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을 든 꽃 160화
2황자 카르엠 드 하르덴 키리에, 윈들턴 디아상트 공작, 현자 헤레이스 리어폴드는 2황자의 막사 안에 모여 앉아 있었다.
“창천기사단장이 예상보다 강해서 놀랐지만, 그래도 순조롭소. 생각해 보니 상정 외의 강함이 오히려 계획에는 더 도움이 될 듯하오.”
“마검의 악마는 지금 어디쯤에 있습니까?”
“여전히 회색 산맥 내부에 틀어박혀 있소이다. 부상을 치료하고 있는 것 같군. 디아상트 공, 창천기사단의 토벌을 막을 자들은 확실히 준비된 거요?”
“물론입니다. 원정대와 마검의 악마가 충돌하면 바로 움직여 끼어들 수 있습니다.”
카르엠은 팔걸이에 턱을 괸 채 공작과 현자가 나누는 대화를 지켜보고 있었다.
‘가짜 마검’을 가져온 것은 디아상트 공작이었다. 용의 뼈와 마검의 마나, 마검에 대한 연구기록을 이용해 현자 헤레이스 리어폴드가 만들어낸 물건.
위치를 추적하는 마법과 발동 시에 숙주를 중독시키는 저주가 통제를 위해 걸려 있었다. 창천기사단의 토벌을 실패하도록 만든 후에 카르엠이 나서면, 저주를 발동해 손쉽게 악마를 토벌할 수 있을 것이다.
이제 곧 유리엔의 파멸을 볼 수 있다. 카르엠의 눈이 번들거렸다.
언제부터 이토록 유리엔을 증오하게 되었는지, 카르엠은 정확하게 기억하진 못했다. 그것은 특별한 계기로 인한 결과가 아니었다. 많은 일들이 쌓이고, 누적되고, 고여서 썩어 만들어진 감정이었다.
황후가 3황자를 출산하며 사망한 건 카르엠이 두 살 때의 일이었다. 어머니에 대한 기억은 거의 없다.
어렴풋이 따뜻했던 느낌만이 남아 있었다.
카르엠이 기억하는 것들은 이런 것들이었다.
〈네 어미는 저 역겨운 것에 의해 죽었다.〉
〈그녀가 살아 있었다면 널 정말 사랑했겠지. 가여운 내 아들아, 너는 저것 때문에 그녀의 사랑을 받지 못하게 되었다.〉
〈네 눈동자는 그녀와 꼭 닮았어. 그녀를 닮은 건 너뿐이로구나.〉
황제는 자주 카르엠을 찾았다. 어린 아들의 눈동자를 들여다보며 늘 그렇게 속삭였다. 어릴 때 황제는 카르엠에게 몹시 다정했고, 극진할 정도로 정성을 기울였다.
〈너만이 내 진짜 아들이다. 다른 여자한테서 난 것이나, 제 어미를 잡아먹고 태어난 것 따윈 내 아들이 아니야.〉
카르엠이 검술에 재능을 보이자 황제는 진심으로 기뻐하며 온갖 선물을 안겨 주었었다.
〈검에 재능이 있다고? 역시 내 아들이다. 너 말고는 다 쓸모가 없어.〉
그 때까지만 해도 카르엠은 황궁 구석에서 유모의 손에 홀로 크는 어린 동생에 대해 큰 감흥이 없었다. 아비에게 배운 대로 저것 때문에 어머니가 죽었다는 건 확실하게 알고 있었지만, 별로 관심이 없었다.
어머니가 있는 또래의 귀족 아이들을 보면서 부러워질 때마다 동생이 없었다면 좋았을 걸, 하고 생각하긴 했다. 그래도 그 때는 분명 증오까지는 아니었다.
여덟 살 이후로 그 감정은 변하기 시작했다. 시작된 날은 기억한다. 황제가 3황자에게도 검술 재능이 있다는 말을 듣고서는 여섯 살의 유리엔과 여덟 살의 카르엠을 대련시켰던 날.
