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을 든 꽃 159화
에키네시아가 당황해서 그를 바라보더니 묘한 표정을 지었다.
“걱정해 주셔서 감사합니다만, 그렇게 심각한 상처는 아니에요. 아무래도 등이라서 잘 안 보이니까 붕대가 좀 어긋난 모양이에요.”
“그런 상태로 자는 건 회복에 좋지 않다. 상처를 보여봐라.”
“네?”
그녀가 화들짝 놀라며 옷깃을 부여 잡았다. 유리엔은 그제야 등에 있는 상처를 치료하려면 셔츠를 벗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의 낯이 벌게졌다. 여성을 상대로 함부로 할 만한 제안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저대로 내버려두고 싶지도 않았다. 그는 허둥거리며 말을 늘어놓았다.
“그, 다, 다른 뜻이 아니라, 피가 옷에 번져날 정도인데, 그대로 자는 건 아무래도…… 그러니까, 도와주겠다는, 그런 뜻일 뿐이다.”
평소의 유리엔이라면 이런 문제로 말이 꼬이지 않았을 것이다. 담백하게 도움을 제의하고 거절하면 깔끔하게 물러났을 터다.
그러나 지금의 그는 제대로 말이 나오지가 않았다. 빤히 바라보는 눈 동자에 얼굴이 홧홧해졌다. 바보가 된 기분이었다.
에키네시아는 횡설수설하는 남자를 바라보았다. 은발 사이로 보이는 귓불까지 빨갛다. 어쩔 줄 모르는 그 모습이 익숙했다. 그녀가 다친 것을 알아보고, 걱정하고, 그대로 두질 못하는 것도.
그녀를 기억하지도 못하면서. 그의 잘못이 아님을 아는데도 마음이 부서질 것 같다.
“그럼, 부탁드릴게요.”
충동적인 결정이었다. 말해 놓고 잠시 후회했으나, 곧 에키는 그에게 등을 돌리고 침낭 위에 앉았다.
셔츠의 단추를 풀면서 그녀는 생각했다. 만약 성검을 되찾아도, 그가 성검을 더 이상 쥘 수 없게 되었다면, 그래서 지워진 과거에 대한 기억이 돌아오지 못하면……. 물에 잠긴 것처럼 먹먹해졌다.
‘전에는 그가 아무것도 모르고 있기를 그토록 바랐는데.’
눈앞이 흐려졌다. 그녀는 얼른 턱을 들어 눈물이 흐르지 못하게 했다. 셔츠를 벗고, 속옷에 손을 대고 잠깐 망설이다가 그것도 벗어 내려 놓았다. 습관적으로 꼈던 장갑은 벗지 않았다. 등 뒤를 덮은 머리카락을 앞으로 모아 등을 드러냈다.
그녀가 돌아서서 단추를 푸는 순간부터 석상이 되어 있던 유리엔은 길게 늘어져 있던 머리카락이 치워지며 좁은 등이 드러난 순간 숨을 들이켰다. 정신 못 차리고 뛰던 심장이 상처를 보며 얼어붙었다.
자잘한 생채기는 그렇다 쳐도, 비뚤게 매어지는 바람에 흘러내린 붕대 사이로 일부만 보이는 상처가 몹시 깊었다. 응급처치를 하긴 한 것 같은데 위치가 위치다 보니 제대로 마무리가 되어 있지 않았다.
그는 다가가 붕대를 풀어냈다. 오른팔밖에 쓸 수 없었지만 이미 풀어지던 중인 붕대라 쉽게 흘러내렸다.
새하얀 등을 벌겋게 가른 상처들. 옆구리에서부터 등의 중간까지 비스듬하게 베인 것, 그리고 허리 부근을 가로로 베인 것. 갈라져 속살이 드러나 있었다. 소독하고 약을 바르고 붕대를 두르는 정도로 내버려둘 게 아니었다. 이 상태로 움직인 게 신기할 지경이었다.
“경은 제정신인가? 이런 상태로……!”
