. 고작 그 얼굴을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심장 안쪽이 불이 되어 머리를 끓어오르게 만든다.

이 열기를 내버려둔 채 살라고? 평생 느껴본 적 없는 이 감정의 근원도 모르는 채? 기억에 뚫려 있는 아득한 구멍을 들여다보면서?

“경, 장담할 수 있다. 나는 알아야만 한다.”

그녀의 몸짓을 계속해서 눈으로 쫓는다. 그녀의 표정에, 눈빛에, 목소리에, 온 전신이 반응한다. 이성이 무의미하게 허물어진다.

알 것 같다. 아무리 겪어보지 않은 감정이라 해도, 이 지경까지 와서 모를 수는 없었다. 자신이 타인처럼 느껴질 만큼 변해버린 원인을 깨달았다. 미쳐버린 게 아니라면 답은 하나뿐이었다.

유리엔은 커다랗게 떠진 보라색 눈동자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어지러울 정도로 녹아버린 머리가 이끄는 대로.

“내가 왜 이토록…… 그대를 사랑하게 되었는지를.”

에키는 숨을 쉬는 것도, 눈을 깜박이는 것도 잊은 채 그를 응시했다. 그들이 쌓아올렸던 것들을 모두 잊어버리고도 그녀를 사랑하고 있음을 고백하는 남자를.

“이 감정의 근원이 어디에 있는지를, 나는, 모르고 살 수는 없다, 에키네시아 경.”

“다, 단장님은 제가 누구인지도 잊어버렸잖아요. 그런데 어떻게…….”

“그래, 나는 그대가 누구인지 모르겠다. 경이 어떤 사람인지, 어떻게 나와 알게 되었는지, 경과 나 사이에 무엇이 있었는지 알지 못한다. 그럼에도 이것만은 확신할 수 있다.”

유리엔이 그녀에게로 성큼 다가왔다. 손을 뻗으면 닿을 만한 거리까지. 그리고 격하게 말을 쏟아내었다.

“성검은 없어졌고, 기억은 엉망진창이고, 마검의 주인을 마주한 이런 상황에서, 판단이나 추측보다 우선하여 내 뇌리를 점령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아는가? 이성은 의심의 가능성을 놓지 말라 하는데 맹목적으로 그대를 믿게 된다. 다른 모든 것보다 그대를 우선하고 싶어진다. 내가 의도하지 않아도 저절로 그리 된다.”

그녀를 고스란히 비쳐내는 푸른 눈동자가 느릿하게 깜박였다. 냉정이 완전히 망가진 얼굴.

“경, 지금 내가 경에게 무엇을 하고 싶은지 아는가? 무슨 정신 나간 생각이 자꾸만 드는지 아는가?”

유리엔의 입술이 떨렸다. 내뱉는 호흡이 헝클어져 있었다. 그는 죄를 고백하듯 말했다.

“그대에게 입 맞추고 싶다.”

혼란스럽고, 어지럽고, 그럼에도 뚜렷한 음성. 그 말이 귀로 파고들어 머릿속을 희게 지워나갔다. 머리를 비운 것이 가슴으로 내려와 여기저기 굴러다니며 덜그럭거렸다. 그것은 아주 뜨거웠다. 그녀는 멍하니 입을 열었다.

“……단장님.”

진심이냐고, 뒤이어 나오려던 물음을 삼켰다. 그는 힘겨워보였다. 부상 때문이 아닐 것이다. 그러고 보니 기억을 잃고 깨어난 이후부터 지금까지 그가 웃는 것을 한 번도 보지 못했다.

그토록 자주, 누구보다도 예쁘게 웃곤 했는데.

‘원래 잘 웃는 사람이 아니었구나.’

에키는 이제야 그 사실을 깨달았다. 그게 무엇을 의미하는지도.

유리엔은 어쩌면 그녀가 아는 것보다도 더, 그녀를 사랑하고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녀가 깊다고 생각했던 그가 내보인 감정들도 실상은 일부분에 불과했을지도 모르겠다.

손을 들어 딱딱하게 굳어 있는 그의 뺨을 감쌌다. 유리엔은 움찔 놀랐으나 그녀의 손길을 피하지 않았다. 흔들리는 푸른 눈동자. 경직되어 있는 눈매.