황제는 카르엠이 더 뛰어나다는 것을 보여줄 작정으로, 귀족들이 잔뜩 모인 연회에서 두 아들의 대련을 선보였다.
그러나 결과는 유리엔의 압승이었다. 카르엠은 몇 번 휘두르지도 못하고 동생의 손에 목검을 놓쳤다.
그 때부터였다. 황제는 카르엠을 몰아붙였다. 모든 지원을 퍼부으며 어떻게든 카르엠이 유리엔보다 뛰어나지길 원했다. 하지만 그 시도는 번번이 실패했다.
〈넌 내 아들이다. 너만이 내 아들이란 말이다. 내 아들이 저것보다 못할 리가 없어!〉
카르엠은 황제의 입에서 너도 내 아들이 아니었구나, 라는 말이 나오는 것이 두려웠다. 지금껏 받았던 애정이 사라지는 게 무서웠다. 그래서 나름 최선을 다했다.
그럼에도 두 살 어린 동생을 이길 수가 없었다. 어떤 분야에서도. 심지어 유리엔이 제대로 가르침을 받지 못한 분야에서조차도.
그 아이는 천재였다. 악마 같은 천재. 아니, 악마였다.
황제가 분노하는 일이 잦아졌다. 아비가 왜 유리엔보다 못하냐고 폭언을 쏟을 때면 카르엠은 어머니에 대해 상상하곤 했다. 어머니가 살아 있었다면 어땠을까. 겪어보지 못해서 알 수가 없었다. 그 어머니도 제 동생이 죽인 거다.
언젠가부터 유리엔의 얼굴을 보면 머리끝까지 화가 치솟게 되었다.
‘난 이렇게 미칠 것 같은데, 넌 평온한 얼굴로 지내는구나. 나는 발버둥치고 있는데, 네놈은 그리 쉽게 모든 것을 해내고.’
그래서 유리엔이 키우던 새를 죽였다. 카르엠은 유리엔이 자신만큼 괴롭기를 원했다. 그러나 키우던 새를 죽였는데도 어린 유리엔은 카르엠에게 화를 내지 않았다. 그저 조용히 울었다.
그의 그런 면도 카르엠에게는 끔찍하기만 했다. 저놈은 아무렇지도 않은데, 자기 혼자 미쳐 날뛰는 것 같아서.
그런 날들이 쌓이고, 쌓이면서, 증오는 눈덩이처럼 커졌다.
열여덟 살, 카르엠은 연회에서 만났던 어느 영애에게 반했다. 몰래 그 영애에 대해 조사하라 시킨 시종은 그녀가 유리엔을 보며 뺨을 붉히더란 결과를 들고 왔다.
그것을 알게 된 카르엠은 유리엔의 잔에 독을 탔다. 어설픈 계획이었기에 그것은 실패했다. 그리고 황제가 실패한 그 계획과 배경을 알아차렸다.
황제는 그 해에 유리엔을 아젠카로 추방하고, 카르엠을 명문가의 영애와 약혼시켰다. 카르엠이 마음에 두었던 영애는 첩으로 만들어 주었다.
황궁에서 쫓아냈는데도 유리엔은 시들지 않았다. 오히려 억누르던 환경에서 벗어난 것처럼 눈부시게 자랐다. 유리엔이 스물세 살에 마스터가 되었다는 소식에 황제는 처음으로 카르엠의 뺨을 때렸다.
카르엠은 아비를 미워하지 못했다. 황제는 유리엔만 엮이지 않으면 그에게 좋은 아비였다. 원하는 건 뭐든 들어주고, 아낌없이 지지해 주었다. 야단을 친 적도 없다. 유리엔만 얽히지 않는다면.
좀 자란 후에 알게 된 사실도 있었다. 황제가 황태자 시절 카르엠의 어머니가 아니라 크루엔의 어미인 첫 번째 황후와 정략혼을 해야 했던 이유.