가슴 안쪽이 욱신거렸다. 유리엔은 왈칵 화를 내려다 말을 끊고, 황급히 모닥불 근처에 굴러다니는 물건들 사이를 뒤졌다. 깨끗한 붕대와 약통을 가지고 돌아온 그는 그 안에서 찾던 것을 발견했다. 바늘이었다.
“……에키네시아 경, 아무래도 봉합해야 할 것 같다. 이대로 붕대를 다시 매어봤자 상처가 또 벌어질 테니. 괜찮겠나?”
무겁게 가라앉은 음성이 등 너머에서 들려왔다. 에키는 고개만 틀어 뒤를 흘깃 보았다. 유리엔의 시선이 그녀의 상처에 고정되어 있었다. 내리깐 은빛 속눈썹이 가늘게 떨리는 게 보였다. 그녀보다 그가 더 아파 보이는 얼굴이다.
“……네.”
“통증이 심할 거다. 혹 마취제나 마법약 같은 것은…….”
“그런 건 없어요. 그냥 하셔도 돼요.”
혼자 다녔을 때는 스스로 꿰매기도 했었다. 사실 마나로 바늘을 움직이면 등의 부상도 혼자 꿰맬 수 있긴 할 텐데, 아무리 그녀라도 보이지도 않는 부위에서 바늘 같은 것을 섬세하게 움직일 순 없었다.
그래서 유리엔의 어깨만 봉합하고, 그녀의 부상은 대강 붕대로 압박만 했다. 그러고 나서 지쳐서 그대로 쓰러져 잠들었었다.
기절하듯 잠든 와중에도 누군가가 접근하는 건 알아챘지만, 그게 유리엔임을 무의식적으로 깨달아서 반응하지 않았다. 일어나 눈을 뜨고 마주한 그의 눈에 뚜렷한 이지가 있는 것을 보고 신께 감사했다.
등 뒤에서 유리엔이 깊은 숨을 토하는 것이 들렸다. 긴장과 걱정이 느껴졌다. 상처 부위를 조심스럽게 닦아낸 그가 소독액으로 바늘과 실을 소독하더니 깨끗한 천을 접어 그녀에게 내밀었다.
“물고 있어라.”
“……감사합니다.”
그녀는 고통을 참을 때 이가 상하지 않도록 천을 입에 물었다. 유리엔은 잘 움직이지 않는 왼팔로 용케 실을 꿰고는 그녀의 상처를 봉합하기 시작했다.
시간을 지체해 봐야 더 아프기만 할 테니 최대한 빠르게 움직였다. 응급처치였기에 최소한으로 봉합했지만, 그래도 상처가 워낙 커서 여러 번 바늘을 놀려야 했다.
그녀의 피부에 진땀이 맺혔다. 그러나 그녀는 신음을 흘리지 않았다. 봉합을 끝내고 붕대를 마무리할 때까지도.
유리엔은 자꾸만 흐트러지려는 호흡을 가다듬었다. 조용히 견뎌내는 그녀의 모습에 기괴할 정도로 마음이 아렸다.
치료가 끝난 후, 그는 그녀가 새 셔츠를 꺼내 입을 수 있도록 돌아섰다. 거뭇한 동굴 벽 위로 조금 전까지 뚫어져라 보고 있던 그녀의 등이 떠올랐다. 단련이 덜 된 티가 나는 여린 등, 어울리지 않는 긴 상처, 바늘이 다친 살갗을 꿰뚫는데도 신음조차 내지 않는 여자.
“……부상에 익숙한가?”
“네, 이 정도는.”
그녀는 약간 쉰 목소리로 대답했다. 말 사이사이에 옅은 한숨이 섞여 있었다. 통증을 느끼지 못하는 건 아니라는 뜻이다. 그는 모닥불이 벽에 그녀의 그림자를 그려내는 것을 지켜보았다. 가느다란 실루엣.
“어쩌다 그런 부상을 입은 건가?”
“글쎄요……. 그것보다 궁금하신 게 많을 텐데요.”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돌아서자 새 셔츠를 입은 그녀가 꺼져가던 모닥불에 나무토막을 던져 넣는 게 보였다. 그녀는 불을 키우며 물었다.