그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그를 제게로 잡아당겼다. 발돋움을 했다. 순순히 고개를 숙인 그의 긴 은발이 그녀 위로 쏟아졌다. 그녀는 입술이 닿기 직전에 눈을 감았다.

말캉한 살이 맞닿았다. 익숙한 감촉이었다. 꾹 눌렀다가, 조르듯 문지르자 그가 입을 열었다. 더운 숨이 흘러나오는 것을 입안에 머금었다. 그녀가 그의 뺨을 어루만졌다. 그녀의 혀가 그의 혀를 건드렸다.

그 순간 커다란 손이 그녀의 뒷목을 움켜쥐었다. 머리카락 사이로 파고드는 손가락. 갈급하게 제게로 끌어당긴다. 델 것 같은 욕망이 그녀에게로 넘어왔다.

예상한 일이었는데도 움찔 놀랄 정도로 휘몰아쳤다. 뒤섞인 숨이 어지럽게 오갔다. 강렬한 시선이 감고 있는 그녀의 눈꺼풀 위를 더듬었다.

입술을 떼며 그녀는 눈을 떴다. 달뜬 그의 눈동자와 상기된 뺨이 보였다. 그 얼굴은 그녀가 기억하는 그대로였다. 그가 말없이 다시 입술을 겹쳤다.

서로의 손이 상대의 얼굴과 목덜미를 어루만지고, 어깨를 잡아당기고, 허리를 그러안았다. 젖은 소리가 그들 사이에 고여 흘러내렸다.

호흡이 벅차서 물러나면 잠깐 떨어졌다가, 곧바로 따라붙는다. 그렇게 몇 차례. 마지막으로 입술을 삼키듯 빨아들였던 그가 가만히 그녀의 이름을 발음했다.

“……에키네시아.”

경칭이 빠져 있었다. 불러놓고서, 그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 수가 없는 것처럼 침묵했다. 그의 손이 그녀의 허리를 안으려다가 상처가 있는 부근에서 정지했다.

그가 눈을 내리깔았다. 입맞춤으로 인해 붉게 젖은 그의 입술이 말할 듯이 벌어졌다가 지그시 다물렸다. 그녀는 그 입술에 시선을 둔 채 속삭였다.

“다시 성검의 주인이 되면.”

유리엔이 고개를 들어 그녀를 보았다. 그녀가 파르르 떨리고 있는 그의 눈가를 손끝으로 쓰다듬었다.

“랑기오사를 되찾는다면…… 당신이 잊어버린 것들을 되찾을 수 있을 거예요.”

“랑기오사를…….”

“하지만, 율.”

그녀가 부른 애칭에 닿아 있는 유리엔의 몸이 흠칫 굳는 것이 느껴졌다.

“만약에…… 당신이 다시는 성검을 쥘 수 없게 되었더라도. 그래서 잊은 것들을 영원히 되찾지 못한다 해도.”

그의 손이 다가와 제 눈가를 어루만지는 그녀의 손을 잡았다. 손가락이 얽혀들었다. 에키는 그의 어깨에 이마를 기댔다.

“……그래도 괜찮아요. 그래도, 괜찮으니까. 저는 당신이 무사히 돌아온 것만으로도 괜찮으니까, 정말로……. 당신에게 검을 겨누면서, 또 잃어버릴까 봐, 제가 얼마나…….”

나직이 이어지다가 잦아드는 목소리. 유리엔은 제 품에 고개를 파묻은 여자를 내려다보았다. 가슴팍의 옷깃이 조금 젖어드는 것이 느껴졌다. 무언가가 울컥 치받아 올랐다.

그녀는 지금의 자신이 아니라, 기억을 잃기 전의 그, 그녀가 ‘율’이라고 부르던 그를 향해 말하고 있다. 지금의 유리엔은 그녀가 어떤 심정인지 온전히 이해하는 것이 불가능했다. 어렴풋이 짐작만 할 뿐.

그것을 깨닫자 속이 꽉 막혀들었다.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어서, 그는 그저 그녀의 어깨를 감싸 안기만 했다. 손 안에 들어온 어깨는 예상했던 것보다 더 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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