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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을 든 꽃-161화 (161/211)

검을 든 꽃 161화

유리엔은 얼어붙어 버렸다. 자신이 마검에 물들었다가 되돌아 왔다는 사실도 믿기지가 않는데, 눈앞에 마검을 가진 사람이 있었다. 그것도 전설인지 뭔지 모를 마검사 이야기처럼 악마가 되지 않은 사람이.

에키는 유리엔의 옆에 가방과 망토로 둘둘 말아둔 가짜 마검을 내려놓았다.

“단장님, 이것들 좀 맡아주세요. 아, 망토로 감싸둔 건 만지지 마시고요. 망가진 것 같긴 해도 혹시 모르니까.”

“이게 무엇이기에…….”

“당신을 물들였던 빌어먹을 가짜 마검이요.”

에키는 굳어버린 그를 내버려두고 돌아섰다. 마검이 시끄럽게 떠들어 대고 있었다.

[주인아, 나 써줄 거야? 진짜? 진짜지? 그럼 저것들 죽이는 거야? 그래도 돼?]

“시끄러워, 발. 조용히 좀 해봐.”

[야, 이런 중대한 상황에서 어떻게 조용히 있어! 이안이었나 뭐였나 그놈 이후로 계속 살의 쌓기만 하다가 드디어 풀게 생겼는데! 앞으로도 계속 나 쓸 거야? 이제 나 안 숨겨? 얼마나 죽일 거야? 열 명? 백 명? 난 싹 다 죽였음 좋겠어! 신난다!]

“입 안 다물면 화낼 거야. 아, 왔다.”

작게 쏘아붙이던 그녀가 고개를 들었다. 숲의 그늘 사이로 속속들이 사람들이 나타났다. 검은 후드를 눌러쓴 자들이었다. 대강 보이는 것만 사십여 명. 에키는 보이는 자들 외에 뒤쪽에도 몇몇이 더 있는 것을 알아차렸다.

‘뒤에 있는 건 마법사들인가? 그냥 암살자 집단이라기엔 수준이 좀 높은데. 근위기사단일 수도 있겠네.’

이 상황에서 저런 분위기로 나타난 자들의 정체야 뻔했다. 황제의 직속이라 2황자의 수족으로 움직일 확률이 높은 근위기사단, 혹은 황실에서 은밀히 키운 개들.

‘어차피 어느 쪽이든 목적은 똑같겠지.’

그녀는 팔짱을 끼고 선 채 그런 생각을 했다. 후드를 쓴 자들은 기다리는 것처럼 서 있는 에키와 그녀의 뒤에 있는 유리엔을 발견하고 걸음을 멈췄다. 그들이 반응하기 이전에 에키가 먼저 입을 열었다.

“당신들의 주인은 2황자인가요? 아니라면 빨리 말해요.”

“…….”

“음, 혹시나 해서 물어 보겠는데, 대화를 할 생각은 있나요?”

“…….”

두려움이나 긴장감이라곤 전혀 느껴지지 않는 태평한 어조였다. 후드들 사이에 눈짓이 오갔다. 당황한 듯한 기색이 느껴졌다.

기다리던 에키는 그들 중 하나가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보았다. 그가 우두머리인 듯, 그자가 고개를 끄덕이자마자 그들의 기세가 달라졌다. 분명한 살기가 피어올랐다. 동시에 훅 하고 날아오는 화살을 에키가 한 손으로 잡아챘다.

“역시. 그럼 뭐, 듣기만 하세요.”

더 확인할 필요는 없었다. 그녀는 화살을 내던지고, 아무것도 들지 않은 빈손을 늘어뜨리며 한가롭게 중얼거렸다.

“되도록 평온하게 살고 싶었는데, 도저히 안 되겠더라고요. 당신들의 주인이 선을 넘어도 한참 넘었거든. 이젠 못 참겠어.”

화살이 몇 발 더 날아왔으나 그녀의 몸에는 하나도 닿지 않았다. 그녀는 슬쩍 몸을 틀거나 머리를 기울이는 것만으로 화살을 피하고, 정통으로 오는 것들은 잡아채서 바닥에 떨궜다. 어차피 먹히리라 생각하고 화살을 쏜 게 아니었던 후드들은 그러면서 포위망을 만들기 시작했다.

“하지만 음, 어쩔 수 없이 따르는 사람도 있을 수 있으니까. 그런 사람들을 위해 미리 충고할게요.”

그녀는 그들이 그러든 말든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 눈은 전혀 웃고 있지 않았다.

“살고 싶으면 도망가세요. 도망가는 사람은 쫓지 않을 거예요.”

후드들은 내심 기가 찼다. 그녀는 여기저기 베이고 핏자국이 묻은 데다 망토도 없는 제복 차림에, 붕대까지 두른 빈손의 여자였다.

창천 제복이니 저 여자도 마스터겠지만 후드를 쓴 자들 중에도 마스터급이 여섯이었다. 게다가 그들에게는 지원을 준비 중인 후방의 마법사들도 있었다.