“어디까지 기억하고 있으세요?”
“그 말은 내 기억에 무언가 문제가 있다는 뜻 같군.”
“예리하시네요.”
음성 끝에 미묘하게 웃음기가 묻어 났다.
“지금이 몇 년, 몇 월, 며칠인지는 아셔요? 설마 그것도 모르시진 않겠죠.”
“1629년 7월…….”
반사적으로 답하던 유리엔이 말끝을 흐렸다. 며칠인지는 잘 모르겠다. 에키는 살짝 안심하며 정정해 주었다.
“24일이에요. 아니다, 자정이 지났을 테니 25일이겠네요. 봄에 있었던 흰 까마귀 협곡 마물 토벌은 기억나 세요?”
“기억난다. 결절이…… 생겨서…….”
유리엔의 표정이 변했다. 결절이 생겼고, 그는 미칠 뻔했었다. 그의 스콰이어가 결절에 들어가는 바람에. 그게 누구였지? 아니, 그 이전에 왜 갑자기 자신이 스콰이어를 지명했었지?
에키가 질문을 이었다.
“그럼, 성녀를 구출한 것은요?”
“엘기오사 오너……. 솔 족 소녀였지. 그 때도 결절이 생겼었다. 기억하고 있다.”
“태양 축제 때 있었던 일은요?”
“약혼식을 9월에 하겠다고 발표했던 것 같군.”
“드라코툼바 성은…….”
에키는 차근차근 물었고, 그는 혼란스러워하면서도 고분고분 대답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에키는 그의 기억이 어떤 상태인지 확실하게 알 수 있었다.
자신이 했던 행위, 했던 말, 있었던 일은 거의 다 기억하고 있다. 고스란히 빠진 것은 ‘지워진 과거’와 관련된 것들. 그러니까, 마검과 에키네시아 로아즈, 그녀에 대한 것들.
스콰이어가 있었다는 건 기억하면서 그게 누구인지는 기억하지 못하고, 성녀를 구해낸 것은 기억하면서 결절 안에서 정확히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알지 못한다. 황태자와 손을 잡고 2황자파가 주도한 마검의 음모에 대해 조사했다는 것은 기억하면서, 그것을 자신이 어떻게 알아내었는지는 모른다.
성검을 포기하고 가짜 마검을 쥐게 된 정황은 아예 기억하지 못하고 있었다. 물들어 있던 기간 동안 있었던 일도.
그 외에도 완전히 잊어버린 일들이 몇 가지 있었다. 그가 그녀에게 고백하고, 그녀가 그에게 고백했던 일 같은 것들. 서로의 죄책감을 털어놓았던 순간도.
회귀 이전에 대해 알고 있어야만 가능한 일들과, 지워진 과거를 기반으로 행동했던 기억들이 전부 엉망진창이었다. 여기저기 구멍투성이. 성검과 공유하고 있던 기억이 사라진 부작용인 듯했다. 가짜 마검에 물들었던 후유증일지도 모른다.
‘……그래, 미치지 않은 게 어디야.’
다른 물들었던 사람들처럼, 자아가 완전히 부서져 죽어버리는 것도 각오했었다. 그게 어떤 느낌인지 너무나 잘 아니까. 선한 그는 선하기 때문에 더 견디기 힘들 수도 있었으므로.
그러나 유리엔은 미치지도 않았고 멀쩡히 되돌아왔다. 정신을 차린 그와 눈을 마주한 순간 진심으로 안도했다. 그는 버텨냈다.
‘성검을 다시 쥔다면 기억도 되찾겠지.’
하지만 쥐지 못할 수도 있다. 아무도 죽지 않았다면 모를까, 제국군에서 희생자가 몇 명 나왔다. 에키는 성검이 그것을 악행으로 판단할지, 자의가 아니었으므로 악행이 아니라고 여길지 짐작이 가지 않았다.
그녀가 고민해 봤자 의미가 없는 일이다. 에키는 생각을 그만두고 그를 살폈다.