황제의 남동생이 황태자였던 황제보다 다방면에서 뛰어났다고 한다. 그 탓에 계승구도가 불안했고, 그는 정략혼을 통해 세를 다지고 제위에 올랐다.
황제가 제위에 오른 후 그의 동생은 낙마 사고로 죽었다. 정말 사고였을까. 카르엠은 아버지를 이해했다. 자신도 동생을 죽여버리고 싶었으므로.
그러니까 전부 유리엔이 문제였다. 모든 것이 그놈 탓이었다. 그놈만 없었다면 아비도 자신도 행복했을 테니까.
그렇게 쌓아올린 증오였다. 그 놈만 망가뜨릴 수 있으면 무슨 수단을 쓰든 상관없다는 생각이 들 만큼 썩어버린 증오다.
그리고 이제 그 증오의 결실을 거둘 수 있게 된다. 비로소 유리엔으로부터 해방된 삶을 살 수 있을 것이다.
카르엠은 비릿하게 웃었다. 그러나 그 웃음은 헤레이스의 놀란 음성으로 인해 금이 갔다.
“반응이 사라졌소!”
“그게 무슨 소립니까?”
“마검이 망가진 것 같소. 대체 이게 무슨……. 내 역작이 이럴 리가 없는데…….”
현자는 납득할 수 없다는 듯 횡설수설했다. 디아상트 공작의 낯빛이 굳었고, 카르엠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공작이 무어라 말하기 전에 카르엠이 손짓했다.
“창천을 상대하려고 준비시켜 놨던 자들을 보내라.”
“예? 그들은…….”
“우선 어떻게 된 일인지 알아봐야 할 것 아닌가. 추적마법이 망가졌을 수도 있으니. 만약 마법이 아니라 마검에 이상이 생긴 거라면…….”
끝까지 애먹이는 놈. 카르엠은 이를 까득 갈고는 말을 이었다.
“중독 저주를 발동하고, 유리엔의 목을 베어 와라. 그 목을 내걸고 우리가 창천보다 먼저 악마를 토벌했다고 선전하겠다.”
디아상트 공작은 하려던 말을 삼켰다. 가짜 마검에 이상이 생겼다는 말을 듣자마자 공작이 떠올린 건 마검을 가지고 있을지도 모르는 여자였다. 현재 아젠카에 있는 것으로 알고 있지만, 이변을 일으킬 만한 변수는 그 여자뿐이었다.
‘……뭐, 문제가 발생하더라도 뒤집어쓰는 건 저 멍청한 2황자지. 열등감에 절어 날뛰는 한심한 놈.’
2황자가 몰락하더라도 디아상트 공작은 상관 없었다. 오히려 반길 일이었다. 그래서 공작은 2황자에게 그 변수를 언급하는 대신, 만에 하나 기적이 일어나 창천기사단장이 돌아올 때를 홀로 대비하기로 결심했다.
‘그럴 때를 위해 성검을 챙겨 두었으니까.’
공작은 은밀히 웃었다.
* * *
[주인아, 이거 완전히 나한테 쫄았나 봐.]
바르데르기오사가 우쭐한 말투로 말했다. 동굴 입구에 서서 가짜 마검을 살피던 에키가 고개를 들었다.
“쫄았다니?”
[저거 지금 꼼짝도 못 하잖아. 망가진 거 아냐?]
에키는 시험 삼아 맨손으로 가짜 마검을 쥐어보았다. 가시덩굴은 그녀를 휘감기는커녕 손잡이 부근에 뭉친 채 미동도 하지 않았다. 마검이 종알거렸다.
[가짜야, 까불어봐! 왁! 왁! 홍, 역시 별것도 아닌 게. 봐봐, 주인아, 못 덤비잖아. 내 덕이니까 나한테 고마워해!]
“그래. 이번엔 정말 잘했어, 발. 고마워.”
[어어, 어, 으응……. 헤헤.]
마검이 조용해지더니 혼자 실실 웃어댔다. 에키는 이상하게 구는 마검을 내버려두고 가짜 마검을 도로 망토로 둘둘 말았다.