그들이 경계하는 것은 물들어서 날뛰고 있어야 할 창천기사단장이 제정신으로 보인다는 사실뿐이었다. 하지만 그마저도 자신들이 가진 가짜 마검에 내재된 중독 저주를 발동하면 의미가 없어질 터다. 심지어 그 창천기사단장도 왼팔을 고정하고 있는 부상자였다.

어딜 봐도 그들이 유리했다. 여자가 떠들어대는 말은 정신 나간 허세로 들렸다. 그녀가 떠드는 사이 원을 그리며 그들을 완전히 포위한 후드들이 각자 무기를 꺼냈다. 철컹거리는 쇳소리가 연달아 들렸다.

에키는 웃음을 거두고 마지막 경고를 했다.

“죽기 싫으면 달아나라고, 분명히 말했어요. 이제-”

그녀가 훅 하고 사라졌다. 눈으로라도 그 움직임을 따라갈 수 있었던 것은 유리엔뿐이었다. 그녀는 순식간에 어느 후드 앞에 서서 손을 휘둘렀다. 분명히 빈손이었던 그 손에 어느새 바르데르기오사가 모습을 드러냈다.

후드를 쓴 자는 제가 뭐에 당했는지도 모르고 목이 날아갔다. 그 자는 아까 고개를 끄덕여 신호를 주었던 우두머리였고, 마스터인 여섯 명 중 하나였다.

그런 자가 아무런 반항조차 하지 못하고 죽었다. 머리를 잃은 시체가 피를 쏟으며 허물어져 내렸다. 후드들의 시선이 그 앞에 선 여자에게 쏠렸다. 표정이 사라진 그녀가 마검을 들어 올렸다.

“네놈들을 위한 자비 따윈 없어.”

순식간이었다. 마지막으로 살아남은 자마저 달아나기까지는.

후드를 쓴 자들은 그녀가 들고 있는 마검을 ‘가짜 마검’이라고 생각했다. 그것을 든 여자가 악마가 되지 않은 것은 그것이 고장 난 탓이라고 판단했다. 그래서 거침없이 덤벼들었다.

그러나 그들은 곧 상황을 이해할 수가 없어졌다.

여자가 너무 강했다. 무기를 든 자들은 아예 상대가 되질 않았다. 흩날리는 긴 머리카락조차 아무도 스치지 못했다.

전투라는 것은 어느 정도 상대가 되어야 이루어지는 법이고, 숫자의 우위는 포위가 가능한 상황에서나 의미가 있다.

속도를 따라갈 수조차 없는데 막거나 피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애초에 막아봤자 무기까지 부러질 뿐 결과는 변하지 않았다. 그러니 다른 자가 버티는 동안 뒤를 치는 것도 불가능했다. 만들었던 포위망은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마법마저 모조리 막혔다. 마나 실드를 쓸 수 있게 된 에키네시아는 마법을 아예 무시했다. 용이 뿜는 불도 막아냈던 그녀의 실드를 마법으로 뚫으려면 현자급은 되어야 했다.

그저 한 칼에 하나씩 죽어나갈 뿐이었다. 그 점에서는 마스터나 마스터가 아닌 자나 공평했다.

마스터라 해봤자 창천에 비하면 확연히 수준이 떨어지는 자들이었다. 창천기사라 해도 그녀의 검을 받아 내기 힘들 판에 고작 이런 자들이 그녀의 상대가 될 리가 없었다.

결국 마법사 중 하나가 가짜 마검에 새겨져 있는 중독 저주를 발동시켰다.

그러나 숙주도 없는데다 바르데르기오사에게 짓눌려 망가진 상태로 망토에 처박혀 있는 가짜 마검은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에키네시아가 들고 있는 것은 진짜 마검이니 더더욱 반응할 리가 없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자 후드들은 몹시 당황했다. 에키는 그들이 그런 짓을 시도한 줄도 몰랐다. 그녀는 멀쩡히 검을 휘둘렀다.

차원이 다르다. 뒤늦게 그것을 깨달은 자들 중 하나가 달아나기 시작했다. 에키네시아는 등을 돌린 자를 베지 않았다. 그녀가 정말로 도망치는 자를 살려주자 남은 자들은 금세 싸울 의지를 잃었다.

하나 둘 달아나기 시작하자 그들은 허무할 정도로 순식간에 와해되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 근처에는 시체만이 남았다.

유리엔은 빌린 검을 쥔 채 멍하니 그 광경을 지켜보았다. 그가 검을 들 일은 아예 일어나지 않았다. 그녀를 지나쳐 그를 공격하려던 자들이 가장 먼저 죽었기 때문이었다.

[행복해……. 맨날 오늘 같았으면 좋겠다.]

바르데르기오사가 흐물흐물 풀어진 목소리를 냈다. 짧은 사이에 족히 절반은 죽였으니 마검이 행복해할 만도 했다. 에키는 뺨에 튄 피를 손 등으로 닦으며 마검을 늘어뜨렸다. 투명한 칼날에 묻은 피는 금세 흡수되며 사라졌다.

결국 피를 보았다. 후회되지는 않았다. 어차피 앞으로도 피를 볼 예정이었다.