유리엔은 충격과 혼란이 범벅이 된 낯으로 이마를 짚고 있었다. 스스로 했던 행동들의 이유를 알 수가 없고, 그 대상도 알 수 없으니 당연하겠지. 그나마도 여기저기 구멍 난 상태니. 그녀는 속으로 말을 고른 다음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제가 당신의 스콰이어였어요, 단장님.”
“……경이?”
“네, 그리고…….”
당신과 저는 연인이었어요.
그 말은 목끝에 걸려 나오지 않았다. 차라리 그가 지워진 과거를 몰랐으면 좋겠다고 바랐던 때와 지금은 너무나 달랐다.
그와 그녀가 울며 토해냈던 감정들을 알지 못하는 눈앞의 유리엔은, 절대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왜 그가 그녀를 사랑하는지. 왜 그녀가 그를 사랑하는지.
그녀는 뒷말을 잇지 않고 고개를 숙였다. 머리카락이 흘러내려 얼굴을 가려주었다.
그녀가 말을 멈추자 유리엔이 고개를 들었다. 그녀의 어깨가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무슨 표정을 짓고 있을까.
그는 무의식적으로 손을 뻗어 그녀의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고, 그녀의 이마에 남아 있는 식은땀을 손끝으로 훔쳐냈다. 흐트러진 얼굴을 어루만졌다. 위로하는 것처럼 다정한 손길과 애틋한 시선이었다.
“……!”
그녀의 눈동자가 동그랗게 커진 것을 보고서야 그는 제 행동을 자각했다. 당황해서 손을 말아 쥐며 뒤로 물렸지만 이미 늦은 짓이었다. 멍하니 그를 보던 에키가 눈꼬리를 접으며 웃었다.
“더 쓰다듬어 주세요.”
“……?”
“그 정도 보상은 받아야 할 것 같거든요.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한테 화를 낼 수도 없고, 뭐라고 할 수도 없고…….”
입 맞출 수도 없으니까. 뒷말은 입 안에서만 돌아서 그에게는 닿지 않았다.
유리엔은 그녀의 말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럼에도 그는 그녀의 말에 순종했다. 거의 본능적인 반응이었다.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쓸어 넘기고,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녀가 가만히 그의 손에 뺨을 기대 왔다. 그것에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그는 갈라진 음성으로 물었다.
“내가…… 무엇을 기억하지 못하고 있는 건가?”
“말로 설명해서는 의미가 없는 것들을요.”
수수께끼 같은 대답이었다. 그녀가 제 뺨에 닿은 그의 손 위에 자신의 손을 올렸다. 겹쳐진 손에 열기가 올랐다.
“그러니까 그건 말씀드리지 않을 거예요.”
그녀가 웃는다. 그 웃음은 울음을 감추는 것처럼 보였다. 그 얼굴에 마음 한구석이 무너지는 듯했다.
깜박이는 눈꺼풀 위에, 땀에 젖은 이마 위에, 동그란 코끝에, 떨리는 입술 위에, 발간 혀끝에, 키스를 하고 싶어졌다. 품 안에 단단히 끌어안아 위로하고 싶었다. 어지러울 정도의 충동과 욕망이었다.
이대로 있다간 그녀를 움켜쥐게 될 것 같아 유리엔은 그녀에게서 손을 뗐다.
이상하다. 정말로, 모든 것이.
자신에게 그녀는 무슨 의미였던 것일까. 대체 무엇을 잊어버린 것일까. 그가 손을 물리자 그녀가 눈을 내리깔고 제 손을 들여다보았다. 멀어진 온기가 허전한 듯이. 그러나 그런 기색은 순식간에 지워지고, 고개를 든 그녀는 태연하고 새침한 얼굴이 되었다.
“너무 늦었어요. 내일 일찍 움직여야 하니 조금이라도 자야죠.”
에키네시아는 그 말을 끝으로 침낭에 엎드려 눈을 감아버렸다. 유리엔은 한동안 미동도 하지 않고 그녀의 뒷모습을 지켜보다가, 느릿하게 자리에 누웠다.
그는 오래도록 잠들지 못했다.