동굴 안쪽에서 유리엔이 일어나는 기척이 느껴졌다. 들어가 보니 그는 멍하니 그녀의 빈자리를 보고 있었다.
“단장님?”
유리엔은 화들짝 놀라며 그녀를 돌아보았다. 그 얼굴에 급격히 안도하는 기색이 퍼져나가서 에키는 약간 당황했다.
‘내가 혼자 가버린 줄 알았나.’
그녀의 추측은 일부만 맞았다. 늦게 잠들었던 유리엔은 일어나자마자 그녀가 보이지 않자 순간적으로 온갖 생각을 했다. 그중에는 그녀의 존재 자체가 꿈이 아니었나 싶은 의심도 있었다.
“피곤하시겠지만 바로 출발해야 할 것 같아요. 시간이 없어서요.”
“시간이 없다니?”
“27일까지 단장님을 모셔가지 않으면 큰일 나거든요. 가면서 이야기해요.”
그들은 짐을 챙겨서 동굴을 빠져나왔다. 유리엔을 찾아올 때는 곳곳을 뒤지느라 오래 걸렸지만, 돌아갈 때는 직진할 작정이니 하루 정도면 캠프에 도착할 수 있을 터였다.
그녀도 그도 부상자였으나 제니스인 덕에 이동이 빨랐다. 에키는 걸 으면서 대강 그에게 사정을 설명했다.
“내가…… 마검에 물들었었다고?”
“정확히는 가짜 마검이요. 2황자 짓이었을 거예요. 돌아가면 당신을 물들인 음모부터 해명을…….”
그녀가 갑작스레 말을 중단했다. 굳은 얼굴로 고심하던 유리엔이 물었다.
“가짜 마검이라는 걸 경은 어떻게 알았지? 게다가 악마가 되었었다면, 나는 어떻게 되돌아온 건가? 그런 일이 가능할 리가 없는데.”
숲의 한쪽을 노려보던 에키가 그를 돌아보았다. 그녀는 장갑을 끼고 있는 제 오른손에 잠시 시선을 주었다가 다시 유리엔을 응시했다.
“제가 마검의 주인이거든요. 그래서 알았고, 그래서 가능했어요.”
“그게 무슨…….”
“대화는 나중에 해요, 단장님. 별로 안 좋은 손님들이 오고 있어서요.”
에키가 허리춤에서 아메시스트를 풀어 그에게 건넸다.
“검이 없으시니 이걸 빌려 드릴게요.”
유리엔이 얼결에 그것을 받아들었다. 랑기오사와 닮은 검. 그것을 쥐고 들여다본 순간 얼핏 무언가가 떠올랐다.
그는 자신의 스콰이어, 그러니까 눈앞에 있는 에키네시아 로아즈에게 주기 위해 이 검을 만들었었다. 이것을 그녀에게 주던 순간도 연달아 떠올랐다.
스콰이어에게 주기에 과한 물건이었다. 이런 걸 왜 자신은 그녀에게 주었던 걸까. 스스로 알던 자신과는 너무도 다른 태도로. 난데없이 신입생이던 그녀를 스콰이어로 삼은 이유도 여전히 모르겠다.
‘대체 왜 그랬던 거지? 무슨 생각으로?’
그사이 에키는 오른손의 장갑을 벗었다. 그녀보다 약간 늦게 다가오는 기척들을 알아채고 고개를 든 유리엔은 그녀가 빈손인 것을 발견했다.
“내게 검을 빌려주면, 경은?”
“조금 전에 말씀드렸잖아요. 저는…….”
그녀가 손을 펼쳤다. 가시덩굴을 움켜쥐느라 입었던 자잘한 상처가 있는 손이었다. 그 손바닥에 선명하게 드러나는 검은 문양. 그녀의 상처에 신경 쓰고 있던 유리엔의 낯이 창백해졌다. 그것은 마검의 문양이자 악마의 상징이었다.
그녀는 담담히 말을 이었다.
“바르데르기오사를 쓰면 되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