쌓이는 살의를 풀겠다는 이유로, 혹은 살의에 휘둘리는 상태로는 검을 들고 싶지 않았지만, 간신히 되살려낸 사람들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얼마든지 들 수 있었다. 시간을 되돌린 후 처음 피를 보았을 때 결심했듯이.

‘살아남은 놈들이 바르데르기오사를 알아봤을까.’

가짜 마검이라 생각했을 확률이 높지만, 알아봤어도 큰 상관은 없었다. 유리엔이 말려든 음모에 대해 고민하면서 결심해 둔 바가 있었다.

그녀는 깊게 숨을 내쉬고, 유리엔 쪽을 돌아보았다. 그는 핏기가 가신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마검을 든 에키가 그를 향해 한 걸음 내딛자 유리엔이 반사적으로 아메시스트를 치켜 들었다.

그 반응을 본 그녀의 눈이 흔들렸다. 그녀는 더 이상 그에게 다가가지 않고 멈춰 서서는 눈을 내리깔았다. 그러더니 이미 닦았던 뺨을 무의미하게 한 번 더 문질러 닦고는, 마검을 문양 안으로 회수했다.

빈손으로 그를 향해 한 걸음 내딛자 그가 한 걸음 물러났다. 에키는 그의 표정을 볼 자신이 없었다. 여전히 눈을 내리깐 채 속삭이듯 말했다.

“그 검은 안 돌려주셔도 돼요.”

검을 가지고 있는 편이 좀 더 안심되겠지. 마검으로 사람을 죽이는 모습을 보였으니 경계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그냥 마검을 가지고 있는 모습이나 마검으로 마물을 처리하는 모습과는 달라도 너무 다르다.

머리로는 알지만 속은 저며졌다. 에키는 애써 태연한 표정을 만들어 내며 그의 옆에 내려놨던 가짜 마검을 집어 들었다. 이어 마법 가방을 들려는데 나직한 목소리가 들렸다.

“경은, 마검에 물들지 않나?”

“……물들었었어요.”

멈칫했던 그녀의 손이 다시 가방의 손잡이를 향했다. 그녀는 여전히 시선을 들지 않고 가방을 든 채 돌아섰다.

“그리고 벗어났죠. 그 뒤로도 계속 노력해서…… 이젠 괜찮아요. 제정신이기만 하면 통제할 수 있어요. 완벽하다고는, 못 하겠지만, 그래도, 거의…….”

점점 목소리가 작아졌다. 니콜이나, 바라하나, 던컨에게 알릴 때는 확신에 차서 말할 수 있었는데. 폭주해서 목을 조른 적도 있는 유리엔을 향해서는 차마 당당하게 말할 수가 없었다. 비록 지금의 유리엔은 그 때의 일조차 잊어버렸다 해도.

‘내가 그라도 못 믿겠지. 어떻게 믿어, 언제 돌변해서 미쳐 날뛸지 모르는데.’

마검을 드러내지 않으면 설명할 수가 없어서 드러낸 거였는데, 괜히 드러냈다는 생각이 들었다. 조금 울고 싶어졌다. 그녀는 고개를 푹 숙인 채 힘겹게 말했다.

“어쨌든 그래서…… 단장님을 물들인 것이 가짜 마검인 걸 알았고, 그걸 망가뜨리고 되돌릴 수 있었던 거예요. 음, 당신을 물들인 살의를 제가 흡수하는 식으로…….”

“……에키네시아 경.”

그의 목소리가 바로 옆에서 들렸다. 아메시스트를 거둔 그가 어느새 그녀의 곁에 와 있었다.

“경에게 부상을 입힌 게 나였나.”

“네?”

전혀 예상하지 못한 물음이었다. 에키는 놀라 고개를 들었다. 그와 시선이 정면으로 마주쳤다. 푸른 눈동자가 깊었다.

“조금 전에 경이 싸우는 것을 보았다. 경은 제니스고, 다치지 않고도 나를 제압할 실력이 있다. 그럼에도 다른 곳도 아니고 등을 베였다는 건…….”

유리엔 자신의 몸에는 반쯤 잘린 어깨와 허벅지 근처의 상처를 제외하면 부상이 없었다. 그리고 그건 둘 다 꽤 시간이 흐른 부상이었다.

최근에 입은 상처는 생채기 몇 개밖에 없다. 그는 그 사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안다.

“……경이, 나를 우선했다는 뜻 아닌가.”

유리엔이 눈을 내리깔았다. 은빛 속눈썹이 흰 피부 위에 길게 그림자를 드리웠다. 그 그림자가 가늘게 떨렸다.

그녀에게 자주 보이던 무방비하고 흐트러진 얼굴이 아니라, 담담하고 절제된 낯선 얼굴이었다. 그럼에도 그의 안에서 무언가 격한 감정이 소용돌이치고 있다는 것은 확연했다.

그는 숨을 들이키며 그것들을 함께 삼키고는 눈을 들었다.

“부상을 입으면서까지 말이다. 그렇지 않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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